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주말의 생일 파티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니까. 벌써 주말이라니.’
어쩌면 두려움과 설렘은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왜냐면 유독 바람이 좋은 주말, 후작가 앞에 선 니아 프레슬리의 마음이 꼭 그랬기 때문에.
공작가보다는 작았지만 역시나 거대한 후작가의 저택을 바라보며 니아는 입술을 악물었다. 긴 오르막을 올라 도착한 후작가에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느낄 수 있는 위엄이 감돌았다.
‘실수하지 않을 거야.’
니아 프레슬리는 초대받은 손님이고, 손에는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선물도 들려 있었다. 니아는 지레 겁먹지 말자고 한 번 더 다짐했다.
후작가 저택 문이 양쪽으로 열릴 때, 또다시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 니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의 결이 부드럽게 니아의 코와 귓가를 타고 넘어갔다. 덕분에 니아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상냥한 목소리의 후작가 하녀가 니아를 안내했다. 그녀는 니아를 후원으로 이끄는 내내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덕분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어도 니아는 그녀에게 충분한 배려를 받았다고 느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카레나가 보였다.
그녀는 후원에 놓인 커다란 탁자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놓여 있었고, 섬세한 찻잔과 형형색색의 아기자기한 과자들이 테이블에 가득해 무척 화려해 보였다. 꽃들 역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어 생기를 더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은 귀족 영애들이었다. 그녀들이 앉아 있어서 니아의 눈에 보이는 것은 겨우 상체뿐이었지만, 곧은 자세와 미동에도 펄럭이는 소매의 레이스들이 그려 낸 듯 우아했다.
‘와아! 꼭 그림 같다.’
그들은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로를 마주 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카레나가 니아를 발견하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니아는 후작가의 하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카레나에게로 걸어갔다.
“니아!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카레나는 꼭 니아를 초대하던 순간처럼 상기된 목소리로 그녀를 반겼다. 아름다운 녹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누가 보아도 이 생일 파티의 주인공이었다. 싱그러웠고,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생일 축하드려요, 카레나 아가씨!”
큰 목소리로 니아는 그녀에게 답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싫은 울림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니아에게로 쏠렸다가 다시 카레나에게로 향했다.
니아는 카레나에게 포장된 선물을 건넸다. 그러자 카레나는 감동받은 표정을 지은 채 숨을 들이켰다. 포장만으로도 무엇인지를 알아챈 것이다.
“이건 설마……! 박사용 망원경! 정말 갖고 싶은 거였어. 고마워, 니아!”
카레나는 귀족 영애답게 우아하게 무릎을 숙여 감사를 표했고, 니아는 그에 대한 답으로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당연한 그 인사치레조차 니아에게는 너무도 따스했다.
“네가 축하해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자, 니아. 가서 앉자.”
니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녀가 빈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책에서 보았던 대로 먼저 진한 향을 음미하며 니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 할로나 아가씨다.’
대각선에 있는 할로나가 니아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더 크게 반가움을 표현하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눈치였다. 다른 귀족 아가씨들이 많은 자리였으니까.
니아는 그런 할로나에게 역시 눈짓으로 답하고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카데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니 느낌이 꽤 달랐다. 말없이 웃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단아해 보였고, 주위의 숙녀들과 참으로 비슷했다.
니아는 지금 이 순간이 며칠 전부터 내내 보았던 책들 안에 삽입되어 있던 명화처럼 느껴졌다. 몇 달 전만 해도 아름다운 그림 속에 직접 들어가는 호사를 누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여기는 니아 프레슬리야. 보 아카데미생이고, 올해 아카데미에 들어왔지. 친해진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늘을 계기로 더 친해지고 싶어. 니아는 정말 귀엽고 똑똑하거든!”
카레나 비비고르가 니아를 대신해 간단히 그녀의 소개를 했다. 귀족들 특유의 호의 같은 것인지, 귀엽고 똑똑하다며 니아를 향해 후한 평가도 이어졌다.
니아는 책에서 읽은 티파티 예절 중 하나를 떠올렸다.
‘이 정도는 예상했잖아. 사교계의 기본 공식.’
니아는 슬쩍 차를 마시며 웃었다.
‘초대 손님을 있는 대로 치켜세워라.’
