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레몬 파이 (25/75)

10. 레몬 파이

화창한 날씨의 어느 날이었다.

마음을 녹일 만큼의 바람만 살랑거렸고, 기분이 딱 좋을 만큼의 햇살만 부서져 내렸다. 마치 계절이 사람의 마음이 무엇에 약한지를 다 아는 것처럼.

햇살 조각이 정수리를 쪼아 댈 때, 와글거리는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청량함으로 빛났다. 그렇게 축복처럼 두근대는 계절이 내리쬐는 오후였다.

“니아! 내 생일 파티에 와 주지 않을래?”

시끌벅적한 교실 속에서 카레나 비비고르가 건넨 말은 호수에 던진 돌보다도 더 큰 파장으로 니아에게 다가왔다.

“내 생일 파티에 말이야!”

아무런 미동도 없는 니아에게 카레나 비비고르는 한 번 더 말을 반복했다. 그제야 니아의 귀에 ‘생일 파티’라는 단어가 제대로 박혔다.

검은 머리에 테가 얇은 안경을 쓴 그녀는 카레나 비비고르가 맞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이토록 생경한 느낌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일 파티란,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행위이자 친한 사람들만 초대하여 축하를 받는 문화적 생활의 한 형태인데. 나와 카레나 아가씨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 뭐지?’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러나 니아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도 카레나 비비고르의 속내를 예측할 수는 없었다.

‘혹시 내가 하녀라는 것을 깜빡 잊은 건 아닐까.’

어느 정신 나간 귀족이 하녀를 생일 파티에 초대한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니아는 카레나 비비고르가 잠시 실수를 한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자 파도치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응? 무슨 오해?”

카레나 비비고르는 말투에 친절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기다림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발을 콩콩 굴렀다.

“그보다 니아, 빨리 대답해 줘! 무척 떨려…….”

심지어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니아의 손을 잡은 채 격렬하게 흔들기까지 했다.

“왁!”

당황한 니아는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고 말았지만, 그 소리 또한 카레나의 열정에 묻히고 말았다.

‘이게 무슨…….’

정신을 차려 보니 니아의 두 팔이 종이 인형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몇 번 더 펄럭였다간 연체동물이 되어 버리고 말겠다 싶은 순간에, 카레나가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막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미소 지었다.

“집에서 조그마한 티파티를 여는 거니, 부담 없이 와 주면 돼. 친한 사람들만 초대했으니까.”

‘맙소사.’

그제야 니아의 머릿속에 댕, 댕, 댕 하고 종이 울렸다.

“와…….”

당황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카레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라 무척이나 부자연스럽게 보일 게 분명했으나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까지는 없었다.

“그러니까, 저를 생일 파티에…… 들이시겠다는 말씀이죠?”

“아니, 네가 내 생일에 와 주는 거야!”

뭐가 다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니아는 완벽하게 깨달았다. 무려 생일 파티에 초대된 것이다. 난생처음으로!

니아가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것은 재빨리 개미만 한 목소리로 초대해 줘서 고맙다고 중얼거리는 것뿐이었다.

과연 이 소심한 목소리가 들렸을까 의문이 드는 찰나, 카레나가 니아의 볼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꺄! 고마워! 이번 주말에 후작가로 와 주면 돼. 네가 와 준다니 정말 기뻐.”

정신이 반쯤 나간 눈으로 슬쩍 바라보니, 카레나의 검은 눈동자가 안경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니아는 그 후로 그녀가 하는 몇 마디에 성의껏 반응했다. 아카데미에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 과제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아카데미에 떠도는 영양가 없는 몇 가지 소문들까지. 적절히 호응했지만 머릿속은 점점 포화상태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생일 파티에 초대받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

니아는 설렘인지 걱정인지 모를 생각으로 가득 차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무엇 하나 제대로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비상인 것은 확실했다.

‘어렸을 적에 가끔 공작가 하인들이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 주는 건 봤어도 말이지.’

그러나 그건 어린 니아의 눈에도 결코 대단해 보이지 않았을 만큼 소박한 축하에 불과했다. 그 소박한 축하조차도 니아에겐 한 번도 없었지만.

‘레몬파이, 성냥불, 소원. 이 세 가지가 끝이었지.’

그래, 딱 레몬파이였다. 세 사람이 한 입씩 먹으면 끝나는 레몬파이에 불을 붙여 놓고 하인들은 기도를 했다.

