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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진실 (30/75)

15. 진실

한번 말문이 트이니 그가 생일을 준비하는 내내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저는 고아잖아요. 진짜 부모님도 알지 못하는데, 생일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 거 가져 본 적 없어요. 진짜 부모님도, 생일도. 일 년 중에 어느 날도 절 위해 준비된 적이 없었다고요…….”

다 가진 그 앞에서 없는 것을 이야기하려니 슬펐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셀 수도 없었는데, 매년 그의 생일 때는 그를 위해 몸을 내주었으면서도 스스로의 생일은 알지도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배신을 당해야 깨닫게 될 것이다. 후회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주고 싶다는 마음에 대한 후회.

니아 프레슬리의 정체를 들키는 일에 비하면, 생일 정도야 쉬웠다.

“저한테 속으시니 기분이 어떠세요? 그런 줄도 모르고 작위를 주신다고요. 제가, 도련님을 이용한 거예요. 속인 거예요.”

“…….”

“겨우 알량한 자존심 한번 지켜 보려고 한 거짓말에 놀아나고, 놀아나서는.”

니아는 부디 그녀의 말이 필릭스 쿠아란의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기를 바랐다.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은 일을 벌일 수 없도록.

“그러니까 저한테 뭘 해 주려고 하지 마세요. 작위를 준다는 말 같은 건 하지도 마세요. 결국 오늘처럼 되어 버릴 테니까요. 또 거짓말에 속고, 배신감에 치를 떨고 싶지 않으면 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

니아는 신경질적으로 모자의 끈을 풀었다. 모자는 힘없이 바닥에 내려앉았고, 그것과 동시에 니아의 고개도 땅으로 떨어졌다.

차라리 이대로 니아의 몸도 땅으로 떨어지고 떨어져 필릭스 쿠아란 앞에서 사라지면 좋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괴롭고,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은 일이었다.

순간 시야가 캄캄해졌다. 촛농이 다 녹아내린 것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 니아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잘했어. 니아 프레슬리, 잘한 거야. 넌 이렇게 해야만 했어.’

하지만 계속해서 고개를 떨군 채 굳어 버린 것은,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을 마주 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잘했잖아. 잘한 거잖아. 이게 최선…….’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지? 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지? 바보처럼…….

그가 화를 낼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완벽한 저 사람에게, 내가 흠이 되는 마음을 알게 했을까 봐 두려웠다. 배신감으로 인한 분노보다 상처가 더 클까 봐 두려웠다. 상처란 그런 것이니까. 너무 아픈 것이니까. 특히나 마음의 상처는.

“니아 프레슬리.”

필릭스가 그녀를 불렀다. 단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그녀의 귀에는 꼭 꾸짖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래서 니아는 여전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나한테 얼마나 실망했을까.’

그는 더 이상 니아를 사랑하지 않을 만큼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니아 프레슬리.”

다시 한번 나직한 음성이 들리자, 니아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에 시달렸다. 용서를 빌고 싶은 욕망.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화 풀라고, 정말이지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점점 커져 가는 거짓말에 사실을 말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그녀도 그가 열심히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니아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갔고, 이미 고인 물은 샘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힘을 준 눈이 아프도록 시려 왔다.

‘아, 안 되는데.’

결국 니아는 차오르는 물기를 이겨 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가에 겨우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그러다 결국 거친 폭포처럼 깊은 줄기로…….

“알고 있었어.”

그 순간에 부드러운 음성, 부드러운 손길.

뜨거운 니아의 눈물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그리고 마치 아기를 쓰다듬듯 소중하고, 신중한 손길로 니아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눈을 감으니, 꿈을 만났나 보다.

울음을 터뜨리니, 환상이 찾아왔나 보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면 네가 화낼지도 모르지만. 널 속였다고 말이야.”

“……”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기적처럼 눈물이 멈추었다.

“오늘이 네 진짜 생일이 아닌 건.”

기적처럼 눈이 떠졌다.

“그래도 생일 축하해. 오늘이 네 진짜 생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기적처럼 필릭스 쿠아란이 웃고 있었다.

