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차례
1. 다시 봄
2. 너무 이른 꽃
3. 예상치 못한 전개
4. 아팠던 건, 좋았던 건
5. 간단한 결론
6. 빛나는 마정석
7. 선물
8. 난이도의 문제
9. 반짝반짝
10. 레몬 파이
11. 작은 오해
12. 주말의 생일 파티
13. 거짓말
14. 가짜 생일 파티
15. 진실
1. 다시 봄
레오 아리데오는 니아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그녀를 안고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줄 알았어.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살아 있는 줄 알았다면, 나는…….”
“쉿, 괜찮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다시 한번 자신의 품으로 안겨 오는 니아 프레슬리를 레오는 꼭 안았다.
‘나도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살아 있는 걸 알았다면, 다른 건 다 상관없이 너를 찾아다녔을 거야.’
레오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니아의 얇은 등을 매만졌다. 그녀를 만나니, 그녀 없이 보낸 십 년의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레오의 얼굴을 매만지고, 안고, 울던 니아가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친 레오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너…… 다쳤잖아, 다쳤잖아……! 괜찮아?”
니아의 시선이 레오의 팔로 향했다. 그 경기를 본 모양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이 검술 대회는 레오에게 니아를 가져다주었다. 아마 레오는 팔이 잘려 나갔어도 니아를 만난 행복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쳤다고 말하면 다시 울 것만 같은 니아를 향해, 레오가 별것 아니라는 듯 웃어 보였다. 레오가 다쳤을까 봐 걱정하는 니아 프레슬리는 십 년이 지났어도 그대로였다.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살짝 스친 것뿐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른 데는? 얼굴은 괜찮아? 허리는? 다리는? 멍 안 들었어? 피 안 났어?”
다친 팔을 제외하고는 괜찮아 보이는 레오를, 니아가 탐색하듯 이곳저곳 살피기 시작했다. 급기야 레오를 한 바퀴 돌려 보는 니아였다.
“괜찮다니까…….”
하지만 레오는 그녀가 왜 이렇게 걱정스럽고, 한없이 미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지 곧 알 수 있었다.
‘그날을 떠올리고 있구나.’
레오가 니아를 대신하여 맞았던 날, 그것이 레오에 대한 니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니아가 자신을 보며 귀를 막고 덜덜 떨었던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자신 또한 그것이 니아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으니까.
“이런 위험한 대회는 왜 나왔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죽었으면, 나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니아가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했어.”
“아니야, 레오. 다시는 이러지 마. 이런 위험한 거 하지 마. 다치지 마, 아프지 마…….”
니아가 애원하듯 간절하게 부탁했다. 몸은 자랐어도 얼굴과 표정 모두 그대로이기에 레오는 더욱 애틋해졌다.
“그래.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널 찾았으니까.”
황궁 탑 꼭대기에 앉은 둘은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려한 피로연의 시작을 바라보며, 두 손을 맞잡은 채로.
“네가 사라진 뒤에, 고아원에서 혼자 도망쳤어.”
레오의 말에 니아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봤다.
“그럼 고아원이 불타기 전에 도망친 거야? 그래서 살아 있을 수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레오가 갑작스레 니아를 추궁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옥폴린이 불탄걸?”
“그야 직접 봤으니까…….”
“봤다고? 어떻게? 난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네가 살아 있는 줄 확실히 알았다면, 나는…….”
“나는 도망쳤어. 네가 그렇게 맞던 날, 갑자기 누가 어딘가로 날 데려가더니……. 오래 걸렸지만, 널 보려고 도망쳐서 다시 고아원으로 갔어. 그런데 온통 타 버려서 재밖에 남지 않았더라.”
니아는 차마 배가 찢긴 채 산에 버려졌다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레오는 그녀의 능력을 모르고 있었고, 그 끔찍한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미친 사람처럼 고아원 앞에서 불타 죽었을 레오를 기다린 것도, 그러다가 길거리를 떠돈 것도, 십 년간 공작가에서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였다.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니아가 사실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를…… 레오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니아, 미안해. 널 더 찾았어야 했는데.”
레오가 고통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절망의 감정이 느껴졌다.
‘레오는 정말 밝은 아이였는데.’
그녀와 헤어진 뒤 많이 힘든 삶을 살았던 걸까? 많이 아프고, 많이 좌절스러웠던 걸까?
니아는 가차 없이 상대를 무너뜨리던 아까의 레오를 생각했다. 무슨 일들을 겪은 걸까. 그렇게 날카로운 검술 실력을 가지게 될 때까지 얼마나 고생했을까…….
‘레오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 긴 시간을.’
니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지난 십 년의 삶에 대해 물었다. 그녀 없이 보낸 그의 시간들이 궁금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레오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무서워.’
니아는 묻고 나서도 그의 입에서 듣기 괴로운 말이 나올까 봐 두려웠다. 자신처럼 힘든 삶을 산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그는 행복했어야 하는데. 그럴 자격이 넘치고 넘치는 사람인데.
‘난 참 힘들었어. 혼자서 너무 괴로웠어. 너를 많이 그리워했어. 네가 불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었을까 봐, 늘 불안에 떨었어…….’
니아의 마음이 들릴 리 없는 레오는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시작했다.
“고아원에서 도망치고, 그러고 나서 길을 잃고 헤매었는데…… 운이 좋았던 것 같아. 펠링턴 지역의 백작이 날 구해 줬으니까.”
“…….”
“그 후로 백작가에서 일하게 됐어. 그리고 몇 년 뒤에 백작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되었지. 백작에게는 자식이 없었거든.”
“……뭐? 그럼 넌 지금 귀족인 거야?”