티파티 예절 스물한 번째 항목이었다. 심지어 카레나의 목소리엔 꽤나 진심이 묻어 있는 듯해, 니아는 역시 사교계에서 뼈가 굵을 대로 굵은 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 그 공작가의 피후견인이라던?”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할로나 허니 옆자리에 앉은 영애가 턱을 괸 채 니아를 보고 있었다.
니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정돈했다.
“네, 그렇답니다. 감사하게도 공작가의 후원을 받게 되었어요.”
“반가워라. 아카데미의 후원자라니,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서 말이야.”
가벼운 목소리와 푹 파인 보조개가 니아에게 돌아왔다. 새하얀 얼굴에 호수처럼 푸른 눈, 그리고 진한 분홍빛 입술을 가진 그녀가 웃음소리를 내며 니아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네.’
문득 그녀가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워 보이는 머리칼과 아주 오랜 시간 다듬었을 것 같은 손톱, 반짝이는 입술과 가지런한 치아 전부.
그러다 다시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그녀의 눈썹이 살아 있기라도 한 듯 꿈틀거렸다.
‘아, 내가 너무 빤히 쳐다봤나 봐. 상대를 너무 빤히 보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데.’
니아는 그녀의 외모에 시선을 뺏겨 너무 오랫동안 답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먼저 니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러나 니아가 입을 열려는 찰나, 앞선 그녀의 말을 시발점으로 몇몇이 말을 더 하기 시작했다.
“맞아. 우리가 아카데미의 후원자를 볼 일이 어디에 있겠어? 매일 저택 안에 갇힌 처지에.”
“보통은 평민이지, 아마? 카레나가 평민 후원자를 초대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사교계에서도 보기가 힘드니까, 평소엔.”
허공에서 종달새 같은 소리가 우아하게 맞물렸다. 니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가끔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것도 지루하지 않겠다 싶어. 그런데 최근에 할로나가 집에서 추가로 과외를 받기 시작한 걸 보면서 이것도 참 못 할 짓이다 싶었지. 내가 골백번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말을 해도…….”
“맨날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다니고 있는 걸 보면 용하다고, 할로나?”
부채로 입을 가린 그녀들은 그게 무척 즐거운 이야기라는 듯 웃었다.
할로나는 이런 식의 대화가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거렸고,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카레나 비비고르도 그녀들을 따라 싱긋 미소를 지었다. 인형같이 아름다운 그 영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이 웃고 있는 사이, 니아는 어차피 끼어들지 못할 거라면 그들의 대화를 통해 재빨리 그녀들을 하나하나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는 귀족 여성들.’
그녀들을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자리에 카레나와 할로나, 그리고 니아를 제외하곤 아카데미생은 없었다.
귀족이 무엇인지 보여 주겠다는 듯 영애들은 요즘 얼마나 무료한지를 말했고, 니아 같은 하녀의 기준으론 사치스럽게만 들리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그녀들은, 니아의 입장에서는 영양가가 참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대화들을 더 나눴다.
그러나 상황을 판단해 보건대, 나쁘지는 않았다. 마치 흐르는 시냇물을 보는 듯했다. 여기저기서 졸졸 대화가 흘렀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니아는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커질 때마다 따라서 호호 웃었다. 그러다 잠시 조용해지면 입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다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만한데?’
시시각각 바뀌는 주제들을 따라가기가 어렵긴 했지만 이 정도면 그녀들과 잘 어우러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카레나 아가씨, 아버님과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재잘대던 영애들의 대화는 갑작스러운 후작가 하녀의 말에 멈췄다. 니아도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무엇보다 카레나의 반응이 압권이었다.
그녀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 소리를 내었다.
“정말? 오늘 돌아오시긴 어려울 거라 했는데! 정말이야?”
“아가씨 생일날에 맞춰 돌아오시기 위해 무척 애를 쓰신 모양입니다.”
곧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멀리서 두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키가 큰 두 남자는 체형이 무척 비슷했다. 걸음걸이조차 복제해 놓은 듯 흡사해, 먼 거리에서 봐도 부자 사이가 확실해 보였다.
“잠시만 다녀올게!”
