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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4년 뒤 (37/75)

7. 4년 뒤

에슬란 제국에 봄이 내렸다. 마치 눈꽃처럼 벚꽃잎이 흩날렸다. 봄바람을 타고 꽃잎은 휘청이듯 내려앉았고,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술렁였다. 그러나 마냥 그 봄을 즐길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딕시 댁스터의 교수 사무실을 누군가 똑똑똑, 급하게 두드렸다.

“누구시죠?”

“댁스터 교수님의 생명술을 수강하고 있는 오즈 르나드입니다!”

“들어오세요.”

깔끔한 목소리가 방문을 허락했다. 오즈 르나드는 떨리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교수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오……!”

오, 너무 더러운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 오즈 르나드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무슨 용건이신지 말씀하세요.”

“오……즈 르나드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오즈인 것에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를 표했다. 사무실이 더러워서 놀랐다는 것을 들키면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건 아까 말씀하셨습니다. 용건을, 말씀하세요.”

‘역시 그 교수에 그 조교야.’

오즈 르나드는 슬쩍 미소를 지으려다 재빨리 불쌍한 표정을 짓고 훌쩍였다. 어째서 그녀가 이 년간 댁스터의 조교를 할 수 있었는지 여실히 실감하며.

“저…… 제 시험 성적을 알고 싶은데요.”

조교는 르나드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녀는 손길 한번에 르나드의 시험지를 찾더니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오즈 르나드 학생, 100점 만점에 13점입니다.”

“네에?! 13점이요?”

르나드는 너무 놀란 나머지 교수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문득 이 조교가 그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눈이 짓궂게 반짝였다.

“에이, 거짓말이시죠? 저 급하단 말이에요! 제대로 알려 주세용!”

오즈 르나드의 애교 섞인 목소리에 넘어가지 않는 여자는 없었다. 그 예시로는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 반대 예시로는 그의 여동생이 있었지만, 오즈는 열 살에 불과한 그의 여동생을 여자로 분류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았다.

조교는 고개를 숙인 채로 르나드에게 시험지를 내밀었다.

“시험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팍, 하고 시험지를 받아 든 르나드는 충격과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여전히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 지난번에는 22점이었잖아요!”

르나드의 비명에도 조교는 끄떡없었다. 이렇게나 소리를 지르는데도 그쪽은 여전히 쳐다보지도 않았다.

“말씀하신 것은 가채점 점수입니다. 분명 재채점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고 공지가 내려간 것으로 아는데요. 공정한 시험 결과를 위해 조교인 저와 댁스터 교수님께서 한 번씩 시험을 채점했고, 정당한 채점 기준에 맞춰 점수를…….”

“조교님께서 성적을 올려 주실 순 없나요? 조교님의 재량으로요! 추가 점수 같은 걸 주실 수 있잖아요!”

“불가합니다.”

“그럼 차라리 재수강을 할게요!”

“그것도 불가합니다.”

“차라리 저를 이 수업에서 제명해 주시는 건?”

“불가합니다.”

오즈 르나드는 양손이 하얘지도록 꽉 쥐었다 폈다. 정말이지 이 방법까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이거…… 조교님만 알고 계세요.”

오즈 르나드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거…… 조교님만 알고 계세요.”

오즈 르나드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제가 아버님께, 아카데미 근처에 좋은 건물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정보를 조교님께…….”

“…….”

“그러니까 어떻게 좀…….”

조교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고민을 하고 있다 생각한 오즈 르나드는 더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그 정보가 뭐냐면…….”

“불가합니다.”

이씨! 철벽같은 조교를 향해 오즈 르나드는 마지막 수를 던졌다.

“이거 이번에 나온 한정판 시계입니다. 정말 어렵게 구한 겁니다. 저 낙제점 받은 걸 알면 집에서 쫓겨날지도 몰라요, 조교님……. 네? 네? 저 좀 살려 주세요.”

