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간단한 결론
‘오늘도 똑같아.’
그리고 니아 프레슬리에게는, 그녀가 바라지 않던 하루하루가 펼쳐지고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의 입장은 간단하고 또 명료했다.
‘간단해. 나는 널 좋아하고, 널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가끔은 돌연 울컥하는 일도 있었지만, 금세 사르르 웃어 보였다.
니아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다 웃을 때면 홀린 듯 바라보았고, 그 웃음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 번번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입을 합죽이처럼 다무는 니아 프레슬리가 미워질 법도 한데 종종 그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큰 소리를 내어 웃기도 했다.
‘불공평해.’
분명 거절당한 것은 그인데, 그보다 니아 자신이 더 괴로워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피할 때면, 그의 눈동자 끝에 맺히는 서운함과 상처도 알았다. 가끔은 그가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않아, 니아는 죄책감 그 이상의 것을 느끼기도 했다.
하루는 필릭스 쿠아란이 이런 말을 한 적도 있었다. 애써 덤덤한 척했지만, 니아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었다.
‘네가 날 영영 좋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진심을 담아 말하는 그에게,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니아는 그저 죄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은 진짜 두려움을 몰라요.’
니아는 그녀를 들킬까 봐 두려웠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그 눈이, 두려움이나 혐오로 바뀌게 된다면 니아는 어떻게 버틸까. 어떻게 살아갈까.
처음부터 그녀를 괴물로 보던 시선도 얼마나 아팠는데. 얼마나 날카롭게 그녀를 찔러 댔는데.
필릭스가 니아를 사랑하는 일이 그랬다. 감히 가져서는 안 될 것을 훔친 듯 불안했다. 거지꼴을 하고 왕관을 쓰게 된 사람이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자신을 향해 웃는 필릭스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익숙해지면 어떡하지?
필릭스가 주는 사랑에 익숙해지면 어떡하지…….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되어야 할 텐데. 하루빨리 평온해져야 할 텐데.
평범한 도련님과 하녀의 관계가 되어, 계약한 날짜가 오면 이 모든 걸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그를 떠날 수 있어야 할 텐데.
“니아!”
저 멀리서 필릭스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사람을 발견한 듯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의 웃는 얼굴이 니아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게 니아 프레슬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는 일. 등을 보인 채 그에게서 멀어지는 일.
따라잡힐 걸 알면서도 니아는 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걸었다.
그에게 우울한 얼굴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단 한 가지 마음으로 환히 웃을 수 있는 그가 부러워졌으니까. 니아는 그를 보며 그렇게 웃을 수가 없어 한없이 울적해졌으니까.
황궁 검술 대회에 나갔던 아카데미생들이 돌아온 만큼, 대회 참가자들이 비참가들을 맡아 기본적인 검술을 알려 주는 시간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우승자가 나온 것을 기념해, 특별히 준비된 시간이었다.
기사론의 교수인 지무트 아블란사 교수가 학생들을 연무장으로 인도했다.
“니아, 나랑 해.”
어느새 필릭스는 그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니아는 그런 그를 보고 잠시 움찔하더니 곧장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나 아니면 누구랑 하려고…….”
필릭스가 으르렁거리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니아는 백터 쉐리에게 다가섰다.
“저랑 같이 하시면 안 돼요?”
갑자기 다가오는 니아를 향해 백터가 놀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신에게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을 거라 이미 체념한 상태였던 것이다.
“난, 대회에 나가긴 했지만 잘 못 해……. 다른 사람이랑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야.”
백터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딴에는 니아를 위해 어렵사리 뱉은 말이었다.
“아니에요. 정말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요. 괜찮죠?”
니아가 정말로 원한다는 듯 바닥에 팽개쳐져 있던 그의 검을 주워 손에 쥐여 줬다. 백터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회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은 없지만,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내가 열심히 너를, 히익! 힉……! 피, 필릭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필릭스가 백터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른 애랑 해, 백터.”
“하, 하지만 이 애가…….”
“못 알아듣겠어? 가라고.”
필릭스가 검을 위협적으로 이리저리 돌리자, 백터 쉐리는 겁먹은 생쥐처럼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뭐 하시는 거예요.”
니아가 노려보자, 필릭스가 이제 그쯤은 아무 타격감도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결국 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눈을 접으며 웃으면 왠지 눈에 힘을 주고 있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허탈함이 들곤 했다.
“같이 하면 좋잖아. 네가 다른 남자랑 연습하는 꼴은 보기 싫거든.”
“안 할래요.”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갔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였다.
“안 할 수 없을걸? 지무트 아블란사 교수가 단상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필릭스의 말대로, 오랜만의 바깥 실습에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는 듯한 기사론의 지무트 아블란사 교수가 보였다.
‘……젠장.’
일부러 백터 쉐리에게 다가갔던 일이 다 물거품이 되었다. 필릭스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칼을 들고 하는 수업이니만큼 다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저 사람이 안전할 것 같아서 고른 건데.’
그마저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짝을 지은 후라, 니아는 영락없이 필릭스와 이 수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손에 든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칼은 들지 않을게, 니아. 내가 어떻게 네게 칼을 들이밀 수가 있겠어. 아무리 연습이라지만.”