카레나는 전에 없이 붉어진 두 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후원 건너편에 있는 두 남자를 향해 뛰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카레나는 후작과 그녀의 오빠로 보이는 사람에게 닿았다. 그러자 그런 그녀를 두 남자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차례대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아, 후작 부인인가 봐.’
조금 뒤, 카레나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인도 그들에게 다가갔다.
‘카레나 아가씨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그녀는 부드럽게 비비고르 후작의 손을 잡았고, 한참 대화를 나누던 네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떤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네 사람이 조화롭게 어울린다는 것은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누구라도 분명히.
오랜만에, 그리고 자식의 생일날 한곳에 모인 가족에게서 나오는 애정과 애틋함이 니아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나 봐. 즐겁고…… 좋아 보인다. 정말 좋아 보여.’
니아는 카레나가 왜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하녀인 그녀를 이곳에 초대했는지 깨달았다. 온전한 깨달음이 들이닥치자 목이 조금 멘 나머지 여러 번 침을 삼켰다.
‘이렇게 행복하게 자랐다면, 좋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겠지.’
온전한 애정을 받은 자만이 그 애정을 또다시 온전한 형태로 줄 수 있는 것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구나.’
그래서 니아는 그들의 모습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들이 짓는 미소에 살갗이 따끔거리면서도.
방금 니아 프레슬리는 스스로 명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홀로 그림 밖으로 튕겨 나온 것처럼 얼떨떨했다. 이것은 니아 프레슬리가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그림이기에 그런 것일까.
“어쩜, 화목하기도 하지.”
그런 니아를 현실로 돌려놓은 것은 다름 아닌 에이미 블레이즈였다.
니아는 대화를 들으며 영애들 이름을 대부분 외웠는데, 모두 아름다웠지만, 특히 더 잘 만들어진 인형 같다고 생각한 그녀의 이름이 바로 에이미 블레이즈였다.
니아는 그제야 후작 가족에게서 눈을 떼었다.
“카레나는 참 좋겠어.”
하지만 목소리는 전보다 날이 서 있는 것처럼 들렸다.
니아는 눈을 크게 한번 깜빡였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다.
“정말 보기 좋다니까. 그렇지, 에이미?”
누군가의 자연스러운 대꾸에 에이미 블레이즈가 깊숙한 보조개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테이블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그래, 참 적당한 집안이야. 그보다도……. 난 네 얘기를 듣고 싶어. 공작가의 피후견인, 평민 아카데미생.”
에이미의 말에 모든 시선이 니아에게로 쏠렸다. 마치 니아가 처음 등장했던 그 순간처럼.
“카레나가 돌아올 때까지 우릴 심심하지 않게 해 줬으면 하는데.”
니아는 잠시 숨을 삼켰다. 카레나가 없으니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왜지? 왜 이토록 차가워진 거지?
니아는 손끝의 떨림을 느끼며 에이미 블레이즈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마주쳤다.
니아가 그녀의 눈빛을 읽으려 노력하는 만큼 그녀도 니아의 속내를 파악하고 싶어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보다 명확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거리감이었다.
“걱정 마. 우린 편견이 없으니까. 카레나가 초대할 정도라면 얼마나 능력이 있을지 궁금할 뿐이야. 아카데미에 뒤늦게 들어간 케이스라니. 어떤 식으로 후원을 받게 됐는지 말해 봐.”
“…….”
“하녀 주제에 어떻게 후원을 받게 되었을까. 노블레스 오블리주인가, 아니면…….”
그녀는 말을 잠시 끌다가 작은 목소리로 주변에만 들리게 말했다.
“몸으로?”
그녀의 말에 몇몇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던 니아의 양손은 결국 서로를 붙잡았다.
‘카레나가 있을 때는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뿐이었구나.’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 오는 것을 보면.
니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비웃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할로나 허니가 당황한 얼굴로 에이미 블레이즈를 향해 입을 달싹이는 것도 보였다.
‘다행이야.’
에이미 블레이즈의 행동이 불편한 게 니아뿐만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것만으로 니아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기분이 무척 나빴다. 아니, 그보다는 감정이 이렇게 크게 소용돌이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놀라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연습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무언가가 몸속에서 꿈틀거렸다.
“공작가는 자선사업 단체가 아닙니다, 아가씨.”
