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냥 대회
다음 날, 시끄러운 북소리와 함께 프론티네 산으로 향하는 행렬이 시작되었다.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말 위에 올랐고, 그 외의 사람들은 마차에 올랐다.
사냥을 가며 마차를 탄다는 것이 우스운 모양새이긴 했으나, 어차피 귀족들의 재미를 위해 준비된 공간이니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니아 프레슬리는 평소보다 더 편안함을 느꼈다. 귀족들의 안전과 심미적 기능을 위해 마법으로 길을 정돈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쿵 소리 한번 없이 물 흐르듯 움직임이 부드러웠다. 소란스러운 니아의 마음과는 달리.
산을 오르는 기다란 행렬은 계속되었고, 자랑하듯 아카데미의 깃발은 휘날렸다. 모두가 아카데미에서 벗어난 것이 좋은지 웃고 떠들어 댔다. 산에 뜨거운 기운이 가득 차올랐다.
니아 바로 앞 아카데미생도 마차의 창문을 열고 말을 탄 아카데미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분홍빛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니아는 덧없이 ‘좋겠다’, ‘싱그럽다’ 그런 감상을 마음속으로 흘려보냈다.
답답함에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슬쩍 바깥을 살핀 순간이었다.
아주 잠시 보았을 뿐인데.
니아는 결코 필릭스 쿠아란을 보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바깥의 풍경을 보려고…….
‘아, 눈이 마주쳤어.’
재빨리 니아는 쾅 소리가 나게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지금 뭘…….”
앞자리 아카데미생이 어이를 상실해 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금 사냥 대회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귀중한 그녀의 연애 사업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 방해?
“죄송합니다. 바람이 차네요. 비가 오려나……?”
뚱딴지같은 소리는 그녀의 화를 더 돋우었다.
‘아직 여름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바람이 차다고? 그리고 비는 무슨 비! 천문학자들이 고르고 고른 가장 좋은 날인데.’
그러나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던 그녀는, 니아 프레슬리의 진심으로 속상해 보이는 표정과, 그녀가 최근에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해 죄를 사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반만 열게. 괜찮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슬쩍 눈을 흘기고는 그녀는 다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연애 사업의 진도를 쭉쭉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반면에 니아 프레슬리는 이제 창문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러다 곧 뚫리겠다 싶을 만큼 마차의 바닥만 쳐다볼 뿐이었다.
‘벌써 힘들어.’
니아는 어제 결국 필릭스에게 산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긴 하루를 보냈다. 필릭스와 길리 포바즈의 대화를 엿들은 덕분에 사냥 대회에 대한 이야기는 잊힌 지 오래였으니까.
그래서 지금 니아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결국 산에 오게 되었다는 것보다, 그리고 프론티네 산이 외관상 잘 꾸며져 있기에 생각보다 괜찮다는 사실보다 다른 것이 훨씬 신경 쓰였다. 그저 필릭스 쿠아란 하나 때문에 우울함이 내핵을 향해 돌진했다.
사냥 대회를 맞이하여 신은 튼튼한 가죽신도, 단단하게 짜인 방어용 조끼도, 화살이라고는 쏘아 본 적도 없는 니아의 등에 고정시킨 화살집도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멀리서 마법만 쓰면 다칠 일은 없겠지?”
니아는 산을 올라가는 길이 지루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시저에게 물었다.
그는 니아의 대각선 맞은편에서 열심히 <사냥 짐승 대백과>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머릿속에 내용이 다 들어가 있을 텐데도 다시 읽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렇겠지. 변수가 존재하지 않는 한.”
시저는 사냥의 팔 할은 변수라는 말을 해 주려다, 산이 무섭다며 찡찡거렸던 니아 프레슬리가 생각나 슬쩍 말을 바꿨다.
“아주 작은 동물 하나만 잡고, 교수님께 확인받은 후에,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돼. 분명 연기를 쫓아오라고 하셨어. 그렇지?”
본인도 알고 있으면서 몇 번씩이나 물어 오는 니아 프레슬리의 말을 시저는 무시했다.
“그렇지?”
그러나 본인이 무시당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지, 니아 프레슬리는 또 물어 왔다.
‘또 시작이군. 또 시작이야.’
