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예상치 못한 전개 (18/75)

3. 예상치 못한 전개

그리고 다음 날.

놀랍게도 니아 프레슬리는 어젯밤 자신이 꿈을 꾼 것인가 고민해야 했다. 아니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거나.

니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내가 정신이 나간 건가……? 왜 헛것이 보이지.’

필릭스 쿠아란이 부은 눈을 반으로 접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니아, 내 손 잡을래?”

그러고는 해사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기다란 손가락을 보며 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모든 것이 마차에 오르려던 차에 발생한 일이었다.

니아가 슬쩍 그의 손을 툭 쳤다. 실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필릭스는 갑작스레 그녀가 손을 치자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진짜잖아.’

니아는 그가 오늘 그녀와 함께 마차를 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니아 홀로 마차를 타고, 그는 니아를 피해 다닐 거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예상이 빗나갔다. 니아의 그 어떤 예상에도 이런 장면은 없었는데.

“……괜찮습니다.”

니아가 겨우 필릭스의 손을 무시하고 마차에 올랐다.

필릭스가 민망하게 홀로 남은 손을 집어넣었다.

마차에 타서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눈빛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니아가 보기에도 무엇 하나 보탤 것 없는 분명한…… 사랑이었다.

“나 오늘부터 같이 수업 듣는데. 알고 있어?”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끝난 니아에게 필릭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평소만큼, 아니 평소보다도 더 부드러웠다.

‘이게 무슨 일이야.’

“같이 앉을래?”

입꼬리를 가득히 올리며 웃는 그를 피하기 위해 니아는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죄송하지만 피곤해서요. 잘게요.”

겨우 뱉은 말은 이따위 것이었다.

“그래, 잘 자.”

이 상황에서 절대 잠들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에게 포근한 담요를 덮어 주었다.

눈을 감은 니아의 동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필릭스 쿠아란은 누가 보면 고백에 성공한 남자라 생각할 만큼 뻔뻔하게 굴고 있었다.

하녀에게 차인 일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다른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나?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분명 필릭스는 어젯밤 그녀의 말을 이해했고, 동시에 아파했다.

숨이 고르게 쉬어지지가 않았다. 밤을 새웠어도 정신은 말짱했다. 역시나 잠은 전혀 잘 수가 없었다. 오히려 지난밤보다 더 머리를 써서 지금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빴다.

“니아, 잠들었네.”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중얼거렸다. 니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미안해.”

그리고 그는 사과를 했다.

“……좋아해서.”

담백한 목소리로 덧붙이며.

‘젠장.’

니아는 잠든 척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래도 그녀가 끝까지 눈을 뜨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필릭스 쿠아란은 어젯밤 잠들지 않았다.

어제는 그가 황궁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날이었고, 고백을 계획한 날이었으며,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그 고백이 진행되었고, 잔인한 거절의 의사를 받은 날이었다. 고로, 잠들기는 완전히 그른 밤이었다.

그는 니아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다른 사람 좋아하지 마. 사랑하지 마. 그러지 마…….’

말이 튀어 나갔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니아를 안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후에, 니아를 안고서는 말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좋아한다고.’

필릭스는 몰랐다. 니아가 그동안 그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몰랐던 건지.

이젠 중요치 않은 일이지만.

‘좋아하지 마세요.’

‘왜 하필 그 말이었을까.’

좋아하지 말라는 말은 저주였다. 그런 것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니아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좋아했다. 그리고 단 한순간도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일매일 좋아했다. 매 순간 좋아했다.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지? 그런 법은 알지 못했다.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좋아하지 말라는 말이 아팠나 보다. 마치 형벌같이 느껴졌기에.

심장을 쥐어뜯는 느낌으로 밤을 새웠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많은 기억들, 많은 감정들이 그와 함께 밤을 하얗게 지새웠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도 있는 거야.’

그리고 그가 내린 그 결론이란 것은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오히려 씁쓸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카데미에 도착하자마자, 니아는 자신을 깨우기 위해 앞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 기척을 느꼈다. 몇 번이고 망설이는 눈빛과 손길이, 눈을 감고 있었지만 다 보였다.

‘도망치자.’

결론을 내린 니아는 눈을 번쩍 뜨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니아?”

필릭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왔다. 니아는 걸음을 더 빨리했지만, 당연히 몇 걸음 만에 그에게 따라잡혔다.

“같이 가자.”