저도 모르게 말이 나갔다. 고개를 숙이는 대신 입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타이르듯 말하는 그 음성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감히 하녀 주제에 귀족을 향해 그렇게 말하다니!
“방금 뭐라고 했지?”
“공작가는 자선단체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단지 귀족의 도덕적 의무로 아카데미생을 후원할 만큼 공작가는 자애롭지는 않거든요. 혹시 아가씨의 집안에서는 손해 보는 사업을 하시는지요? 그렇지 않다면 공작가도 같은 이유일 겁니다.”
니아의 입에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말이 술술 나왔다. 그녀 안에서 이성보다 빠른 속도를 가진 무언가가 그녀를 조종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이거, 현실이 맞겠지.’
스스로가 너무 낯선 나머지 꿈을 꾸는 기분마저 들었다.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기분보다 순간의 충동이 훨씬 더 강렬했다.
“대답이 됐을까요?”
니아의 마지막 말과 함께 고요가 찾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며 평온함을 가장하던 긴장의 줄이 마침내 끊어진 것이다.
인형같이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보조개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미소도, 어떤 가식도,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녀는 표정을 갈무리하는 일조차 잊은 것처럼 매서운 눈빛을 한 채 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니아의 체감상으로는 차가 식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물론 에이미가 다시 말을 하기까지의 공백은 모두에게 불편한 시간이 분명했다. 그러나 니아가 조금 전의 행동을 후회할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아직까지 그녀에 대한 불쾌감을 지우지 못했으므로.
쨍그랑!!
순간 찻잔이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롭게 부서지는 소리가 긴 공백을 깼다.
“에, 에이미, 괜찮아?”
긴 시간 공들여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유리잔은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후작가 하녀의 얼굴은 겁에 질린 채 하얘져 갔다. 후작 부인께서 얼마나 아끼시는 찻잔인지를 아는 터였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이 미끄러졌구나.”
“금방, 금방 치워 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아니, 됐어.”
“예……?”
“너 말고도 여기, 하녀가 있으니까.”
그렇지?
그녀는 니아를 향해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파티의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치우도록 해라.”
에이미 블레이즈가 진짜 평온함을 되찾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평온을 가장하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말투는 아까와 같았다. 우아했으나 동시에 무척 오만했다.
순간 니아의 입에서 작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니아는 지금 그녀의 행동이 무섭거나 수치스럽다기보다……. 그래, 유치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초연해진 말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저는 이곳에 하녀로 온 것이 아닙니다.”
안타깝다는 듯,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가 바로 말꼬리를 잡았다.
“그렇다고 네가 하녀가 아닌 건 아닐 텐데?”
“그렇지만…….”
“이걸 네가 직접 다 치운다면, 방금의 무례는 용서하겠다. 나도 카레나의 생일 파티에서 일을 크게 벌이긴 싫으니까.”
니아가 받아치지 못하자, 에이미 블레이즈는 승리를 직감한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무례를 용서…….’
니아는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양손을 맞잡은 채로.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부서진 조각들을 치우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리고 비참함을 꾹 참고, 스스로의 못남을 내세우며 용서를 구하는 수순까지도.
만약 그렇게 한다면 상황은 평화로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의 마음은 하나도 고요하지 못하리라.
적어도 오늘만은 머리보다 마음이 빠른 듯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하녀로 온 것이 아니라 카레나 아가씨의 손님으로 왔으니 아가씨와 동등하죠. 그러니 아가씨께서 고의로 떨어뜨린 그 물건을 제가 치울 이유는 없습니다.”
니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이미 블레이즈에게서 황당함이 가득 담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시작된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 큰 웃음소리로 번졌다.
그러다 에이미 블레이즈는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웠다.
“내가 너와 같다고? 네가 아카데미생이건 공작가의 총애를 받건 상관없어. 안타깝게도 난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었으며, 죽을 때까지 귀족일 것이다. 그런데도 동등? 카레나 비비고르가 웬 미친 여자아이에게 속아 넘어갔구나.”
숨을 한번 들이켜고 부채를 두어 번 부친 후, 그녀는 더 탄력을 받아 말을 이었다.