“불가합니다. 방금 요청사항은 교칙 위반으로 벌점이 부가됩니다.”

“어, 아니, 아니, 농담이었어요! 에이 조교님! 그러면 안 되는 거죠! 무섭게 왜 그러세요오…….”

조교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신경질이 난 듯 머리를 쓸었다. 덕분에 책상을 향해 처박혀 있던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본 르나드는 문득 이렇게 말하고만 싶어졌다.

“그럼 대신에…….”

“…….”

“저랑 이번 주말 데이트하지 않으실래요? 정보 공짜로 드릴게요. 하하.”

“네?”

“저랑 데이트 한 번만, 어떻게……. 네? 니아 프레슬리 조교님?”

책상 앞에 조교의 이름을 확인한 오즈 르나드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하…….”

니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이 시건방지고 어이없는 아카데미생의 얼굴을 확인했다. 피도 안 마른 햇병아리가 수줍게 두 볼을 붉히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니아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한 번 더 머리를 쓸었다.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가합니다.”

그때, 딕시 댁스터 생명술 교수가 사무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자네는…… 내 수업 학생이군. 무슨 일이지?”

오즈 르나드는 입술을 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리 오즈 르나드가 아버지를 무서워하기로서니, 딕시 댁스터에게 성적 수정을 요구할 만큼 간이 크지는 못했다.

오즈 르나드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사무실 밖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 모습을 본 니아 프레슬리는 쯧, 하고 혀를 찼다.

“니아? 방금 나간 학생의 용무가 뭐였지?”

딕시 댁스터가 모자를 벗어서 벽에 걸어 놓으며 물었다. 그녀는 가벼운 손길로 재킷을 의자 위로 던지곤 푹 내려앉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의자는 삐그덕 소리를 내었다.

“부정행위 요청 및 청탁?”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니아에게 딕시 댁스터는 아카데미에서 만났던 첫날과 같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히 짧은 머리에 개성 넘치는 옷차림, 딱딱한 말투, 떨어지는 사교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멋있는 사람. 덧붙이자면 눈치도 빠르고.

니아는 봄날의 햇살처럼 웃으며 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그보다?”

“니아 프레슬리 조교, 시험 채점 모두 완료했습니다, 교수님!”

사 년 후, 딕시 댁스터의 조교가 된 니아 프레슬리였다.

“레오! 나 왔어!”

니아는 품 안에 종이 뭉텅이를 잔뜩 안고 문을 두드렸다. 손이 자유롭지 않아 문을 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레오가 집 안에 있으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니아, 왔어?”

기다렸다는 듯 레오가 문을 열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왔다.

“토마토 스튜!!”

“정말 개코라니까.”

바로 정답을 외치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레오 아리데오는 감탄을 보냈다. 니아도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음식 냄새에 자극을 받은 니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니아는 입맛을 다시며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리 줘. 또 집까지 할 일을 가져온 거야?”

니아가 든 종이 뭉텅이들을 받아 든 레오는 에효,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은 곧 니아 프레슬리의 ‘진짜’ 한숨에 묻히고 말았다.

“말도 마. 겨우 시험 채점을 완료했더니 이번엔 학생들 논문 대조를 하라고 하시잖아! 그게 얼마나 귀찮고 손이 가는 작업인지 알아? 아카데미생일 때는 몰랐어. 그냥 댁스터 교수님의 과제 주기나 양이 과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한 치 앞을 몰랐던 거야. 그런데 조교가 되고 나서 처절히 깨닫게 되었네? 댁스터 교수님의 조교는 교수님이 가르치는 학생 수만큼의 과제가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말이야!”

쉬는 구간 없이 다다다 말한 니아는 레오에게 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내가 아베쎄 아카데미의 시간 강사로 일주일에 두 번씩 강의를 간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심지어 이건 댁스터 교수님의 추천을 받아 하게 된 일이란 말이야. 그런데 교수님은 내가 교수님처럼 강의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으신 것 같아. 나도 내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데!”

