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여름의 안녕
니아 프레슬리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그곳은 비에 젖은 평지였다.
비가 그쳐 하늘이 맑았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니, 아마도 그녀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듯 보였다. 사방은 다 가파른 오르막이었고, 그녀 혼자 평평한 땅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달리다 달리다 못해 발을 헛디디고 낭떠러지로 구른 모양이었다. 비 때문에 시야가 모두 가려진 채 달렸던 것이 떠올랐다. 중심을 잃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니아 프레슬리.
결코 혼자의 힘으론 오를 수 없는 절벽.
그나마 땅이 평평한 것과 하늘이 아직 푸르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았다. 다치지 않았음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던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신호탄을 쏘아야 할까.’
니아는 진흙이 묻은 창백한 손으로 품 안의 신호탄을 매만졌다. 옷은 비에 젖었지만 신호탄은 옷 안 깊숙한 곳에 있었기에 제 기능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니아는 신호탄을 쏘고, 아카데미생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필릭스 쿠아란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
니아의 손은 결국 신호탄을 꺼내지 못한 채 멈췄다.
비가 오는 바람에 사냥 대회는 모두 무산되었을 것이다. 귀족들의 안전에 그토록 신경 쓰는 교수들이니 바로 취소를 알렸으리라.
아카데미가 무척이나 신경을 쓴 축제였다. 어쩌면 날짜를 지정한 천문학자들이 징계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니아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날 찾고 있을까?’
니아는 신호탄 대신 잔뜩 젖은 머리칼과 옷, 온몸에 묻은 흙과 정량대로 챙겨 온 몇 개의 마정석, 그리고 품에 있는 작은 칼을 물끄러미 보았다. 등에 고정해 두었던 화살집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작고 초라한 자신을 내려다보다 니아는 다시 그를 떠올렸다.
‘괴물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냥 던진 말. 니아가 괴물이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으니 뱉을 수 있는 말. 그 말에도 니아는 지옥을 다녀왔다. 그의 무의식이 니아 프레슬리를 죽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격한 감정은 다 사라지고 오롯이 하나의 생각만 남아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의 넋이 나간 표정.
분명 상처를 입은 것도 니아고, 울면서 도망친 것도 니아인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
‘내가 잘못한 거야. 나만 나쁜 사람인 거야. 그렇게까지 몰아가서는 안 됐던 거야.’
니아는 눈물 때문인지 빗물 때문인지 모르지만, 말라붙은 얼굴이 땅겨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사실이 여실히 실감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태 숨을 쉬는 니아 프레슬리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그녀를 구해 줄 누군가가 있을까 해서.
‘아, 여긴 마법이 미치는 곳이 아니구나.’
그러나 한 번 더 둘러보니 알 수 있었다. 도와줄 사람은커녕 마법조차 부재한 공간에 떨어지고 말았음을.
산의 모든 곳에 마법이 걸려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그 너머, 마법이 걸리지 않은 자연적인 곳이었다.
‘익숙해. 익숙한 공간이야……. 꼭 그곳 같구나.’
지금 이 산의 모습이 펠링턴의 산과 꼭 같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헛웃음이 났다. 이래서야 이 산이 니아 프레슬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잘 꾸며진 모습들은, 그래, 속임수였을 뿐이었다.
역시나 사냥 대회 같은 건 오지 말았어야 했다. 후회해 봤자 늦었다는 걸 알아도 후회가 되었다.
“방법이 없어. 신호탄을 쏘는 수밖에.”
결국 신호탄을 꺼내 손에 쥔 순간이었다.
쿵!!
천둥소리가 온 땅에 울렸다.
‘천둥……?’
니아는 신호탄을 쏘지 못한 채 재빨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올려다보자마자 눈을 다시 감았다. 햇빛이 너무 눈이 부신 까닭이었다. 이토록 눈이 시리게 밝은 하늘인데, 또다시 비가 올 낌새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잘못 들었나?”
방금의 진동을 몸소 느꼈으면서도 니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천둥이 치지 않았는데, 그것을 느꼈다면 이상했으니까.
혹시 그녀가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린 채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일까? 또다시 꿈이라든지.
쿵!!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 또 한 번 진동이 울렸다. 거짓일 수가 없는 거대한 울림이.
“진짜야. 잘못 들은 게 아니야.”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천둥이 아니라 다른 것…….”