“공작가를 자애롭지 않다고 말할 만한 배은망덕함이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했지. 후원을 받고 있는 입장에 그런 말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나? 피후견인이 이토록 망신을 시키고 다니는 건 공작가에서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
“네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진 몰라도 하나만은 확실히 알겠구나. 분수를 모른다는 것. 아아, 귀족으로서 가르침을 줘야 할까?”
그녀는 니아를 보며 매섭게 마지막 말을 뱉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매질을 해 네게 가르침을 줘야 옳겠니, 아니면 네가 이 유리 조각을 치우고 카레나의 생일 파티를 망치지 않는 것이 옳겠니?”
누구라도 그녀의 의도를 알았을 것이다. 에이미 블레이즈는 혀를 뱀처럼 말아 독을 가득 담은 말을 니아에게 쏘았다.
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할 정도로 니아는 괜찮았다. 오히려 냉수를 맞은 듯 냉정해졌다.
“둘 다 옳지 않습니다.”
니아는 눈을 천천히, 한 번 감았다가 떴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ᅌᅳ나, 마음만은 달라져 있었다.
“저는 공작가가 아무런 기대 없이 후원을 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굳이 말씀드리자면, 공작가는 무척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가문입니다. 차기 가주이신 필릭스 도련님의 미래를 위해 인재를 길러 낼 만큼 철저하죠.”
손깍지를 푼 니아는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세를 앞으로 기울였다.
“쓸모없는 사람을 받아 줄 만큼 아카데미가 무력한 곳이 아니란 걸 잘 아실 겁니다. 아카데미란 그런 곳이 아닙니까, 에이미 블레이즈 아가씨?”
니아는 말을 끝마치고 차를 한 잔 들이켰다. 뭐라도 행동을 취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그랬는데, 차의 씁쓸한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지금의 흥분으로 미각까지 마비된 듯싶었다.
불안정한 떨림이 니아의 몸 전체에 일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부러 짓고 있던 당당한 미소가 점차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나쁘지 않은 감각이야.’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여유로운 자세로 느껴졌다는 것을 니아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에이미 블레이즈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는 것도.
차를 내려놓고 직시한 에이미 블레이즈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창백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 채 입술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니아는 그 모습을 보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쾌감을 느꼈으나, 점차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는 침묵에 이상함을 느꼈다. 어쩐지 주위 사람들이 에이미 블레이즈보다 니아 프레슬리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왜들 그렇게 보는 거지?’
사실 니아 자신은 몰랐지만, 방금 그녀는 활활 타오르다 못해 하늘로 불꽃을 쏘아 올린 수준이었다. 마지막 말이 너무나 성공적으로 에이미 블레이즈의 유일한 약점을 건드렸던 것이다.
에이미의 유치함도 다 그 약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고, 그녀가 말문이 막힌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니아는 몸을 부르르 떠는 에이미를 보며 조금씩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내 말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스스로를 인재라고 칭한 건 좀 뻔뻔했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에이미 블레이즈가 일어섰다. 그녀가 깨트린 유리 조각들을 즈려밟고서.
파르르, 이미 깨진 조각들이 더 잘게 부서져 파편이 되는 소리가 니아의 귀에 들려왔다.
그렇게 그녀는 빠르게, 무시무시한 속도로 니아 프레슬리에게로 다가왔다.
그것은 너무도 순식간이라, 니아는 그녀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짝!
날카로운 손바닥이 니아의 볼을 스쳤다.
“에이미! 뭐 하는 짓이야!”
할로나가 놀라 외쳤고, 니아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한번 짝 소리가 났다. 붉어진 두 볼과 함께 니아 프레슬리의 고개가 땅으로 낙하하듯 떨어졌다.
‘양쪽 뺨을 맞았어.’
귓가가 윙윙거렸다. 마치 벌들이 귀 안에서 웅성거리는 것처럼. 아픈 것보다, 멍멍한 이 울림 때문에 고개를 다시 들기가 어려웠다.
“감히……!”
“…….”
“너 따위 하녀가 감히!!”
니아는 뺨에서 느껴지는 화끈함과 동시에 점점 멀어지는 귓가의 감각을 느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폭언을 쏟아 내고 있는 것이 분명한 에이미 블레이즈의 목소리는 그렇게 희미해져만 갔다.
“당장 무릎을 꿇고 내게…….”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무엇이든 할 테니 화를 푸세요.