레오가 어떻게든 대꾸를 시도하려고 입을 벙긋거리자, 니아는 아직도 아니라는 듯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솔직히 옆 사무실 조교는 한 학기에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교수님 차 타 드리기와 교수님 마차 예약하기라고 하던데, 나는 이게 뭐야. 열두 시간을 사무실에서 보내고 와도 집에서까지 일을 해야 하잖아!”

이제야 숨을 좀 내쉬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레오는 준비된 말을 꺼냈다.

“그래도 올해의 조교상을 받았잖아, 니아 프레슬리.”

그의 말에 니아의 턱이 조금씩 하늘을 향해 치솟기 시작했다.

“그건…… 당연한 거지! 아카데미에서 나만큼 열심히 일하는 조교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심지어 아베쎄 아카데미 강사 일을 하면서까지 말이지!”

“그럼! 에슬란 제국에 이제껏 너처럼 훌륭한 조교는 없었을 거야. 넌 조교계에 한 획을 그은 거라고.”

그런 것까진 아니라고 겸양을 보일 만도 한데 니아 프레슬리에게선 부정의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네 말이 맞아. 올해의 조교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사람은 이제껏 없다고 들었거든. 왜냐면 조교를 이 년 동안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지. 보통은 일 년 아니면 육 개월.”

뒤에 더욱 힘을 주어 말한 니아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레오 아리데오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정말로 니아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은 그녀의 기분을 위해 과장을 섞기도 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 심각하지 않아?!”

아직 밥을 먹지 못한 니아 프레슬리는 오늘따라 더 예민한 듯했다.

“어떻게 논문 대조를 시키실 수 있냐고! 난 내일 강의를 나가야 한단 말이야! 오늘 밤 잠은 다 잔 거라고! 난 언제 자? 언제 밥 먹어?!”

그녀는 무척 화가 난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레오 아리데오는 언제나 통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좋아하잖아.”

“…….”

“조교 일도, 댁스터 교수님도.”

그럼 니아 프레슬리는 항상, 언제 그랬냐는 듯 화가 풀린 채 방긋 웃어 보였다.

지금도 그랬다. 산더미 같은 논문 자료들을 가지고 와서 툴툴거리다가도 이 말만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네 말이 맞아, 레오. 난 이 일을 무척 좋아하지. 딕시 댁스터 교수님은 내 롤모델이야. 그러니까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레오는 소리 내 웃으며, 막 끓여 따끈따끈한 토마토 스튜를 접시에 담았다.

작은 이 인용 식탁에, 포크와 숟가락이 두 벌 놓이고, 두 잔의 물이 놓였다.

니아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레오, 너에게만 고백할 게 있는데. 오늘 아카데미에 다니는 남자애 하나가 교수님 사무실에 왔거든? 근데 부동산 정보가 있다길래 정말 잠깐, 몇 초 혹했다니까…….”

“자, 이제 그만하고 진짜 밥 먹자. 니아 프레슬리.”

니아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튜를 입에 넣었다. 따듯한 음식 하나로 온몸에 행복감이 번졌다.

저녁 한 끼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삶은, 그들에게 사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아베쎄 아카데미는 어린 귀족들을 위한 아카데미였다. 그리고 몇 달 전부터 아베쎄 아카데미에서 일주일에 두 번, 시간 강사를 하고 있는 니아 프레슬리는 이곳을 좋아했다.

어린아이들의 활기가 사랑스럽기도 했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니아의 적성에 잘 맞았다.

그러나 오늘은 턱 밑까지 자란 다크서클을 차마 무엇으로도 가리지 못한 니아 프레슬리는 살짝 예민했다. 물론 스스로의 기분에 따라 수업의 질이 달라질 만큼 아마추어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자, 모두 박수를 쳐 주자.”