다시 비가 내리는 것보다 더한 상황이 상상되었다.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세 번째 쿵 소리가 울렸다. 불안정하게 니아의 몸이 흔들렸다. 그제야 소리의 정체를 알아낸 그녀는 비명이 새어 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이건 산사태야.’
네 번째 울림과 함께 시작된 진동에 니아의 몸도 따라 떨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산사태가 맞았다. 조금 전 내린 비가 산의 토양을 휩쓸고 산의 질서를 흩뜨린 것이다.
니아는 재빨리 엎드려 팔다리를 바닥에 고정시켰다. 두 발로 서 있기에는 발밑의 땅이 너무나 위태로웠으니까.
“안 돼……! 신호탄!”
젖은 흙바닥이 더욱 거세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작은 나무나 꽃들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갑자기 엎드리게 된 탓에 꼭 쥐고 있던 신호탄이 니아의 손에서 벗어나 데굴데굴 굴러갔다. 신호탄은 기다렸다는 듯 땅의 움직임에 맞춰 니아에게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빨리 벗어나야 해…….”
니아는 어디로 도망갈 수 있나 주변을 급하게 살폈다.
경사가 급할수록 산사태가 일어나기 쉽다고 들었다. 그러면 니아가 있는 이곳으로 토양이 모두 흘러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으니까. 그러니 절벽을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고, 또 가능하다고 해도 미친 짓이었다.
그러다 신호탄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이 평지에서 도망칠 곳을 찾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더 쉬웠다.
‘일단 신호탄 먼저 찾아야 해!’
엉금엉금, 신호탄을 잡기 위해 어떻게든 기어가 보려는 니아의 눈앞에 무언가 나타났다.
“악……!!”
불쑥, 하고 젖은 땅 위로 무언가 솟아난 것이다.
거대한 뿔 하나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 니아는 숨을 막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더 커지는 지진과 함께, 하나, 둘, 셋…… 솟아나는 뿔들을.
‘이게 다 뭐야……?’
대여섯 살 어린아이의 몸통만 한 뿔이었다. 찔리면 그냥 상처로는 끝나지 않을 거대한 뿔. 지진을 딛고서 올라오는 소리는 쇠가 서로 긁고 긁히는 듯이 소름 돋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날카로운 뿔이 올라올수록 땅은 배로 더 흔들렸다.
그렇게 니아 빼고 온 세상이 모두 흔들리는데, 니아만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땅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괜히 움직였다가 이동하는 흙 속에 파묻히거나 자라나는 뿔에 찔릴 게 분명했다.
‘아니. 찔리는 게 아니라, 뚫리는 거야.’
도망치려는 니아 프레슬리의 몸이 뻥, 뚫리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된다고? 예전처럼?’
숨을 고르며 니아는 곧 무너져 내릴 것같이 위태로운 절벽을 바라보았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다. 절벽을 오를 수도, 뿔을 피해 달아날 수도.
‘왜 매번 난…….’
문득 그냥 눈을 감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끝나 있지 않을까?’
그냥 구르고 굴러, 산이 니아를 이끄는 곳으로 가면 다 끝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거친 산사태에 휩쓸려 드디어 죽음이란 것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포기……할까?’
폐 깊은 곳까지 흙이 들어와 차곡차곡 쌓인다면, 숨을 쉬지 못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할 수만 있다면.
“악……!!!”
그사이 니아의 등 뒤로 뿔 하나가 더 솟아났다. 한 걸음이라도 니아가 뒤로 움직였더라면 뱃가죽이 뚫렸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오늘 그렇게 하지 말걸. 마지막 얼굴이 하필…….’
하필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상실감인지 배신감인지 모를 그 표정. 그러나 상처받았음은 분명했던 표정. 그것이 니아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이 슬펐다.
그가 기억하는 니아의 마지막 또한 비슷할 거라는 생각에 더욱……. 막상 죽는다고 생각하니 다른 것들보다 그것이 너무 슬펐다.
이렇게 정말 끝나는 건가?
눈을 감으려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래도 죽지 않으면?’
또 살아남으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언제 니아 프레슬리가 정말 죽음에 이른 적이 있던가. 죽음 그 이상의 공포를 맛봐도 세상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니아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럼 살아야 하잖아.”
만약 이번에 죽지 못한다면 니아 프레슬리는 언제나처럼 살아야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몸이니까. 어떻게든 꾸역꾸역 삶을 살아 내야 했다.
