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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선물 (22/75)

7. 선물

며칠이 지났을까.

수업이 모두 끝난 후 역시나 자신을 따라오겠다는 필릭스를 향해 니아는, 따라오면 오늘 공작가에 들어가지 않겠다 엄포를 놓았다.

물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필릭스 쿠아란에게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니아, 그냥 멀리서 따라가기만 할게. 그건 어때?”

필릭스가 짐짓 괜찮은 생각이라는 듯 물었다.

“따라오면 진짜 화낼 거예요. 절대로 따라오지 말아요.”

니아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필릭스는 입술을 물고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 사이로 필릭스가 어떤 핑계를 대며 니아를 따라올지 고민하는 게 보였다. 그는 가끔씩 이렇게 니아 앞에서 속이 훤히 다 보이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다. 아이처럼.

‘따라오기만 해 봐. 내가 아주…….’

“몰래 따라가는 건?”

필릭스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렸다. 쩔쩔매는 모습이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반대로 묘하게 동정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도대체 이 나라에서 누가 그를 동정씩이나 할 수 있다고.

‘이러니까 그런 소문이 나지.’

필릭스가 니아만 보면 안절부절못하며 길 잃은 강아지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니, 사람들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이제 아카데미에는 그 대단한 필릭스가 사랑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람들은 필릭스와 니아의 눈치를 동시에 보았다. 게다가 필릭스의 추종자들은 질투 어린 눈빛을 니아에게 보내곤 했는데, 그 눈빛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심지어 니아에게는 마치 팬레터처럼 예쁜 편지지가 오곤 했는데, 그 내용은 너무 유치하고도 짜증 나 눈살이 찡그러질 정도였다.

‘네까짓 게 도대체 뭔데.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넌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 밤길 조심해……’ 등등.

니아는 왠지 할로나의 취향을 빼다 박은 화려한 편지지를 보며 아주 잠깐, 잠시 그녀를 의심했지만 할로나가 니아가 받은 편지(협박편지)를 보고 니아보다 훨씬 더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여 바로 반성한 적도 있었다.

‘공작가 하녀가 대놓고 필릭스를 피하던데?’

게다가 감히 필릭스 쿠아란의 구애를 공작가 하녀 주제에 거절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니아는 남들이 보기에 자신이 얼마나 황당한 사람일지를 생각하면 또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절대 따라오지 마세요. 몰래 따라오면 진짜 화내요. 공작가에 가서 에보니한테 물어볼 겁니다. 도련님이 집에 바로 들어왔는지 아닌지.”

“오늘 너무 박하네.”

“저는 원래 냉정해요.”

니아는 팔짱을 끼고 필릭스가 돌아서는 모습을 기다렸다.

필릭스가 거북이처럼 마차로 향하다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지?”

“만나러 가면요?”

“못 가게 해야지.”

필릭스 쿠아란이 강아지 같던 태도를 모두 지우고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니아는 움찔했다.

별다른 답 없이 시간이 흘러가자 그는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왜 대답을 안 하지?”

서늘한 모습인데도 니아는 왠지 그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발칙한 생각을 했다. 그녀의 주먹으로는 간지럽지도 않을 것 같지만.

대신 니아는 손을 크게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니까, 가요!”

‘나도 레오를 못 본 지 한참 지났구먼. 레오는 금방 온다면서 오지도 않고……. 나도 보고 싶은데.’

니아의 말에 필릭스는 겨우 다시 몸을 돌려 마차로 향했다.

니아는 기어코 마차가 떠나는 것까지 바라보다 레오 아리데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잠깐을 못 올까. 걔가 펠링턴의 백작가에 산다는 것 빼고는 난 아는 것도 없구나…….’

감감무소식인 레오가 걱정되는 니아였다.

원래대로라면 레오만을 애타게 기다렸을 니아였을 텐데. 어쩌면 참지 못하고 펠링턴으로 가 그를 직접 찾았을지도 모른다. 십 년간 레오를 그리워하는 것이 니아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즘 니아의 머릿속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실은 그 때문에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과 이십사 시간을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스스로에게 변명해 보아도, 니아는 레오에게 미안했다. 예전처럼 니아의 온 세상이 레오로만 가득 차 있지 않아서.