니아는 열 살의 어린 귀족의 발표를 듣고 먼저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도 따라서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가 잦아들 때 즈음, 니아는 발표 학생인 헤나에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선생님도 발표 잘 들었어. 특히 생명술의 기본 원리를 아주 잘 이해한 것 같아 놀랐단다.”

“감사합니다! 프레슬리 선생님.”

헤나가 뿌듯한 표정으로 웃자 니아 역시 미소를 머금고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내가 가르쳐 준 것 외의 개념을 적용해선 안 돼. 오늘 네가 말한 건 우리 수업 수준 이상의 것이거든. 게다가 살짝 틀렸기도 했고…….”

“…….”

“하지만 그걸 정정하면 남은 수업 시간을 다 써도 끝이 나지 않을 듯하니 나중에 따로 하는 걸로 하자. 그러니까 앞으로 내 수업에는 내가 정해 준 것만 알면 된다. 알겠지, 헤나 르나드?”

단호함이 섞인 목소리가 헤나 르나드를 을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이름을 부를 때는 무척이나 부드러워 헤나는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잠깐, 헤나. 네 성이 르나드였구나.”

그런데 헤나가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니아 프레슬리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니아는 헤나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했다.

“헤나, 혹시 너 오빠가 있니?”

“아니요.”

헤나 르나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니아를 향해 보이던 열정적 눈빛이 일순간 사라졌다. 대신 무척 끔찍한 이야기를 들은 듯 헤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니아는 그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헤나, 오빠가 있구나.

“그럼 르나드라는 성을 가진 귀족이 또 있나? 정말 오빠가 없는 게 맞니?”

가벼운 말투였지만 꿰뚫어 보는 듯한 물음이었다.

헤나 르나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치 야채를 먹어야만 초콜릿을 주겠다는 협박을 당한 아이처럼.

“그런 괴물이 집에 한 마리 있긴 하죠. 피가 섞여 있긴 하지만 그딴 괴물은 상종하지 않아요.”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나이 차이가 무려 열 살이었다. 오빠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아베쎄 아카데미 학생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는 작게 물었다.

“헤나, 너희 오빠가 그렇게 별로야?”

역시나 반사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응. 조만간 죽여 버릴 거야.”

“허억……!”

웅성이는 학생들 사이, 헤나 르나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아는 손뼉을 짝 하고 쳤다.

“다들 조용히.”

헙, 하고 아베쎄 아카데미 학생들은 입을 다물었다.

“헤나?”

니아는 온화한 목소리로 호명했다. 헤나 르나드는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이었다.

“네, 선생님.”

“괴물이라는 말,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런 말 사람한테는 하면 안 되는 거라고.”

상냥했지만 단호했다. 헤나는 부정을 당한 것만 같아 창피해졌다.

“잘못했어요.”

“다음부터 안 하면 되는 거야. 괜찮아.”

다정한 타이름에 헤나 르나드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나도…… 네가 네 오빠를 죽여 버리는 건 찬성이야. 곧 죽여 버릴 거라고 했지? 선생님이 응원할게.”

헤나 르나드는 떨리는 눈빛으로 프레슬리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녀가 응원을 받은 걸까? 오빠를 향한 그녀의 살인 계획을 응원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열 살인 네가 스무 살인 네 오빠보다 훨씬 더 훌륭한 것 같으니.”

어제 오즈 르나드가 보인 추태를 떠올리며 니아 프레슬리는 헤나를 향해 화이팅,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헤나 르나드는 그날, 자신의 운명을 알았다. 니아 프레슬리 선생님처럼 멋진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헤나 르나드라는 열 살 여자아이의 운명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니아 프레슬리는 발에 바퀴를 단 것처럼 빨빨거리며 뛰듯 걸었다. 한 시간 전 수업 시간에 보였던 선생님의 위엄은 모두 갖다 버린 채로.