습관처럼 니아의 머릿속에 정답이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다.’
맞는 일이,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니아는 종종 맞아 왔다. 안나와 퍼시가 죽고 고아원에 가게 되었ᅌᅳᆯ 때는 원장에게 맞았고, 공작가에 들어와서는 수시로 모르트 독테의 학대에 시달렸다. 그렇게 맞고, 맞고, 또 맞고.
그러나 상처가 사그라지는 때쯤이면 니아는 언제나 멍하고, 두렵고,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러니 에이미 블레이즈가 니아 프레슬리에 대해 반이라도, 아니 반의반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이런 방법은 택하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지. 이건 아무렇지가 않아.’
에이미 블레이즈, 그녀의 손은 너무 고왔다. 그것이 문제였다. 이 정도 수준으로는 니아의 마음을 할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에이미 블레이즈, 그녀는 최악의 수를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니아는 붉어진 뺨을 쓰다듬었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겁먹게 하려면 좀 더 제대로 했어야지.’
겨우 따귀밖에 때릴 줄 모르는, 손이 곱디고운 귀족 여자는 오히려 니아 프레슬리의 비웃음을 샀다. 니아가 맞아 본 그 어떤 따귀보다도 가벼웠기에.
붉어진 두 뺨으로 에이미 블레이즈를 올려다본 니아 프레슬리는 물었다.
“끝난 겁니까?”
“……뭐?”
“그렇다면 아가씨는 참…….”
“…….”
“시시하군요.”
그다음 니아 프레슬리는 맞아서 빨개진 볼이 홍조로 보일 만큼, 입꼬리를 올려 아주 말갛게 웃어 보였다.
얼음 조각이 장작 위에 놓인 것 같은 일그러진 공기가 흘렀다. 크게 숨소리를 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깨진 찻잔 파편, 붉어진 볼을 당당히 내비치며 웃고 있는 니아 프레슬리,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이미 블레이즈. 그리고 그들을 발견한 카레나 비비고르가 그들에게 다가와 침묵을 깨기 전까지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내 손님한테 무례하게 구는 건 어디서 나온 발상이야?”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카레나는 모두가 움찔거릴 만큼 무서웠다. 착한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서워지는 이치와 같았다.
“하…….”
그녀는 무엇부터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열심히 상황을 판단하던 카레나 비비고르의 눈동자는 결국 에이미 블레이즈에게서 멈추었다.
“잠시 나 좀 볼까, 에이미?”
멀어지는 두 아가씨를 보며, 니아는 찬찬히 미소를 지웠다.
남은 아가씨들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까처럼 원만한 대화가 쉽게 시작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니아는 말없이, 생각이란 것을 했다.
그녀는 에이미 블레이즈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의 니아 프레슬리를, 더 나아가 저기 어린 니아 프레슬리를.
‘오늘처럼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는 자신을 다치게 했던 손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에이미 블레이즈의 고운 손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매서웠던 손들을. 그리고 그보다 더 매서웠던 말들을.
니아는 할 수만 있다면, 어린 시절의 그녀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매번 울기만 하는 건 아니야. 아무렇지 않은 날도 와.’
다음번에는 또 어떨지 몰라도 오늘은 그랬다. 살다 보니, 누군가의 손찌검을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는 날이 왔다.
니아는 푸르고도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타고 그녀의 마음이 전해지면 좋을 것 같았다.
“미안해, 네 생일 파티를 망친 것.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에이미는 응접실에 이르자마자 카레나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그녀를 돌아본 카레나는 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화가 난 건 내 생일 파티를 망쳐서가 아니야.”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고. 이 정도면 됐잖아? 이제 그만해. 난 충분히 창피를 받았어! 여기서 얼마나 더 사과해야 받아 줄 셈이야?”
에이미 블레이즈는 말을 하다 불쑥 서러워져 언성을 높였다.
겨우 하녀 따위에게 무시를 당했다. 게다가 카레나가 그녀를 따로 데려온 것만으로도 십 년 치 수치가 추가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쯤 그 하녀와 함께 모두가 에이미를 신나게 비웃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이가 갈렸다.
“너…… 정말…….”
그런 에이미를 보며 카레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아득함을 느꼈다.
카레나는 천천히, 혹여라도 에이미가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씹듯이 단어를 뱉었다.
