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난이도의 문제
니아가 산 총 스무 개의 펜던트에는 그녀가 만들어 낸 꽃들이 하나씩 들어가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직접 만들어 낸 꽃을, 잎을 하나씩 떼어서, 말리기까지 해 넣은 수제(?) 펜던트였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레오 한 명에서 시작해 시저 카르만, 에보니까지 세 명, 그리고 이제는 스무 명에게 펜던트를 선물하게 생긴 니아 프레슬리였다.
레오에게는 바비아나를, 에보니에게는 바이올렛을, 시저에게는 라그리스를. 그리고 남은 사람한테는 의미 없이 그냥 무작위로. 그렇게 꽃을 넣은 니아는 이게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나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한테도 줘야 하잖아.’
필릭스가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정말 선물을 주는지 안 주는지 감시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우선 가장 먼저 선물 주기를 시도한 것은 에보니 레인즈였다. 그녀는 예약된 스무 명 중, 가장 쉽게 선물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니아! 너무 예쁘잖아! 미쳤어, 미쳤어!”
에보니에게선 예상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녀는 펜던트를 열어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니아, 이건 또 뭐야? 보석 안에 더 예쁜 게 있잖아! 보라색 내 최애잖아, 너도 알지?”
그녀의 최애 색깔은 늘 바뀌는 걸로 알고 있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보라색이 그녀의 최고 애정을 받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꽃말도 있는데……. 들어 볼래? 네가 원한다면 얘기해 줄게.”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던 에보니가 큰 눈을 끔뻑거렸다. 긍정의 의미였다. 니아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여, 영원한, 우정…….”
말하고는 왠지 부끄러워졌는데, 에보니가 빠르게 니아를 덮쳐 왔다.
“에, 에보니?”
“니아! 어쩜 이렇게 예쁜 짓을 할 생각을 했어? 아이참. 정말 고마워!”
그녀에게 껴안음을 당한 채 니아는 슬쩍 미소 지었다. 선물 받은 것은 에보니인데, 왜 니아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땐 에보니한테 선물을 해야겠다.’
에보니가 들으면 기특해 죽을 다짐을 하게 되는 니아였다.
“저 에보니, 그런데 부탁이 하나 있어.”
니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에보니가 꽉 껴안았던 팔을 풀고 니아를 쳐다봤다.
“뭔데?”
“…….”
니아는 말없이 뒤편에 숨겨 뒀던 펜던트들을 한 무더기 꺼냈다.
“네가 나 대신 좀 나눠 줄래……?”
그리하여,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는 공작가 하인들에게 직접 펜던트를 나눠 주는 수고는 덜게 되었다.
“뭐, 릴리 아줌마? 나 그 아줌마랑 지난주에 대판 싸웠는데. 그 아줌마는 빼면 안 될까?”
물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기도 했지만 뭐, 나름 성공적이긴 했다. 어찌 되었건 총 열여섯 개의 펜던트를 해치웠으니.
이제 남은 문제는 네 개였다.
사실 레오야 나중에 주면 될 일이고, 시저 카르만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필릭스 앞에서 직접 주겠다고 말한 딕시 댁스터 교수와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가 아주 큰 문제였지.
“너 정말 나눠 줬더라?”
부엌에서 비스킷을 먹고 있던 니아를 향해 필릭스가 쿵쾅대며 걸어왔다. 얼른 자리를 피했는데, 어차피 소용없었다. 아카데미로 가는 마차 안에서 필릭스가 내내 앵무새처럼 떠들어 댔기 때문이다. 본인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삐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길리, 로건, 메이슨, 심지어 리암한테도 줬던데?”
‘어머. 리암은 에보니가 좋아하는 남자앤데. 귀여운 에보니. 얼마나 떨렸을까.’
“아, 맞아. 다이애나? 걔한테도 주셨더군? 물어보니까 일주일 전부터 일하기 시작했던데. 언제 친해진 거야, 도대체?”
니아는 그 여자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다.
필릭스는 하인들에게 선물을 받았는지 일일이 물어보고 다닌 걸까? 니아도 모르는 걸 그는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의문이 드는 건…….
“그 사람들이 다 제가 준 걸 알아요?”
니아가 묻자 필릭스는 별소리를 다 한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그럼 네가 줬다고 알지, 누가 줬다고 알아?
“아니, 전 모를 줄 알았죠…….”