‘또다시 살 수밖에 없다면 난…….’
산이 무너져 내리려는데, 머릿속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잘 살고 싶어. 행복하고 싶어.’
언제나 죽음을 견디고 살아나면 니아 프레슬리는 약해져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난 것이 아니었기에.
그렇게 살아난 니아는 왜 죽지 못했나를 되뇌며 세상을 원망하는 데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
세상을 원망하는 일이란 스스로를 원망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니아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또 예전처럼 살아야 하는 거지. 원망하면서, 사람답지 못하게 살면서.’
모두가 그녀를 괴물이라고 부른다 하더라도, 니아 자신에게는 스스로가 얼마나 애틋한 존재이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니아는 이번엔 눈을 감지 못했다. 차마 감을 수가 없었다. 니아는 그토록 애틋한 스스로를 감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자 한 가지가 눈에 보였다. 눈을 감지 않았기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니아 프레슬리보다, 살고 싶어 살아가는 니아 프레슬리가 훨씬 강하다는 것.
니아는 땅에 엎드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봐야지. 내가 살아야 사는 거지.’
살기 위해 무언가를 해 보기로 했다.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다시 눈을 뜨면 그곳에 지금과 같은 강한 니아 프레슬리가 있도록.
니아는 살기 위해 절박해졌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해답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머릿속을 구석구석 헤집었다.
‘이게 무슨 현상인지를 생각해. 분명 어디선가 봤을 거야. 책에서 반드시 봤을 거라고……!’
사냥 대회에 오기 전에 많은 책을 읽었다. <사냥 짐승 대백과>를 가장 중점적으로 읽었지만, 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나 지난날의 거대 재해 같은 것들을 분명 읽은 적이 있었다.
‘제발, 기억해 내!’
“지진, 산사태, 침식, 비에 젖은 땅…… 뿔?”
니아는 엎드려 주위를 바라보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앞에, 날카롭게 솟아난 그것.
“뿔?”
지진이 왜 일어났을까? 그건 땅이 비에 젖었기 때문이다. 그럼 뿔은 왜 돋아났을까? 그건 땅이 비에 젖어, 땅속의 짐승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피르.”
이것은 땅속에 사는 짐승, 피르의 뿔이었다.
‘피르는 땅속에 사는 짐승이야. 초식 동물이지만 아주 사납지. 머리 위로 커다란 뿔이 달린 것이 특징. 그리고 습기를 아주 좋아해…….’
마법처럼 피르에 관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래, 피르야. 물이 있기에 뿔을 올린 거야. 그런데 지진까지 일어났으니 무척이나 불안정한 상태일 테지……. 곧 모습이 다 드러나고, 눈앞에 보이는 것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공격해 올지 몰라.’
“그런데 내가 뭘 할 수 있지?”
생각보다 답은 빨랐다.
“마법.”
니아 프레슬리는 생명술에 강했다. 품 안에 있는 마정석으로 뿌리를 옭아매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몸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땅속에 있는 피르를 단단히 붙잡도록. 땅 위로 나오고 싶더라도, 결코 올라오지 못하도록.
‘피르의 움직임을 고정하면, 땅의 떨림도 조금은 잦아들 테니 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늦출 수 있을 거야.’
손에서 초록색 마정석이 번쩍 빛났다. 땅속으로 손을 깊이 묻고, 니아는 뿌리가 단단하게 퍼져 나가는 것을 상상했다.
‘제발……!’
“허억, 허억…….”
숨을 간절히 내쉬는데, 마정석의 소진이 느껴졌다.
‘안 돼. 벌써 마정석이 다…….’
“아니지.”
니아는 빠르게 손을 빼 마정석을 모두 집어 던졌다. 마정석은 신호탄처럼 빠르게 니아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소진된 마정석 따위.
니아 프레슬리는 원래부터 마정석이 필요 없는 몸이었다.
그리하여 마정석 없이도 니아 프레슬리의 마법은 계속되었다.
이 넓은 땅에 뿌리를 자라게 하는 일이니만큼 정신력과 체력의 소모가 엄청났다. 시간도 그만큼 오래 소요되는 것 또한 당연했다. 니아는 마정석 없이 마법을 할 수 있지만, 최고의 마법 실력을 가진 마법사는 아니었으니까.