그 외에 귀족들의 파티에 관해서도 니아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공작가에서 파티가 열릴 때 니아는 방 안에 홀로 숨어 있었고, 폭죽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축제가 끝나고 하루가 지나갔음을 알게 될 뿐이었다.

따라서 니아는 카레나가 말하는 생일 파티의 정의를 명확하게 내릴 수 없어 꽤 곤혹스러웠다.

‘오랜만에 만난 난제야. 이런 종류의 문제에는 전혀 면역이 없는데.’

그러니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못할 만큼 니아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증언은 역사적 효력이 부족하네. 하지만 역사서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과거에는 이런 허위 증언을 제대로 된 확인도 하지 않고 정식 역사서에 적었단 말이야. 아무튼 이처럼 마법은 얼마든지 혼동기억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의견을 말해 보지 않겠나. 누가 말해 볼까……. 음, 니아 프레슬리 양?”

아리갈리 버도네가 피를 토하듯 연설하다 재빠르게 교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그러고는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입을 반달 모양으로 커다랗게 찢었다. 강의실 안 학생 중에 오직 그녀만이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니아 프레슬리, 그의 애제자다웠다.

하지만 실상 니아 프레슬리는 멍을 때리다 그의 레이더망에 걸린 것으로, 그녀는 지금 이 수업이 아리갈리 버도네의 수업이라는 자각조차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

그가 두 번째로 호명했을 때야 니아는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네, 네? 네……?”

여전히 멍한 얼굴로 니아는 아리갈리 버도네를 바라보았다. 바보처럼 말을 더듬으며.

“지난번처럼 멋진 대답을 기대하겠네.”

순간 버도네 교수가 슬쩍 윙크를 했다. 니아는 그 윙크에 차가운 냉수를 얼굴에 맞은 기분을 느끼며 깨어났다.

철저히 그의 윙크를 외면한 니아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시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그녀를 구해 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프레슬리?”

니아가 답을 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리갈리 버도네의 마그네슘 부족 현상도 심해져 갔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은 니아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레몬…….”

“오! 혼동 마법 무력화의 달인 레몬 글로리아에 대해 이야기하려나 보군! 역시 내 애제…….”

“……파이?”

뜬금없는 답을 내뱉고 고개를 푹 숙인 것은, 정말로 니아의 머릿속에 레몬파이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버도네 교수님.”

레몬파이 뒤에 어떤 멋진 답이 나올까 기대하던 아리갈리 버도네의 입과 눈꼬리에 경련이 시작됐다.

“가, 감점 십 점.”

아리갈리 버도네는 마치 울음을 참는 사람처럼 입술을 바르르 떨고는 칠판 쪽을 향해 돌아섰다.

몇 번씩이나 좋은 학생과 나쁜 학생의 경계를 넘나드는 니아 프레슬리. 분노와 미움이 한데 모여 배신감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러나 교수의 권위가 있지, 이러한 모습을 학생들 앞에서 보일 순 없었다. 돌아선 그는 입을 앙다문 채 작게 기침을 내뱉었다. 이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있으면 니아 프레슬리도 반성이란 것을 할 거라 믿었다.

‘운이 지지리도 없지, 니아 프레슬리. 하필 버도네 교수에게 찍히다니.’

반면 그의 배신감 따위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니아 프레슬리는 그새 펜으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소해 보이는 버도네 교수의 등짝을 바라보면서.

‘감점 십 점을 채우려면 버도네 교수와 면담 신청, 그리고…… 그가 출판한 책들의 독후감 열 장. 벌써 눈앞이 깜깜하군.’

“도서관!”

니아 프레슬리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에 짐을 막 쑤셔 넣으며 외쳤다.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가 준 감점 십 점은 우선 밀어 둔 채로.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깨에 짐을 짊어지는 순간, 우당탕거리는 니아를 향해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아, 오늘은 집에서 나랑 검술 연습을 하기로 했잖아.”

니아 프레슬리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답하려다 멈칫했다. 지난주에 필릭스 쿠아란과 했던 약속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건…… 그녀의 요청으로 성립된 약속이었다.

‘생일 파티 제안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봐. 그걸 잊다니.’

이건 모두 지무트 아블란사 교수의 변덕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갑자기 그가 ‘검술 실습’이란 수행평가 과제를 내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학생이 무려 자기 수준에 맞는 검술 시범을 보여야 했다.

검술 시범. 그건 니아 프레슬리에게 그의 수업 석차 꼴찌를 도맡아 달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니아는 결코, 절대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필릭스 쿠아란에게 이를 악물고 도움을 요청했다. 다른 마음 없이 오직 순수한 학문적 목적으로.