니아가 순간 놀라 말했다. 헤어져 있던 십 년 사이에 레오가 귀족의 양자가 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가 왜 자신처럼 불행했을 거라 생각했을까? 같은 고아원에 버려졌지만, 그는 불운을 타고난 니아 프레슬리와는 다른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레오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충분히 빛나고, 행복할 자격이 있는. 니아는 레오가 자신과 같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마음이 한층 편안해졌다.
“뭐, 그런 셈이지.”
떨떠름하게 말하는 레오였지만, 니아는 흥분하여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정말 잘됐다, 레오! 널 양자로 삼아 주시다니, 좋은 분인가 봐.”
“……그래.”
“네가 그동안 잘 지내서 다행이야. 그때처럼 힘들게 살지 않아서. 너라도 행복해서 정말 다행이야…….”
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니아였기에 레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레오 도련님이라고 불러야겠네. 넌 내 가족인데 귀족이 되어 버렸다니, 기분이 이상해. 그럼 새 성을 받은 거야?”
“대외적으로는 레오 블루아르라고 불려. 그래도 니아, 너는 이 이름을 기억할 필요 없어. 나는 그냥 레오 아리데오야. 늘 그랬어.”
“역시 내 레오. 하나도 안 변했어.”
니아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니아도 자신의 그간 사정을 간단히 요약했다. 도망쳐 길을 떠돌다 쿠아란 공작의 눈에 들었고, 하녀로 십 년간 일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자신도 레오처럼 운이 좋게, 공작가의 후원을 받아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고 말하자 레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니아는 레오의 놀란 눈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레오의 말을 듣고 놀랐던 자신의 표정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레오가 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그녀가 장하다는 듯이.
“네가 잘 지냈던 것 같아 다행이야, 니아.”
니아는 그에게 자신도 행운으로 둘러싸인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아 기뻤다. 그녀는 레오 앞에서 예전처럼 밝고 행복한 사람이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 탑 위로는 왜 올라온 거야? 널 쫓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
니아가 레오를 장난스럽게 툭 치며 물었다. 이제야 그가 치료까지 마다하고 이 탑에 올라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냥. 높은 곳에서 황궁을 둘러보고 싶었어.”
레오의 대답에 니아가 싱겁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게 뭐야. 널 따라서 뛰어오느라 난 발이 다…….”
니아는 말하다가 순간 헉하고 멈추었다. 발에는, 상처가 다 나았을 텐데.
“다쳤구나, 나 때문에.”
레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야. 금방 나아. 괜찮아.”
니아가 재빨리 발을 숨겼다. 상처가 다 나은 자신의 발도, 피가 굳어 흉해 보일 발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금방 낫는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잖아. 봐 봐. 어디…….”
“괜찮다니까!”
니아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그녀의 발을 향해 손을 뻗던 레오가 동작을 멈췄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레오. 나는 진짜 괜찮아서 그래. 정말로. 그러니까 보지 마…….”
“……알겠어.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말을 마치자마자, 레오는 탑 건너편으로 훌쩍 건너가 지붕 위를 달렸다. 마치 타고난 검객처럼 날렵한 모습이었다.
“레오!”
니아가 소리쳤지만, 그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을 들고 나타났다.
“또…… 사라지면 어떡해!”
니아가 힘을 뺀 주먹으로 레오를 툭 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혹시나 방금 일들이 자신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자, 이거 신어.”
레오가 조심스레 신발을 내밀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어디를 갔다 온 거야?”
“훔쳤어.”
레오가 니아의 발에 신발을 신기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뭐? 그런 짓을 했다간 안나에게 혼이 날 거라고.”
마치 십 년 전, 그 시절처럼 말하는 니아였다.
레오는 자신도 모르게 그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니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쥐고 쓰다듬었다. 바로 어제처럼 느껴지는 것들, 행복했던 시간들.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생겼다. 니아 하나로, 레오의 세상이 다시 봄을 찾았다.
어둠이 찾아오자 레오는 돌아가야만 한다고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며 니아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아주 잠깐이면 돼. 빨리 돌아올게. 내가 돌아오면…… 그때 같이 살자. 옛날처럼. 많이 늦었지만, 너한테 했던 약속 지킬게.”
마치 전쟁터로 떠나기 전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비장한 말투였다. 도망쳐서 둘이 살자고 했던 그 약속을 꼭 지키겠다며.
니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는 아쉬운 듯 계속 뒤를 돌아보더니,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니아는 레오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아직 식지 않은 그의 온기를 느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나도 필릭스와 한 계약을 지켜야 하는데…….’
니아에겐 필릭스와의 계약이 남아 있었다. 아카데미에서의 생활, 그리고 공작가에서 보내기로 약속한 시간들.
‘꿈에 그리던 레오를 만났는데 계약이나 생각하다니. 정신이 어디로 나갔었나 봐.’
레오가 같이 살자 말했을 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당장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문뜩 든 니아였다.
“정신 차려, 니아 프레슬리. 이제 레오를 만났고, 뭐든 상관없어. 평생 레오와 둘이 살 거야. 가족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레오가 신겨 준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남의 것이라 조금 헐렁했지만, 그것조차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였다.
신발은 마치 레오가 환상이 아닌 실재라는 증거 같았다. 니아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레오의 잔상이 남아 있는 신발을 계속 내려다봤다. 가슴이 벅찼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녀에게 이런 행운이,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올 수 있을까.
‘신에게 이토록 감사할 것이 많은 하루라니.’
어둑한 밤. 니아는 레오가 준 그 신발을 신은 채, 공작가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채 니아는 들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