니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충 나눠 주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에보니가 펜던트를 나눠 주면서 니아의 선물이라는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사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에보니가 하인들에게 펜던트를 전해 주는 내내 입을 있는 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물을 받은 사람들도, 받지 않은 사람들도 니아 프레슬리의 비단결 같은 마음에 감동을 하게 되었다.
“니아가 글쎄, 완치 턱을 냈지 뭐예요.”
니아는 맹세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완치 턱도 만약 낼 거라면 몇 달 전, 공작가를 떠나려 했을 때 냈어야 시기가 맞는데?
“그동안 병에 걸렸던 니아를 잘 보살펴 준 여러분께 정말 감사하다고.”
이때 하인들은 다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에 바빴다. 십 년간 병이 옮을까 봐 제대로 말 한번 해 본 사람이 없었다. 다들 누가 그렇게나 니아 프레슬리를 잘 보살폈던 건지 서로의 눈치만 봤다.
“애가 또 얼마나 마음이 고운지, 직접 꽃까지 넣어 놨지 뭐예요. 얼마나 예뻐요.”
갑작스러운 선물을 받은 하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는데, 마음씨가 착한 아이였군. 앞으로 잘해 줘야겠어. 중얼거리면서.
“우리 니아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하자면 너무 슬퍼요. 봐요, 벌써 눈물이 날 것 같잖아요…….”
에보니가 물기 하나 없는 눈을 바르르 떨었다.
“십 년간 아파서, 여러분과 가까워지고 싶은데도 다가갈 수가 없었대요. 늘 숨어서 지켜보고, 병이 옮을까 봐 늘 멀리서만 그렇게……!”
선물도 받지 않은 사람이 에보니의 말에 맞춰 살짝 코를 훔쳤다.
“낯을 좀 가려서 그렇지, 봐요, 좋은 애잖아요. 앞으로 잘해 주기예요?”
하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니아는 의도치 않은 동정 및 애정을 받게 되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은 까맣게 모른 채, 니아 프레슬리는 그저 잘 전달해 줬겠거니 추측할 뿐이었다.
이제 니아에게 남은 미션 1. 난이도는 중하였다. 하로 분류해도 되지만, 왠지 오글거리는 바람에 난이도를 중하로 올렸다. 미션 내용은 시저 카르만에게 선물하기.
니아 프레슬리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어, 뭐가 떨어졌네?”
그녀는 부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히는 척하다가 손에 펜던트를 쥐고 일어섰다. 하지만 시저 카르만이 그녀 쪽을 쳐다도 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난이도를 중하에서 중으로 올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 뭐가 떨어졌다니까?”
“…….”
“어, 뭐가 떨…….”
“뭐, 뭐. 뭐가 떨어졌는데? 또 귀찮게 굴래?”
시저 카르만이 신경질적으로 니아 프레슬리를 바라보았다. 니아는 펜던트 부분으로 시저의 머리를 한 대 쳐 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애써 웃음 지었다.
“이거. 이게 떨어져 있었어. 네가 가지면 되겠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걸? 내가 그걸 왜.”
“그거야…….”
“내가 너도 아니고. 주인이나 찾아 줘라.”
평소에는 그렇게나 빠르던 눈치가 본인과 관련해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는 시저 카르만을 향해 니아는 속으로 분통을 삼켰다. 그냥 적당히 줄 때 받으면 좋을 텐데?
“그냥 네가 가져도 돼. 그냥 가져.”
그녀의 말에 시저 카르만은 특유의 무시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딴 거 너나 가져. 세균 덩어리일 거다. 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알아? 넌 하녀가 그것도 몰라.”
니아는 난이도를 중상으로 조절했다. 시저 카르만, 네가 순순히 받을 기회는 이제 딱 한 번밖에 남지 않았다…….
“잘 봐 봐. ‘바닥에 떨어진 더러운 거’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비싸 보이지 않아? 이게 얼마짜리 같아? 유서 있는 골동품 가게에서 비싸게 사 온 그런 것 같지 않니?”
시저 카르만이 니아가 들고 있는 펜던트를 힐끔 보더니 답했다.
“줘도 안 가지게 생겼는데. 딱 봐도 가짜잖아. 자꾸 시끄럽게 할 거면 그냥 내가 버려 줄 테니까 나한테…….”
“너 주려고 샀다!”