하지만 십 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레오에게도 레오의 세상이 존재할 테고…….

니아는 그래서 레오가 그저 위험한 일을 하지 않고, 다치지 않고, 늦더라도 안전하게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나 열심히 살면서 너를 기다리고 있어. 빨리 와, 레오. 많이 그립다.’

니아는 아카데미의 하얀 망토를 벗었다. 그리고 따로 준비한 검은 망토를 몸에 둘렀다. 준비 끝.

“후, 한번 가 볼까.”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얼마나 역사적이냐면, 니아 프레슬리가, 처음으로, 그것도 혼자서 시장에 가는 그런 어마어마한 날이었다.

‘나 용기 냈어. 할 수 있어!’

니아 프레슬리는 열의를 불태웠다. 굳세게 마음을 먹었다. 과거의 그녀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지만, 현재의 니아 프레슬리는 과거의 니아 프레슬리와는 다른 사람이니까.

그녀는 미소 지으며, 시장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아가씨! 미래가 궁금하지 않소?”

아카데미복은 망토에 가려졌고, 눈에 띌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한 남자가 니아의 팔목을 잡았다. 좁은 골목을 지날 때였다.

“만지지 마세요!”

니아가 단호하게 소리를 지르자 남자가 놀라 손을 떼었다.

“아이고, 이거 실례했구먼.”

“……아셨으면 됐어요.”

큼, 큼! 기침 소리를 내던 남자가 주머니 속에서 수정구슬을 꺼내 니아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었다.

“내 특별히 더 싸게 봐 드리리라. 부탁할게. 우리 마녀 아가씨가 미래를 아주 잘 본다오. 이 시장 바닥에 소문이 자자하지.”

‘미래?’

니아는 슬쩍 남자의 수정 구슬을 보았다. 색이 오묘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 미래를 보는 건가요?”

니아가 흥미를 보이자 남자는 옳다구나, 신이 나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거야 당연히 우리 마녀 아가씨의 신비한 재능으로 보는 거지. 가까운 미래부터 먼 미래까지. 중요한 정보일수록 요거, 요건 조금 나가지만.”

그가 은근히 손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니아는 ‘합리적인 가격 측정이군’ 생각하며 물었다.

“어떤 학문을 기반으로 하는 건가요? 천문학? 점성술? 아시다시피 천문학은 개개인의 미래까지는 볼 수 없잖아요. 나라의 대경사나 천재지변을 보는 데나 유용하죠. 하지만 점성술도…… 음, 사백 년 전에는 꽤나 유행했다 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어 효용이 없는 학문으로 지정되었다 알고 있는데요.”

“…….”

남자는 조금은 창백해진 얼굴로 순진한 표정의 니아 프레슬리를 바라봤다.

“그, 그건…… 그러니까……. 보인다, 보여! 요즘 걱정거리가 많구먼! 어두워, 어두워! 뭔가가 아가씨를 힘들게 만들고 있어!”

그의 말에 니아가 소름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 그거 어떻게 아셨어요?”

남자도 니아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얜? 왜 또 이렇게 반응이 좋아.

“그거야, 그거야 뭐 신비한 능력…….”

“마법인가요!”

또다시 니아가 질문을 할 것 같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천문학도, 점성술도, 마법도 아니랍니다.”

빨간색 베일을 여러 겹 둘러 얼굴을 가린 여자가 니아에게로 다가왔다. 니아는 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노랫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럼 무슨…….”

“일단 들어와 봐요. 돈은 받지 않을 테니. 내가 아가씨의 미래를 봐 주겠어요.”

‘이런 행운이!’

니아 프레슬리가 뜻밖에 마주한 행운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종종걸음으로 여자를 따라갔다.

“내가 아주 재미있는 분을 만났네요?”

