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차례
1. 괴물
2. 깨지기 직전의 평화
3. 사냥 대회
4. 여름의 안녕
5. 달라진 세상
6. 계절들
7. 4년 뒤
8. 필릭스 쿠아란
9. 보이지 않는 균열
10. 클라우디아 엘로이 황녀
11. 감정의 잔재
12. 비뚤어진 문패
13. 협박
14. 우연한 만남
15. 리바론 기사단
1. 괴물
“니아. 니아 프레슬리.”
누군가 니아를 깨웠다. 그러나 아주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니아는 짜증 하나 없이 감은 눈을 지그시 열었다.
조금씩 떠지는 눈에 담긴 것은 뒷모습이었다. 그러나 누구인지 확신이 서자,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도련님?”
그는 탄탄한 허리에 딱 맞는 조끼를 입고, 커프스단추가 보이게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의 어깻죽지가 살짝살짝 움직일 때마다 수 놓인 공작가의 문양이 빛에 반사되었다.
공작가의 문양. 더없는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니아 프레슬리.”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니아의 이름을 불렀다.
필릭스의 뒷모습을 이렇게 오래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노곤해진 나머지 니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여기가 어디지?”
나지막한 그의 물음에 니아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누워 있다고 생각했는데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 채로 잠이 들었다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무런 갈피를 잡지 못한 니아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실에서 받은 하사품들이 한쪽 벽면의 장식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다른 쪽 벽에는 역대 공작들의 초상화가 줄줄이 걸려 있었다. 그들의 생김새는 서로를 빼다 박다 못해 복제라도 한 듯 유사했다. 외양부터 작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세습해 왔는지가 한눈에 보였다.
니아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이곳은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왜 여기서 눈을 떴지?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의아함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곧 여전히 뒷짐을 진 채 벽면을 향해 있는 필릭스 쿠아란에게로 넘어갔다.
“도련님, 제가 왜 여기 있어요? 공작님의 집무실이잖아요. 여기에는 들어오면 안 되는데……. 아, 그러니까 제가요. 도련님은 들어오셔도 되지만…….”
횡설수설하는데 꼭 현실 같지가 않았다. 왜인지 그녀의 말이 필릭스 쿠아란에게 닿지 않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히는 느낌.
꾸준히 니아를 돌아보지 않는 남자를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는 정말 필릭스 쿠아란이 맞을까?
순간 남자가 뒤를 돌았다.
니아는 안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조금의 원망을 담은 채로.
“도련님, 놀랐잖아요. 아닌 줄 알고…….”
그는 필릭스 쿠아란이 맞았다. 필릭스 쿠아란은 다정하게 니아를 바라보고 있었고, 입가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무슨 걱정을 한 거람. 니아는 휴, 한숨을 내뱉었다.
“놀랐어요.”
그가 성큼성큼 니아에게로 다가왔다. 동시에 그녀는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니아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몸집이 거인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그녀보다 한참은 더 커다란 그였지만 이처럼 태산같이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일이 까마득했고, 그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고개를 드느라 뒷목이 저려 왔다.
“뭔가 이상한 것 같…….”
“여기가 어디지?”
필릭스는 그녀의 말을 차갑게 내친 채 질문했다. 그답지 않았다.
“공작님의 집무실이요. 아까 말했잖아요…….”
니아는 애써 미소 지으려 노력했으나, 바라본 그의 얼굴에 완전히 질색하고 말았다. 어느새 다정했던 그의 눈길이 서늘하게 변해 버렸으며, 입가의 미소도 처음부터 없었던 듯 무표정했던 것이다.
“……도련님?”
니아는 그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필릭스 쿠아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큼성큼.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뒷걸음질 치고 싶었으나 공간이 없었다. 거인의 걸음이 원래 그러하듯,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그는 니아에게 도달했다.
“내가 누구지?”
가까이 다가온 그의 눈, 코, 입, 그리고 자잘한 주름을 확인한 니아는 그제야 정답을 말했다. 추락하는 목소리로.
“……쿠렐 쿠아란 공작님.”
“너는 누구지?”
“……니아 프레슬리.”
“그렇게 답하면 안 돼. 너는.”
“…….”
“괴물이라고 답해야지.”
니아는 퍼뜩 깨달았다.
이것은 악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니아 프레슬리의 과거였다.