“내가 화가 난 건, 네가 니아를 함부로 대했기 때문이야. 그 애한테 오늘 귀족뿐인 이 자리가 얼마나 어려웠겠어? 그런데도 와 준 고마운 아이라고.”
“…….”
“난 내가 초대한 손님들이 오늘 모두 나만큼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너를 포함해서 말이야.”
진심으로 슬퍼 보이는 카레나를 향해 에이미 블레이즈는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카레나는 거칠게 그 손을 쳐 냈다.
“그런데 넌 내가 니아와 너를 초대한 일을 후회하게 만들었어. 그게 네가 한 가장 큰 잘못이야.”
“난 실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이미 블레이즈의 눈에 물기가 맺혔다. 그녀는 내쳐진 손을 자신의 품으로 가져가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너야말로 애초에 왜 그런 하녀를 초대했어? 없는 것들에게는 잘해 주지 말라는 말을 모르진 않을 텐데. 설마 공작가를 의식해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카레나 비비고르? 잘돼 봤자, 귀족이나 황족 뒤치다꺼리나 할 계집애를!”
부들거리는 에이미를 향해 카레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눈은 실망과 슬픔으로 가득했다.
“아무것도 아닌 계집애가……. 저딴 게, 아카데미를…….”
“에이미 너의 질투는 추해.”
카레나는 결국 이 말을 하게 한 에이미가 원망스럽다는 듯 말을 뱉었다. 순식간에 에이미 블레이즈의 얼굴이 굳었다.
“네가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어 했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다니지 못했지. 네가 이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모두가 입 다물고 있었을 뿐이야.”
“…….”
“넌 재능이 없었잖아. 아버지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걸 반대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난 네가 입학시험에 떨어진 걸 알고 있었어.”
“…….”
“입학시험에 떨어진 널 뒤로 넣어 줄 만큼 대단한 집안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아니야. 아니야!”
에이미가 악을 쓰며 응접실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체면이고 뭐고 없어진 채로, 분노로 몸을 덜덜 떨며.
아카데미에 가지 못한 것은 에이미의 유일한 부끄러움이었다.
입학시험에 떨어졌을 때 그녀가 마주한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녀의 아버지가 해결해 줄 거라 믿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번번이 아카데미의 거절 의사만 돌아왔다.
그래서 올해 자리가 났을 때는 그 공석이 정말 자신의 것이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웬 공작가의 하녀가 후원을 받아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에이미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카레나 비비고르가 그 피후견인을 생일 파티에 초대했다길래, 어이가 없으면서도 잘됐다 싶었다. 그 잘난 얼굴을 한번 확인한 후 단단히 혼을 내 줄 셈이었다. 분풀이로 가볍게.
“아직 안 끝났어. 네 질투가 더 추한 이유는 다른 데 있어. 넌 재능이 없지만, 더 나쁜 건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거야. 죽을 만큼 노력했다면 넌 지금쯤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고 있겠지.”
“아니야…….”
“실력 없는 자존심만큼 한심한 것도 없어. 그런데도 이제껏 입 다물고 있었던 건 널 위해서였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 그 겉멋 든 자존심을 위해서였지. 그런 너와는 달리 니아 프레슬리는 재능도, 노력도 모두 가졌어. 그건 내가 알아.”
“…….”
“알겠으면 그만 가 줘. 보아하니 오늘 니아에게 사과할 마음 같은 건 없는 것 같으니까. 그 아이도 진심 없는 사과는 받고 싶지 않을 거야.”
“난…….”
에이미 블레이즈의 얼굴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발길질할 힘도, 악을 쓸 힘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축 처져 있었다.
“그리고 내년부터 내 생일 파티에 네 자리는 없을 거라는 걸 알아 두는 게 좋겠다. 잘 가도록 해.”
에이미 블레이즈는 그리하여 입학시험에 떨어진 이후, 그녀의 삶에서 두 번째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었다.
두 번째가 첫 번째보다 더 최악이었다. 그야말로 불행 중 불행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두 번째 수치는 첫 번째 수치로 비롯된 것이었으며, 더 이상 그녀 속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젠 사교계 내지는 하녀들의 입방아에 그녀의 두 가지 수치가 오르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