오늘따라 니아 프레슬리의 기분이 좀 안 좋아 보이는 것도 같아, 시저는 아량을 베푸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참고사항까지 전달해 주었다.
“그래. 지도나 잘 외워 둬. 산에는 종이를 갉아 먹는 니젝이 사니까. 매년 지도를 잃어버리는 사람이 나오더군.”
“니젝……. 그 날다람쥐랑 비슷하게 생긴 동물 말이지.”
알고 있다는 듯 니아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그런데 그때 시저가 읽고 있던 <사냥 짐승 대백과>를 거칠게 덮고 기다렸다는 듯 니아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니아 프레슬리, 내가 적어도 <사냥 짐승 대백과>를 세 번은 정독하라고 하지 않았나? 달달 외우는 것까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도대체 넌 지금까지 뭘 한 거야? 넌 정말 니젝이 날다람쥐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냐고!”
갑자기 발끈하는 시저 카르만을 보고 니아는 잘은 모르지만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헷갈렸나 봐. 니젝은 날다람쥐랑 전혀 비슷하지 않아…….”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시저 카르만이 비웃음을 내뱉었다.
“니젝은 설치류 동물이 맞아. 특히 날다람쥐를 닮은 모습으로 유명하지.”
“…….”
“네가 <사냥 짐승 대백과>를 제대로 읽었나 확인하기 위해서 그랬어.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 아가씨.”
사냥 대회까지 와서 시저 카르만은 니아 프레슬리를 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마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참으며 니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니아의 목소리가 시무룩하니 떨렸다.
“내 말이 맞았잖아…….”
“네가 <사냥 짐승 대백과>를 완벽하게 숙지했다면 내가 던진 함정에 걸려들 일도 없었겠지. 내게 분노를 느낄 시간에 스스로를 원망하며 책이나 한 번 더 보도록 해.”
오랜만에 니아 프레슬리를 이긴 기분에, 시저 카르만은 짜릿함을 느꼈다.
평소였다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시저의 정신을 쏙 빼놓았을 그녀가 이번에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꼭 울고 싶기라도 한 사람처럼.
이거, 승리 맞겠지? 시저는 찝찝함을 뒤로한 채 다시 <사냥 짐승 대백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출발점에 도착했다!!”
거대한 외침과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아카데미생들이 우르르 마차, 혹은 말에서 내렸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과 나무가 즐비한 가운데, 인공적으로 깎은 평평한 땅 위에 아카데미 문양이 수 놓인 천막이 여러 개 보였다.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해 준비된 간이 병실과, 사냥이 일찍 끝난 학생들을 위한 휴식 장소, 교수와 마법사들의 대기 장소였다.
“잡는 동물은 1등급에서 5등급으로 나뉘며, 1등급인 사람들 중 우승자가 정해진다. 얼마나 희귀한 동물인지, 얼마나 까다로운 동물인지, 새끼인지 성체인지가 판단의 기준이 됨을 명시하도록!”
지무트 아블란사 교수가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 소리쳤다. 학생들은 자세를 정비했다.
“서른 명의 마법사와 아카데미 교수진이 학생들을 지키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신호탄을 나눠 준다. 이상 상황이 발견되면 즉시 신호탄을 쏘도록!”
니아는 품 안에 든 신호탄을 확인했다.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만큼, 제자리에 잘 있었다. 물론 그녀가 신호탄을 쓰는 일은 없을 테지만, 품에 넣어 두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사람은 실격 처리됨을 명심하길! 그럼, 보 아카데미 사냥 대회를 시작한다!”
대포 소리가 펑! 크게 터지며 사냥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에게로 다가왔다.
학생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 가운데, 그는 사냥감이 니아 프레슬리라도 되는 양 이끌리듯 그렇게 걸어왔다. 니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어디 가?”
필릭스 쿠아란이 익숙한 목소리로 니아 프레슬리를 멈춰 세웠다. 니아는 천천히 어제의 시린 마음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꼼꼼히 따졌다.
“사냥을 해야 해서요.”
뻣뻣하게 말을 뱉는 순간, 필릭스가 니아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오며 물었다.
“내가 한 말 잊었어?”