필릭스가 그녀의 팔꿈치 쪽 옷을 잡아당겼다. 마치 조르는 아이처럼.

니아는 아무 대답 없이 그를 무시한 채 걸어갔다. 그의 행동이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검술 대회가 끝났으니까 수업도 같이 들어야 하잖아.’

공작가에서, 마차에서, 그리고 이제 강의실에서까지, 하루 종일 필릭스를 봐야만 했다.

니아는 주인을 따라오는 강아지처럼 자신 곁에 딱 붙은 필릭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떡하지……?’

생각도 잠시.

“손잡아 볼까?”

산뜻한 그 질문에 결국 니아는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필릭스는 주눅이 든 듯 시선을 돌리며 민망한 듯 웃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니아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필릭스도 멈춰 섰다.

“……할 말이 있어요.”

서 있던 니아가 돌연 중얼거렸다. 필릭스는 긴장감에 숨을 들이켰다. 니아도 마찬가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무슨……?”

“따라오지 말아 주세요.”

니아는 단호히 말을 마치고 다시 앞서 걸음을 옮겼다. 필릭스의 귀가 축 처졌다.

“같은 방향이잖아…….”

그는 차마 바로 따라가진 못하고, 니아와 멀리 간격을 두면서 걸음을 옮겼다. 강의실에서 다시 무엇이든 시도를 해 봐야겠다고 다짐하며.

하지만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니아를 찾는 필릭스의 시선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 방해를 받고 말았다. 그의 우승에 열광한 아카데미생들이 그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며 그를 막았던 것이다.

“누가 황궁 검술 대회의 우승자죠?”

“필릭스 쿠아란!”

“황제 폐하의 극찬을 받았던 사람은?”

“필릭스 쿠아란! 필릭스 쿠아란!”

아카데미 안에는 그를 환호하는 말들로 가득했다. 마치 어제 축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강의실 안은 열기로 후끈했다.

“저, 필릭스. 황궁 기사단으로 바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

“그래, 필릭스! 아카데미는 다 수료하고 갈 거지? 그치?”

“이 잘생긴 얼굴에 상처가……! 괜찮아, 필릭스?”

“비켜.”

필릭스의 차가운 반응에도 시끄러운 분위기는 가라앉지를 않았다.

“비키라고 경고했을 텐데?”

필릭스가 사납게 노려보자 그제야 하나둘 눈치를 보며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우승을 하고도 왜 저렇게 화가 나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에, 필릭스의 눈이 그제야 니아를 제대로 쫓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저 구석, 누군가와 함께 앉아 있었다.

‘시저 카르만…….’

니아 프레슬리는 지난번처럼 시저 카르만과 함께 앉은 채였다.

“니아 프레슬리, 왜 이래. 꺼져.”

시저 카르만이 옆자리로 기어들어 온 니아를 향해 이건 또 무슨 미친 짓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니아 프레슬리가 그의 영역을 침범해 앉더니, 꿈쩍을 하지 않았다.

“그냥 좀 같이 앉자.”

“내가 왜? 미쳤냐, 내가? 너 돌았어?”

“그냥 좀……! 난 지금 피해야 할 사람이 있어.”

그제야 시저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피해야 할 사람이라면 필릭스 쿠아란밖에 더 있겠는가.

그리고 돌아봐 확인한 필릭스 쿠아란은, 이쪽을 향해 엄청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너네 도련님이 나 죽일 것 같은데?”

시저는 꽤나 다급했다. 그러나 니아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죽이기야 하겠어.”

“…….”

“나 먼저 살려 줘.”

니아 프레슬리가 이를 악물고 속삭이자, 시저 카르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일이래.’

니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필릭스와, 그런 필릭스를 피하는 니아.

“내 목을 딸 것 같은데……?”

시저가 니아를 펜으로 쿡쿡 찔렀다. 니아는 그런 시저의 펜을 단호하게 손등으로 툭 쳐 냈다. 그의 날카로운 깃펜이 공중부양해 건너편 책상으로 넘어갔다.

“내 펜……!”

니아는 그를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고마워, 시저 카르만.”

‘니아 프레슬리 민폐……!’

시저는 펜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며, 동시에 민폐 갑 니아 프레슬리를 향해 마음속으로 욕을 휘갈겼다.

그렇게 시작된 첫 수업은 학생들보다 더 필릭스의 우승에 취한 아리갈리 버도네의 수업이었다.

