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깨지기 직전의 평화
니아는 두 손에 주전자와 찻잔을 올린 쟁반을 들고서 필릭스 쿠아란의 서재 앞에 섰다.
주방에 있을 때만 해도 굳건했던 다짐이 계단을 올라오면서 약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거절을 하는 것은, 니아에게 무척 중요했다. 이런 것 하나 거절하지 못하면 앞으로는 정말이지 필릭스에게 끌려다닐 것 같았으니까.
니아는 손에 든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다시 한번 스스로의 처지를 망각하지 않으려고 고개도 저었다. 니아는 그런 씁쓰레한 마음을 달래며 방문을 두드리려고 했다.
“그래, 레오 블루아르가 약혼을 했다고?”
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듣고 얼어붙게 되지만 않았다면.
“네. 펠링턴의 자작가 여식과 약혼을 맺었다는군요.”
“그 비밀스러운 가문이 잘도 약혼을 했군그래. 그래, 결혼은 언제라지?”
“그것까지는 정해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도 뭐, 금방 하지 않겠습니까.”
레오의 약혼, 그리고 결혼?
니아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레오가…… 약혼을 했다고. 그리고 곧 결혼을 할 거라고.’
니아는 그토록 기다리던 레오 아리데오가 그녀에게 오지 못하는 이유를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이토록 우연히.
“다른 소식은 아직이야? 레오 블루아르가 백작가의 양자라며? 어떻게 양자가 되었는지, 뭐 그런 거.”
“레오 블루아르도, 블루아르 백작도 모두 무척 비밀스럽습니다.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양자가 되기 전 어느 가문에 살았는지 알아봤으나 기록이 없더군요.”
“내가 보기엔 그 백작가 뭔가가 있다니까.”
“꼭 뭐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니아는 찻잔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힘을 꽉 주었다.
‘돌아온다고 했으면서. 기다리라고…… 말했으면서.’
니아는 마치 몸의 반쪽을 잃은 듯한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다 불현듯 그와의 간격을 생각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
레오에게도 그의 삶이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니아가 그 없는 세상을 만들고 살아왔던 것처럼. 니아가 서운한 건 단지, 남에게서 이런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편지 한 통 쓰지 않은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하며 니아는 다음에 만나면 아주 혼을 내 주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축하도 해 줘야겠지만.
‘그나저나 언제 들어가지? 타이밍이 좀 별로네.’
빨리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러나 남의 뒷조사가 한창 진행 중인 현장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들어가기도 참 뭐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레오의 뒷조사였다.
필릭스가 왜 레오의 뒷조사를 했는지 알겠기에, 니아 프레슬리는 태연하게 서재의 문을 박차고 들어갈 만큼 뻔뻔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필릭스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미안함이 불쑥 찾아왔다. 뒷조사는 화를 내야 할 나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레오와 니아 사이를 오해하고 있다. 니아가 레오 아리데오를 좋아한다고 여겼고, 그것이 이성적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다.
서재 안에서 종이가 휙휙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니아는 계속해서 시기를 잡지 못한 채 물끄러미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조금 뒤, 다시 그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아, 그리고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블루아르 백작가가 한 고아원을 꽤 오랜 시간 후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고아원을 후원했다고?”
“네. 꽤나 오랫동안 한 모양이라……. 중요한 건 그 고아원이 십 년 전쯤 불에 타 사라졌는데, 그 시기와 레오 블루아르가 백작가에 들어가게 된 시기가 묘하게 일치한다는 겁니다.”
“음…….”
길리가 재빨리 덧붙였다.
“불에 다 타 버려 살아남은 사람도 없답니다.”
“그 고아원 이름이 뭐지?”
“분명…… 옥폴린 고아원. 그런 이름이었죠.”
옥폴린 고아원!
니아는 이번에야말로 찻잔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몸에 단단히 힘을 줘야 했다. 옥폴린 고아원이라면 더 이상 레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니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레오의 양아버지가 오랫동안 고아원을 후원해 왔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으나, 니아의 신경은 그보다도 필릭스에게로 가 있었다.
고아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필릭스 쿠아란. 니아의 과거를 말하는 필릭스 쿠아란. 느긋한 목소리인데도 소름이 돋았다. 니아는 더 이상 죽일 수도 없는 숨을 더욱 붙든 채 새어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그 레오라는 놈이 그 고아원의 고아였나? 백작이 후원하는 고아 중 하나를 양자로 점찍어 놨다거나.”
“글쎄요.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겠죠.”