물론 니아는 그가 지난 한 달간, 세뇌시키듯 사냥 대회에서 함께 다니자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옆에 꼭 붙어 있으라는 말.
니아가 입을 꿰맨 듯 답하지 않자 그가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작은 초조함을 드러내면서.
“일단 얼굴 좀 보고.”
“…….”
“나 좀 보고.”
니아는 다시 한번 어제의 감각을 떠올렸다. 더 노력할 필요도 없이 단번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저는 5급 동물을 잡으러 갈 거예요. 도련님과 함께 다닐 이유는 없습니다.”
“내가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 따로 다니는데 어떻게 널 지켜 줘?”
필릭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부드럽게 눈을 맞춰 왔다. 니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요. 지켜 주실 필요 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는데도 민폐를 끼치긴 싫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민폐?”
이번에야말로 그의 미간에 깊이 금이 갔다. 니아 프레슬리의 말투에 돋친 가시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네가 내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로 들리는데.”
“정확히 들으셨어요. 그리고 저는 더 이상의 민폐는 끼치지 않을 생각이에요.”
“산이 무섭다며. 겁이 난다고 하는 널 내가 데리고 왔는데, 내가 널 지키지 못하게 하면 어떡해.”
잔뜩 찌푸린 얼굴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속상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 꾸짖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니 쉽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니아는 다시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 그가 속상해한다고 약해지면, 앞으로 그의 곁에서 어떻게 버티겠는가.
니아는 그와 싸워야 했다. 싸워서 온갖 정을 다 떨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 모든 관심을 지우게 해야 했다.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게 니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도련님, 제가 싫다고 말했습니다.”
“…….”
“저는 제가 혼자 해냈으면 해요.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 나가고 싶습니다. 도련님은 필요 없어요.”
어느새 출발 지점에는 필릭스와 니아뿐이었다. 하늘은 이토록 맑은데, 왠지 찬바람만이 그들을 감싸는 것 같았다.
낮고 우울한 공기는 자꾸만 니아 주변으로만 몰려들었다. 니아는 그 공기를 거부하듯 등을 돌렸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왜 이렇게 달라졌지?”
그러나 일이 쉽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넌 날 피하지 않았는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길에 니아는 다시 돌아섰다. 그녀의 몸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리고 있는 것은 마음일까?
“내가 뭘 또 잘못했어?”
애가 타는 눈동자로 그가 물었다. 니아는 그의 눈빛에서 초조함과 애틋함을 동시에 읽었다.
니아는 천천히 그의 모든 것을 살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짙은 머리카락부터 흙이 조금 묻은 부츠의 버클까지.
“나는 네가 아니라, 네 모든 생각을 알 수가 없어. 그러니까 난, 내가 무언가 잘못했다면 네가 꼭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필릭스 쿠아란은 검술 대회에서 썼던 장검을 찬 채로, 니아와 똑같은 가죽조끼를 입고 있었다. 끈으로 허리를 단단히 조여 맨 그는……. 그래, 그는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나 혼자서는, 틀릴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위대한 기사도 공작가 도련님도 아닌, 그저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받고 싶어 하지 않는 소년처럼 보였다.
니아도 그런 소녀이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받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인 소녀.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는 그럴 수 없었다.
“도련님.”
니아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저는 도련님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앞에서 비참해지는 일이 두려웠다. 그도 세상 사람들처럼 혐오 어린 눈을 할까 봐, 그것이 끔찍이도 두려웠다.
“무섭다고?”
그는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니아의 말을 따라 했다. 기다렸다는 듯 니아가 바로 다음 말을 중얼거렸다.
“싫고, 무섭고, 끔찍해요. 도망가고 싶어요. 도련님 곁이 싫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언제나 그랬어요.”
필릭스는 마치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니아에게로 손을 뻗어 왔다.
그의 손이 얼굴에 닿으려는 찰나, 니아가 거칠게 쳐 냈다.
“왜 그래. 정말 무서운 사람 보듯이…….”
갈 곳을 잃은 그의 손은 방황했다. 니아가 두 손으로도 들기 버거운 검을 한 손으로도 가볍게 휘두르는 그는, 니아 프레슬리의 거절에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 손을 가누지 못했다.