“나 때는 말이지, 황궁 검술 대회 다음 날이면 아무도 아카데미에 오지 않곤 했다고. 밤늦게까지 우승자와 함께 술을 마시느라! 그럼 교수들이 어떻게 했냐고? 뭘 어떡하긴 어떡해! 다들 이해해 줬지. 왜냐? 우승자가 보 아카데미에서 나왔으니까 말이야! 자, 우승자 필릭스 쿠아란! 내 자네가 우승할 줄 이미 알고 있었지 말일세, 흠. 어제 자네의 모습을 나도 봤는데, 내 친구 수르만 렉시스가 떠오르더군. 그 친구도 대회 우승자인데…….”

“…….”

수업은 하나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새는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였다. 그의 장황한 연설이 끝없이 이어졌다.

니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마치 마취총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혼미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펜은 종이에 지렁이를 그리다 힘없이 또르르 굴러갔다.

“야.”

시저가 팔꿈치로 니아를 세게 가격했다.

“……!”

니아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혹시 침을 흘렸나 싶어 입 주변을 매만졌다. 그런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려고 고개를 뺀 시저 카르만의 앞머리가 빠르게 찰랑거렸다.

“진짜 더럽다.”

자신을 경멸하는 시저의 말투에 니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입 모양으로 중얼거리며.

‘깨워 줘서, 고, 마, 워.’

시저는 순간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쩌다 이런 거에 자신이 걸려서…….

눈을 찡긋거리는 게 더 꼴 보기 싫어 시저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니아 프레슬리는 심지어는 고맙다며 그를 툭툭 치기까지 했다.

“그래서! 자, 우리 우승자 필릭스 쿠아란의 소감 한마디를 들어 볼까? 아주 궁금하단 말이지, 흠흠!”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가 기대에 가득 차 필릭스를 바라봤다. 관심 없다는 듯 다른 짓을 하고 있던 학생들도 필릭스를 뒤돌아봤다.

“죽일까…….”

필릭스가 중얼거렸다.

“응, 응? 자네, 뭐라고 했나?”

“죽여 버릴…….”

“어쩐지 눈빛이 더 용맹해진 것 같구먼, 필릭스 쿠아란! 자, 자, 이제 수업을 나가 볼까?”

아리갈리 버도네는 서둘러 말을 끝냈다.

‘저거 나한테 한 소리지?’

시저 카르만은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태평하게 자신 옆에 앉아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니아 프레슬리가 정말로, 진심으로 원망스러웠다.

“야, 너 가.”

아리갈리 버도네의 수업이 끝난 후, 시저가 니아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왜 또 이래.”

니아가 시저의 말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다음 수업 책을 꺼냈다.

“진심이야. 가라고.”

“아, 왜!”

니아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필릭스 쿠아란이 수업 시간 내내 눈 한번 안 깜빡이고 날 노려봤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겠지? 나는 필릭스한테 찍히느니 평생을 투명 인간으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야. 알았으면 그만 피해 주고 꺼져, 제발.”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 계속……?”

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필릭스가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문제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니아는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니까 제발 가라, 가. 네 문제는 네가 해결하란 말이야.”

시저는 니아의 몸을 옆으로 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크게 웃으며 난생처음 보는, 최고로 어색한 상황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 하는 수작이지?’

“하하. 하하하.”

기계처럼 웃는 니아 프레슬리를 보니 더 큰 불안함이 시저를 엄습했다.

“왜, 왜 웃어.”

“따라 웃어. 즐거운 것처럼.”

“내가 왜…….”

“뜨르 으스라그.(따라 웃으라고.)”

니아가 복화술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를 몰아세우는 건…….

‘필릭스 보라 이거군. 이 얼간이가 감히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하, 어쩌다가 너 같은걸……. 정말 미쳤군. 미쳤어, 니아 프레슬리!”

“하하, 하하. 나도 즐, 거, 워. 하하.”

시저는 울고 싶은 마음과,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마음에 울상을 짓고 따라 웃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웃음이었다.

“하, 하하하. 니아 프레슬리, 내가 필릭스 쿠아란에게 죽기 전에 먼저 널 죽여야겠어…… 하하.”

인생을 하직시켜 주겠다는 시저의 말을 무시한 니아는 계속 어색하게 웃으며 필릭스 쪽을 힐끔 바라봤다.

‘이런…….’

니아는 필릭스의 표정을 보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봤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망했다.”