여자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순간 니아는 그녀가 자신의 비밀까지 다 알아채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말에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난 연애 전문이랍니다. 당신을 꿰뚫어 보지는 않아요. 그냥 사소한 이야기나 하는 거죠.”

마치 니아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안심하라는 듯 이야기하는 여자였다.

“와! 어떻게 미래를 보시는 거예요? 저는 그런 건 배워 본 적이 없거든요. 천문학은 조금 알지만……. 저도 알려 주시면 안 돼요?”

니아의 말에 여자가 그녀의 손등을 잽싸게 찰싹 쳤다.

“……영업 비밀이에요! 생각해 봐요, 아가씨. 내가 아가씨에게 말해서, 아가씨가 내 가게 옆에 돗자리라도 깔고 내 손님들을 다 뺏어 가면 어떡하겠어요? 난 아주 피눈물이 날 거예요. 그렇죠?”

니아는 일리 있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 제가 실례했네요. 죄송해요.”

“이번 한 번만 봐줄게요. 자, 나를 봐요. 나를 아주 집중해서 바라보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니아는 눈이 아플 정도로 여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참 뜸을 들이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런, 당신은…….”

니아 프레슬리는 움직이는 여자의 입술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당신은 아주 재미있는 일을 많이 겪었네요?”

“네?”

“앞으로도 많이 겪겠고.”

“재밌는 일은 글쎄요. 딱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니아에게 여자가 장난스레 말했다.

“내가 보기엔 아주 재미있는데요?”

“…….”

“반가운 분이니 더 봐 드려야겠네.”

“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여자는 정말로 즐겁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니아는 그녀가 왜 그러는지 도통 알 수 없어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녀가 웃음을 멈추고 헛기침을 할 때까지 니아는 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당신은 때때로 스스로를 속이기도 하는군요.”

“……제가요?”

“그럼요. 내 앞에 있는 바로 당신이요.”

“그런 적은 없는데요……?”

“아니에요. 잘 생각해 봐요. 분명 그럴 거예요. 내 눈은 아주 정확하니까.”

“이해가 잘 안 되는걸요. 죄송해요. 좀 쉽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니아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간단히 생각해요. 본인의 마음에 집중하면 되잖아요.”

니아는 역시나 그녀의 말이 이해가 안 가 눈을 끔뻑거렸다.

“또……. 때로는 멀리 보는 법도 필요합니다.”

“멀리 보는 법이요? 아, 책을 너무 가까이 두고 읽어서…….”

여자가 한 번 더 니아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내가 안경사인 줄 알아요? 나는 책을 멀리 보라는 그런 허접한 조언은 하지 않는답니다.”

“……죄송해요.”

니아는 영문도 모르고 두 번이나 맞은 자신의 손을 쓰다듬었다.

“너무 작은 것에 집중하지 말라는, 뭐 그런 거였어요.”

“…….”

“당신은 아주 대단한 사람이니, 작은 일들이 감히 당신의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해요. 제일 중요한 건 당신의 마음이랍니다.”

“…….”

“이상 미래 보기 끝!”

“네?”

니아가 놀라 되물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말만 하다 끝이라니?

“혹시 돈을 안 내서 그러세요? 낼 테니 조금 더 자세히 봐 주세요.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저 내일 방어술 시험 보는데, 시험 점수 같은 거?”

“그딴 건 안 봐요.”

여자는 이제 꺼지라는 뜻으로 손을 훠이훠이 저어 보였다.

‘뭐야. 내가 궁금한 건 하나도 안 알려 줘 놓고서는.’

“……실망인데요.”

니아의 말에 여자가 흠칫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쉬더니 일어서는 니아의 등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알겠어요.”

“네?”

“한 가지 더 얘기해 줄게요.”

“오, 뭐를요?”

여자가 아주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잘될 거예요.”

“…….”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여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

“진짜 끝. 이제 가요. 선물 사러 가야죠?”

“…….”

“라모르! 오늘 장사 끝. 접어요.”

니아는 아무런 수확 없이 시간 낭비만 했다는 생각을 하며 방을 빠져나왔다.