니아가 그의 손에 내팽개치듯 펜던트를 던졌다. 그리고 얼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저 카르만을 뒤로하고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시저 카르만을 향해 외쳤다.
“가짜 아니야! 비싼 거야!”
시저 카르만이 벙찌는 건 정말 희귀한 일인데, 오늘은 대놓고 벙찐 시저 카르만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펜던트를 한 손에 든 채 입을 벌리고는, 멀어져 가는 니아를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렵사리 미션 1번을 클리어 한 니아는 이제 난이도 상, 미션 2번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겨우 용기 내었지만, 난이도 상답게 딕시 댁스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건 그냥, 제자로서 감사의 마음에…….”
딕시 댁스터의 단호박 같은 말에 니아 프레슬리는 식은 치즈처럼 쭈그러들어 갔다. 반면에, 옆에서 그런 니아를 바라보고 있는 필릭스 쿠아란은 어쩐지 기세등등해 보였다.
“난 학생에게서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아. 게다가 이런, 의도가 다분하게 보이는 것은 더더욱.”
“의도요……?”
정말 몰라 물어봤다. 그러자 딕시 댁스터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청탁성 뇌물 말일세.”
그녀의 입에서는 니아의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나왔다. 청탁성 뇌물이라니, 청탁성 뇌물이라니!
“저, 교수님 그게 아니라, 이건 정말 순수한 그런…….”
딕시 댁스터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자리를 떴다. 한마디 말을 남기고서.
“진심으로 실망이군.”
떠나는 딕시 댁스터의 뒷모습을 애처로이 바라보며, 니아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바닥에 풀썩 넘어졌다.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그 옆에선 당연하게도, 그런 니아 프레슬리를 신나게 놀리는 남자 한 명이 존재했다.
“내가 뭐랬어. 아카데미 법 위반이라니까. 그러니까 나 주라고 할 때 주면 좋았잖아?”
“…….”
“학생이 교수한테 뇌물을 준다는 게 애초에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니아가 필릭스를 휙 째려봤다. 저 얄미운 입……!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다 그쪽 때문이잖아!’
애초에 니아가 딱 알맞게 펜던트를 샀으면 되는 일이지만. 어찌 됐건 본인 탓은 하기 싫은 관계로 화살은 필릭스에게로 날아갔다. 그에게 목걸이 하나 주지 않으려고 한 일이 이렇게나 커져 버렸다.
‘실망이라는 말을 듣다니. 그건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말인데.’
“목걸이 하나가 남게 됐네. 니아, 그건 누구 줄 거야?”
저 기대하는 목소리에 부응하기 싫어서라도 니아는 줄 수 없었다.
“제, 제가 하면 돼요. 잘됐네요. 저도 하나쯤은 가져 보고 싶었는데.”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며, 필릭스는 어쩐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자기 달라고 땡깡 부려야 정상인데. 뭐지?’
그 이유는 그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난이도 극상의 미션 3번,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였다.
“세상에나, 이걸 나에게 주겠다고!!”
시작부터 요란한 그는 역시 명실상부 입 털기 좋아하는 아리갈리 버도네였다.
“네!”
니아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난이도 극상을 예상했지만, 의외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서 빨리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이 극심한 에너지 소모를 이제는 끝내고 싶었다!
“이게 뭔가!”
“펜던트입니다, 교수님!”
희망에 찬 니아가 밝게 대답했다. 여전히 씩 미소 짓고 있는 필릭스 쿠아란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걸 나한테 준다고! 비싸 보이는데!”
니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비싼 거야. 당신한테 주는 게 너무 아까울 만큼 비싸!
“세상에나, 이런 제자가 있나! 자네, 다시 봤구먼!”
‘됐다……!’
회심의 미소를 짓는 니아 프레슬리에게 아리갈리 버도네가 입 모터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래, 나를 존경하는 제자들이 꽤나 많지! 자네도 그중 한 명이고!”
“……네!”
“이 펜던트를 보니 이십 년 전, 그 제자가 떠오르는구먼…….”
이쯤에서 니아 프레슬리는 도망갔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피아나 오질릿, 자네처럼 평민 피후견인이었지. 노래를 아주 잘하는 제자였어. 얼마나 잘했는지, 내 수업에 조는 학생은 거의 없지만, 뭐 아예 없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조금쯤 지루한 날이 한 번쯤은, 가뭄에 콩 나듯 있는 법이니까. 그럴 땐 그 제자에게 노래를 시키곤 했는데, 노래를 할 때면 새가 지저귀고 나뭇잎이 춤을 추는…….”