“네가 태어난 건 진짜잖아.”

소년이, 환하게.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그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라는 여자는.”

“이봐, 말조심해. 그 여자는 이제 귀족이 된다고.”

“그깟 귀족……. 누가 그 여자한테 난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다고 전해 주겠어?”

술을 한계치까지 마신 남자가 중얼거렸다. 누군가 비틀거리는 그의 몸을 붙잡았다.

“자네, 취했군. 취했어. 다들 눈치를 보는 이유를 알잖아. 겨우 작위 하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이 왔겠어? 아니면 정말 생일을 축하해 주려고 왔겠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하라고.”

이곳에 그런 순진한 사람이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있다 해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밤늦게까지 나타나지 않는 주인공을 기다리는 일에 시간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단 말이었다.

손님들을 이토록 기다리게 만드는 데도 남아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끝까지 남아서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고, 기억에 남아 어떻게든 줄을 잡아 보려고 하는 것.

“그 여자의 뒷배가 공작가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지. 아카데미에 피후견인을 넣었다고 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때부터 줄을 선 자들은 지금쯤 아주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을 거라고.”

필릭스 쿠아란이 자리에 없는 것을 확인한 이들이 너도나도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서서히 그들의 가면을 벗어 던졌다.

“공작이 나이가 들었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야. 예전에 그 잘나가던 공작이 아니라고. 그의 아들에게 모든 권력이 넘어가는 때가 온 거지. 그러니 그 아들이 목을 매는 여자한테 잘 보여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어?”

그렇게 가면을 벗고 맨살이 드러나니, 솔직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포장지 없는 내용물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래. 오죽 예뻐하면 작위를 생일 선물로 주겠냐고?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이야기하던걸……. 차기 가주의 권력을 앞세워서 말이야.”

“웃으면서 얘기해도 다 알지. 그 여자를 건드리면 그 웃는 얼굴이 바로 악마로 돌변할 거라는걸. 블레이즈 가문을 봐서 알잖나? 그 딸이 니아 프레슬리 그 여자에게 실수를 하는 바람에 어떤 꼴이 났는지. 장사와 뒷거래로 먹고살던 집안인데, 이젠 아무도 그 집안과는 거래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지. 내가 듣기론 뭐 그렇게 심한 잘못을 한 것도 아니라더구먼. 좀 과해, 처사가.”

“그래. 다들 알면서 속아 넘어가 주는 거지. 그렇게 해 주면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건을 보는 견해는 각기 달랐으나, 그들의 목적은 같았다. 어떻게든 공작가의 권력에 탑승하고자 하는 것.

“작위를 준 걸 보면, 공작가 안주인은 되지 못해도 정부 정도는 되지 않겠어. 그렇다면 제국 내 가장 유명한 정부가 되겠군! 오늘 온 자들이 다 니아 프레슬리, 그 이름을 기억할 테니까 말이야.”

“필릭스 쿠아란은 아직 어리지. 그 시절 풋사랑이 뭐 얼마나 가겠어? 그 여자에게 잘 보이느니, 전공을 세우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왜, 그라나다 전투 같은 데서 말이야…….”

해가 떴을 때는 굽신거리다, 해가 지니 벽에 몸을 기댄 채 비꼬는 자도 있었다.

“그러는 자네도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 자리까지 온 것 아닌가? 아까 표정이 볼 만하던데.”

비꼬는 자를 비꼬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말이야, 소문을 들으니 필릭스의 총애가 그렇게 빨리 끝날 것 같지가 않다더군…….”

소문을 퍼뜨리는 자.

“어디서 들은 소문으로는, 십 년간 짝사랑을 했다더군. 그 공작가 도련님이! 그래서 그런지, 다들 십 년은 더 봐야 하지 않겠냐고 우스갯소리로 그러더군. 하하하.”

예견하는 자도 있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요? 내가 본 미래는 그렇지가 않던데.”

노래하듯, 마치 모든 것을 다 미리 보고 온 것처럼 구는 자도 존재했다.

소란이 소란으로 덮이는 그런 밤이었다.