정신은 속절없이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절대 멈출 수는 없었다. 니아가 멈추면, 포기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니까. 그다음 도와줄 사람 따위 예전이나 지금이나 없었다.
뿌리가 점차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길게 뿌리의 끝을 늘일 때마다 땅 안에서 움찔거림이 느껴지면 니아는 바로 그것을 단단히 붙잡았다. 피르가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땅 아래 깊은 곳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위로 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짐승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됐나……?’
너무 힘을 주고 엎드린 나머지 땅속으로 팔과 다리가 많이 들어간 상태였다. 축축한 땅은 니아의 팔과 다리를 완전히 잡아 삼키려는 듯 더욱 거센 힘으로 끌어당겼다.
니아는 더 이상 몸이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모든 힘을 빼고, 그 상태로 마법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요해진 땅을 둘러보았다.
땅속에서는 더 이상 뿌리를 흔드는 움직임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니아가 땅을 단단히 붙든 탓인지 미미한 지진도 느껴지지 않은 채 고요했다. 기적처럼.
다행스럽게도 무너지지 않은 절벽, 멈춘 지진, 뿌리로 단단히 묶은 피르.
기다렸다는 듯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니아는 엎드린 자세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진다…….’
바라본 하늘은, 해가 떨어지다 말다 했다.
“해냈나 봐. 해냈나 봐, 내가.”
니아는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입술을 물었다.
“이제 어떻게 내려가야 하지?”
그러나 그다음 문제가 존재했다. 이제 니아 프레슬리는 산 아래로 돌아가야만 했다. 신호탄을 잃어버렸으니 구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니아를 둘러싼 절벽은 여전히 높고 험했다.
‘그래도 해낸 거야.’
그러나 잠시의 기쁨은, 너무 강렬해 도리가 없었다. 온몸으로 그 환희를 맞이할 수밖에.
니아가 그대로 눈을 감고 모든 것을 포기했더라면, 그랬더라면 피르에게 몸을 찔리고 무너지는 흙들에 휩싸여 굴러야만 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이렇게 번듯하게 살아 있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찰나였다.
니아의 눈 바로 앞에 있던 뿔 하나가 순식간에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땅 밑으로 꺼졌다.
‘다 붙잡은 게 아니었나?’
등잔 밑이 어두웠던 모양이다.
“빨리, 다시.”
니아가 다시 땅에 손을 집어넣고 뿌리를 만지려던 순간.
“어?”
몸이 허공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니아를 끝끝내 잡고 놔주지 않던 땅이 멀어진 듯한 기분.
그러고 보니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환청처럼, 무언가 북 하고 찢어지는 소리가.
니아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뭐지……?’
니아의 손이 허공에 떠 있었다. 분명 땅속으로 집어넣었는데.
발도 마찬가지였다. 발버둥을 치니 발이 땅이 아닌 허공을 갈랐다. 니아는 온몸이 공중에 뜬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뚝뚝,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꽤나 가까운 거리에서.
“아…….”
붉은색의 점들이 채워지고 있는 땅을 바라보며 알았다.
겨우 한 마리를 놓친 것으로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이야.
그곳엔 엎드린 모양새 그대로, 피르의 뿔에 뱃가죽이 뚫려 허공에 매달린 니아 프레슬리가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의 패배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것은 아주 잠깐이었나 보다.
아직 하늘의 끝자락에 걸려 있는 해를 보며, 니아는 고통에 의해 잠시 기절을 했다가 깨어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금세 모습을 감출 태양처럼, 니아의 정신도 위태로웠다. 한계였다.
고통이 정신을 삼키는 것을 느끼면서, 니아 프레슬리는 생각했다.
‘후회하니?’
그냥 눈을 감을 걸 그랬다고, 애초에 그랬다면 긴 시간 피르 무리를 막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었고, 모든 체력이 바닥 날 일도 없었다고, 그래서 후회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놀랍게도 답이 곧장 나왔다.
‘아니.’
후회하지 않았다. 잘했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한 마리를 놓쳤지만 그 한 마리를 제외한 모든 피르를 막았으니 넌 아주 잘한 것이라 말해 주고 싶었다.
‘넌 도망치지도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몇 시간이나 스스로를 지켰잖니.’
몇 시간이나, 니아 프레슬리가 니아 프레슬리를 지켰다. 그거면 된 것이다.
‘그래도…… 미안해, 니아 프레슬리.’