시간이 계속해서, 아주 천천히, 고래 배 속을 탐험하는 새우처럼 끝도 없이 흘러갔다.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지? 내 열두 번째 제자 에반 그레이에 대해 이야기했던가?”
“…….”
“아, 펜던트에 엮인 내 증조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꼭 해 주고 싶은데 말이야, 흠흠! 일단은 스무 번째 제자까지 말해 주고 증조할머니 얘기를 해 주는 걸로 하지. 참고로, 놀라지 말게나. 자네는 무려 내 이백스물두 번째 제자일세! 흠흠! 이가 세 번이나 들어가는구먼! 자네는 행운아야, 행운아!”
니아가 주는 선물 같은 것은 받기 싫다는 말을 빙빙, 스무 번째 제자에서 그의 증조할머니까지 언급하며 돌려서 말하고 있는 걸까? 니아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걸까?
니아 프레슬리는 이제 더 이상 가식적인 웃음을 짓고 있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굳어 버린 입꼬리는 경련하고 있기에…….
“니아, 내가 좀 도와줄까?”
그리고 마찬가지로 니아가 넋이 나갈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던 필릭스가 은근슬쩍 다가와 물었다.
“그러실래요?”
이미 많이 지쳐 있던 니아가 힘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필릭스가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는데.
“버도네 교수님.”
그가 잽싸게 아리갈리 버도네의 말을 끊었다.
“……응? 아, 필릭스! 자네도 있었나? 잘됐네. 자네는 내가 아끼는 이백 번째 제자인데 말이야. 물론 이 순번은 그냥 내가 정한 순서니 마음 쓰지 말게. 애정의 척도는 모두 똑같아!”
“예, 교수님. 그런데 혹시 제주스 펜텀 교수님을 기억하십니까?”
필릭스의 말에 신이 나 있던 아리갈리 버도네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 알다마다……. 그 친구…… 아주 유능한 친구였지.”
필릭스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미소였다.
“어떻게 아카데미를 그만두셨는지도 잘 아시겠네요?”
“뭐, 어떻게 그만뒀더라. 기억이 잘…….”
증조할머니의 펜던트에 엮인 추억까지도 기억하는 사람이 갑자기 건망증에 걸린 듯 굴기 시작했다.
“모르신다니 알려 드려야겠군요. 아카데미 법 8조 위반. 학생에게 뇌물 청탁을 받은 혐의로 싹 잘리셨습니다. 요새는 변두리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군요. 전직 생명술 교수님답죠?”
“그 친구…… 흠, 흠. 자연 친화적으로 살고 있구먼. 난 몰랐지…….”
“누가 고발한 줄 아십니까?”
“응?”
그 사람은 무조건 피하고 볼 생각으로 아리갈리 버도네가 빠르게 반응했다.
“바로 교수님의 이백 번째 제자입니다.”
필릭스의 말에 아리갈리 버도네는 흰자가 보일 정도로 크게 눈을 뒤집어 깠다.
“뭐! 내 이백 번째 제자라면…… 누구냐, 그 누구…… 헉!”
“예, 제가 고발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보낸 교수가 한둘이 아닙니다, 교수님. 아, 물론 제가 아직까지 교수님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말이죠, 교수님.”
“으악! 가져, 가져가게! 나는 그냥 대화를 하고 싶었던 거지 이런, 이런 몹쓸 것을 받으려고 했던 게 아니야. 그냥 나는 단지……!”
“역시나 그러셨군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님. 그럼 저흰 이만.”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는 충격에 빠져 도망쳤고, 그렇게 펜던트는 한 개 더 남게 되었다.
“이제 내 거지?”
당돌하게 물어 오는 필릭스 쿠아란과 함께 말이다.
“……아니요? 당연히 아니죠!”
“또 누굴 줄 건데? 이제 줄 사람 없는 거 알아. 포기하자, 니아 프레슬리.”
정곡을 찔린 니아 프레슬리가 차마 펜던트를 순순히 주지는 못하고 씩씩댔다. 억울하고 분했다.
“나 줘. 목에 걸어 주면 더 좋고.”