니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니아 프레슬리가 요동치는 듯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심장 부근이 조이는 듯 아팠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었지만 충분히 잘해 낸 것 같았다.
내일도 할 수 있겠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떠나는 날도 오겠지? 후련하게.
“……거짓말.”
그러나 돌아서려는 그때, 필릭스 쿠아란이 다시 한번 손을 올렸다. 그리고 니아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마치 생일날, 니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던 것처럼.
“왜 거짓말을 하지? 다 보이는데.”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볼을 쓸던 손끝이 눈가로 향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니아의 속눈썹에 닿았다.
“눈을 깜빡이고 있잖아.”
그는 니아의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듯 그녀의 눈동자를 깊이 쳐다보았다.
니아는 그제야 자신이 눈을 계속 깜빡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속눈썹이 그의 가지런한 손끝에 닿았다. 그래서 스스로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빨리 눈을 깜빡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모든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반면 필릭스 쿠아란은 모든 것을 다 알겠다는 듯, 니아의 마음을 아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제 나와 길리의 대화 때문이지? 맞지?”
순간 니아의 심장이 터질 듯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필릭스가 어제 니아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것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가 혼란스러운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한때 좋아하던 남자의 약혼 소식을 들었으니까.”
“…….”
“네가 내게 조금 더 빨리 오길 바라는 마음에…… 널 힘들게 만들었나 봐. 미안해.”
니아가 그게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필릭스는 미소로 먼저 입막음했다.
“네 비밀도,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분명 들었지만,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
겨우 붙잡고 있던 마음이 다 바스러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곁에서 니아가 안간힘을 쓰며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 그의 한마디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애써 한 대답에도 그는 침착했다. 그는 다시 한번 니아의 눈가를 쓸었다. 부드러운 감각이 눈 주위에 자욱이 끼얹어졌으나, 그것을 막을 정신이 없었다.
“그런 것 하나 예상하지 못했을까 봐.”
니아 프레슬리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늘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을.
필릭스 쿠아란이 그녀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마치 떨림을 멈춰 주겠다는 듯이. 무엇이든지 다 이해하겠다는 듯이. 커다란 손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니아는 그 손이 무서웠다. 니아는 그녀의 몸과 마음이 필릭스 쿠아란의 손으로 향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디까지…… 알고 계세요?”
니아는 숨기고 있는 것이 많았다. 전부 들키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게 있었다.
공작가에서의 십 년간의 비밀, 그리고 니아 프레슬리의 몸의 비밀.
아니, 실은 그가 그녀를 괴물이라고 부르게 될까 봐…… 그 일이 가장 두려웠다.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노력한 것도, 다 그게 싫어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비밀을 기다리고 있다고?
필릭스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니아는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게 된 지 오래였는데, 그는 니아 프레슬리에게서 시선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글쎄. 다는 아니야.”
“그럼…….”
“네가 고아원에서 레오 블루아르와 자랐다는 것 정도일까.”
어제의 그는 레오가 고아원에서 자란 것도 확신하지 못했고, 니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하루 사이에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겨우 하루 만에.
그는 너무 빨랐다. 그가 다가오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 니아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손끝이 부들댔다. 걷잡을 수 없는 박동으로.
그렇게 벌벌 떠는 니아 프레슬리를 필릭스가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무서워하지 마. 떨지도 말고. 난…….”
“…….”
“난 어떤 얘기라도 다 이해할 수 있으니까. 네가 내게 오기만 한다면.”
그의 말에 니아는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그의 말 한마디 때문에. 고작 그 한마디 때문에.
그리고 니아는 그의 눈 속에서, 목마른 사람이 사막에서 물을 찾듯 진심을 찾아 헤맸다.
“정말이에요……?”
필릭스 쿠아란이 정말로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이 나라 모든 사람이 괴물이라고 부르는데도, 그만은 니아를 이해해 줄까? 계속 좋아해 줄까?
니아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그를 보자, 필릭스 쿠아란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가볍게 덧붙였다. 마치 심각한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무릇 농담이란 것이 그러하듯 그의 목소리는 경량의 무게를 하고 있었으나, 그 농담이 니아에게 왔을 때는 중량이 되었다.
“뭐, 괴물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겠어?”
반사적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절망의 소리가.
