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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계절들 (36/75)

6. 계절들

가을은 빠르게 지났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들은 점차 야위어 탁한 색을 띠었다. 가을의 총천연색들이 하나의 색깔, 흑백으로 갈무리되어 갔고 청명한 소리를 내며 아카데미 안 곳곳을 낮게 날던 바람도 어느새 매서움을 드러냈다.

좋은 계절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는 법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특히나 좋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었기에 니아 프레슬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언제나 시곗바늘은 현재를 뛰어넘기 위해 달렸고, 앞장선 미래만을 좇았다.

그렇게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 없는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다.

눈 날리는 겨울이었다.

에슬란 제국의 보 아카데미에는 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아카데미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였다. 첫눈이었다.

첫눈이 내리는 날, 니아의 학사모에도 하얀 조각들이 내려앉았다.

오늘은 니아 프레슬리가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날이었다.

‘아카데미를 수료하는 날이 오다니.’

댕, 댕, 댕.

아카데미의 시계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릭스 쿠아란과 함께 시작했던 아카데미의 첫날부터 그 없이 맞는 아카데미의 마지막 날. 니아는 그 일 년의 길고도 짧은 시간을 회상했다. 그가 떠나기 전과 그가 떠난 후의 시간들을 전부 샅샅이 되짚었다. 그곳엔 기쁨도 슬픔도 공존하였으나, 그 모두가 소중한 추억이라는 것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도련님이 떠난 이후에, 어떻게 살았더라.’

필릭스 쿠아란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에 니아는 아카데미를 계속 다녔다. 아직 그와의 계약은 유효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돌아와서 직접 계약을 파기하지 않는 이상 니아는 아카데미에 다닐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가 금방 돌아올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니아는 일상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고, 그렇게 있다 보면 그가 어느 순간 돌아와 니아에게 무슨 설명이라도 해 주지 않을까 했으니까.

매일매일 똑같이 생활하기 위해 애썼다. 상황을 탓하거나 스스로를 탓하거나 혹은 그를 탓하거나 무언가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망가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아서.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니아에게 어떤 소식도 전해 오지 않았다. 무소식도, 희소식도.

한 달.

그를 기다리는 한 달은 일 년처럼 길었다.

영영 쓰이지 못할 그의 오른팔을 생각하며 죄책감으로 지새우지 않은 밤이 없었다.

매일 아침 새로 뜬 하늘을 바라보며 그도 같은 하늘을 볼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집사님, 정말 제가 아카데미를 계속 다녀도 될까요?’

‘네가 공작가의 적이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으니까. 넌 계속 아카데미에 다녀야 하겠지.’

‘……적이요?’

‘그래. 공작가의 완벽한 도련님을 불구로 만든 공작가의 적.’

‘그렇지만…… 한 달 동안 도련님이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제가 이 집에 있을 자격이 있는 걸까요?’

길리 포바즈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계약을 지켜, 니아 프레슬리. 도련님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릭스 쿠아란이 돌아와 니아를 공작가의 적으로 간주한다 선언해도 좋았다.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의 팔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기만 한다면 괜찮았다.

니아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가 안전하기를 기도하며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그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 보니 또 한 달이 지나가 있었다.

실은 그 시간 동안, 니아는 그를 떠올리며 울기도 했다. 밤을 지새우다 잠깐 잠이 들었을 때 악몽을 꾸기도 했다.

니아는 전쟁터에서 필릭스 쿠아란이 죽는 꿈을 꾸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오른팔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해 그는 죽고 말았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 공작가에 돌아오는 끔찍한 꿈이었다.

그런 식으로 한 달이 가니 두 달이 갔고, 석 달이 지났다.

사람은 간사했다.

니아는 석 달이 지나자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웠다. 꿈에서 안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러나 잘 사랑을 하며 지냈는지는 모르겠다.

필릭스 쿠아란이 보고 싶기는 했다. 그립기는 했다. 걱정되기도 했다. 여전히 밤에는 꿈도 꾸었다.

하지만, 그냥 살아갔다. 별 탈 없이.

넉 달이 지난 시점, 니아는 아카데미 생활에 정말 충실했다. 사람들이 필릭스 쿠아란에 대해 묻는 것에도 더 이상 당황하지 않았고, 그의 팔에 대한 소문이 떠돌아도 더 이상 심장이 내려앉지 않았다.

죄책감이 무뎌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상황에 익숙해진 것뿐이었다.

그러나 니아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나 주기를.

니아 프레슬리는 공작도, 그 아들도 없는, 주인이 부재한 빈 공작가 안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왜 전쟁터로 향했는지만 알 수 있다면, 그것만 안다면 니아도 미련을 좀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걱정 말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괴로웠다.

그렇게 하루는 괜찮았다가, 하루는 나빴다가, 하루는 울었다가, 하루는 웃었다가 하다 보니 어느새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날이 와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 앞으로!”

수료증을 받아 들며 고개를 숙이자, 학사모에 달린 갈색 술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울리는 박수 소리를 받으며,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이 곁에 있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마음으로 아카데미 밖으로 한 걸음 나오는데, 그곳에 꽃을 든 레오 아리데오가 서 있었다.

레오 아리데오가, 니아에게로 온 것이다.

“졸업 축하해.”

니아는 그 품으로 뛰어 들어가 안겼다.

오늘따라 더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전쟁터, 그 위험한 곳으로 향했는지 모르겠는 그 사람이 보고 싶다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수료거든, 바보야.”

니아는 그렇게 수료증을 받고 아카데미를 떠났고, 계약을 완료했다.

혼자서 계약을 완료한 니아 프레슬리는 그렇게 공작가를 떠났다.

십일 년 만의 이별이었다.

오랜 시간 바라 온 이별이니 날아가는 새와 같은 해방감을 느껴야 마땅할 텐테, 허무했다.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미리 짜 놓은 결말처럼 언제나 떠나는 것은 니아 프레슬리의 몫이고, 남겨지는 사람은 필릭스 쿠아란일 거라 여겼다. 이토록 허무한 이유는, 그 반대의 상황에 아직까지도 당황을 지우지 못한 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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