그리고 같은 시각, 필릭스 쿠아란의 방 안.

다시 켜진 촛불은 어두운 방을 밝힌 채, 환한 불꽃을 반짝반짝 뿜어내고 있었다.

다시 새로운 초를 꺼내 불을 붙인 그는 마치 일상적인 얘기를 하듯 입을 열었다.

“조금만 생각해도 간단하잖아. 네가 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생일을 이야기한 적이 없고, 그렇게나 생일에 의미를 두는 걸 보면.”

그게 간단한 건지 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그렇게나 간단한 거라면, 왜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

영영 얼어붙어 있을 것만 같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고 니아는 풀리지 않는 죄책감을 토해 냈다.

“……그래도 거짓말인데요. 도련님이 알고 계셨다고 한들, 제가 도련님을 포함한 모두를 속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떨어뜨린 모자를 다시 주운 필릭스는 여전히 별것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야. 그러고 보니 그때는 진심으로 기뻤지. 네가 날 필요로 하게 되는 일이 있다니 말이야.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난, 만족스러웠어.”

니아는 드디어 날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새빨간 거짓말인 것을 알고도, 그는 니아 프레슬리의 생일 파티를 열어 주고, 작위를 주는 일이 그저 기뻤나 보다. 우습게도.

아니, 애초에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그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네 거짓말을 지켜 주고 싶어서 말을 아꼈는데, 잘못 판단한 모양이지. 이렇게 신경 쓸 줄 알았더라면, 미리 이야기를 나눌 것을.”

그럼 니아는 그동안 뭘 걱정했던 걸까. 그녀가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그는 절대로 알 리가 없다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던 순간이 저절로 의미를 잃었다.

풀리지 않도록 다시 꼭 매듭을 지어 모자를 고정시킨 그는 니아에게서 멀어졌다. 가볍게 투덜거리며.

“참, 선한 사람의 사고는 따라가기가 어렵단 말이지.”

그곳엔 니아가 걱정했던 분노도, 상처도 없었다.

초가 모두 녹아 촛농으로 범벅이 된 레몬파이. 먹을 수도 없게 된 레몬파이가 다시 그의 손에 들렸다.

또다시 번쩍거리는 불꽃이 니아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불꽃은 이번에야말로 직접 꺼 달라는 듯 빛을 내고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더없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아…….’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를 내어, 스스로의 마음을 방어하고 싶었던 니아 프레슬리는 도리어 당했음을 느꼈다.

‘반칙이다.’

니아 프레슬리한테 태어나 줘 고맙다는 말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그는 몰랐다.

살기보다 죽기를 바랐던 시간이 더 긴 니아 프레슬리에게 그 말이 얼마나 값진지를 그는 몰랐다.

존재에 의문을 품고 품었던 니아 프레슬리를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니아를 알지 못한다 해도, 니아 프레슬리는 니아 프레슬리를 알았다.

그래서 니아는, 그가 모르고 한 말인 것을 아는데도 온몸이 저렸다.

‘오늘은 안 되겠구나…….’

그의 말 하나로 귀한 사람이 된 니아 프레슬리는 오늘의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마음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네가 태어난 건 진짜잖아.’

그는 거짓조차 진실로 만들었다.

니아는 어느새 진실로 변하게 된,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뱉은 필릭스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새로운 두려움이 찾아들었다.

‘안 돼. 욕심이 생기는 것 같아.’

내내 갖고 있던 두려움이 탁해져 가고, 그 자리를 욕심이 채우는 게 느껴졌다.

“잠깐, 소원을 빌어야지.”

촛불을 끄려는 니아에게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눈 감고.”

서른 개쯤 빌어 봐라, 내 귀에 들리게 말로 하면 더 좋겠다, 말도 안 되는 소원이라도 좋으니 빌어 봐라……. 평소와 똑같은 필릭스 쿠아란.

니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그동안에 빌지 못했던 생일날의 소원까지 모두 가져와 빌었다. 빌고 또 빌었다.

‘불행이 오지 않았으면.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으면. 나도, 저 사람도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해요. 함께하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듣고 있나요?’

