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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무 이른 꽃 (17/75)

2. 너무 이른 꽃

니아는 달빛을 바라보며 걸었다.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질질 끌리고 덜컥거렸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속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 단 한 가지의 걱정거리만이 니아를 괴롭혔는데, 그건 바로 이 모든 일들이 꿈이거나 만들어 낸 허상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아직 밤은 춥구나.’

분명 봄은 시작되었으나 아직 쌀쌀함이 가시지 않아 추웠다. 니아는 차가운 밤바람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는 듯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몸을 움츠리며 아래를 보는데, 신발 바닥 아래 무언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어…….’

초록 잎이었다. 니아는 황급히 발을 뗐다.

“꽃이 피었네……?”

아직 추운 날씨건만 벌써 꽃이 핀 모양이었다. 작은 바람꽃. 은은한 푸른빛을 띠고 있는 꽃이었다.

어렵사리 이 추위를 뚫고 자라났을 텐데, 니아가 짓밟아 버린 것이다. 신발에 밟혀 납작해진 꽃이 애처로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고.’

니아는 미안한 마음에 뭉개진 바람꽃을 다시 세워 보았다. 하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이미 줄기가 꺾인 꽃은 살아날 줄을 몰랐다.

‘음, 설마 될까.’

니아는 주위를 살핀 다음, 바람꽃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 밤에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축제의 여흥을 즐기던 사람들조차도 모두 사라진 고요한 밤이었다.

니아는 잠시 눈을 감고, 이 바람꽃이 다시 피어나기를 바랐다. 단단히, 누구보다 크게 자랄 바람꽃. 이 날 선 바람을 뚫고 세상에 나온 꽃이니, 다시 한번 이겨 낼 수 있겠지.

그리고 니아가 눈을 떴을 때, 바람꽃은 어설프게나마 다시 줄기를 세우고 일어서 있었다. 그녀의 마법이 통한 것이다. 마정석도 없이 한 것인데.

“괴물이 살려 줬다고 싫어하는 건 아니지?”

꽃은 사람이 아니니 이런 그녀를 싫어하지 않겠지.

니아는 부드러운 손길로 바람꽃의 잎을 쓰다듬었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도, 가능한 일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했다. 꽃이 살아났듯이, 죽은 줄 알았던 레오를 다시 만났으니. 어쩌면 그런 일이 세상에서는 또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니아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걸어 마침내 공작가 앞에 도착했다. 불이 모두 꺼진 공작가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기 위해 조심스레 발끝을 세웠을 때였다.

“도련님?”

놀랍게도, 이 어두컴컴한 밤에 필릭스가 홀로 공작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너…….”

니아를 발견하자마자 서성거림을 멈춘 그가 빠르게 걸어왔다. 니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러한 행동이 무색하게도 순식간에 그에게 어깨를 잡혔다.

“너 대체 어디로, 어딜 갔던…….”

“…….”

“아니야, 돌아와 줘서 고마…… 아니, 아니.”

그는 이상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 보였다.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자꾸만 흔들어, 니아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게 무슨 표정이야.’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었다. 도무지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모습이었으니.

‘분명 같은 사람인데도.’

불현듯 경기장에서 그가 그녀를 보며 태양처럼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 니아가 느꼈던 감정까지도. 분명 얼마 지나지 않은 장면인데,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필릭스의 입술은 한숨을 내뱉고, 말을 하려다 말고 계속 움찔거렸다. 급기야 그는 거세게 한숨을 내뱉더니 니아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는, 너는, 넌……!”

그가 소리 지르는 것은 여러 번 보았지만, 이토록 고통스럽게 내뱉는 고함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이토록 날것의 감정을 내비치는 것도.

“왜 갔어? 왜 갔던 거야?”

“……네?”

필릭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니아의 심장이 또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심리에 동조되는 듯 속절없이.

속이 울렁거려 그의 질문에 빠르게 답할 수가 없었다.

니아가 답을 않자 필릭스 쿠아란은 절망스러운 듯 눈을 감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른 놈을 쳐다봤잖아. 내가 아니라.”

“…….”

“설마 다른 남자를 쫓아간 건 아니었지? 아니라고 해 줘. 그러면 다 용서할게. 돌아왔으니까 다 용서할게…….”