필릭스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결국 이렇게 돼 버릴 거라면 도대체 니아는 왜 그 고생을 하며 그 많은 사람들에게 펜던트를……!
“…….”
니아는 결국 부들대며 필릭스에게 펜던트를 내밀었다. 거북이처럼 천천히 주려는데, 필릭스가 마저 손을 뻗기도 전에 낚아채 갔다.
“고마워. 잘 쓸게.”
“다른 의미는 없는 거예요. 알겠죠?”
필릭스 쿠아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니아가 줬다는 것에서 의미가 생겼는데 다른 의미가 없을 리가. 그는 이미 완벽한 의미 부여를 끝낸 차였다.
니아 프레슬리는 이것을 선물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필릭스 쿠아란에게는 이 펜던트야말로 선물이었다.
어깨를 들썩이고 대답은 하지 않은 그가 펜던트를 열었다.
“꽃까지 넣었네……. 아주 지극정성이야. 네가 이렇게 주위 사람들을 잘 챙기는 줄 몰랐어.”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니아에게는 그의 말이 은근히 비꼬는 것으로 들렸다. 원래 찔릴 것이 많은 사람이 더 발끈하는 법이니까?
그녀도 결코 질 수 없어 한마디 쏘아 주려던 찰나, 필릭스가 눈앞에 펜던트를 내밀었다.
“이건 무슨 꽃이야?”
“안개꽃이네요. 음, 내가 안개꽃도 넣었던가……?”
순간 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제 거랑 바꿔요.”
그녀가 필릭스의 펜던트 쪽으로 손을 뻗자 그가 뒤로 손을 확 뺐다. 세상에서 가장 치사한 것이 바로 줬다 뺏는 건데.
“니아 프레슬리, 치사한 면도 있었어?”
“그게 아니고, 바꾸자는 거예요.”
니아는 툴툴대면서도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표정 역시 더없이 진지했기에 필릭스도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러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얼마나 단호한지, 그는 곧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
니아는 결국 필릭스의 손에서 펜던트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들고 있던 자신의 펜던트를 건넸다.
“거짓말 안 한다니까요.”
필릭스는 니아가 다시 준 펜던트를 누가 가져가기라도 할세라 재빨리 낚아챘다. 그러고는 바꾼 펜던트를 들여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응, 그렇네.“
니아는 필릭스가 실실거리는 것을 힐끔 쳐다보다 마지막엔 미련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왜 바꾸는지 진짜 말 안 해 줄 거야?”
필릭스가 그런 그녀 뒤를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전과 달리 질문하는 목소리가 경쾌했다. 깜짝 선물에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소년처럼.
“또 대답 안 하지, 니아 프레슬리.”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분명 내일도. 그는 니아 프레슬리에게 궁금한 게 참 많기도 많은 모양이었다. 니아는 종종걸음으로 달리듯 걸었다.
수업이 끝난 뒤라 긴 복도에는 어느덧 그와 니아뿐이었다. 밝은 햇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번쩍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두 명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섰다.
‘눈부셔.’
치맛자락을 흩날리며 걷던 니아는 예고 한마디 없이 멈췄다. 커다란 창문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 그제야 니아 프레슬리는 그녀가 지나온 복도가 태양 덕에 은빛 호수처럼 빛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안 그럴 것 같으면서도 조그만 것에 집착하는 필릭스를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귀족 도련님께서는 의외로 장난에 면역이 부족할 때가 종종 있었다.
니아가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필릭스에게 다가섰다.
“정말 궁금하세요?”
“응.”
“정말로……?”
“응, 응.”
필릭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순진해 보여 니아는 소리 내어 웃을 뻔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게까지 나오신다면 어쩔 수가 없네요. 말씀드릴게요.”
“…….”
“그건…….”
“…….”
필릭스가 허리를 굽히고 니아에게로 귀를 가까이 갖다 대었다. 니아가 진지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귀에다 대고 입을 열었다. 필릭스 쿠아란의 귀에 간질간질한 봄바람이 일었다.
“비밀!!”
혼자 말하고 큭큭 대던 니아는 순간 필릭스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필릭스 쿠아란이 얼굴을 붉힌 채 거세게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너무 놀렸나?’
하지만 뛰다가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니아는 커다랗게 입을 벌렸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필릭스는 여전히 뚱한, 못마땅한 표정으로, 달리는 니아의 뒤를 성큼성큼 따라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며칠 뒤, 아카데미에 가지 않는 날.