“도련님,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무지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너무 긴급한 사안이라 오늘 말고 다른 날로 하면 안 될까요?”

“그게 무슨 일인데?”

말투가 꽤 딱딱했다.

‘어, 내가 실수했나? 약속을 마음대로 취소해서 화가 났을지도 몰라.’

약속을 파기하는 것에 대한 불쾌감인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필릭스 쿠아란이 미간을 점점 찌푸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 전자일 듯싶었다…….

니아는 도움받는 처지에 거절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며 목소리에 있는 힘껏 불쌍함을 담았다. 스스로 듣기에도 나쁘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상냥하게.

“방금 제 말투가 약속을 파기하는 주제에 조금 건방졌나요? 정말, 정말로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지금 다시 한번 잘 들어 보시면 제 목소리에 죄책감과 죄송함, 그리고 감사함을 가득 담은 것을 알게 되실 거예요. 제 마음 아시겠죠……?”

분명 이번에야말로 그의 분노가 조금쯤은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필릭스 쿠아란의 미간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표정이 더 심각해지는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약속 파기에 대한 벌로 영영 검술을 봐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검을 빌릴 곳도 없는데…….’

그런 불상사는 막아야 했다.

“설마 제가 한 번뿐인 기회를 날리고 있는 건 아니겠죠? 내일도, 모레도 있고 시범 당일까지는 날이 꽤 남았으니까…….”

니아가 말꼬리를 늘이며 필릭스의 옷소매를 잡았다. 아이처럼 해맑게 미소 지으며.

그런데 그녀가 소매를 잡자마자 그의 미간이 자동반사적으로 펴졌다. 니아는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답을 들어야 했기에 ‘네? 네? 괜찮죠?’ 하고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필릭스 쿠아란이 기계처럼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마치 니아가 ‘그만’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결코 고갯짓을 멈추지 않을 것처럼.

자세히 보니 그의 귀가 빨개져 있었다.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모르는 척 외쳤다.

“다행이네요! 그럼 전 이만…….”

“레몬파이와 관련된 일인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 프레슬리를 막아섰다.

앞길이 막혀 올려다보니 그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니아를 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본인이 어딘가 고장 나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의 눈동자는 꽤 예리했다.

“레몬파이요?”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은 니아 쪽이었다.

“종일 생각했지만 모르겠어. 레몬파이가 뭔지.”

둘 사이에 정적이 십 초 정도 흐른 뒤, 그제야 니아의 얼굴에서 물음표가 증발했다.

“……설마 제가 수업 시간에 말한 레몬파이요?”

필릭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니아에게 묻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니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론 또 웃기기도 했다. 그거 때문에 이렇게 심각하게 굴었단 말인가? 그녀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뭐, 전혀 상관없는 일은 아니네요. 하지만 레몬파이보다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예요. 금가루가 뿌려진 레몬파이랄까요.”

‘금가루? 그건 또 뭐야.’

“표현이 너무 비유적이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는 건 어때.”

필릭스가 또 한 번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니아 프레슬리의 고개가 점점 바닥으로 향했다. 심지어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놀리고 있는 건가?

눈을 더 가늘게 접은 그가 침묵 끝에 무심히 말했다.

“……괜찮다면 금가루를 뿌린 레몬파이를 선물하지.”

본인이 말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자포자기하듯 한 중얼거림에 니아 프레슬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잠깐, 잠깐만요. 뭐라고 하셨죠?”

“혹시 선물은 싫어? 그럼 선물 말고 오다 주운 것처럼 주고 가는 건 어때.”

뭔진 몰라도 아주 틀리진 않았구나 싶어 필릭스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동글동글한 미소가 광대 부근까지 번졌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작스러운 뿌듯함이 필릭스 쿠아란을 감쌌다. 레몬파이 때문에 고생한 오늘 하루가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니아가 큰 소리 나게 손뼉을 쳤다.

“선물!!”

그렇게 외친 니아 프레슬리는 갑작스레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도련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올 테니까요!”

그녀는 호다닥 뛰어가며 필릭스를 향해 외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가 듣지 못했을까 봐(결코 그럴 일은 없지만) 숨을 헐떡이며 한 번 더 소리쳤다.

“먼저 가시면 안 돼요! 갈 곳이 있으니까요!”

급한 마음을 몸이 따라 주지 않는지 니아는 필릭스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두어 번 몸을 삐끗했다. 그때마다 오뚝이 인형처럼 일어서긴 했지만 그녀의 걸음이 엉킬 때마다 필릭스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전개지?