“……뭐를요?”

니아가 오늘 그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던가. 그가 원하던 대로 그의 경기를 보러 갔고, 끝까지 보았다. 그럼 그에게 죄를 지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용서받을 것 따위는 없지만…….

‘왜 애원하는 것처럼 들릴까.’

그냥 그가 원하는 대로 대답하라는 애원, 호소……. 거짓말이라도 달게 받을 것만 같은 목소리. 하지만 필릭스에게 애원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저는…… 뭘 용서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에 필릭스가 지나치리만큼 가깝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 니아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두려워 숨을 힘껏 참았다.

“오늘 네가 내게 어떤 짓을 한 건지 넌 몰라. 그래도 용서할게. 날 버리고 간 것, 날 아프게 한 것…… 전부 다…….”

니아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사실이었다. 필릭스는 다 용서할 생각이었다. 다 없었던 일 셈 치고 넘어가 줄 작정이었다. 니아가 왔으니까. 다시 돌아와 줬으니까. 그것만으로 절망이 다시 희망으로 바뀌었으니까.

‘니아 프레슬리는, 어디로 갔어.’

니아가 사라지는 것을 본 필릭스는 관중석을 헤치고 올라가 물었다. 한 여자가 말했다.

‘니, 니아는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짓더니,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뛰어갔어요.’

‘어디로.’

필릭스가 주변이 다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건 저도, 자, 잘 몰라요, 도련님.’

그 말을 듣자마자 모든 것을 다 부숴 버리고 싶었다. 몸을 잠식한 질투. 분노와 실망, 수치와 걱정, 그리고 다시 분노, 슬픔, 절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년간 죽지 않았던 사랑.

‘이 죽일 놈의 사랑이 말이지.’

니아는 도대체 왜 사라진 걸까. 그 남자를 왜 쳐다봤을까. 그를 왜 따라간 걸까. 따라갔다면 왜…… 도대체 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니아와 다른 남자를 상상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생각과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화가 나다 못해 두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미칠 지경이었다. 니아가 돌아오지 않아서.

처음에는 그저 니아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화를 내고 싶었지만…… 한 시간, 두 시간 지날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설마…….

‘이대로 사라지는 건 아닐 거야.’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예상치 못한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니아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이, 그가 다신 니아를 보지 못하는 것이…….

결국 두려움에 잠식당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니아도, 필릭스도. 그리고 어떤 짓을 해도 멈추지 않는, 니아를 향한 자신의 심장도.

그렇게 암흑에 먹히는 기분으로, 공작가 앞에서 몇 시간이고 오지 않는 니아 프레슬리를 기다린 필릭스였다.

그리고 필릭스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니아가 드디어 입을 뗐다.

“레오를 따라간 건데…….”

“……뭐?”

필릭스의 표정이 일순간 서늘하게 굳었다. 더 이상 애원하던 눈빛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차가워진 그를 보며 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정말 무언가가 틀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레오라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레오의 이름이 너무도 낯설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자 필릭스가 내내 잡고 있던 니아의 팔에서 손을 뗐다.

“……그놈이었어?”

필릭스는 잠결에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니아 프레슬리를 떠올렸다. 개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진짜 개새끼일 줄이야.

“뭔데 그놈을 쫓아가. 그 새끼가 뭐길래? 그딴 새끼가…….”

그가 비웃음과 허탈함을 섞어 중얼거렸다.

니아는 왠지 허전함이 느껴져 팔을 쓸다가, 필릭스 쿠아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어떤 순간에도 레오를 모욕하는 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세요.”

스스로 듣기에도 차가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떻게 다시 만난 레오인데. 그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저렇게 함부로 부르다니. 레오는 필릭스에게 그렇게 불릴 이유가 없었고, 그럴 사람도 아니었다.

“뭐라고……?”

“레오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시라고요.”

니아의 말에 필릭스는 얼어 버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잠시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니아를 입술을 꽉 깨물었다.

“들어가요. 이제.”

어서 이 답답하고 이상한 상황을 끝내고 싶었던 니아는 걸음을 뗐다. 단 한 걸음도 갈 수 없었지만.

“뭐냐고 물었잖아? 그놈이, 그 사람이 너한테 뭐냐고.”