이제 니아는 이것이 실험의 일종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비슷한 형태를 고아원에서 경험했으나, 비교하자면 원장이 나은 수준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니아 프레슬리를 괴물 년, 혹은 괴물의 새끼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니까.
“괴물 년! 내가 아니었으면 넌 아직도 그 사창가 골목을 떠돌면서 배를 곯고 있을 거다.”
모르트 독테는 화가 나면 니아를 향해 비싸지 않은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화가 나면 언제나.
화가 나지 않으면, 그는 견딜 만한 정도의 세기로 니아의 배나 명치를 쿡쿡 찔렀다. 죽은 짐승이 살아 있나 확인하듯이. 고양이가 생쥐를 죽이기 직전 가지고 놀 듯이.
그는 괴물 년, 괴물의 새끼, 끔찍한 짐승…… 이런 단어들로 시시각각 변하는 니아의 표정을 관찰하다 킬킬대곤 했다. 그러다가도 급격히 흥미를 잃은 채, 재미가 없는 년이라며 욕을 퍼붓다가 방을 떠났다.
그렇게 그가 방을 떠나면 오늘은 끝났구나 싶다가 금세 속이 허했다. 모래로라도 속을 모두 채우고 싶을 만큼.
물론 모르트 독테가 니아 프레슬리를 찾아오는 것은 그리 많은 날은 아니었다. 그러나 필릭스 쿠아란의 생일이 다가오면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공작가에 찾아왔고, 이층에서는 필릭스 쿠아란을 간호하고 지하에서는 니아를 학대했다.
짙은 겨울이 되면, 그때는.
정말 두려운 것은 그가 술에 취한 날이었다. 술에 취한 날은 예고도 없었다. 새벽일 때도 있고, 밤일 때도 있고, 한낮일 때도 있었다.
아무도 그가 방에서 니아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으니 그를 말릴 수도 없었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는 공작이 없는 날에만 술을 먹었던 것 같다.
술을 아주 많이 먹은 날에는 그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지 공작가의 비싼 조각상이나 도자기를 니아를 향해 던졌다.
그는 니아의 머리를 맞히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머리에 정통으로 유리잔이 맞아 산산조각 나면 그는 명중이라며 킬킬거렸다.
“괴물! 괴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니아는 멍하니 부서지는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그 주문 외에는 믿을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또다시 그가 폭풍처럼 몰아치고 사라진 방 안에서 니아는 홀로 생각했다. 표면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상처가 깨끗이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가 괴물이라서?
“괴물?”
니아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싶었으나, 모르트 독테가 끊임없이 퍼부었던 말들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네가 괴물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 너 같은 괴물을 구해서 공작가에서 살게 해 줬으니, 너는 내게 감사를 해야 해.
나니까 이 정도야. 네가 괴물이라는 걸 알게 되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달려들어 네 사지를 찢어 놓으려 들걸?
그러니 너는 내게 맞아도 할 말이 없지. 괴물인데다, 내게 구원까지 받았으니.
그의 레퍼토리가 항상 똑같았기에, 그만큼 반복되고, 학습되었다.
“그런가?”
어린 니아 프레슬리는 눈을 깜빡였다. 하도 머리를 세게 맞아서 그런지, 왠지 그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다. 니아는 아주 정확하게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아마 열세 살쯤, 아니면 그보다 한 살 많은 열네 살쯤이었을 것이다. 불쾌한 여름의 습기에 속절없이 당하던 때다.
니아는 평소에는 아주 괜찮다가, 멍하니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은 과거와 스스로의 처지를 비관하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맛있는 음식이 입에 들어오면 순간 기분이 날아갈 듯 들뜨기도 했다.
그러다 우습게도 무언가를 납득하기도 했었다. 모르트 독테의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음식은 먹어 보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그럼 고마운 사람인 거야, 그래도. 내게 그렇게 해도.
그러나 또 가만 생각해 보면 아닌 것도 같았다. 너무 나쁜 사람 같았다.
작은 니아는 어깨를 들썩였다. 이래저래 복잡해지는 것 같으면 넋을 놓으면 그만이었다. 그게 니아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참 길게도 흐른다 생각할 즘, 하루는 오랜만에 술을 먹은 모르트 독테가 찾아왔다.
올 것이 왔다.