그러나 사과를 해야만 했다.
니아 프레슬리를 찌른 피르 한 마리는 이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일 터였다. 그럼 니아가 피르를 묶어 놓은 뿌리도 다 소용이 없어질 테고, 그렇다면…….
“헉……!”
니아는 몸을 관통했던 뿔이 사라지는 감각에 반쯤 감겼던 눈을 치켜떴다. 니아를 찔렀던 피르가 뿔을 뽑아낸 것이다.
그들 무리를 옭아매던 마법의 주인은 처리했으니, 그는 이제 다음 임무를 시행할 차례였다. 뿌리에 붙들린 동료들을 구하는 것.
저 동물을 원망해야 할까? 니아의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니까.
‘살고자 하는 것. 다 마찬가지야.’
그러나 니아가 어떻게 살고자 발버둥 치는 짐승을 탓할 수가 있을까. 니아도 이번만큼은 살기 위해 간절해지지 않았던가.
땅거미가 지듯 스르르, 다시 사라지는 피르를 보며 니아는 이 짐승을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자연의 섭리였다.
그러나 미움은 어찌할 수 있어도, 고통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파. 아프다. 그래, 이렇게나 아픈 거였지…….’
뿔에 찔렸을 때보다, 그것이 몸에서 빠져나갈 때가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니아는 다시 땅에 어둑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무너지는 몸으로,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올렸다.
어느새 하늘에는 해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도 곧…….’
이제 니아가 정신을 놓을 차례였다. 시야가 흐려지고, 숨 쉬기가 힘들어지고, 무엇 하나 온전함을 유지하기가 불가능했다.
‘아무도 오지 마라.’
마지막 정신으로 속삭이는 말이었다.
혹여라도 사람은, 이곳에 오지 마라. 살아남으면, 이번에도 살아남게 된다면 알아서 또 살아 나가 볼 테니까.
그러니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했다. 사람에게 구해지기를 바라기엔, 너무 큰 상처가 나 버리고 만 후였다.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아무도 오지 않을 텐데…….’
모든 감각 중에 청각이 가장 끝까지 살아남는다고 하던가.
깊은 잠에 빠져드는 와중에 환청 같은 것이 또 한 번 들린 듯했다. 마치 니아가 뿔에 찔렸을 때와 같은 북, 하고 찢기는 소리가.
짐승들의 울림이 땅 위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니아는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아주 긴 잠에.
어두워진 세상 아래, 땅의 움직임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피르들은 다시 한번 그들의 뿔을 젖은 땅 위로 올렸고, 마치 알을 깨듯 몸을 튕겨 세상 밖으로 나왔다.
성체 피르, 새끼 피르, 그리고 그 사이의 어중간한 상태의 피르까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피르는 땅 위 세상에 적응하려는 듯 꿀렁이더니 이내 빠르게 움직였다. 축축하고 짧은 갈색 털이 듬성듬성 커다란 점처럼 박힌 몸으로.
털이 없는 곳은 겉피부조차 없는 듯 붉었다. 눈은 하나였는데, 뿔 위에 동그랗게 튀어나온 것이 마치 대롱대롱 매달린 것 같았다. 피르 무리는 서로 신호를 주고받더니 곧 적에게로 돌진했다.
그러나 그렇게 땅 위로 올라선 피르들은 다시는 땅속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들을 가두었던 마법사에게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배가 관통된 채로 기절해 있는 니아 프레슬리에게는, 단 한 마리의 피르도 다가서지 못했다.
피르의 뿔에 어깨가 관통된 남자가 그녀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를 악물고 튀어 올라오는 짐승들을 베고 있었기 때문이다. 뚫린 어깨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피르를 학살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베고, 베고, 또 베고.
강자의 대학살. 이 또한 자연의 섭리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다기엔 그는 너무 잔혹하고 빨랐다. 단지 살생에만 목적을 둔 사람처럼.
오직 달빛만이 비치는 평원, 니아 프레슬리가 흘렸던 피의 배의 배가 땅에 흩뿌려졌다.
남자의 손에 들린 검은 마치 왈츠처럼 춤을 추었고, 아마도 그의 춤은 달빛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었다. 하얀 빛이 오직 검이 움직이는 모양을 따라서만 흘렀다. 사그라지는 생명들은, 울부짖음 따위는 빛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듯 어둠 속에서 죽어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이 밤, 오로지 두 사람만이 밝게 빛났다.