믿을 수 없게도 니아 프레슬리는 공작가 정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손에 장갑을 끼고, 앞치마를 두르고, 장화까지 신은 채였다. 이 복장은 설마?
“니아, 그쪽 흙을 조금만 파 봐.”
그리고 마찬가지로,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흙을 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 공작가 외동아들이었다. 특징으로는 뛰어난 외모, 큰 키, 특출 난 검술 실력. 그리고 특이사항은 니아 프레슬리 짝사랑 중, 이 정도였다.
‘내가 왜…….’
“니아, 해지기 전에 마무리해야 된단 말이야. 저길 봐.”
필릭스가 땀을 닦으며 오른쪽을 가리켰다. 그가 손짓한 곳에는 한 무더기의 씨앗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걸 제가 왜…….”
니아의 말에 필릭스가 삽을 땅에 팍 꽂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너랑 같이 씨앗을 심을 거야.”
“……왜요?”
“내가 모를 줄 알았지?”
필릭스가 은근히 말해 오자, 니아가 눈을 크게 떴다.
“너 나랑 목걸이 바꾼 거.”
“…….”
그런 거에는 눈치가 없는 줄 알았더니, 의외였다. 꽃말 같은 것에는 아예 관심도 없는 줄…….
‘안개꽃 꽃말이 죽음이라는 걸 알았나?’
사실 펜던트 안에 어떤 꽃이 들어 있건, 그 꽃이 어떤 꽃말을 가졌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가져야 한다면 니아 쪽이 그 펜던트를 갖는 게 나았기에…….
‘나는 죽지 않으니까.’
죽음 따위 의미 없는 쪽이 갖는 것이 좋을 테니까.
“그래요, 혹시라도 다치면…….”
“사랑의 성공.”
애써 변명거리를 만들고 있는 니아에게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예?”
“사랑의 성공. 찾아봤거든. 네가 왜 펜던트를 바꾸자고 했을까 고민하다가 알아냈지. 길리에게 물어보니 안개꽃의 꽃말은 사랑의 성공이더군. 내 말이 맞지?”
니아는 맹세코 안개꽃에 그런 꽃말이 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정말요?”
“그래. 알면서 뭘 물어.”
“방금 도련님이 만들어 낸 거 아니죠?”
진심으로 놀란 니아를 보며 필릭스는 놀란 척 연기하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걸로 상처받지 않으니 그만해도 돼.”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는 진짜로…….”
“하지만 그냥 넘어갈 수도 없지. 그래서 너랑 심으려고.”
“세상에…….”
“안개꽃 씨앗 말이야.”
그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아낸 이상, 그의 장단에 맞춰 줄 수는 없었다. 사랑의 성공 따위를 같이 심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야. 저 안 할래요.”
장갑을 벗어 던지려는 니아를 필릭스가 막아섰다.
“안 하기는. 이제 씨앗만 심으면 되는데.”
손이 잡히자 장화라도 벗어 보려고 발을 움직이는 니아를 향해 필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까 봐 심은 다음에 얘기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나오면 곤란해. 여기서 멈추면 어쩌게? 내 집 정원을 영원히 땅굴로 만들어 놓을 셈인가?”
그가 땅에 요란하게 파 놓은 구멍들을 향해 눈짓했다.
“정원사 아저씨 부르시면 되잖아요. 저보다 훨씬 더 잘하실 텐데요!”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너랑 심는 게 아닌데.”
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마법사들 불러서 정원을 꾸미시든가 하세요. 전 들어갈게요…….”
빤히 쳐다보는 필릭스의 시선에 니아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아버지는 마법을 좋아하지 않으셔. 나도 마찬가지고. 너도 알잖아.”
“…….”
“난 자연스러운 게 좋아. 마법 같은 거 없이. 마법은 종종 순간을 놓치게 하거든.”
“순간을 놓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니아의 물음에 필릭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생명술로 정원을 일 년 내내 봄처럼, 때론 여름처럼 아름답게 만들 수 있겠지. 가을의 풍요를 느끼게 만들 수도 있고……. 하지만 겨울은?”
니아는 의외로 진지한 그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앙상하기만 하고 볼품없잖아요. 그게 나쁜 건가요?”