그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을 알면서도, 니아는 생일 소원의 무모함을 믿고 빌어 보았다.

한참 뒤, 후 소리와 함께 불꽃은 증발했고,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기처럼 니아 프레슬리의 생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보 아카데미 사냥 대회>

아카데미의 문양과 함께 커다란 양피지가 칠판에 걸렸다.

“아카데미의 전통을 다들 알고 있겠지?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사냥을 가는 것! 올해는 또 어떤 볼거리들로 가득할지 궁금하지 않은가, 학생들!”

기사론 교수 지무트 아블란사가 단상 앞으로 내려가 외쳤다.

그의 말에 전 시간 수업 내용을 복습하던 니아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에게로 향했다.

‘사냥? 무슨 사냥?’

“우승한 사람은 보 아카데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수 있네. 그리고 알고 있겠지만, 마법, 검술, 그 외의 동물에 관련된 지식, 그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지!”

‘사냥에 마법은 금지인데…….’

니아가 읽은 책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냥의 이론과 법칙>, <귀족들의 대표 취미 사냥, 이대로 괜찮은가?>, <사냥꾼이 되는 101가지 비법>, <십 년 차 사냥꾼 지기가 경고하는, 아직 기회가 있는 그대, 도망쳐라> 등. 책과 논문 모두 사냥에서 마법은 금지되어 있으며, 오직 물리적인 힘을 가해 사냥을 해야만 한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었다.

“아카데미 사냥 대회에서는 마법이 허용돼. 일반인이 마법을 써서 사냥하는 건 너무 위험하니까 금지되어 있지만. 교수들과 마법사들이 안전을 책임질 거다.”

니아 프레슬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는 듯, 시저 카르만이 말했다.

“사냥을 왜 하는데?”

보다 더 순수한 니아의 질문에 시저는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해 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책을 읽으면 되잖아.”

니아가 앞에 쌓여 있는 책을 쿡쿡 눌렀다. 하지만 시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받아쳤다.

“배움은 책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으쓱 어깨를 올렸다 내린 니아는 또 다른 궁금증을 물었다.

“그럼 사냥은 어디서 하는데?”

그러자 이런 바보가 또 어디 있냐는 표정으로 시저 카르만이 되물었다.

“어디서 할 것 같은데?”

“……산?”

“예, 정답이네요. 훌륭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질문은 없지?”

그러고 걸음을 옮기려 하는 시저를 니아가 붙잡았다.

“산에서 한다고? 정말? 진짜로?”

“뭘 또 물어. 그럼 사냥을 집에서 하겠어, 짐승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이 아카데미에서 하겠어. 왜 이래, 아마추어처럼.”

니아의 눈이 의심과 불안으로 동그래졌다.

“그치만, 산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겁쟁이.”

중얼거리는 시저에게 니아는 너에게만 말해 준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그것참 대단한 정보로군. 내가 아까 말했잖아. 교수와 마법사들이 안전을 책임…….”

“뭘 잃는다고?”

교수와 면담을 하러 갔던 필릭스 쿠아란이 어느새 니아 곁에 와 있었다. 그는 시저를 향해 세상 제일 오만한 표정을 짓고는, 깜짝 놀란 니아 프레슬리 앞에서는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여우 같은.”

홀로 중얼거리는 시저를 필릭스는 공기처럼 가볍게 무시했다. 그러다가 니아와 시저가 말을 맞추려는 듯 눈빛을 교환하자, 차가운 불꽃처럼 서늘한 눈으로 시저 카르만을 바라보았다.

“뭘 잃는다고.”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저 없는 물음이었다. 마치 경고처럼 들리는.

“……아무것도요.”

니아가 말함과 동시에 시저 카르만이 다다다 쏘아붙였다.

“니아 프레슬리가 산에서 사냥 대회를 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고급 정보를 내게 전해 주던 중이었다. 너는 그것마저 귀엽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눈엔 별것도 아닌 걸 신경 쓰는 겁쟁이 내지는 애송이로 보이니 날 그렇게 매섭게 쳐다볼 필요 없어, 필릭스 쿠아란. 자, 이제 산이 무서워 떨고 있는 저 아, 가, 씨, 를 좀 위로해 주기만 하면 된다.”