필릭스는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 검술 대회에서처럼.

‘필릭스는 마음을 접을 생각이 없어.’

그를 너무 얕잡아봤다. 그래, 그는 여태껏 자기 마음대로 살아온 도련님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그녀의 거절이 그의 승부욕을 불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이르자 니아는 아득해졌다.

시저 카르만은 창백해진 니아를 보고 꺼림칙한 듯 중얼거렸다.

“야, 너 왜 그래?”

“……놀라워서 그래. 놀라워서.”

“뭐가?”

“이 모든 게.”

니아는 알 수 없는 말을 마치고 미친 듯이 무언가를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슬쩍 바라본 시저 카르만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찍이 니아에게서 떨어졌다.

‘무슨 욕을…….’

그녀는 종이가 파일 만큼 깊이, 에슬란 제국의 욕이란 욕은 모두 적고 있었다.

시저는 갑자기 한기가 도는 것 같아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은 화사하기만 했다. 그의 뛰어난, 지략적인 머리가 경고했다. 지금은 피할 때라고!

니아는 다음 수업이 시작할 때가 되어서야 손을 멈췄다. 다음 수업은, 딕시 댁스터의 생명술이었다.

“오늘은 옆 사람과 함께 하이드라 멜로니를 공동으로 키워 보겠다.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마정석을 적게 소비하면서 크게 키워 내는지를 중점적으로 보겠다.”

딕시 댁스터가 진흙이 잔뜩 묻은 운동화를 신고 강의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말했다. 그녀는 씨앗과 마정석을 두 명당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딕시 댁스터 교수는 오늘도 역시나 통이 넓은 바지와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짧은 머리는 늘 그렇듯 시원하게 빛났다.

“내가 손해로군.”

시저가 중얼거렸다.

“내가 그래도 생명술을 제일 잘하는 거 알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변명하듯 말하는 니아에게 시저가 칼같이 대답했다.

“모든 기준은 상대적이지.”

“그래. 너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뭐, 어쨌든 점수는 잘 받겠다.”

한 치의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는 니아의 말투에 시저 카르만의 앞머리 속 눈동자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아까부터 정말 너무 막 나가는데?

“너를 네 글자로 나타내 볼까? 내가?”

“나를? 네 글자로? 네가?”

“그래.”

“뭔데……?”

“무임승차. 아주 비겁한 종자들이나 하는 짓이지.”

니아의 표정이 팍 굳었다.

무임승차라니? 비겁한 종자?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요즘의 니아는 적어도 평균치는 하고 있었다. 시저 카르만의 눈에는 차지 않을지 몰라도…….

자신을 진지하게 업신여기고 있는 시저 덕분에 승부욕이 불끈 솟는 느낌이었다. 그가 아니더라도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두고 봐, 시저 카르만. 내가 네 코를 납작……하게는 만들지 못하겠지만, 뭐 무임승차 그런 건 아닐 테니까.”

“네가 잘도. 피해나 주지 마라.”

시저 카르만이 콧방귀를 뀌며 니아를 비웃었다.

눈을 부릅뜬 니아는 있는 힘을 다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일까?

“왜 이렇게 빨라…….”

시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식물을 키워 내는 것을 보자 니아의 의욕이 팍 죽었다. 눈에서 나오던 열기도 흔적 없이 사라졌고.

“열매는 내가 피울게. 가만히 있어.”

결국 니아는 풀이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정석 다 쓰지 마라. 나 경고했다.”

시저가 떨떠름하게 마정석을 건넸다. 마정석을 낭비하는 것이 니아 수준에서 실수하기 가장 좋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고 했잖아…….”

니아가 집중하느라 입술을 모은 채 답했다. 열매가 맺힌 모습을 상상하고, 더 크게 자라날 모습, 햇빛과 비를 충분히 맞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리고 한 가지 더.

니아는 그녀가 가진 능력을 활용하는 중이었다. 시저 카르만에 비하면 실력은 한참 미달이었지만, 마정석을 쓰지 않는 것 정도의 귀여운 재능 활용은 괜찮지 않은가?

“…….”

“나 잘했지?”

동시에 세 개의 작은 열매를 피워 낸 니아가 땀을 닦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네. 마정석을 거의 안 썼잖아.”

놀라는 시저의 모습에 니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왼쪽 볼의 보조개가 옴폭 파였다.