필릭스 쿠아란이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불은 왜 났을까?”
“그런 작은 고아원은 안전이 취약한 법이니까요. 뭐, 고아원에 앙심을 품은 자의 짓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세상엔 별의별 일이 다 있으니까요.”
필릭스의 표정을 슬쩍 살핀 길리 포바즈는 결국 그의 생각에 동조했다.
“만약 도련님 추측이 맞는다면, 레오 블루아르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아가 되겠네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아직까지는 다 추측일 뿐이야.”
무심한 목소리가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니아는 레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아원에서 도망치고, 그러고는 길을 잃고 헤매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아. 펠링턴 지역의 백작이 날 구해 줬으니까.’
‘그 후로 백작가에서 일하게 됐어. 그리고 몇 년 뒤에 백작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되었지.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거든.’
운 좋게 화제를 피하고, 운 좋게 백작을 만나고, 그리고 운이 좋아 양자까지 되었다던 레오 아리데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운이 좋았던 걸까?’
니아는 백작이 고아원을 후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옥폴린 고아원은, 귀족의 오랜 후원을 받았다고 할 만큼 여건이 좋은 곳이 아니었으니까.
“빠른 시일 내에, 고아원 아이들의 명단을 내게 가져와.”
그러나 곧 걱정과 의문으로 가득 찼던 사고의 흐름은 덤덤한 목소리에 의해 정지되었다.
순간 니아의 입술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고아원의 장부, 비리 자료, 관련된 건 전부.”
옥폴린 고아원 명단에는 분명 니아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 같은 날짜에 고아원에 들어온 레오와 니아의 이름이 나란히.
그가 그걸 본다면…….
니아는 그런 것들을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한 시절은 너무 짧았다. 그때의 이야기를 줄줄이 설명해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니아는 비참해졌다. 그 참담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레오와 니아, 두 사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훨씬 더 큰 문제가.
‘니아 프레슬리의 사망 기록.’
혹시라도 고아원 자료 어딘가에 니아가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면! 필릭스 쿠아란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조사하고, 또 조사할 것이 뻔했다.
그럼 자연스럽게 니아가 어떻게 공작가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도 알아내고 싶을 게 뻔했다. 아니, 그는 처음부터 그것을 궁금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구태여 묻지 않았을 뿐.
필릭스 쿠아란이 모든 진실에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굳이 전처럼 상기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본능적인 두려움이 밀려왔다. 해일처럼 강렬하게.
니아는 두 손에 든 차를 내려놓지도, 그렇다고 서재에서 멀어지지도 못한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토록 바랐건만 생각보다 빨리, 평온은 부서져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아원은 까만 재가 되어 내려앉아 있었다.
“여기…… 왜 이런 거예요?”
작은 소녀의 눈에 그것은 지옥으로 보였다. 분명 지옥을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녀 앞에는 또 다른 지옥이 있을 뿐이었다.
“며칠 전에 불탔잖니. 안에 있던 선생이건 고아들이건 까맣게 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지. 참 안됐어.”
붙잡고 물어본 사람은 니아에게 거짓을 말했다. 레오가 자신을 두고 죽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레오인데, 레오 아리데오인데.
니아는 믿을 수가 없어서, 차마 믿어지지가 않아서 흑색의 가루를 매만졌다. 쪼그려 앉아 만지고 또 만졌다. 가슴 깊이 가루들을 품었다.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참으며 내려왔어. 견디고 견뎠어. 포기할 수가 없었어…….’
“왜?”
니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을 바라본 것인지, 아니면 그 위의 신을 바라본 것인지는 모른다. 그녀는 누군가에는 꼭 물어야만 했다.
니아 프레슬리를 제외한 모두의 목숨을 이렇게나 허무하게, 쉽게, 빠르게 앗아 가면서 왜 그녀만은 살려 놓는지를.
“안나, 퍼시, 레오…….”
니아는 한순간에 그녀의 삶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한 움큼 집었던 재 가루가 니아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손에 지금 닿은 것이 레오의 뼛가루인가, 아니면 니아 프레슬리의 산산조각 난 영혼인가.
‘누가 좀 답해 봐. 어떻게 하면 좋지?’
잡을 수 없이 가벼워 니아 프레슬리에게 머물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고 참을 수 없이 무거워 그들을 따라갈 수 없는 니아 프레슬리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그렇게 니아는 그날의 기분을 떠올리며 눈을 떴다.