더 웃긴 건 니아의 움직임에 따라 그의 몸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가 멈추며 삐그덕 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바보가 된 기분은 또 오랜만이었다. 마음과 몸을 동시에 가누지 못하는 것은.

니아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 그도 손이 움직였고, 니아가 다시 중심을 찾으면 그의 몸도 똑바로 자리를 찾았다. 멀리서 보면 참으로 웃긴 한 쌍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을 아주 갖고 노는구나, 니아 프레슬리.’

한숨을 내쉰 필릭스는 니아 프레슬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가장 중요한 말을 먼저 외쳤다.

“뛰지 마! 넘어지잖아!”

니아 프레슬리가 손을 흔들어 댔다.

“멀쩡해, 헉! 완전히 넘어질 뻔, 아니 멀쩡해요!”

필릭스는 이마를 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따듯한 봄바람도 막을 수 없는 깊은 한숨이었다.

“뭐 찾아?”

이쯤 되면 도서관 지박령이란 수식어가 전혀 위화감이 없는 시저 카르만이 니아를 향해 물었다.

물론 먼저 말을 건 것은 니아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상기된 얼굴로 도서관을 헤집고 다니는 사람을 봤다면 그게 누구라도 거슬리는 건 당연했으니까.

“시저 카르만! 잘 만났다.”

그러나 니아의 말에 시저 카르만은 스스로 함정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기보다 눈앞의 문제를 빨리 해치워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빨리 말해. 삼 초 안에 말하지 않으면 어떤 도움도 주지 않…….”

“에슬란 제국 파티의 역사, 귀족 영애들의 티파티, 사교 파티 등등. 파티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아, 생일 파티면 더 좋아.”

“……난 네가 어떤 과목을 공부하려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데.”

“어, 잘 몰라?”

“…….”

“이런. 시저 카르만 너도 공부는 꽤 하지만 교양이 있는 편은 아니구나.”

‘교오양……?’

지금 니아 프레슬리가 시저 카르만에게 교양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니아 프레슬리가? 시저 카르만에게? 진정?

“애초에 사교 파티나 귀족 영애들의 티파티 같은 건 내가 알 바가……!”

발끈한 시저를 다 안다는 눈빛으로 바라본 니아는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시저,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이래 봬도 내가 눈치가 꽤 있는 편이잖아.”

“네가 뭘 알고 있는데?”

질문을 던진 시저 카르만은 재빨리 목덜미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곧 돌아올 니아 프레슬리의 대답에 안정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네가 나 말고 친구가 없다는 것 말이야! 너랑 나는 상황이 꽤나 다르긴 하지만……. 네가 생일 파티에 초대된 적이 없었대도 나는 이해할 수 있어.”

“허어?”

니아는 자랑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는 듯 눈을 미친 듯이 깜빡거렸다.

시저의 심리 상태와, 지금 있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자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니아 프레슬리는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다.

“내가 생일 파티에 초대됐다는 말이야, 시저!”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니아 프레슬리의 장대한 대서사시가 시작되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카레나 비비고르가 오늘 본인에게 어떤 발걸음으로 걸어왔는지부터, 어떤 말투, 어떤 표정과 행동을 했는지, 그 외에도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세부사항까지 낱낱이 고했다.

종알종알 뱉는 그 말은 시저에게 세상 그보다 더 상세할 순 없었고, 동시에 그보다 더 무료할 수가 없었다.

“그만. 알았으니까 그만해, 제발.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아.”

그러나 시저 카르만의 제재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잠시 숨을 내쉴 시간을 얻은 니아 프레슬리가 더 탄력을 받아 종알거리는 계기를 주었을 뿐이다.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물론 나도 무척 얼떨떨하고, 실은 처음엔 카레나 아가씨가 잠시 실수를 하신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건 아까 두 번이나 이야기했잖아.”

“그랬나? 처음 하는 것 같은데.”

“그랬어. 분명히.”

“아무튼 중요한 건…… 내가 생일 파티에 초대되었다고!”

니아 프레슬리의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말끝마다 자신이 생일 파티에 초대된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알았어.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이제 제발 다음 얘기를 해 봐.”

시저 카르만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애원했다.

그제야 니아 프레슬리는 방긋 웃으며 그녀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시저는 니아 프레슬리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에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우선은 서론이 끝났다는 것에 기뻐해야 할지 혼란을 느끼며 책장에 몸을 기댔다.

“우선 책을 보고 공부를 할 생각이야.”