그리고 남자가 지친 몸으로 무릎을 꿇었을 때쯤, 모든 피르는 이미 죽음을 맞이한 뒤였다.
시체가 즐비한 가운데서, 남자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니아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았다.
미소 짓는 사람들을 보고.
‘안나, 퍼시.’
안나와 퍼시가 니아를 향해 따듯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의 품을 향해 달려가려던 니아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걸 깨닫고 노력을 멈췄다.
‘왜지? 왜 발이 움직이지 않지?’
가만 내려다보니 니아의 배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아프지도, 피가 흐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떠올려 보니 이것은 꿈이고, 배가 뚫린 것은 현실이었다.
꿈. 얼마나 달콤한 도피처이던가.
심지어 꿈속에서 죽은 안나와 퍼시를 만났으니 이 또한 얼마나 큰 행복인가.
“저……! 저 여기 있어요!”
니아는 그들을 불렀다.
그들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였다. 니아는 문득, 그들이 니아를 보러 온 것이 십 년 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 년……. 니아는 그들에게 할 말이 있었다.
“저예요, 니아! 저 이렇게 컸어요. 못 알아보시면 안 돼요. 제 말 들리세요?”
언제나 니아의 꿈속에 등장하는 안나와 퍼시는 과거의 것이었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이렇게 커다래진 니아 프레슬리를 만나러 온 적이 없었다.
정말 처음이었다. 그럼 혹시, 그들은 니아 프레슬리를 데리러 온 것일까?
“저 죽은 건가요?”
그들은 잔잔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곧 죽나요?”
이번에도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다시…… 같이 살 수 있어요?”
안나와 퍼시가 니아에게 다가오지 않은 채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거절을 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가득했다. 그 미소는 니아 프레슬리의 그리움이었다.
그래서 니아는 질문의 답이 모두 거절이어도 상관없었고, 오히려 기뻤다. 눈물이 차오를 만큼.
‘너무 행복해…….’
싸늘한 시체가 그들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러나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니아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맘이 너무나…….
“그럼 우린 언제 다시 봐요……?”
니아의 물음에 그들은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었다.
“난 매일 보고 싶단 말이에요……. 언제까지 기다려요…….”
안나의 따듯한 음성이 니아에게 내려앉았다. 분명 멀리 서 있는데도 귓가에 속삭이는 듯 따스했다.
“마음껏 살다가, 때가 되면. 그때.”
때가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니아는 몰랐다. 알 수 없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안나는 부드러운 설명을 덧붙였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우고, 그리고 사랑하면서 사는 게 마음껏 사는 거야. 그렇게 살다가 와야 하는 거야.”
퍼시는 미소로 안나의 말을 뒷받침했다.
니아의 마음속에 뭉클하고 무언가 차올랐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니아는 점점 더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겠다고, 꼭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그게 죽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라면 니아는 꼭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오에게도 전해 주렴, 우리의 사랑을.”
미소와 함께, 그들은 갔다. 사랑을 남기고서.
그리고 이어진 것은 다음 꿈이었다.
“필릭스?”
니아는 두 번째 꿈에서 필릭스 쿠아란을 만났다.
“어, 다쳤다…….”
그가 답하기도 전에 니아는 그의 어깨에서 상처를 발견했다. 니아의 배에 난 상처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내 상처는 줄어들고 있는데…….’
꿈속에서마저 니아의 회복은 빨랐다. 만약 세 번째 꿈을 꾸게 된다면, 그쯤에는 구멍이 사라져 있으리라 확신할 만큼 니아의 상처는 작아져 있었다.
“어떡해…….”
니아는 피가 줄줄 흐르는 그의 상처에 손을 대 더 이상의 출혈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역시나 이번에도 몸은 움직이지를 않았다. 애가 탔다.
“괜찮아.”
그는 부드럽게 답했다.
“그래도…….”
어깨에서 피가 이렇게나 많이 흐르는데, 니아가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꿈이잖아.”
그러나 이어진 그의 말에 니아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그렇다. 이곳은 꿈이었다. 현실이 아니니까 다 괜찮은 것이다.
그럼, 니아는 필릭스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이곳이 꿈이라면 반드시.
“죄송해요.”
“무엇이?”
“못된 말을 한 것 말이에요.”
“네가 무슨 말을 했더라.”