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그는 평소보다 더 니아를 심하게 대했고, 공작은 예상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발길도 잘 하지 않던 니아의 방에 어째서 그날따라 그가 왔는지는 몰랐다.
“모르트 독테……. 무슨 짓이지?”
충격 어린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아가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는데, 공작이 모르트 독테를 끌고 방 안에서 나갔다.
니아를 때릴 때는 태산같이 거대했던 모르트 독테가 공작 앞에서는 늙은 여우 같았다. 그만큼 작아 보였다.
쾅 하고 방문이 닫혔다. 공작이 나를 구해 준 건가?
마음의 떨림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홀로 방 안에 앉아 있는데, 공작이 다시 돌아왔다. 모르트 독테 없이 혼자.
그는 한참 동안 니아 프레슬리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니아의 초록빛 눈을 들여다보았다. 오래도록.
니아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녀의 눈동자를 샅샅이 훑는 내내, 니아는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던 주름, 그리고 어쩐지 무척이나 피로해 보이는 눈가의 기색을 읽었다.
“언제부터였지?”
니아는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았다. 모르트 독테가 언제부터 때리기 시작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고민하지 않고 니아는 답했다.
쿠렐 쿠아란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언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무어라 입 밖으로 꺼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러다 그는 결국 말 대신 한숨을 뱉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늦은 새벽, 아무도 없을 때 니아를 그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입을 벌린 채 집무실을 구경하고 있는 니아에게 아주 짧게,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게 경고해 두었다. 하지만.”
짙고 어두운 목소리가 울렸다. 깊고 천천히.
“네가 괴물이라는 것을 잊지는 마라.”
니아는 홀린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날은, 모르트 독테가 쌓아 온 모든 것들의 정점이었다. 그 이후로 니아는 단 한 가지, 괴물이라는 말에는 모든 면역력을 잃고 말았으니까.
괴물.
이 두 글자는 니아를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가장 간편하고도 쉬운 방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악몽은 자주 꾸는 것이었다. 니아에게 악몽이란 곧 과거이기도 했다.
악몽을 꾼 다음 날,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의 등을 보며 멈칫거리는 자신에게 놀랐다. 아니, 놀라기보다 슬펐다.
“왜 그렇게 봐?”
니아는 차마 그에게서 잠시 그의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많이 자라셨다 싶어서요.”
“실없기는.”
이러지 말자 싶으면서도 니아는 그의 눈을 살폈다. 그의 먹색 머리칼을 보았다. 유려한 콧대를 훑었다. 항상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그 얼굴에서 니아는 누군가의 흔적을 찾고 찾았다.
니아가 멍한 얼굴로 시선을 떼지 못하자, 필릭스는 멋쩍은 듯 웃다가 종국에는 홀린 듯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가 니아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역시나 홀린 듯이. 그의 힘으로는 차마 그 행동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천천히, 느릿하게, 그러나 확실히 니아에게로.
“……예쁘다.”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니아는 여전히 그를 바라고 있던 차였다. 그러다 마침내 온전한 깨달음이 들이닥쳤고, 얼굴이 창백해졌다가 점차 붉어졌다.
붉어진 낯빛을 한 채 니아는 미친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아주 잠깐이라도 그를 그의 아버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숙인 채로, 니아는 목 막힌 소리를 냈다. 겨우, 애써서.
“고맙습니다.”
딱딱한 대답에 필릭스 쿠아란이 웃었다. 사랑스럽다는 듯이. 부끄러운 기색을 발견하고는 더 크게 웃었다.
꿈 때문인가. 그의 눈빛이 이렇게 고맙고, 사랑스럽고, 동시에 아픈 것은 처음이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다름 아닌 필릭스여서 참 다행이었다.
니아는 이렇게 예쁜 눈동자를 가진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켜 주고 싶었다. 우습게도.
사냥 대회까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그 말은 곧 스무날 정도가 지나갔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니아는 아직까지 거절의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냥 대회가 무척 기대되는 듯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또 만약 그가 니아를 따라서 가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한참을 설득해야 할 텐데, 그 생각을 하면 더 어렵기만 했다.
그렇게 하루를 미루니 이틀을 미루는 것은 일도 아니었고, 그렇게 또 열흘, 스무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일.’