‘갈 곳이 없으니 고아원 주위만 빙빙 돌았었지. 사람들은 그런 날 보면 도망쳤어. 고아원의 죽은 아이 귀신이라면서.’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한 것은 정말로 갈 곳이 없어서였고, 레오가 죽은 곳이라 생각하니 더더욱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어쩌면 레오 아리데오가 살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한 톨의 희망 때문이었다.
‘아니. 실은 레오의 유령이라도 만나고 싶었어.’
사람들이 계속해서 니아에게 유령이라고, 귀신이라고, 영혼이라고 말하니 정말로 그런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너만 떠나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지. 날 데려가 줄 수는 없겠냐고.’
해가 땅으로 몇 번을 떨어졌는지, 그리고 다시 치솟았는지는 세지 않았다. 그냥 많은 시간이 흘렀겠구나, 그래도 레오의 영혼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는구나 깨달았을 때쯤.
저주가 붙은 고아원이라는 소문 때문에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았던 곳은, 새로운 건물을 짓는다며 인부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장비들을 가지고.
그들은 계속해서 주위를 기웃거리는 니아를 내쫓았다. 니아는 그 날카롭게 갈린 쇳덩이들이 그녀의 뱃가죽을 뚫을까 겁이 나 떠났다. 아니, 실은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떠났다.
그렇게 갈 곳 없는 니아의 떠돌이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다 모르트 독테를 만난 것이고, 공작을 만나게 된 것이다. 겉가죽만 남아, 말라비틀어졌다는 말로도 부족한 더럽고 우울한 아이의 상태에서.
니아는 서재 앞에서 과거의 악몽을 되새기며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니아의 진실에, 니아의 비밀에, 니아의 얼룩진 과거에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니 고아원의 명단 따위는, 비리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필릭스 쿠아란이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
“왜 대답이 없어?”
길리가 한참 대답이 없자, 필릭스 쿠아란이 닦달했다. 길리 포바즈는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고아원 아이들 명단을 보면 모든 게 확실해질 듯한데, 고아원이 불타면서 명단도 사라졌답니다. 관련된 고아원의 자료도 모두.”
“뭐? 전부?”
실망스럽다는 말투에 니아의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듯 힘이 빠졌다. 순간 너무 안심한 나머지 그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재빨리 입술을 악물어 불상사를 막았지만, 입에서 기침과 같은 신음이 작게 샜다. 니아는 다시 한번 입술을 있는 힘껏 다물었다. 입술의 색이 하얗게 번져 갔다.
‘다행이야. 듣지 못했나 봐.’
니아의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너무나 다행이었다. 명단이 타 버린 일도, 니아의 소리를 필릭스 쿠아란이 알아채지 못한 일도. 신이 이번만큼은 그녀를 도왔다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정확한 자료 없이 떠도는 소문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겠더군요.”
“남은 건 오직 소문뿐이라…….”
“맘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 건 질색이야. 뭐든 확실한 게 좋아.”
“예, 예. 그러시겠죠. 그럼 이것도 말씀드리지 말까요? 저도 힘 안 들이고 좋습니다.”
니아는 잠시 벽에 몸을 기대었다.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힘이 다 빠진 탓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명단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에 안정이 찾아왔다.
“쓸데없는 소리는 됐으니 빨리 말하기나 해.”
“유령이…… 떠돌았다더군요. 그 이후에.”
하지만 니아의 심장은 오늘 하루에만 몇 번을 떨어지고 마는지.
“유령? 아무리 소문이라지만 그런 헛소리를 가져오면 어떡해? 길리, 혹시 요즘 쉬고 싶어? 막 백수가 되고 싶어 미치겠어?”
“끝까지 좀 들어 보세요. 고아원이 불타고, 한 아이가 고아원을 빙빙 돌기 시작했답니다. 흉한 몰골을 하고서. 유령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고 하던데요.”
“……사람이군, 그거.”
“죽은 고아원 아이의 영혼이라는 말도 있긴 합니다만…… 그렇겠죠?”
영혼이 아니다. 그것은 니아 프레슬리였다.
그의 말은, 아직까지 니아 프레슬리가 펠링턴의 소문으로 남아 떠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무 살의 니아 프레슬리는 여기에 있는데, 아직 자라나지 못한 잿더미 위의 소녀는 영영 그곳을 떠나지 못한 채 떠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 아이를 찾아봐,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진심이세요? 지금 저보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실존 인물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아이를 찾으라는 겁니까?”
“아니.”