어떤 찝찝한 일도 만들지 않겠다는 시저의 강력한 의지가 돋보이는 발화였다. 심지어 그는 니아 프레슬리를 비웃는 것도 잊지 않으며 아가씨라는 단어를 강조해 말했다. 그것은 그가 요즘 니아 프레슬리를 놀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남작 아가씨, 레이디, 귀족 영애 등등.

‘그만 좀 놀리라니까!’

니아는 또 한 번 놀리면 피의 복수를 하겠다는 의미로 그에게 으르렁댔다. 그러나 초식 동물이 치아 자랑을 하는 정도의 위협 수준에 그치게 되어, 도리어 비웃음을 사고 말았다.

풋, 일부러 크게 소리 내며 시저는 니아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했다. 더 과장되긴 했으나, 그의 모습에서 방금 자신이 어땠는가를 깨달은 니아는 목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랬어? 산이 무서웠어?”

시저에게 눈빛으로 꺼져, 사인을 보낸 필릭스는 마치 귀여운 생명체를 보듯이 아주 사랑스럽게 니아를 바라보았다. 니아는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 것도 모르고서.

“응?”

옛날 같으면 니아는 단호하게 ‘아니요’, 혹은 ‘모르셔도 됩니다’ 같은 말을 한 채 돌아섰겠지만, 이제는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무슨 말만 하면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말 한마디를 해도 고르고 골라 하고 싶었고, 얼굴 한번을 보여도 멀끔하고 정돈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그가 니아에게 가장 어려운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네, 아니, 네. 산은 가 본 적이 없어서요.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하고.”

이것도 문제였다.

거짓말을 해서 그 꼴이 났는데도, 또 필릭스 쿠아란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산에 가 본 적이 없다고? 니아 프레슬리, 정말 뻔뻔하구나.’

산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입은 잘 꾸며진 말을 출력했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되는데.”

필릭스가 던진 말에 니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

“저기 콩알만 한 글씨로 감점 삼십 점이지만 불참 가능이라고 쓰여 있잖아.”

불참 가능이라고? 세상에!

니아는 소리 내어 깔깔 웃고 싶은 기분을 참았다. 필릭스 쿠아란 앞이었다. 그녀는 수줍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도 네가 산이 무서우면 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

역시 필릭스 쿠아란도 니아와 같은 생각이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움찔거렸다.

“정말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

“교수님과 마법사들이 아주아주 안전하게 지켜 줄 예정이고, 그것보다도 내가 더 안전하게 지켜 줄 테고, 그리고 특히 내가 또 사냥에는 일가견이 있고, 네가 그걸(내가 사냥감을 때려잡는 멋있는 모습을) 본다면 무척 기쁠 것 같고, 사냥이 모두 끝나고 모닥불을 피우고 춤을 추는 것도 너무너무 기대했지만.”

“…….”

“네가 무서우면 어쩌겠어.”

여기까지만 해도 니아는 거절할 마음이 있었다. 산은, 산은 정말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바다에서 삼 일 동안 잠수를 하라면 할 만큼 산은 니아에게 싫은 공간이었다. 그가 아무리 가고 싶다고 해도…….

까슬한 포대에 담긴 채 산에서 굴렀던 기억, 살아난 몸을 이끌고 겨우 마을로 향했던 기억. 그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산에 간 적이 없는 니아는 산에 오른 자신의 상태가 어떨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울지, 기절할지, 아니면 의외로, 혹시라도, 기적처럼 아무렇지도 않을지.

그러나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니아는 도박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죄송해요, 도련님. 혼자 가세…….”

“나도 가지 않는 수밖에.”

하지만 그 마음은, 니아가 가지 않으면 그도 가지 않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듣기 전까지만.

“그게 무슨 나약한 소리세요? 당연히 가는 거죠!”