길을 가다 그녀가 가르치는 학생이라도 만난다면 무척 곤란했지만, 일단은 니아 본인이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했다.

‘빨리……! 집에 가서 논문 대조를 마무리하고, 밥을 먹고, 난 빨리…… 자야 해. 빨리빨리.’

아까는 겨우겨우 턱에 매달려 있던 그녀의 다크서클이 이제는 팔꿈치까지 하강한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몇 시간 내에 발끝에 도달할 테고, 그럼 니아는 곧 사망에 이를 것이 분명했다.

잠을 좀 자게 해 달라고 눈꺼풀이 아우성을 쳤다.

‘제발. 지난주엔 삼 일 밤을 새우고도 쌩쌩했잖아. 이 정도는 아직 견딜 만하잖아, 니아 프레슬리!’

마음과는 반대로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호되게 혼내며 니아는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급한 탓인지 자꾸 걸음이 꼬였다.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정확히 말하면 몸이 일주일 전 같지가 않았다. 아마도 피로도가 축적된 탓이겠지.

니아는 오늘 집에 가서 할 일을 모두 끝내면 내일은 쥐 죽은 듯 잠만 자겠다고 다짐했다. 지난 사 년간 그녀의 다짐이 이뤄진 적은 손에 꼽지만.

“아, 잠깐. 들를 곳이 있지.”

니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미안해, 눈꺼풀아. 신문 하나만 사자고.’

혹시 이 몸뚱이의 주인이 미쳤나, 외치려는 다크서클과 눈꺼풀에게 니아는 마음 깊숙이 사죄를 했다.

길거리에 위치한 신문 보급소의 문을 니아 프레슬리가 두드렸다.

“아저씨? 오늘 특집 기사 나왔죠?”

“오, 니아!”

신문 보급소의 윌리 로망이 그녀를 반겼다.

“제 거 남았죠? 예약 걸어 놨잖아요. 무려 두 달 전부터.”

만약 조금 늦게 왔다는 이유만으로 특집 기사를 사지 못한다면, 니아의 눈꺼풀은 윌리 로망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럼 당연하지. 네 거 딱 하나 남았어! 아가씨들에게 어찌나 인기가 좋은지!”

니아 프레슬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 4키오네예요.”

니아는 품속에서 키오네 네 개를 꺼내 윌리에게 건넸다.

“자, 여기 ‘필릭스 쿠아란 소공의 승리 대서사시’ 특집 기사다. 제목 정말 잘 뽑았지?”

“얼른…… 주기나 하세요.”

니아는 누가 볼세라 특집 기사를 가방 속에 밀어 넣었다.

그때, 길거리에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보입니다!! 필릭스 쿠아란 소공께서 또 한 번 대승을 거두었다는 승전보입니다!!”

소년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의 함성이 길거리에 울려 퍼졌다.

“이런, 오늘 나온 특집 기사인데. 또 새로운 소식을 추가해야겠군.”

승전보를 들은 윌리 로망은 한숨을 내쉬었다.

“니아, 이만 가 보는 게 좋겠어. 우리 직원들은 오늘 야근 확정이어서 말이야. 무척 바쁘거든.”

그러나 그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봤을 때, 그녀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저 애는 항상 정신없이 바쁘단 말이야.”

익숙한 듯 윌리 로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레오, 누가 온 거……. 아, 길리 집사님.”

달리듯 집에 온 니아는 길리 포바즈를 발견했다. 그는 익숙한 듯 레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니아, 일찍일찍 좀 다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지 알아? 최근 기사에서는 말이야…….”

길리 포바즈는 잔소리에 시동을 걸더니 언제나처럼 니아에게 전속력으로 퍼붓기 시작했다. 한참 멍을 때리며 듣고 있자니, 대충 일찍 다니라는 말인 듯해 니아는 입을 삐죽였다.

“이보다 어떻게 더 일찍 다녀요.”