미친 듯이 뛰던 니아의 심장도 차갑게, 차갑게 돌이 되어 굳어 갔다. 사납게 그녀를 베고, 그 순간마저 얼려 버린 그의 말 한마디 때문에.
괴물만 아니면 된다고?
고개가 다시 아래를 향해 추락했다. 더 이상 그의 눈 속에서 진심을 찾는 일 따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니아 프레슬리에 대해서. 다행이었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가 무슨 말을 뱉었는지. 불행이었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 몰랐다. 다행과 불행이 뒤섞이니 스스로의 마음이 어떤지조차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안심이 되어 웃는데, 슬픔도 그만큼 커 눈물이 흐르는 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리하여 니아 프레슬리는 웃으면서 울었다.
‘아, 사라지고 싶다.’
그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괴물. 괴물. 괴물. 마음이 찢기는 것만 같다. 말 한마디에 희망을 찾고, 말 한마디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우스웠다. 정상적인 사고 회로는 멈춰 버렸다.
그렇게 울면서 웃는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마치 백색을 향해 가는 불처럼, 죽어 버린 시체처럼.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그 모습에 단번에 미소를 거둔 그가 니아에게로 한 걸음 걸어왔다.
“아파요.”
“어디가 아픈데?”
그의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한가득이었다. 그 다정한 얼굴을 하고서 그는 그녀에게 한 걸음 더 걸어왔다. 자꾸만 그녀에게로 오려고 했다.
“오지 마.”
그래서 니아는 두 걸음 멀어졌다.
“니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니아 프레슬리를 보며, 필릭스 쿠아란의 손길이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열이 오른 것 같았다. 아니, 체온이 떨어진 건가. 니아 프레슬리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거칠었다. 그의 표정이 따라 틀어졌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더 다가오면…… 도망칠 거야.”
“도망치겠다고?”
서릿발 같은 표정과 충혈된 눈, 거친 호흡, 그리고 목이 멘 목소리. 도망치겠다는 말이 필릭스 쿠아란의 걸음을 멈추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칠 거야. 그러니까 오지 말라고. 오지 말라고!”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필릭스를 두고 니아는 한 걸음씩 계속 멀어져 갔다.
니아는 그에게서 멀어지면서 외쳤다.
“처음부터 도망쳐야 했어! 공작가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때 도망쳐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갔어야 했어. 사람 같은 건 없는 곳으로. 어차피 어딜 가도 다 똑같은 인간들인데. 근데도 난 십 년을 당신한테……!”
그러나 지난 십 년간 니아가 없었으면 필릭스 쿠아란은 죽었을 텐데. 그럼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건 싫어…….’
순간 니아는 멈칫거렸다. 뒤로 걷는 발걸음이 흔들렸다. 그러자 굳어 있던 필릭스 쿠아란은 기회를 잡으려는 듯 다시 손과 다리를 움찔거렸다.
지금은 더 이상 그와 있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날 잡으면 계약 같은 건 상관없이 도망갈 거야. 도망치고 또 도망칠 거야. 어떻게든지! 그리고 다신 안 돌아올 거야…….”
한 맺힌 목소리로 말하는 니아를 향해, 필릭스 쿠아란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날 버리겠다고?”
니아는 대답 없이 그대로 뒤를 돌아 달렸다.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니아는 기다렸다는 듯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 냈다.
그를 버리는 거냐고?
그를 버리려는 게 아니었다.
니아가 버려지기 전에 먼저 그를 떠나려는 것이었다.
도망치는데, 차디찬 것이 조금씩 니아의 머리에 부딪혀 오기 시작했다.
‘사냥 대회를 하기에 좋은 날을 골랐다더니. 모든 게 다 엉터리구나…….’
언젠가 그러했듯, 여름의 소낙비가 시작되고 있었다. 퍼시와 안나가 죽었을 때는 이 소낙비가 참으로 원망스러웠는데, 지금은 니아를 대신해 울어 주는 것 같아 고마웠다.
부디 이 빗물이 그녀를 다 가려 주기를.
니아는 달리며, 울며, 비를 맞으며 생각했다.
뜨겁던 여름도, 이 소낙비로 안녕이려나.
어쩐지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이별이 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