아무래도 니아 프레슬리는 이상한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헛소리를 이토록 당당하게 내뱉는 걸 보면.

“그래. 함께 가는 거야.”

필릭스 쿠아란의 눈빛이 니아에게 내려앉음과 동시에 그는 작게 웃었다.

그 작은 웃음소리가 니아의 마음에, 머리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처음으로 설탕을 맛보고 놀란 아이처럼.

니아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몸을 기울이려고 하는 것을 문득 깨닫고,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할로나 아가씨가 무료 양피지 나눔을 하고 있다는 이상한 핑계를 대며, 필릭스 쿠아란에게서 멀어졌다.

다행히도 필릭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냥 니아를 보내 주었다.

복도 끝자락에 다다라서, 니아는 아침에 입은 이후 한 번도 벗지 않은 망토의 끈을 풀었다. 그리고 거칠게 벗어 팔에 걸쳤다.

이제 망토를 벗을 계절이 온 건가? 몸이 후끈후끈하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니아는 곧 여름이 오려나, 그렇게 시간이 빨리 흘렀나 막연한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랐다.

‘사냥 대회까지 한 달이나 남았으니, 방금 한 말은 언제든 수정 가능이야.’

앞으로의 시간이 더 빨리 달려갈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한 채로, 니아는 그렇게 안일한 마음을 품어 보았다.

금세 봄인지 여름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날들이 찾아왔다.

얇은 겉옷을 입으면 더웠고, 벗으면 다시 겉옷이 그리워지는 날씨였다. 그러나 화창한 계절이라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다. 곧 겉옷을 완전히 벗어 던지게 되는 날이 올 거라는 것에도.

얼떨결에 귀족이 되고 만 니아 프레슬리는 새삼 그녀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화하였음을 느꼈다. 지난 십 년의 세월보다 최근의 몇 개월이 니아에겐 훨씬 더 동적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또 하나, 니아는 요즘 마음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번번이 느끼고 있었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웃음을 참기 위해 억지로 얼굴을 찡그리는 일이나, 긍정하고픈 마음을 참으며 어떻게든 부정을 향해 가는 일이나. 머리와 마음의 충돌은 무척 피곤한 것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거스르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오히려 니아는 스스로가 얼마나 마음껏 행동하고 싶었는지를 깨닫곤 했다.

그래서 요즘 그녀는 그런 마음의 충동질에 가끔 지고 말았다. 어찌할 도리가 없이.

“니아 프레슬리, 물 온도가 딱 적당해!”

갑작스럽게 호숫가에서 말을 세운 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바지를 걷어 올린 그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일이 니아는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해맑은 모습을 보니 인상을 찌푸리거나 등을 돌리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들어올래?”

니아는 대답 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언젠가는 오늘을 그리워할 것 같다는 생각. 그러자 갑자기 오늘이 소중해졌다.

붙잡을 수 없는 오늘이라는 것을 잡아 보려는 듯 니아는 손을 모았다. 그리고 첨벙첨벙 물소리를 내는 필릭스 쿠아란을 바라보았다. 눈동자 가득히 필릭스 쿠아란이 넘실거렸다.

“들어와라, 응?”

아이처럼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재촉했다. 니아는 눈이 부셔 아무 말 없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필릭스 쿠아란이 들어간 곳이 호수인지 하늘인지 헷갈렸다. 물이 너무 맑아 하늘이 전부 비친 탓이었다. 호수에 구름과 태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모습을 보며, 니아는 반짝거림을 느꼈다.

“시원한데…….”

니아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는 민망한 듯 웃었다. 그리고 물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태양을 지르밟으면서.

자갈에 그의 종아리부터 발끝으로 타고 내려온 물기가 맺혔다.

“날이 진짜 좋지 않아?”

니아는 까칠하게만 보였던 필릭스 쿠아란도 계절을 타는구나, 새삼 놀라웠다. 그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하긴, 순간의 충동에 물가로 향하는 모습을 보니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아니 가끔은 그가 아이인지 소년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게요. 올해 유독 날씨가 좋은 것 같아요.”