“시저 카르만, 니아 프레슬리. 훌륭하군. 특히나…… 마정석을 이렇게 조금 쓰다니. 두 사람이서 한 사람분도 쓰지 않았군. 놀랄 정도야.”

다가온 딕시 댁스터가 무언가를 적으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니아와 시저에게 최고점을 주는 듯 보였다.

“그마저도 제가 거의 다 썼습니다. 니아는 십분의 일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시저 카르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딕시 댁스터 교수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십분의 일이라……. 다시 봤군, 니아 프레슬리.”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자리를 떴지만 니아는 그런 딕시 댁스터 교수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공작가 피후견인이 맞냐는 눈빛을 받았던 초반이 떠올랐다.

‘인정받은 기분이야. 이거 정말 기분 좋은 거구나.’

오늘 단 한 번도 우울한 적 없었던 사람처럼 니아의 볼은 발그스레해졌고, 아까 같은 연기가 아닌 자연스러운 웃음이 시저를 향해 지어졌다.

“손 펴 봐!”

니아가 시저에게 재촉했다.

“뭐? 이렇게……?”

영문을 모르고 시저가 자신이 손바닥을 폈다.

짝!

니아의 손이 시저의 손과 맞닿았다. 시저가 얼떨떨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아프잖아. 방금 뭐 한 거…….”

“하이파이브! 우리가 같이 해서 칭찬받았잖아. 너 혼자 말고, 우리 둘이 같, 이, 말이야.”

니아가 거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저의 입에서 감탄사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뭐냐, 너.”

아까까지만 해도 전투적으로 욕을 써 대더니 이제는 기분이 또 좋아진 모양이었다. 얘는 뭐 개그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알 수 없는 인간을 보며 시저 카르만은 졌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 또 시선.’

하지만 그새 잊을세라 또다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시저 카르만은 시선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내일은 기필코 혼자 앉든가 해야지.’

시저는 굳세게 다짐했다. 아직까지도 은은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니아 프레슬리를 바라보며.

“니아, 이번 열매도 우리 줄 거니?”

옆 책상에 앉아 있던 카레나와 할로나가 책상을 정리하는 니아에게 슬며시 물어 왔다.

“네?”

“아니, 지난번에. 그 토마토 우리 줬었잖아.”

둘은 무언가 기대한다는 눈빛으로 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드릴까요?”

니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하이드라 멜로니 열매 두 개를 땄다.

‘이건 식용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뭐, 상관없나.’

니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열매를 따 하나씩 그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카레나와 할로나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듯 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순진하게 묻자, 카레나가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그, 너무 고마워서 그러지. 네가 착해서!”

어쨌든 칭찬인가.

니아는 자신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짓는 그녀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하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니아를 보고 그녀들은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 아가씨들은 참 모르겠군. 그나저나…….’

칭찬은 무척이나 달았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되니 이제 다시 니아에게 남은 것은 오늘 아침부터 시작된 걱정이었다.

오늘 하루의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니아는 그렇게 필릭스 쿠아란이 앉은 뒷자리를 신경 쓰며 보냈다. 결코 뒤돌아보지 못하며.

“네 옆자리에 앉으니까 정말 좋다. 내일도 앉을래.”

서둘러 짐을 챙기고 있는 시저 카르만을 향해 니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시저 카르만은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귀를 막았지만, 니아가 또 막무가내로 옆자리에 앉는다면 받아 줄 게 뻔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시저 카르만이니까?

시저 카르만의 옆자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바로 질문하고, 욕은 조금 먹지만 바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는 거만하게 펜을 움직이지 않다가 교수들이 다른 소리를 할 때 더 열심히 필기를 했는데, 대부분 그들에 대한 신랄한 감상평이었다.

예를 들면, ‘카산드라 맥시멈, 옛날얘기 제발 그만. 재미없음, 감동 없음’, ‘지무트 아블란사, 허언증 의심 정황 포착’, ‘아리갈리 버도네. 자기 자랑 금지. 백 년 동안 금지’ 이런 것이었다.

내일도 같이 앉자는 니아를 향해 시저 카르만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떠났고, 이제 다시 니아 프레슬리가 긴장할 때가 되었다.

“니아, 집에 가자.”

그는 애써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도서관에 갈 거예요.”

숨을 한번 들이쉰 니아는 차갑게 대답하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니아가 떠난 자리에서 필릭스는 짧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다.