“……예를 들어?”

“어떤 선물이 적절한지, 그리고 지켜야 할 예절이 있거나, 꼭 숙지해야만 할 티파티 문화가 있다거나, 그런 거?”

“…….”

“혹시 노래도 연습해 가야 할까? 생일 축하 노래를 한 명씩 돌아가며 불러 주는 건 아니겠지? 가창에는 자신이 없는데.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담 없는 티파티’의 정의도 확실히 해 올게. 나만 믿어.”

니아 프레슬리가 어서 말을 끝내고 가 버렸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기에 시저는 잠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절대 싫어. 절대 알고 싶지 않아. 어차피 하하 호호, 그쪽 영지가 어떻고 우리 집 재산이 어떻고. 누가 누구랑 결혼했네 약혼을 했네, 이런 얘기나 하겠지. 딱 질색이야.”

“안 가 봤으면서. 아는 척은.”

니아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아니, 이 책은!”

니아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녀의 손에 잡힌 책을 바라봤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책의 이름은 <꼬마 숙녀들에게 가장 유용한 티파티 예절>이었다. 지금 니아에게 딱 필요한 책이 틀림없었다.

니아가 꺼낸 책을 환멸 어린 눈으로 바라본 시저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슴을 거칠게 들썩이며 호흡을 정돈했으나 쉽지는 않았다.

“그런 건 안 봐도 뻔하다고! 그런 파티의 역사나, 티파티 예절이나, 이런 거 보지 않아도…….”

시저는 속으로 ‘뻔하겠지? 뻔할 거야’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이런 시저, 시저 카르만. 우선은 내가 생일 파티 초대받는 법부터 알려 줘야겠구나.”

“…….”

“여기, 딱 널 위한 책이 있네.”

니아 프레슬리는 애처로운 눈빛과 함께 옆 책장에 꽂힌 <친구 사귀기, 어렵지 않아요!>를 내밀었다. 칠 세 표시가 커다랗게 그려진 유아용 도서였다.

“이, 이게 정말…….”

차마 니아 프레슬리를 칠 수는 없어서, 시저는 그녀가 내민 책을 멀리 쳐 내 버렸다. 온 우주의 분노를 담아서.

유아용 도서는 계단을 따라 힘없이 또르르 굴러갔다.

“절…….”

시저가 굳건한 목소리로 ‘절교’라는 단어를 뱉을 찰나였다.

“생일은 정말 특별한 거잖아.”

차분해진 목소리가 시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마치 타닥이며 타오르던 불에 냉수를 뿌린 듯 갑작스레.

시저 카르만은 손바닥 뒤집듯 바뀐 분위기에 잠시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뭐야, 저 표정.’

그리고 니아의 얼굴을 살핀 시저는 분위기상, 정말 어쩔 수 없이 절교 선언을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대신 니아의 말에 어울리는 대답을 찾기 위해 고뇌에 잠겼다.

약간의 고민 끝에 그는 가장 적당한 말을 건넸다.

“……생일이야 누구나 갖는 건데, 뭘.”

별 대단치도 않은 거라는 시저의 말에 니아 프레슬리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의 그 미소를 보니 왠지 긍정보다는 슬픔이 더 큰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시저 카르만은 순식간에 모든 분노가 완전히 증발해 버렸음을 인정했다. 모든 전투 의지를 상실한 채, 그는 물끄러미 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들뜬 기색과 걱정스러운 기색, 그리고 아픔을 숨기고 있는 듯한 눈동자까지.

‘흥분한 이유가 있었군.’

정확한 사정까지야 모르지만, 왜 니아 프레슬리가 그토록 기뻐하며 생일 파티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대충 예상이 갔다. 언젠가 니아 프레슬리가 고아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시저, 난 태어난 것을 축하받을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사람들한테서 선물도 받고, 따듯한 마음도 받고.”

“뭐. 난 귀찮기만 하던데. 특별할 것도 없어. 멋질 것도 없고. 지겹기만 하다.”

“지겨울 수도 있는 거구나.”

“아니, 지겨운 게 아니라…….”

특별할 것 없다는 퉁명스러운 말에 니아 프레슬리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수습을 하려는 시저 카르만을 니아 프레슬리가 가로막았다.

“팔십 먹은 할아버지 같은 시저 카르만. 그래, 너 잘났다. 어르신 생신에는 선물 같은 건 기대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아 둬!”

장난스럽게 말을 마친 니아 프레슬리는 어느새 발간 사과처럼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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