‘괜히 시간만 버렸잖아. 빨리 선물이나 사러 가야지.’

니아는 은근히 찜찜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어 재빨리 골목을 벗어나 큰 거리로 나왔다.

“잠깐. 내가 선물 사러 간다고 얘기를 했던가?”

‘뭐, 상관없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니아는 원래 목적, 선물을 사기 위해 골동품점 ‘시크리트레’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긴가?”

걷고 걷다 드디어 골동품점을 발견했다.

‘겨우 찾았다. 두 번은 못 찾아올 것 같은 곳에 있군…….’

골목골목을 찾아서 와야만 하는 이곳은, 길치인 니아에게는 너무도 벅찬 위치에 존재한 곳이었다.

이 골동품점은 알 수 없는 몇몇 식물이 나무로 된 문을 감싸고 있었는데, 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기보다는 꽤 투박한 느낌이었다.

‘범상치 않은 느낌인데.’

작은 골목 사이, 유일하게 홀로 있는 가게의 문을 니아는 벌컥 열었다.

“와…….”

생각보다 안이 넓었다. 이 작은 골목에 이렇게 큰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세로로 길게 뻗은 골동품점은 끝이 어디인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난생처음 보는 물건들이 많았다. 이름조차 알지 못할 만큼 다양한 물건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도 많았지만,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아가씨, 뭐 찾으시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나와 니아에게 물었다.

“음, 목에 거는 그런 거요. 반짝거리고, 조그만 종이 같은 것도 넣을 수 있고 그런…….”

니아가 대충 목에 대고 손짓을 하며 눈짓했다. 뭔지 아시려나?

“펜던트 말이군.”

노인은 척하면 척이라는 듯 말했다. 그는 골동품 가게 삼십 년 차, 눈빛만 봐도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었다.

“맞아요, 펜던트!”

“이리 와 보슈.”

노인이 그녀를 이층으로 데려갔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펜던트들에 니아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엄청 많네요?”

“그러게. 이걸 사려면 아가씨가 돈이 엄청나게 많아야 할 텐데…….”

몸에 보석 하나 두르지 않은 니아를 보며 노인이 중얼거렸다.

그는 하루 종일 물건이 한 개도 팔리지 않아 걱정스럽던 차였다. 사치스러운 귀족 나리나 골동품 모으기를 좋아하는 마나님이 와야 뭘 팔든 말든 할 텐데, 이렇게 어린 아가씨라니, 쯧.

니아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펜던트 가까이 다가갔다. 심지어 이것저것 만져 보는 니아 때문에 노인이 놀라 또 한 번 중얼거렸다.

“그건 비싼 건데……. 보석이 달려 있어서…….”

“…….”

“돈이 많아야…….”

니아가 여전히 노인 쪽은 보지 않은 채 쓱, 주머니를 내밀었다.

노인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것을 받았다. 그는 꼬질꼬질한 낡은 천 주머니에 혀를 차며 주머니를 열었는데…….

“적어요?”

노인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낡은 주머니 안에서 달리온 덩어리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쿠, 눈부셔라!

“엄청 많습니다요.”

니아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니아의 말을 들은 노인은 빙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오늘 장사 접어야겠다.

니아 프레슬리는 자신의 과소비를 반성하며 공작가를 향해 걸어갔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돈을 펑펑 써 버렸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일었다. 단언컨대, 방금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큰 소비를 한 순간이었다.

‘이렇게나 많이 사다니. 그러게 그 아저씨는 왜 나를 무시해 가지고.’

니아는 양손 가득 펜던트를 들고 걸으며 투덜댔다.

골동품 주인이 돈도 없이 구경하는 사람 취급을 하는 바람에 갑자기 저질러 버렸다. 저도 모르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주세요’라고 말해 버린 것이다.

‘그런 짓 하는 귀족들 진짜 재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돈 자랑하는 귀족들을 보며 니아는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었다. 그 대사와 말투와, 여기서부터 여기를 가리키는 그 손끝 모두 최악이라고 여겼는데.