니아는 지난 스무날 동안 마치 좌우명을 외듯 ‘내일’이란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토록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미루어 본 역사가 그녀의 인생에 없었다.
어차피 니아는 사냥 대회에 가지 않을 생각인데, 사냥과 관련된 책을 읽는 시간이 수업을 복습하는 시간보다 더 많아졌다. 마치 일어나지 않을 재난을 대비하는 사람처럼.
‘바보 천치 니아 프레슬리.’
니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애꿎은 책을 발로 찼다. 시저 카르만이 선물로 준 <중급 천문학> 3권이 펼쳐진 채 벽으로 가 퍽 하고 부딪혔다.
‘아, 안 돼……!’
불과 몇 초 전에 본인이 찼다는 사실을 새까맣게 잊은 채, 니아는 엉금엉금 기어가 구겨진 부분을 조심스레 펼쳤다. 그걸 보니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작은 손으로 여전히 꼬깃꼬깃한 부분을 쓰다듬었다.
‘오늘은 꼭 말할 거야. 가지 않겠다고. 그리고 꼭, 혼자서라도 다녀오시라고.’
그래서 니아 프레슬리는 정말, 오늘 말했을까?
“오늘은 말해야지.”
사냥 대회 바로 전날이 되어서야 니아는 정말로 결심이라는 것을 했다. 무려 한 달 만의 ‘진짜’ 다짐이었다.
이제 니아 프레슬리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기회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하루가 다 가지 않았기에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십 분 뒤, 삼십 분 뒤, 한 시간 뒤……. 계속해서 미루기의 역사를 추가시켰다.
스스로의 우유부단함에 질려 버린 니아의 시선은 한숨과 함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시들시들해진 꽃다발이 있었다. 얼마 전 필릭스 쿠아란이 후원에서 직접 꺾어다 준 꽃다발이었다.
처음의 싱그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고, 향긋한 냄새도 다 사라진 상태였다. 그럼 버리는 게 옳은데, 니아는 차마 저 시든 꽃들을 버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마 니아는 저 꽃다발에게 정을 주게 된 것 같았다.
“마음을 준다는 건 무서운 일이구나. 쓸모가 없어도 버릴 수가 없으니.”
니아는 결국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가자. 가자고. 이러다 하루가 다 가 버리겠어.’
쾅 하고 방문이 닫히자 니아의 방에는 시든 꽃다발만이 홀로 남겨졌다.
니아의 말대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직까지 모르고 있는 일이 있었다.
그게 아무리 어렵다 해도, 좋아하는 마음을 멈추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다는 사실을.
공작가 하인의 안방마님 격이라 볼 수 있는 릴리 포비는 향긋한 차를 끓이며 콧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달콤 쌉싸름한 차의 향이 주방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랄랄라 라라라라…….”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천천히 노래를 계속했다.
“라라…… 라…….”
그러나 그녀의 손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화로 옆에 놓인 향신료로 향했는데, 그 손길이 무척이나 은밀했다.
그녀가 슬쩍하고자 하는 것은 제국에서는 들여오지도 않는다던 시눅스 제국의 향신료였다.
‘조금만 가져가서 팔자. 어떻게 들여왔는지는 몰라도, 시장에서 구할 수도 없는 향신료를 이렇게나 많이 가져오다니. 이게 다 얼마야?’
주머니에 향신료를 두둑하게 집어넣은 그녀의 노랫소리는 더욱 커져 갔다.
‘이것이 바로 숙련된 하녀의 야금야금 자금 불리기!’
“아주머니, 이거 도련님께 드릴 거죠?”
“악! 내 간!”
깜짝 놀란 릴리 포비가 펄쩍 뛰었다. 간 떨어질 뻔했다는 말도 다 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 놀랐다. 그녀는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겨우 가슴을 진정시켰다.
돌아보니 본인이 살인미수에 그친 것을 모르는지, 홀로 평온한 니아 프레슬리가 있었다. 협박 내지는 추궁하려는 표정이 아닌 걸로 보아, 릴리가 방금 한 짓을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니아 프레슬……리 아, 가, 씨?”
‘니아 프레슬리, 이 버릇없는 녀석아!’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그녀는 최근에 니아가 작위를 받았음을 겨우 상기했다.