꿈에서조차 장난을 치려는 걸까? 그러고 보니 필릭스 쿠아란이 이렇게 온화한 미소를 짓는 것은 처음 보는 듯했다. 역시 꿈이 맞는 모양이었다.
“상처 주는 말들. 무섭다고 한 것, 끔찍하다고 말한 것 다…….”
고개를 떨구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그는 걸어왔다. 그리고 가볍게 웃어넘겼다. 소년같이 천진하나, 어른처럼 포근함을 담은 미소로.
“괜찮아.”
꿈속의 그는 무엇이든 괜찮다고 말해 주는 모양이었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던데, 아마 니아가 그에게서 괜찮다는 말을 그토록 듣고 싶었나 보다.
그렇다면 니아는 할 말이 많았다. 사과를 했고, 괜찮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이젠 그녀도 사과를 받아야 할 차례였다.
“난 안 괜찮아요.”
“뭐가?”
“괴물만 아니면 된다고 말한 것.”
“넌 괴물이 아니잖아.”
“난 괴물이에요.”
그의 미소가 멈칫거렸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 온화하고 따듯한 음성은 마치 안나의 것과 같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우고,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게 마음껏 사는 거야.’
잘 말하는 것도 그것에 포함될 것이다. 니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단호히 뱉었다.
“괴물이란 말 듣기 싫었어요. 나한테 사과해요.”
“미안해. 하지만 널 괴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니아는 뾰로통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몰라도, 널 괴물이라고 부르지는 않아.”
“또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완전히 뾰로통함을 지우지는 못한 채 니아 프레슬리가 말했다. 그러자 그가 답했다.
“얼마든지.”
니아는 아무리 꿈이라도 조금 부끄럽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저기, 그러니까…….”
“말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도련님을.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오히려 말을 뱉고 나니 니아는 뻔뻔해졌다.
‘여긴 꿈이잖아.’
현실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을 다 하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왜 대답 안 해요? 그새 내가 싫어졌어요?”
그런데 그는 웃지도, 괜찮다고 답하지도 않은 채 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조금 놀란 듯했다. 눈동자가 호두알처럼 동그래져 있었다.
“싫어졌냐고요. 나한테 그렇게 잘해 줘 놓고, 왜 내 말엔 대답이 없어요?”
“…….”
“나도 좋아하고 싶었다니까요? 근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요? 나중에 도련님이 나를 싫다고 하고 버리면, 난 어떻게 살아요. 날 좋다고 말했던 도련님이 날 혐오하게 되면……. 그때쯤에는 난 이미 도련님이 좋아질 대로 좋아진 상태일 텐데.”
“…….”
“그러니까 처음부터 시작을 말아야죠. 이제 내 마음 다 이해하죠?”
니아가 죄책감을 풀어내듯 그를 좋아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그는 들리지 않는 듯 여전히 같은 표정이었다. 놀라워하는 표정.
‘그래. 차라리 대답하지 말아요. 난 그동안 더 뻔뻔해질 테니까.’
“사실 말이에요, 도련님은…….”
당신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내게 사랑을 건네준 사람이에요.
그래서 매번 도망치는 마음으로도 고마웠어요.
사랑하는 일이, 사랑받는 일만큼 엄청난 거라는 거 알아요.
“너무 민망해서 말 못 하겠다.”
니아는 그저 멋쩍게 웃었다.
“그냥 그 상처……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고요.”
“아프지 않은데.”
“그럼 됐고요. 혹시…… 도련님은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어느 순간부터 다시 니아를 향해 미소 짓고 있던 그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걱정 마, 니아 프레슬리.”
하지만 그 말의 온도가 무척 따스해서, 니아는 꼭 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요. 걱정 안 해요, 아무것도.”
그 말에 필릭스 쿠아란은 해맑은 소년처럼 웃어 보였다.
그래서 니아 프레슬리는 꿈인 것을 알지만 오래도록 깨지 않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서서히 흐려져 갔고, 니아는 꿈에서조차 이별은 참 힘든 것이라는 걸 느꼈다.
그 뒤, 기다렸지만 세 번째 꿈은 없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온 세상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며칠이…… 지난 거죠?”
“딱 열흘 하고도 이틀이 지났구나.”
산에서의 사건 이후로 열두 밤이 지나갔다.
니아 프레슬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
눈을 떠 보니 여름은 작별을 고한 후였고, 때는 바야흐로 환절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