누군가 알려 주지 않아도 이것이 평화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 생일 소원이 이뤄지고 있는 것일까?

“놀러 갈까?”

니아는 차마 거절을 하지 못한 채 먼 곳을 바라봤다. 대신 지금 이 순간 떠오른 생각을 뱉었다.

“아이 같으시네요.”

전혀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필릭스 쿠아란은 당황한 듯 기침을 했다.

입가를 손으로 가린 그는 니아가 시선을 둔 곳으로 힐끔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곳엔 태양만 있을 뿐 별다른 것은 없었다. 왜 저 너머를 바라보는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어…… 뭐 해?”

갑자기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그가 더듬거렸다.

“저는 들어가기 싫다고 말한 적 없거든요.”

똑같이 장난기가 담긴 말투였다.

“나 이미 신발 다 신었는데.”

“그래서요?”

웃음기를 머금은 니아 프레슬리가 호수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니, 신는 것보다 벗는 게 더 빠르다고.”

물기 때문에 낑낑거리며 신은 신발을 한 번에 벗어 던지며, 필릭스 쿠아란이 웃었다.

“앗, 차가워!”

물속으로 첫발을 디딘 니아가 생각보다 더 차가운 온도에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발끝이 시렸다. 그러나 마냥 싫은 느낌은 아니라 계속해서 걸어갔다. 걷다 보니 또 익숙해졌다.

용케 무릎까지 다리를 집어넣은 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들어오실래요?”

불과 몇 분 만에 두 사람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곧장 그녀를 따라 들어가려던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가 왜 태양을 바라보았는지 알 것 같아 머뭇거렸다.

호수 안에 다리를 담근 채 뒤를 돌아보는 니아 프레슬리, 그리고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필릭스 쿠아란. 섬세한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니 심장이 쿵쿵, 아프도록 뛰었다.

그래서 잠시 그 찬란함을 눈에 담는데,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에 또 한 번 장난기가 올라왔다.

“시원한데?”

그를 흉내 내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며 필릭스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풍덩 소리와 함께 필릭스 쿠아란이 호수에 뛰어들었고, 그 때문에 호수 안의 구름과 태양이 동시에 일렁거렸다.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모양을 보며, 니아는 계절을 타는 것은 필릭스 쿠아란보다는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니아는 이 계절이 좋았다.

‘오늘은 날이 너무 좋아서 안 되겠어.’

사냥 대회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하며, 니아는 물속의 발끝을 꿈틀거렸다.

“돈이 좋아, 꽃이 좋아?”

필릭스 쿠아란이 후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니아 프레슬리에게 물었다.

“돈이 좋죠.”

단번에 대답을 고르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고 필릭스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럼 내가 돈을 주면 받을 거야?”

“음…….”

니아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 것 같아 필릭스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돈을 많이 주면 받을 거야?”

니아의 얼굴에 떠오른 불편함을 눈치챈 필릭스 쿠아란이 웃었다.

“안 줄 테니까 걱정 마.”

“……그런 건 왜 물어보세요?”

“네가 어디까지 괜찮을까 싶어서.”

니아는 열심히 끄적거리던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종이 위에 손을 가지런히 두었다.

“작위는 괜찮고, 많은 돈은 좀 그렇고. 알겠어.”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니아를 보며 필릭스 쿠아란은 그녀가 여전히 무언가를 받는 일에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필릭스는 이대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니아를 지키기 위해서든, 곁에 두기 위해서든. 그저 앞으로 천천히, 자연스레 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그럼, 미술품이 좋아, 책이 좋아?”

“책이 좋아요.”

“그런데 그 미술품이 이천 년 전에 만든 거장의 것.”

“그럼…… 미술품이 좋아요.”

그 미술품을 팔아 책을 많이 사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 같았다. 그래서 니아는 미술품으로 선택을 변경했다.

“영지가 좋아, 건물이 좋아?”

“그건…….”

“건물은 팔 수 있어.”

“그럼…… 건물?”

예전이라면 쓸데없는 질문 말라며 타박했을 텐데, 지금 니아 프레슬리는 답을 고르느라 열중하고 있었다. 그 변화가 기꺼워 필릭스 쿠아란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그래, 알았어.”