필릭스의 물음에 깊은 한숨을 내쉰 니아는 원망스럽게 그를 쳐다보다, 사실 그대로 답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오로지 사실만을.

“레오는 내 소중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에요.

그러나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필릭스가 니아를 껴안았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그렇게 니아는 그 거대한 품 안에 파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예상치 못한 순간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왜 갑자기……!’

시야가 막히고 숨이 턱 막히는 상황에 오직 청각만이 반응했다. 귓속으로 그의 달뜬 중얼거림만이 들려왔다.

“안 돼, 안 돼. 안 돼…….”

“……?”

“아니야. 말하지 마. 더 말하지 마. 안 돼……. 다른 사람 좋아하지 마. 사랑하지 마. 그러지 마…….”

그리고 그의 품 안에서 니아는 결코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듣고야 말았다. 그건 바로…….

심장 소리.

그의 심장이 너무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심장 소리가 이토록 크게 울릴 수가 있는 걸까. 밖으로 뛰쳐나오기라도 한 듯 이렇게나 선명하게 들릴 수가 있는 걸까.

니아의 귀에는 그의 말보다 그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듯했다.

‘……이건 아닌데.’

그녀를 안고 있는 이 순간에, 이상한 말을 하며, 그의 심장에서 이토록 크게 박동이 울려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떠한 생각이 니아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그 불길한 예감에서 도망치기 위해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필릭스에게 단단히 붙들려 있어서 작은 움직임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니아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을 감는 것뿐이었다.

‘이런 건 안 돼. 이건 아니야.’

그의 심장이 니아를 향해 뛰는 것은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되는 것. 불가능한, 그래, 불가능한 일.

니아는 그를 밀어내기 위해 급히 손을 뻗었다.

“놔주세…….”

“좋아해.”

하지만 필릭스가 더 빨랐다. 중요한 순간에 그는 늘 니아보다 빨랐다. 공작가를 나가려고 했던 순간에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좋아해. 정말 많이 좋아해…….”

“…….”

“내가 너한테 사랑한다고 말하면.”

“…….”

“믿을래?”

그가 니아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니아에게 믿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

바람이 불었다. 아주 찬 바람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니아와 필릭스를 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은 아주 짧았지만, 누구에게는 잔인하도록 길었다.

“……안 믿을래요.”

니아가 필릭스를 밀어냈다. 그가 힘없이 밀려났다.

그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것만 같아서. 아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몰라 두려워서.

그에게 믿지 않는다 답했다. 정말로 믿을 수가 없어 그렇게 답했다.

그는 왜 사랑한다고 하는 걸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째서 필릭스 쿠아란이 니아 프레슬리에게. 그는 도대체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니아 프레슬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할까.

그와 니아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필릭스의 사랑한다는 말이 평범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일들이.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을 위해 십 년간 공작가에서 아픔을 참았고, 그의 아버지는 니아를 이용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필릭스의 저주와, 그 저주를 풀기 위해 그녀가 희생한 시간을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했었다.

공작이 먼저 그녀와의 약속을 깨 버렸지만 니아는 여전히 필릭스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 얘기를 하게 된다면, 필릭스 쿠아란에게 니아 프레슬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니까.

괴물인 니아 프레슬리를 드러내야만 하니까.

‘아…….’

알 수 없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보였던 이상한 행동들. 알 수 없던 말들, 표정, 모두 다. 그 모든 것들을 니아 프레슬리는 알아차리게 되었다.

좋아해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였구나…….

니아는 항상 필릭스가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틀렸던 것이다. 세상에 이유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니아는 쓰게 웃음 지었다.

‘하지만 날 사랑할 수 있는 건…….’

그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니아 프레슬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저주를 풀어 준 것은 그에게 고마운 일일 것이다. 진심으로 니아에게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니아를 더 이상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결말을 니아는 불 보듯 뻔히 알고 있었다.

그는 결국 니아를 무서워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모르트 독테가 그랬듯 니아를 벌레처럼 쳐다볼 것이다. 그동안 그를 속였다고 욕할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그의 몸속에 든 심장이 괴물의 것이라 싫어할지도 모른다…….

니아는 다 싫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해서 그녀가 겪게 될 일들이. 필릭스 쿠아란이 아니라, 니아 프레슬리의 마음속에서 벌어질 괴로움들이.