“나쁘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아. 일 년 내내 봄이라면, 나는 겨울의 기억을 언제 추억할 수 있지?”
“…….”
“이 꽃을 마법으로 키워 바로 네 눈앞에 보여 주는 것보다, 함께 심은 뒤 기다리는 게 중요해. 차가운 겨울을 견디며 기대하고, 기다리고. 그 후에 꽃이 피어나면 그건 마법으로 만들어 낸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기쁨일 거다.”
“…….”
무언가 철학적인 그의 말에 니아가 천천히 곱씹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느낌이 좀 달랐다.
니아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 필릭스의 진지했던 표정이 어색하게 변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씨앗을 심어 볼래, 니아 프레슬리?”
“…….”
“너와 함께 나의 미래를 꽃 치우고, 아니 꽃피우고 싶어…….”
그가 말을 버벅거렸지만, 니아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손을 다정히 맞잡으세요.”
“……네?”
니아가 눈을 치켜떴다.
“아니, 이건 실수.”
뭐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해 올려다본 필릭스의 시선은, 어쩐지 니아를 비껴가 있었다. 그의 눈은 저 먼 허공에 고정된 채였다.
“다정한 눈길로, 도련님은 니아를 쳐다보…… 아니야, 이것도 실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죠, 방금?”
니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국어책 읽듯 어색한 필릭스의 말에,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녀라도 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 돼!”
니아가 입술을 앙다물고 열심히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필릭스가 재빨리 그녀의 양 볼을 잡아 고정시켰다. 니아는 볼에서 느껴지는 축축하고 까슬까슬한 감각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건, 설마.
“어, 미안해…….”
“…….”
“장갑 끼고 있는 걸 깜빡했어…….”
이미 양 볼이 흙투성이가 된 니아의 얼굴을 보며 필릭스가 당황해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니아의 화난 얼굴은 덤이었다.
“진짜…….”
니아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왜 요즘 필릭스와 있으면 자꾸 일이 꼬이기만 하지? 이 나이 먹고 얼굴에 흙을 묻혀야 하나? 다섯 살 먹은 레오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딱 대세요.”
“니아, 미안해. 실수잖아. 실수를 실수로 받아들여야지 똑같이 해서야 쓰겠어?”
필릭스의 진지한 애원에도 니아는 흔들림이 없었다.
“됐고, 대세요.”
필릭스가 눈을 반으로 접어 있는 힘껏 웃어 봤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얼굴을 니아에게로 가져다 댔고, 니아 프레슬리는 흙 묻은 장갑으로 그의 얼굴을 열심히 문질렀다. 양쪽 볼에 사정없이 흙을 묻히고, 그것으로도 성이 안 차 이마에도 있는 대로 흙을 펴 발랐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뒤에서 지켜보던 공작가 하인 일동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종이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대사만 읽으시라니까. 지문을 읽으셨지, 분명히?”
“예. 괄호 쳐 놨는데도 읽으시던데요. 보셨죠? ‘손을 다정히 맞잡으세요’라고 직접 말씀하시는 거.”
“아휴, 저래서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나. 니아 쟤도 참. 그렇다고 도련님 얼굴에 똑같이 흙을 묻히면 어째. 저러다 경을 치지.”
공작가 하인들은 최근 모든 일을 알게 되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준 목걸이를 돈과 바꿔 주겠다며 대놓고 제안하는 그들의 도련님을 보고 나서 말이다.
공작가 전체에 소문이 쫙 돌았다. 글쎄, 도련님이 니아 프레슬리를 짝사랑하신대!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그 도련님의 협박을 받게 되었는데, 결국 꼼짝없이 필릭스 쿠아란의 연애사업을 돕게 되었다.
“……참 별짓들을 다 하시는군요.”
뒤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집사 길리 포바즈는 열외였지만.
하지만 그들이 아예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전의를 상실한 필릭스를 두고 돌아서는 니아에게로 우르르 달려가 두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주었던 것이다.
니아 프레슬리가 정원에서 벗어날 새도 없이, 그들은 다 함께 손을 걷어붙이고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당황한 니아가 벗어나려 할 때마다 번갈아 가며 그녀를 막아서고는 씨앗 심기를 종용했다는…….
어찌 되었건, 필릭스의 계획은 얼떨결에 성공하고 말았다. 약간의 실수는 있었지만 그 정도야 뭐. 그 스스로 이불 차기밖에 더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