그녀가 제일 잘 아는 귀족도 아마 그럴 것 같아 니아는 스스로에 대해 더 정나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사지’ 하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필릭스나 할 법한 짓을 하다니…….’

처음에는 레오에게 줄 선물을 살 생각이었다. 그와 다시 만나면 무언가 주고 싶어서. 요즘 그를 잘 떠올리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랄까.

어찌 되었건 니아는 펜던트를 사며 무척 뿌듯한 마음이었다. 선물을 살 생각을 한 스스로도 대견했고.

그런데 머릿속에 하나둘 고마운 사람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에보니, 시저 카르만, 그리고 필릭스 쿠아란……은 제외했다. 그에게 선물을 줬다가는 무슨 의미 부여를 할지 모르니.

아무튼. 그녀의 좁은 인간관계로 따져 봤을 때, 펜던트는 세 개면 충분했다. 딱 세 개면.

그런데 니아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무려 스무 개였다. 벽면에 걸려 있던 한 줄을 다 사니 스무 개가 니아의 품에 들어온 것이다.

‘이걸 어째.’

이 정도면 뭐 숨기고 들어갈 수도 없었다. 팔에 주렁주렁 매달고 가는 꼴을 무시하고 지나칠 인간도 아니거니와.

“니아!”

양반은 못 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필릭스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또다시 공작가 정문 바깥에서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무시하고 지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필릭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너무 늦었잖아. 한참 걱정했단 말이야. 무슨 일 있는 줄 알고.”

그가 정말로 오랫동안 걱정을 한 듯해서 니아는 눈을 끔뻑였다.

“다음에는 어디를 가든 같이 가. 걱정돼서 안 되겠어.”

“…….”

“그래서, 어딜 갔다고?”

“그건…… 비밀이에요.”

하마터면 술술, 오늘의 일과를 늘어놓을 뻔했다.

니아는 서둘러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필릭스가 뒤를 쫓아오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정말 그 새끼를 만난 건 아니지?”

니아가 고개를 휙 돌려 그를 째려봤다.

“새끼……?”

필릭스가 이를 우득 갈았다.

“그놈. 아니, 그 사람.”

니아가 더 이상 말이 없자 필릭스는 오해했는지 또 섣불리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니아, 안 만날 거라고 했잖아?”

“안 만났다니까요!”

결국 니아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필릭스가 입을 닫았다. 하지만 몸은 계속 니아를 따라가고 있었다.

“믿을게. 나한테 거짓말하면 안 돼. 알겠지?”

“…….”

“난 약속 지켰어. 길리한테 물어봐도 돼. 너 물어보기 편하라고 일부러 십 분에 한 번씩 불렀거든.”

필릭스 쿠아란이 뿌듯해하는 사이 어느새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니아였다. 그리고 필릭스는 아예 그녀를 따라 그녀의 방까지 들어설 기세였다.

“손에 든 건 뭐야? 뭐야, 너 설마…….”

“…….”

“장사하게?”

“……제가 장사할 것처럼 보이세요?”

방문을 열기 전, 니아가 한심하다는 듯 필릭스를 바라봤다. 그는 정말 진심인 듯 순진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다 살게.”

그렇게 좋은 생각을 한 자신이 기특한지 필릭스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니아는 그 모습이 귀여워, 아니 귀여워 보이는 게 아니라 한심해 보여 이를 악물었다.

“그냥 제가 산 거예요. 됐죠? 그만 가세요.”

그녀의 말에 필릭스가 시무룩해졌다가 다시 은근슬쩍 물었다.

“네가 목걸이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말했으면 내가 사 줬을 거야. 더 사 줄까? 얼마나 필요해?”

“제가 할 거 아니에요. 저 목걸이 안 좋아해요. 그러니까 내일 목걸이 주겠다면서 말 걸지 말아요! 직접 걸어 주겠다는 말도 금지!”

이쯤 하면 알아들었겠지.

하지만 필릭스는 또 이상한 곳에 꽂힌 듯했다.