정체를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정체를 알게 된 후 그가 그녀를 혐오할까 봐 두려워하고. 그러다가 결국 괴물로 태어난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고.

그 과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니아는 전부 다 싫었다.

니아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떨궜다. 왜 수많은 사람 중 그는 굳이 고된 니아를 택했을까.

그의 무지가 미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만 하는 필릭스가 입을 열었다.

“왜.”

“…….”

“왜 안 믿는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니아의 목구멍 사이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와 입을 막았다. 숨을 턱 막히게 만드는 그것은 미움 내지는 원망, 그리고 슬픔일 것이다.

“너…… 정말 몰랐어?”

그는 애원했다.

니아의 눈에 이제야 그가 제대로 보였다. 지금 그가 하고 있는 것은 애원이 맞았다. 짝사랑의 애달픔을 담은 애원. 눈물겨울 만큼 애처로웠다.

“내가 널 어떻게 보는지 몰랐어? 내가 왜 같이 아카데미에 다니자고 했는지 정말 몰랐어? 매일매일, 매 순간 난 온몸으로 티를 냈는데, 그걸 몰랐어?”

그러나 애원하고 싶은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니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몰랐어요.”

체념하듯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필릭스가 잡아먹었다.

“이제는 알잖아.”

그의 말이 맞았다. 이제는 안다.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모르는 사실도 니아는 알고 있었다. 왜 그가 그녀를 좋아해선 안 되고, 니아가 그를 좋아해서는 안 되는지.

그는 사람을 잘못 골랐다. 니아 프레슬리는 그가 사랑하기에 최악의 조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요. 이제 알아요.”

“그럼…….”

“이젠 하지 마세요.”

“…….”

“앞으로는 좋아하지 마세요.”

“…….”

“저는 도련님이 절 좋아한다는 생각만으로도…….”

“…….”

“제가 싫어집니다.”

단호하게 뱉은 마지막 말에 필릭스는 마음이 아플까. 그렇다면 얼마나 아플까.

니아가 버텨야만 했던 그 긴 순간들만큼 아플까?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벌벌 떨리는 니아 프레슬리만큼 아플까?

말이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할 수 있을까. 종이에 베인 것만큼? 칼에 찔린 것만큼? 말에 베인 그는 이 순간이 어떻게 느껴질까…….

필릭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침묵으로 인해 결국 니아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나쁜 사람이 되었구나.’

그의 눈이 벌게져 있었다. 시뻘겋게 변해 니아 프레슬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상처받은 짐승처럼.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눈물이건 욕이건 무언가를 니아에게 쏟아 낼 것 같았다.

마치 불쏘시개가 심장을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아 이상했다.

‘네가 여기서 끝내야 해.’

그러나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 지금 이 순간에 끝내야 모두가 평화로웠다. 더 큰 상처를 받기 전에, 지금.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어요.”

“…….”

“좋아하지 말아 주세요.”

따라붙는 그의 끈질긴 시선을 먼저 피한 것은 니아 프레슬리였다. 먼저 발을 뗀 것도, 먼저 상황을 끝낸 것도, 먼저 멀어진 것도. 모두 니아 프레슬리였다.

니아 프레슬리는 그에게서 도망쳤다.

그를 내버려 둔 채 홀로 공작가로 들어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발걸음을 옮겨 후원을 지나고, 방으로 가는 길이 천 리같이 길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 니아는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서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홀로 고개를 떨궜다.

그의 모습이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가슴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묵직했고, 죄책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가 니아를 사랑해서. 그가 니아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더 빨리 알아차리지 못해서.

‘정신 차려야지.’

니아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두려움에 먹힌 여자가 보였다. 마치 이 엄청난 일을 해결해 달라고 니아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니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족을 잃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렸잖아.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야.’

그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겨우 사랑이다. 다른 감정 하나 보탤 것 없는 순전한 사랑. 무지한 그 사랑을 그가 그만두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럼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 밤은, 니아 프레슬리가 감히 필릭스 쿠아란의 사랑을 끝내 버린 엄청난 밤이었다. 그리고 잠이 들 수 없어,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니아에겐 참 어려운 밤이기도 했다.

다만, 하늘에선 별들이 눈치도 없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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