“오늘이 니아가 일주일 중 가장 일찍 들어오는 날이에요. 새벽에 들어오는 일도 많거든요. 지난주에만 벌써…….”

기다렸다는 듯 레오는 길리 포바즈에게 일러바쳤다. 니아 프레슬리를 혼낼 수 있는 사람이 그뿐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니아는 그 입 다물라는 의미로 레오를 눈빛으로 흘겼다.

“새벽? 니아 프레슬리, 그래서야 내가 이 집을 구해 준 의미가 없지 않겠어? 잠시 나랑 얘기 좀 할까?”

사 년 만에 세월을 직격타로 맞은 길리 포바즈는 진심으로 분노한 듯 식탁을 탕탕 내리쳤다. 그러나 이미 이 정도야 익숙한 니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너무 늦으면 사무실에서 자고 오기도 해요. 별로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요.”

“넌 정말이지…….”

길리 포바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잔소리가 니아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자 그는 타깃을 레오 아리데오에게로 옮겼다.

“레오, 내가 몇 번이나 너에게도 당부를 했잖니. 너희 남매는 내 말을 도대체 어디로…….”

길리는 종종 이렇게 니아와 레오를 찾아오곤 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오른팔을 잃은 직후, 그는 니아에게 선명한 적대감을 보였었다. 항상 투덜댔어도 작은 주인을 향한 애정이 큰 그였기에 니아 프레슬리에게 원망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니아는 주인 없는 공작가에서 길리가 그녀에게 보냈던 눈빛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움, 원망, 혼란. 그러나 니아는 그런 그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다. 필릭스 쿠아란의 팔을 떠올리면 니아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니아도 니아가 미웠다.

그러나 길리는 보내오는 눈빛과는 달리 니아에게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 아카데미를 계속 다니게 설득한 것도 그였고, 시간이 지나 니아가 공작가에서 나오게 되었을 때 좋은 집을 알아봐 준 것도 그였다. 덕분에 니아는 레오와 함께 살 안전한 집을 싼값에 구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길리 포바즈는 레오와 니아가 함께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적응할 수 있게 계속 지켜봐 주었다. 오늘만 해도 니아와 레오를 보러 오지 않았는가. 그는 툴툴대면서도 그들을 보살폈다. 부모처럼은 아니라도, 먼 친척 정도는 되는 것처럼.

“집사님, 이런 건 괜찮다니까요.”

“공작가에 쓸모없는 선물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알아? 주는 게 아니라 버리는 거야.”

“저희 그렇게 가난하지 않아요.”

“오, 그래? 공작가보다 돈이 많은 모양이지.”

“그건 아니지만……. 니아가 얼마나 돈을 밝히는지 아세요? 해가 지날수록 더해요.”

“그건 나도 알아. 늦바람이 무섭다고…….”

한동안 길리와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마치 금지된 이름처럼. 두 사람 모두 필릭스의 팔을 떠올리면 저절로 슬퍼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릭스 쿠아란이 승전보를 전해 오기 시작한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던 필릭스 쿠아란은 날개를 단 새처럼 승리를 쌓아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사 년이 지난 지금 필릭스 쿠아란은 에슬란 제국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 옷 갈아입었으면 너도 이리 와서 앉아!”

“싫어요!”

바로 받아치자 길리는 ‘말본새 하고는.’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그를 바라본 니아는 씩 웃었다.

사실 니아는 지금도 가끔 길리 포바즈의 눈에서 원망의 눈빛을 읽는다. 사 년이란 시간은 정을 주기에 충분한 시간일 수는 있어도, 그가 소중히 모셔 왔던 작은 주인의 아픔을 잊기에는 부족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길리 포바즈는 니아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 가끔 그녀를 챙겨 주었던 공작가에서의 십 년과, 니아와 레오를 들여다봐 주었던 사 년 모두.

“도대체 쟤는 왜 저렇게 변한 거니? 처음엔 안 저랬다니까?”