“그렇게 부르실 필요 없어요. 아니, 아주머니 마음이시지만 굳이 절 어렵게 대하실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어요. 전처럼 대하셔도 좋아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맞는지, 예전과 달리 니아는 똑 부러지게 말했다. 어딘가 초연한 눈빛도 은근히 우아했다.
니아는 그저 방 안에서 머리를 쥐어뜯다가 제풀에 지쳐 이젠 미소 지을 힘도 없는 것이었지만, 릴리 포비의 눈에는 니아의 툭 떨어지는 손짓 하나하나가 귀티 나게 보였던 것이다.
‘못 해 준 기억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잘해 줬어야 했는데. 니아가 날 엄마로 생각할 정도로 챙겨 줘야만 했어! 십 년간 넌 뭘 한 거야, 릴리 포비!’
공작가의 그 누가 니아 프레슬리가 이렇게 될 줄 예상이나 했던가. 다들 니아 프레슬리를 어지간히도 일 못하는 병든 하녀쯤으로 여겼는데.
최근 도련님이 니아를 짝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에게 잘해 주긴 했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냉큼 작위까지 받아 낼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그리하여 릴리 포비는 지난 십 년을 버린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니아 프레슬리의 빈 엄마 자리를 차지해야겠다는 큰 포부를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또 혹시 아는가? 니아 프레슬리가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지. 귀족까지 되었는데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니아 프레슬리, 편하게 부르도록 할게……. 둘이 있을 때는.”
다른 사람과 있을 때도 평소처럼 대했다간 무슨 일이 날지 모르니, 릴리 포비는 만일을 대비해 덧붙였다.
“그 차, 도련님께 가져가실 거죠? 제가 가져갈게요.”
“아니, 이런 건 내가…….”
너한테 일 시켰다고 도련님께 혼나면 네가 책임질 거니! 릴리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한다며 쏘아붙이려다가 멈췄다.
‘가만, 내가 니아의 말을 거절해도 되나? 니아는 귀족이 되었는데. 그리고 미래의 안주인이 된다면 어쩔 거야. 자기 말에 거역했다고 날 쫓아내면?’
가만히 생각하던 릴리는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도련님보다 니아의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낫잖아? 어차피 도련님은 니아의 말이라면 지빠귀를 강아지라고 해도 믿을 텐데.’
판단이 선 릴리 포비는 따스한 어머니의 눈빛으로 니아에게 차를 건넸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투도 다시 수정하였다.
“그럼, 당연하지! 자, 어서 가져다드려. 서재에서 길리 집사님과 말씀 중이시……십니다.”
이것은 의도성이 다분한 미래지향적 말투였다. 안주인이 될 자에게 반말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둘이 있을 때도 존댓말과 반말을 은근 섞어 쓰며 니아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는 편이 좋을 거라는 게 그녀의 최종적 판단이었다.
“고마워요.”
군더더기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인 니아는 그녀가 내민 차를 받아 들었다.
“별말씀을……요. 다치지 않게, 조심, 또 조심이야! 호호…….”
이번에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니아가 돌아섰다. 릴리 포비는 자신의 새로운 계획이 나쁘지 않게 시작되었음에 만족했다.
“아, 참.”
그런데 무언가를 잊었는지 니아 프레슬리가 휙 돌아섰다.
야금야금 자금 불리기 프로젝트에 니아가 앞으로 얼마큼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를 계산 중이던 릴리 포비는 화들짝 놀랐다. 어우, 내 간!
“뭐, 왜! 아니, 그게 아니고. 왜요, 아가씨?”
니아 프레슬리는 볼록 튀어나온 릴리의 주머니를 가벼운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 향신료는 시장에서는 팔 수 없을 거예요. 삼 일 전에 시눅스 제국의 향신료가 거래 금지 품목이 되었다는 기사를 봤거든요. 물론 나라에서 금지한 무역품을 개인이 팔면 벌금이 20에오스에 달하는 건 이미 아시는 사항이겠지만요. 그럼 주의하세요.”
여전히 할 말만 하고 돌아선 니아 프레슬리의 등 뒤에는 입이 떡 벌어진 릴리 포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 찍힌 건가?’
미래의 안주인에게, 집 안의 물건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으로 찍힌 거냐고!
차마 소리를 낼 수 없어 릴리는 마음속으로만 울부짖었다.
반면, 그저 자신의 지식을 조금 나누었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는 니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이층 서재로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