“……같이 가는 건 내 마음이잖아.”

니아를 좋아하는 것이 그의 마음이듯. 그의 발걸음이 그녀의 곁으로 향하는 것도 그의 마음이었다.

천천히 니아의 뒤를 따르는 필릭스의 입에서 자조하는 한숨이 흘렀다. 그도 이런 스스로가 놀라워 뱉는 한숨이었다.

니아는 필릭스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공부를 시작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큰 책상에 책을 쌓아 놓은 채, 누구보다 무섭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 옆에 앉은 필릭스는 책상에 엎드려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니아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니아 프레슬리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러자 필릭스도 재빨리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마치 니아의 그림자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애완견인가?

천하의 필릭스 쿠아란이 강아지라니.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니아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그를 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주인의 애정을 갈구하는 강아지 같았다.

“니아?”

그녀를 따라가며 필릭스는 괜히 한번 불러 보았다. 혹시 돌아봐 주지 않을까 싶어서. 물론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니아는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책장을 훑으며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이 예상과 똑같이 흘러가자 필릭스는 마음이 조금 아프긴 했다.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고.

니아가 책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필릭스가 자신의 품 안에 그녀를 가두다시피 한 채, 뻗은 니아의 손 위로 자신의 긴 팔을 뻗어 책을 한 권 꺼내었다.

“이 책 찾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니아의 귀에 내려앉았다. 순간 그의 행동에 멈칫한 니아는,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거 찾고 있었는데요.”

니아가 바로 자신이 손을 뻗은 딱 그 위치의 책을 쓱 뽑으며 말하자 필릭스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니아는 바로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힘을 줘 몸을 돌린 그녀의 눈앞에, 필릭스의 커다란 몸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더 가까워질 거리도 없는데 필릭스가 몸을 기울였다. 그가 꺼낸 책을 다시 집어넣기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 덕분에 이제 니아의 얼굴이 그의 심장 부근에 완전히 닿아 버렸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고, 니아는 또다시 얼음이 되어 버리고.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굳어 버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니아가 도망가지 않자, 이제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필릭스였다. 대화가 필요했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니아, 나랑 얘기 좀 해.”

하지만 어떤 방해꾼에 의해 그의 계획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필릭스는 순간적으로 울컥해 목울대를 울렁였다.

“니아 프레슬리, 오늘도 도서관에 온 거야? 저기 왜 네 짐이…….”

오늘 하루 종일 그가 갖고 싶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니아는 허둥거리며 필릭스를 밀쳐냈다. 그리고 당황해서 붉어진 자신의 얼굴이 보일세라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천만다행이었다. 목소리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 오늘도 도서관에 올 줄은 몰랐네. 그냥 돌아가는 줄 알았지. <천문학의 999개의 비밀>이 새로 들어왔더군. 내가 먼저 읽을 테니까 탐내지 말고 다음에…….”

혹시라도 뺏길까 싶어 <천문학의 999개의 비밀>을 꽉 쥔 채 니아를 향해 다가오던 시저가 그녀 뒤에서 등장한 필릭스를 발견하고 말을 멈췄다.

“시저 카르만. 도서관에 자주…… 오는 모양이지?”

필릭스 쿠아란의 서늘한 눈초리를 보자마자 시저는 재빨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뒷걸음질에 이토록 재능이 있는지 태어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역시 초인적인 능력은 위기에 닥쳤을 때 나오는…… 건지 모르겠고, 그냥 필릭스에게 개죽음을 당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시저는 진심으로, 저 둘 사이 일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열심히 뒷걸음질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전혀. 지금 가려던 참이다.”

“시저? 그게 무슨 말…….”

니아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떠나 버리는 시저를 황망하게 불러 보았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시저 카르만…….”

뒤에서는 필릭스가 그의 이름을 씹듯이 뱉었다.

“도대체 저놈이랑은 얼마나 친해진……. 됐다. 공부해, 니아. 기다릴 테니.”

필릭스 쿠아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니아가 알아주기를 바라다가, 결국 그는 모르길 바라는 편을 택했다. 니아가 지금 그의 심정을 모두 알게 된다면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질 것만 같았다.

유치한 질투심이 주는 불쾌함은 생각보다 더 지독했다. 순수하게 첫사랑을 앓던 소년은 이런 감정 따위 알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필릭스 쿠아란은 어느새 훌쩍 자란 자신과 니아 프레슬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월이 무상하기는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