“그…… 받고 싶어서 고른 건 아니에요.”

니아 프레슬리가 겨우 덧붙였다. 혹시라도 그가 또 무언가를 몰래, 짠 하고 해 줄까 두려운 듯이.

필릭스 쿠아란이 웃으며 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덮었다. 그리고 흔들었다.

“실용적인 게 좋구나. 알아만 둘게.”

그는 머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계속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니아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자 더 재미가 들린 듯했다.

그렇게 필릭스는 꿀이라도 발라 놓은 양 한참을 지분대다, 머리카락을 산발로 만들고서야 손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다가, 돌연 후원에 울려 퍼지게 큰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하!!! 지금 진짜 웃겨! 아, 귀여워…….”

“…….”

“하하…….”

그러나 곧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니아를 발견한 필릭스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공부해, 공부.”

그는 그렇게 니아에게서 멀어지며, 몸을 꺾어 후원 한 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니아는 고개를 흔들어 머리를 정리하려다, 그걸로는 한참 부족함을 깨닫고 손을 뻗어 머리를 쭉쭉 잡아당겨 폈다. 하지만 머리칼은 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포기한 채 니아는 다시 책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펜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빈 종이를 까만 글씨로 채워 가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귀를 간지럽히는 그 소리는 멈췄다.

‘집중이 안 돼.’

니아의 귀에 필릭스 쿠아란의 웃음소리가 아직까지 생생했다. 마치 귓가에 대고 웃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니아는 환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를 흔들며 탁 하고 펜을 놓았다.

‘정신 집중, 집중.’

다시 공부에 열중하기 위해 미간을 찡그리며 펜을 잡았을 때였다.

“니아!”

필릭스 쿠아란이 짠 하고 나타나 또 무언가를 짠 하고 내밀었다.

“꽃다발. 네 거야.”

후원의 꽃들을 꺾어 만든 것으로 보이는 꽃다발이었다. 딱 봐도 생김새가 무척 어설펐다. 꽃들이 조화롭지 못한 채 전부 따로 놀고 있었으니 실패한, 미완성의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을 니아에게 건넸다.

“비싸지도 않고 실용성도 전혀 없어. 아무 가치도 없는데, 이건 어때?”

니아의 눈에는 어설프게 엮인 꽃다발보다 다른 것이 더 보였다.

‘손에 흙이 묻어 있네.’

그의 말대로 비싸지도 않고, 실용성도 없고, 돈보다 좋지도 않은 꽃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은 정답이 아니었다. 흙 묻은 정성이 들어가 있었으니까.

니아는 저도 모르게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향기로운 꽃내음이 코를 간지럽혔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

펜 대신 꽃다발을 쥐고 있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며, 필릭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련 없이 손을 털었다. 바닥으로 흙이 토독, 조금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는 소년처럼 웃었다. 소년. 오늘의 그는 소년이었다.

“이런 걸 좋아해?”

“네.”

“기쁘다. 정말.”

선물을 받은 사람보다 준 사람이 더 기뻐하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난 또 네가 받아 줄 만한 무가치한 것들을 찾아볼게.”

흙을 한 번 더 탁탁 털어 내며 필릭스 쿠아란이 돌아섰다.

니아는 그의 뒷모습과 그가 준 꽃다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이런 걸 좋아하냐고 물었다.

필릭스 쿠아란, 그리고 꽃다발.

니아는 두 개 다 좋았다.

두 가지 다 좋아하지 않았던 때도 있는데, 지금은 두 가지 다 좋았다.

“좋네.”

니아는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려 보았다. 그마저도 누군가 들을까 소심한, 은밀한 속삭임에 가까웠으나.

한때 필릭스 쿠아란을 겨울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를 피해 다닐 때, 왠지 모르게 시리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보니 한참 잘못 알고 있었구나 깨달았다.

겨울인 줄 알았는데, 봄이었던 사람.

여름이 오고 있는 만큼, 더 가까이 다가가면 델지도 모른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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