“많이 뻔뻔해진 것 같긴 해요, 길리 집사님.”

마치 타박하는 듯해도, 그렇게 말하는 길리 포바즈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길리를 마중하고 돌아와 일을 끝내니 하늘엔 어느새 별이 떠 있었다. 새벽이었다. 다락의 창문으로 비친 하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했다.

“하암……!”

니아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계속 어깨를 구부리고 있었던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레오는 잠든 지 이미 오래였고, 니아 역시 지금 잠든다면 세 시간 정도는 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곧바로 잠들 수만 있다면 말이지.

시간을 확인한 니아는 계속 하품을 하며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필릭스 쿠아란 소공의 승리 대서사시.>

필릭스 쿠아란의 특집 기사였다. 니아는 첫 장을 펼쳤다.

<그라나다 전투, 필릭스 쿠아란 소공 첫 승리.>

첫 장에는 그가 왼팔로 적장의 목을 베었다는 내용과 함께 그림이 삽입되어 있었다.

‘별로 안 닮았는데. 조금 더 날렵한 편이라고.’

니아가 처음 그 소식을 들었던 건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얼마나 놀라고, 또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왼팔로도 그가 싸움을 할 수 있어서.

그러나 승리를 했으니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는 더 먼 곳을 향해 갔다.

<노르고르트 전투, 함정을 격파한 필릭스 쿠아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국경을 넓힘.>

도서관에서 삼 일 밤을 새우고 코피가 흐르던 날, 니아는 그 소식을 듣고 코피를 막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럼, 돌아오는 건가? 이번엔 돌아오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승리는 쌓이고, 그의 왼팔은 업적을 만들어 갔지만 필릭스 쿠아란은 그녀에게서 더 멀어져만 갔다.

그래도 니아는 가끔 그를 생각했다. 아니, 실은 그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면 그녀가 그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영웅 필릭스 쿠아란, 여섯 개 성 점령.>

에슬란 제국에서 그는 이미 영웅 이상이 되어 있었고, 타국에서는 막대한 두려움으로 자리매김한 채였다. 그가 차지한 포로들과 재물이 모두 제국으로 운송되었다.

공작가의 도련님에 불과했던 그는 이제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 기사로 추앙받았다. 그 누가 필릭스 쿠아란이 귀족뿐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전례 없는 사랑을 받게 될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먼 곳에 있는 그도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거대한 애정이 제국에 존재했다.

정작 그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니아는 계속 페이지를 넘기며 순간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한 구절에서 손이 멈추었다.

<오른팔 없이도 최강인 왼손의 기사.>

니아는 그 문구를 조심스레 손등으로 쓸었다.

팔 하나를 앗아 간 니아의 죄책감이 초라해졌다. 그는 새처럼 도약했다. 니아 프레슬리가 그의 인생에 낸 커다란 흠집을 딛고서.

“안 돌아와.”

니아는 의문문 대신 평서문으로 문장을 딱 떨어뜨렸다.

이제는 그런 생각도 한다. 전쟁을 찾아 떠난 것은 그저 그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니아의 비밀을 알게 된 것과 상관없이, 그의 팔이 다친 것과 상관없이, 그 무엇도 상관없이 그 스스로를 위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실, 처음부터 영웅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걱정 말라는 그 말도, 정말로 그의 걱정 말고 니아 프레슬리 알아서 인생을 찾으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니아는 그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필릭스 쿠아란 특집 기사를 덮었다.

그토록 잠이 필요했는데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심장이 눈감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아 아이작, 부정행위자가 맞으시죠?”

니아 프레슬리가 강의실을 나서려는 그를 붙잡았다. 그리아는 올 것이 왔구나 싶어 마음을 모두 비웠다.

“부정행위 목격자가 두 명 있고, 어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부정행위 발각 시 어떤 처벌을 받는지 알고 벌인 일이겠죠?”