“그럼 누구한테 줄 건데? 그거 다 누구 거야?”

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도련님 거 아니거든요!

“내가 주고 싶은 사람들이요! 됐어요?”

“주고 싶은 사람들 누구? 몇십 명이나 돼?”

“…….”

주고 싶은 사람은 딱 세 명. 손가락 다섯 개도 다 필요 없는, 오직 세 명.

“너 그렇게 사람들이랑 친해? 누구 줄 건데!”

“……시저 카르만.”

“뭐?”

“에보니, 그리고 레오.”

레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필릭스의 얼굴에 금이 갔다.

“또 누구.”

“……에?”

“또 누구! 그리고 누구 줄 건데. 내가 다 알아야겠어.”

그의 말에 니아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최소 열일곱 명 더. 필릭스 쿠아란을 포함하지 않은 열일곱 명을 더 생각해 내야 한다.

“……휴 아저씨.”

“휴? 뭐야. 왜 주는데……. 그리고 그다음은 누구야.”

“릴리 아주머니, 길리 집사님…….”

니아가 떠듬떠듬 공작가 하인들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다섯 명에서 멈췄다. 두 명이 모자랐다. 그동안 하인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은 니아 프레슬리의 한계였다.

“네가 그렇게 인정이 많은 줄 몰랐네. 두 개 남잖아. 두 개는 누구 거야.”

몰아붙이는 그의 말에 니아 프레슬리의 입에서는 전혀 줄 마음도, 줄 용기도 없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딕시 댁스터 교수님.”

“뭐?”

“그리고…….”

그리고 정말로 말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도.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님.”

그 이름을 들은 필릭스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어 갔다. 설마 그녀의 입에서 아리갈리 버도네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건, 끝끝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너 교수들한테는 그런 거 주면 안 되는 거 알아, 몰라.”

“……뭐, 뭐를요.”

“아카데미에 청탁 금지법 있잖아! 넌 그 교수들한테 반짝이는 그 무엇도 줄 수 없어.”

화가 난 채 중얼거리는 필릭스에게 니아가 되물었다

“예?”

“몰래 줄 수도 없을 거야. 내가 고발할 테니까.”

그의 말에 니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뭐 그딴 법이?

“…….”

올려다본 필릭스는 따발총을 준비 중이었다. 잠시 귀를 막고 싶었지만, 펜던트를 가득 들고 있는 손 때문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스무 명 안에 내가 포함이 안 되는 게 말이 돼?”

그리고 그의 따발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니아에게 명중했다.

“너랑 매일매일 붙어 있는 건 난데, 왜 그 스무 명 안에 내가 없어!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없는 걸 어떡해요. 도련님 건 없단 말이에요.”

사실인걸.

하지만 필릭스는 열이 뻗치는지 니아의 양팔을 잡고 펜던트가 서로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록 흔들었다.

“내 거 내놔.”

“맡겨 놨어요? 제가 주기 싫다는데 왜 그러세요. 남는 건 뭐, 에보니 더 주면 되니까.”

니아가 팔을 확 뺐다.

그녀의 말에 부들거리던 필릭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내가 하나 사 줄 테니까 그거 나 줘.”

“네?”

“내가 주면 되잖아. 스물한 번째 거 나 주라고!”

“…….”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니아 프레슬리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도련님 눈앞에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닫힌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필릭스 쿠아란이 문에다 대고 소리쳤다.

“니아, 부탁 하나만 해도 돼?”

그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필릭스가 그냥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한테 웃어 주는 것처럼 나한테도 그래 주면 안 돼? 처음 봤을 때처럼.”

“…….”

“나 미워하지 마.”

필릭스는 속상한 눈으로 단단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방문에 얼굴을 대고 속삭였다.

“웃어 줘, 니아…….”

그리고 방문이 니아인 것처럼 떨리는 손길로 매만졌다.

니아는 그 말이 사랑해 달라는 말과 동의어임을 알았다. 그것을 잘 알기에, 방 안에서는 그 어떤 대답도 한참 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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