점점 다가오는 목소리는 진지하고 따듯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필릭스 쿠아란만 아니었다면 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니아는 잇새로 중얼거렸다.
“그냥 하시죠. 다른 사람들이 보니까.”
니아가 손에 든 검으로, 바닥 쪽으로 향해 있는 필릭스의 검을 툭툭 쳤다. 빨리 제대로 검을 들라는 의미였다.
“니아, 검이 너무 무거워…….”
그의 엄살에 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그 누가 필릭스 쿠아란이 검이 무겁다며 엄살 부리는 꼴을 믿겠는가.
계속해서 우물쭈물하는 필릭스를 보며, 니아는 자신이라도 칼을 한번 찌르는 시늉을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생각에 빠져 있는 그때였다.
“조심해!”
필릭스가 바로 니아에게로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검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갔다. 대회 우승자다운 아주 빠른 솜씨였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쳐 낸 검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 결과.
“안 돼!”
니아가 검이 스친 어깨 부분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살이 베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리고 그들 모두가 니아를 쳐다보는 순간에, 이토록 밝은 날에…….
“안 돼, 안 돼…….”
니아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숨을 거칠게 내쉬며, 피가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상처를 있는 힘껏 눌렀다.
“니아!”
놀란 필릭스가 칼을 내동댕이치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니아, 괜찮아? 다쳤어? 봐 봐, 어디를……!”
‘니아 프레슬리, 침착해. 침착해야 해.’
세게 베이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살갗을 살짝 스친 것뿐이었다. 이 정도면 몇 분 지나지 않아 나을 정도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검이 몸에 닿은 것만으로 놀라서 너무 소리를 크게 질렀어.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니아, 아예 못 움직이겠어? 내가 안고 병실로 갈까?”
창백한 표정이지만 정신은 깨어 있는 듯 보이는 니아에게 필릭스가 차마 만지지는 못한 채 물었다.
니아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있으면 다 나을 거야. 기다리자. 괜찮아. 괜찮아. 겁먹지 마. 괜찮아, 니아 프레슬리…….’
온 아카데미생들의 이목이 니아에게 집중되었다. 니아에게 실수로 검을 던진 남학생은 불안에 떨고 있었고, 지무트 아블란사 교수도 서둘러 들것을 들고 니아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니아, 말하기 힘들어? 괜찮은 거 맞아?”
불안해서 끊임없이 물어 오는 필릭스에게 대답하지 않으면서, 니아는 계속 시간을 끌었다.
‘빨리 나아라, 빨리.’
“허락 없이 만져서 미안해. 그냥 이대로 안아서 아카데미 병실로 가야겠어.”
니아는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답이 없었다. 속이 탄 필릭스가 결국 그녀를 안고 가겠다고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니아가 벌떡 일어났다.
“저 안 다쳤는데요?”
“…….”
너무 명쾌한 말투에 니아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니아는 민망한 낯빛도 없이 방긋 웃고 있었다.
“저, 니아. 너 혹시 지금 다쳐서 제정신 아닌 거 아니야?”
옆에서 놀라 지켜보던 할로나 허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 있어 죄책감이 든 니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다리가 저려서……. 칼이 날아오니까, 하하. 놀라 가지고……. 제가 원래 겁이 좀 많은 편이고. 진짜 하나도 안 다쳤는데요!”
니아의 말에 다들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지무트 아블란사 교수도 니아의 말에 손에 들고 있던 들것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혹시라도 자신의 수업 중에 부상자가 나올까 봐 겁을 먹고 니아에게로 한달음에 달려왔던 것이다.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방금 네가 어땠는지 알고 하는 말이야?”
다시 둘만이 남자 필릭스가 니아를 추궁했다.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사실 믿을 수 없는 것이 맞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는 하얗게 질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네가 곧 기절이라도 할 것 같아서…….”
“괜찮아요. 그냥 놀란 것뿐이에요.”
여전히 걱정스러워 보이는 필릭스에게 니아가 차분하게 달래듯 말했다.
“정말?”
“그럼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제야 필릭스 쿠아란은 힘겹게 웃었다. 그러나 잔여물처럼 미처 지우지 못한 찝찝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분명 칼에 베이는 것 같았는데…….’
걱정이 돼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니아의 어깨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앞으로 웬만하면 엄살은 부리지 마. 내 심장이 남아나지를 않을 테니…….”
살짝 방향이 좋지 않았지만, 어찌 됐건 니아에게 날아온 검을 쳐 낸 것이 참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
“내가 지켜 줄게. 맹세해. 절대 네가 다치는 일 없게 할게.”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의 말로 불안을 덮으며.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니아의 표정이 다시 심상치가 않았다.
“니아?”
“…….”
“뭘 지켜 준다고…….”
니아가 중얼거렸다.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딱 들어도 필릭스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필요 없습니다.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거든요.”
갑자기 니아 프레슬리는 화가 난 듯 보였다.
“화장실 가는 거예요. 따라오지 마세요.”
니아는 뭔가 틀어진 표정으로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던지더니, 휙 고개를 돌려 연무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