바로 꼬투리를 잡으며 대꾸할 줄 알았던 필릭스가 의외로 순순히 나오자 길리 포바즈는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를 했다.
“만약 살아남았다면 더 이상 아이는 아니겠지. 네가 찾아야 하는 건 다 큰 어른이야.”
역시, 방금의 그건 꼬투리를 잡기 위한 시동일 뿐이었군. 흥, 콧방귀를 뀐 길리는 정확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것도 알아내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린 줄 아세요? 맨날 그놈의 레오, 레오, 레오……. 지겹습니다, 이젠 저도. 펠링턴 지역도 이젠 지긋지긋하고요!”
“연봉 두 배.”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습니다. 전설 속의 사람을 어떻게 찾습니까. 차라리 저택 대청소를 혼자 하겠습니다.”
필릭스 쿠아란이 낮게 읊조렸다.
“세 배 반. 잘 생각해.”
“……시체라도 찾아오겠습니다. 아니, 영혼이라도 데려와 꼭 만나게 해 드리죠. 직접 심문하세요.”
세 배 반 다음은 네 배가 아닌 백수행 급행열차라는 것을 아는 길리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그리고 다시 한번 똑.
“들어와.”
기다렸다는 듯 필릭스 쿠아란이 응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릴리 아주머니가 바쁘셔서요.”
그곳엔 차를 든 니아 프레슬리가 서 있었다.
니아는 입꼬리에 미소를 담은 채 필릭스 쿠아란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웃음을 그려 낸 얼굴도, 사뿐히 쟁반을 내려놓는 손길도 막힘이 없었다. 그것은 다, 니아 프레슬리가 무던히도 애를 쓰며 평온을 가장한 덕분이었지만.
그들이 찾는 사람이 바로 지금, 여기, 그들의 눈앞에 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자리에.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그들이 결코 자신까지 도달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니아도 본인이 어디 어디를 향했는지 모르는데 그들이 알아낼 리가 없었다. 니아는 주문처럼 계속해서 그 사실을 되뇌었다.
‘모든 건 다 불타 버렸어. 아는 사람도 없어. 그러니까…… 된 거야.’
니아는 안심과 함께 싸늘해진 심장의 박동을 느꼈다. 가짜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연신 입꼬리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결국 이렇게 될 것 같았지만…….’
필릭스 쿠아란이 너무 이르게 평온을 깨뜨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꽤 있었는데, 너무 빨리.
니아는 그녀를 향해 곱게 웃고 있는 필릭스 쿠아란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저장하고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도록 오래.
깊은 심연 색의 눈동자. 붓으로 그려 놓은 듯 촘촘한 눈썹, 촛불의 빛에 비쳤을 때 니아의 두려움을 모두 잊게 할 만큼 다정했던 눈빛. 설렘을 야기했던 입술.
그러나 지금 그의 눈동자에는 한 사람에 대한 설렘보다, 감춰야 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여자가 담겨 있었다. 니아에겐 더없이 익숙한 얼굴. 겁이 많은 사람. 겁이 많을 수밖에 없는 사람. 니아 프레슬리가.
“나가 봐도 좋아.”
간단하게 그녀를 보내 주는 그를 보면서, 돌아선 니아는 미소를 모두 지웠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알고 있었다. 그게 니아 프레슬리가 니아 프레슬리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니아는 그에게서 멀어지기로 했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 전부.
보통의 경우라면 길리를 내쫓고 니아 프레슬리가 방 안에 남아야 했는데, 길리 포바즈는 왜 자신이 아직까지 서재에 남아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뭔가 좀 이상한데요. 이래서야 작위를 받은 게 니아 프레슬리가 아니라 저 같은걸요.”
길리는 차 한 잔을 들이마시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호칭을 좀 제대로 할까, 길리? 낮은 작위를 선물 받았다 해도, 이제 니아가 너보다 높은 위치인데.”
“어련하시겠어요.”
작게 중얼거린 길리는 목구멍에 걸린 낯선 느낌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어? 도련님…….”
“왜.”
한쪽으로 의뭉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필릭스 쿠아란이 짧게 답했다.
“차가 식어 있습니다.”
필릭스 쿠아란이 대꾸하기도 전에 길리 포바즈는 그의 생각을 입으로 뱉었다.
“혹시, 니아 프레슬리가 저희의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닐까요?”
그의 말에 필릭스 쿠아란은 기다렸다는 듯 양쪽 입꼬리를 모두 시원스레 올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차의 온도를 재던 길리 포바즈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설마 알고 계셨습니까? 그런데 왜 멈추지 않고 계속…….”