높낮이가 없는 어조였지만, 결코 봐주지 않기로 유명한 니아 프레슬리 조교였기에 그리아는 남아 있던 일말의 희망조차 전부 쓰레기통에 버렸다.

“퇴학이겠군요.”

“틀렸어요, 그리아 아이작 씨. 부정행위 시 금지 마법을 사용했으면 퇴학입니다. 그리아 아이작 씨는…… 컨닝을 하셨죠. 페이퍼를 만들어서요.”

“그럼 퇴학은 아닌가요?”

“네, 아닙니다.”

퇴학은 아니라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던 그리아 아이작은 또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그럼, 무슨 벌을…….”

“이미 증거는 다 인멸하셨겠지만 부정행위 목격자가 두 명이나 있고, 본인도 인정하셨으니 이견은 없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

“댁스터 교수님의 생명술 수업 낙제와 벌점 오십 점입니다. 그리고.”

“잠시만요, 오십 점이요?”

“확인해 보니 이미 벌점이 사십 점 있으시더군요. 그럼 총 구십 점으로…….”

그리아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니아 프레슬리를 바라보았다.

“교내 봉사를 하셔야 합니다.”

봉사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생각보다 가볍게 느껴져 그리아가 힘겹게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였다.

“반성문 백 장 포함입니다. 그리고 벌점이 십 점 더 쌓이면 정말 퇴학이니 주의하세요.”

“…….”

“아 참, 그리고 교내 봉사는……. 아무래도 학칙을 직접 확인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봉사’라는 이름에 포함되어 있는 벌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요.”

니아 프레슬리가 빼곡한 글씨가 담긴 종이를 흔들었다. 아카데미 학칙 위반 시 겪게 되는, ‘봉사’라는 감투를 쓴 끔찍한 처벌들이었다.

“그걸 다 해야 한다고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니, 조교님!”

그리아가 간절하게 니아 프레슬리를 불렀다. 니아는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네. 그리아 아이작 학생.”

그러나 사람을 불러 놓고 그리아는 우물쭈물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리아 아이작을 바라본 니아는 생각했다. 사 년 전만 해도, 아카데미에 이렇게 엉망진창인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고.

니아가 한숨을 내쉴 찰나, 그리아가 입술을 뗐다.

“조교님도 아카데미에 다니셨잖아요! 벌점을 받으신 일이 있을 거 아니에요! 어쩜 이렇게 매정하게…….”

“저는 사실 전달을 해 드릴 뿐 일을 결정하는 권한은 없습니다.”

“……댁스터 교수님께 잘 말씀해 주실 수는 있는 거잖아요.”

여전히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왠지 그리아 아이작은 그녀의 비웃음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아이작 씨?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요. 그리고 하나 말해 주자면.”

“…….”

“저는 벌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아주 우수했거든요.”

사 년이 지나니, 벌점을 받은 기억 같은 건 삭제해 버린 니아 프레슬리가 속으로 씨익 웃었다. 미숙한 과거는 자체적으로 없는 셈 치는 게 나쁜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평정심을 유지한 채 니아는 그렇게 일어섰다. 아베쎄 아카데미 강의 준비부터 과제 채점까지, 할 일이 태산이었다.

강의실 복도에서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옆을 또각또각 지나갈 때, 니아의 귀에 그들이 하는 말이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천둥처럼 울린 한 이름이 숨을 멎게 했다.

‘필릭스 쿠아란.’

니아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멈춰 섰다. 두 가지 소식이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쿠아란 공작님께서 위중하시대. 몇 년간 그토록 아프셨다더니 결국엔…….”

첫째는 쿠아란 공작의 죽음에 대한 암시였다. 그리고 그다음은…….

“필릭스 쿠아란 공작님이 제국으로 돌아오시는 중이래. 이제 공작님 맞는 거지?”

사 년 만에, 공작이 될 필릭스 쿠아란이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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