“왜 그랬을 것 같은데?”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길리의 눈이 한 번 더 크게 떠졌다. 길리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설마, 니아 프레슬리가 다 듣기를 바라셨던 겁니까?”
필릭스 쿠아란은 정답이라는 듯 딱 한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하지만 왜……. 아니, 도대체 왜요?”
언제는 잘 보이고 싶어 거대한 생일 연회도 열고, 작위까지 주었으면서. 그동안 쌓은 점수를 다 까먹고 싶은 건가?
“조금만 머리를 굴려 봐, 길리.”
필릭스 쿠아란은 태평하게 다 식어 버린 차를 잘도 마셨다. 한 번에 들이켠 뒤 마지막엔 여유롭게 입맛까지 다셨다.
“설마, 설마……. 아니, 그보다 먼저 물어야겠습니다. 언제부터 니아 프레슬리가 엿듣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죠?”
길리는 열심히 조사를 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들어 불끈 주먹을 쥐었다. 십 년도 더 된 소문까지 다 긁어 와 그에게 갖다 바쳤건만…….
“쯧. 힌트 없이는 알아낼 생각이 없지, 아주? 조금만 더 굴려 보라고, 그 머리.”
어금니를 꽉 깨문 길리 포바즈는 그의 말대로 천천히 머리를 돌렸다. 그러니 알 것도 같았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정답은 정해져 있었단 걸 깨달았다.
길리는 기가 차 존댓말을 해야 한다는 것도 까먹고 답했다.
“레오 블루아르가…… 약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부터.”
“정답이야.”
필릭스 쿠아란은 그 말을 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기가 무척 힘들다는 듯.
그러다 그는 굳이 웃음을 참을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점차 커져 갈수록 길리의 표정도 함께 썩어들어 갔다.
“발소리만 듣고도 니아 프레슬리가 온 것을 알았지. 마중 나가 반갑게 맞이하는 것도 좋겠지만, 순간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나 싶었어.”
“비열한 인간.”
길리 포바즈는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었다.
“중간에 니아가 작은 기침 소리를 냈는데 그것도 못 들었나 보군. 난 솔직히 반쯤은 너도 다 눈치채고 내게 장단을 맞춰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길리, 혹시 귀에 문제가 있나 확인해 봐.”
필릭스 쿠아란은 한 번은 넘어가 준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길리 포바즈의 되바라짐을 받아 줄 정도로 지금은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리고 길리 포바즈, 니아의 표정을 봤나? 그놈의 약혼 소식을 들은 표정을 봤냐고.”
“글쎄요. 제가 본 건 그냥 차를 들고 웃고 있던 모습뿐이라.”
“바보 같긴! 혈색이 얼마나 안 좋았는데. 거의 홀로 이별하는 표정이었어. 그걸 보는 내 마음은 아팠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서 니아의 마음속에서 그놈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길리는 니아 프레슬리가 자신의 동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저 간사한 도련님에게 놀아난 것이 아닌가? 길리는 두 사람을 대표해서 항의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치졸하셨습니까? 권력을 남용한 도련님께 니아 프레슬리가 오히려 정이 떨어졌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길리 자신이 니아 프레슬리라면, 이런 음침한 구석이 있는 남자는 아무리 잘생기고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피할 것 같았다.
“레오 블루아르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할걸. 그리고 그게 신나서 조사해 온 놈이 할 얘기야?”
“그럼 그 얘기만 하고 불러들이시지, 쓸데없이 고아원 얘기는 왜 떠들게 하시고, 그 유령 아이의 소문은 왜 얘기하게 하셨습니까.”
체념하듯 필릭스 쿠아란이 단숨에 들이켠 찻잔을 정리하며 길리 포바즈가 물었다.
“감이 좀 왔거든.”
필릭스가 뻐근한 듯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또 무슨 감이요?”
필릭스 쿠아란이 그 말을 스스로 입 밖에 내뱉는 것이 무척 황홀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니아가 날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아.”
‘뭐? 니아 프레슬리가 이런 개차반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길리 포바즈는 참았다. 사실 이 또한 알고 있었지 않나. 언젠간 니아 프레슬리가 넘어갈 거라는걸.
세상에 필릭스 쿠아란을 끝까지 거절할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래서 조금 기다려 보려고.”
“……무엇을요?”
필릭스는 무척 기대된다는 듯 답했다.
“니아가 내게 모든 이야기를 해 주는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