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황궁 검술 대회 (13/75)

13. 황궁 검술 대회

드디어 황궁 검술 대회 날이 밝았다.

필릭스는 새벽에 방으로 들어와, 자고 있는 니아에게 대회에 꼭 와야 한다고 한 번 더 속삭였다.

니아는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으…….”

“이거 받아. 꼭 와야 해.”

니아는 비몽사몽간에 필릭스가 손에 쥐여 준 작은 돌멩이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스르르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새근새근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필릭스는 다시 잠드는 니아를 보며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이날만을 기다려 온 그였다.

태양이 모습을 감춘 새벽, 그는 달리는 말에 몸을 맡긴 채 황궁으로 향했다.

“니아, 도련님이 널 꼭 데려오라고 하셨다. 반드시 마차에 태워서, 늦지 않게 데려올 것. 내게 다섯 번이나 당부하셨어.”

바게트를 네 개째 입에 물고 책을 보고 있는 니아를 향해 휴가 말했다.

먹는 데 정신이 팔려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니아에게, 그는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좀 드실래요?”

니아가 휴에게 남은 바게트 한 조각을 내밀었다.

“너 먹어…….”

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쩍 마른 몸에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요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 먹고 나와. 오늘은 나라 전체가 정신이 없어서,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게 뻔하다고.”

“…….”

니아가 빵을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엌 구석탱이에 숨어 빵을 먹는 니아를 찾느라 이리저리 헤매었던 휴였다. 그는 새삼 자신의 처지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널 제시간에 데려가지 못했다간, 내 공작가 생활도 끝날 게 뻔하지. 그러니까 협조 좀 부탁한다?”

휴의 말에 역시나 니아가 고갯짓으로 알겠다는 뜻을 전했다. 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불안해, 한 번 더 강조하고는 부엌 밖으로 나갔다.

앉아서 다섯 번째 빵을 입에 무는 니아에게, 공작가 하녀 에보니 레인즈가 다가왔다.

평소 칙칙한 하녀 옷만 입었던 것과 꽤나 다른 화려한 모습이었다. 에보니는 붉은빛이 도는 새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꽃을 달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공작가 하인들에게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들 모두 에슬란 제국의 명실상부 최고의 축제, 황궁 검술 대회를 구경하러 가기 위해 들떠 있었다.

따라서 에보니 레인즈는 오늘만을 고대하며 새 드레스도 사 놓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스스로 꾸몄던 것이다.

“니아, 오늘 너도 검술 대회 구경 가는 거 맞지? 휴 아저씨가 태워다 주시는 거고.”

에보니는 드레스 때문에 니아처럼 쪼그려 앉을 수는 없다는 듯이 허리를 굽힌 채 이야기했다. 붉게 칠한 입술이 니아의 눈에 들어왔다.

“응, 뭐.”

니아의 말에 에보니 레인즈가 부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자신과 달리, 마차를 타고 가다니.

하지만 니아를 계속 쳐다보던 에보니는 역시라는 표정을 지었다.

니아는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는 것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걱우걱 빵이나 씹으면서!

‘역시 니아는 멋있어…….’

요즘따라 에보니 레인즈는 자신의 친구가 더욱 멋있어 보였다. 역시 아카데미 물을 먹은 사람은 다른 모양이었다. 황궁에 가는 일에 저렇게 무심할 수가 있다니…….

“……같이 탈래?”

니아가 갑작스레 물어 왔다.

“진심이야, 니아? 정말!”

에보니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녀가 내심 귀여워 니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래. 같이 마차를 타고 가자니까?”

웃으며 말하는 니아에게 에보니는 다시 한번 꺅! 소리를 질렀다. 공작가 마차를 타고 황궁에 가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니아, 네가 공작가 아가씨였다면, 나는 너의 충실한 하인이 되었을 거야. 너 왜 이렇게 멋있어졌어?”

에보니가 니아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는 내게 차갑게 굴었지만 난 네가 따듯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부터 시작해, 너와 친구가 된 것은 공작가에 들어와 가장 잘한 일이라는 입에 발린 말까지.

갑작스러운 에보니의 칭찬에 니아는 듣기 괴롭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왜 이래, 그만해!”

하지만 어느새 에보니의 들뜬 마음이 니아에게도 전염된 것 같았다.

마차 하나에 설레는 에보니, 예쁘게 옷을 차려입은 에보니. 마치 아카데미에 가던 첫날, 자신의 모습 같았다. 물론 그때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훨씬 더 크긴 했지만.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버린 것을 실감하는 니아였다.

그녀가 이렇게 아카데미에 적응하고, 새로운 흥미를 갖고. 예전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그 도련님과 가까워지고. 귀족과 어울리고, 귀족과 같은 배움의 기회를 얻고…….

지난 십 년간, 공작가에서 보낸 니아의 시간은 더디게만 지나갔었다. 하지만 필릭스와 함께 아카데미를 다니는 이 몇 개월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가면 필릭스의 시합을 볼 수 있겠지……. 당연히 잘할 테고.’

간간이 니아에게 우승하고 싶다 말한 그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지, 아니면 워낙에 잘난 필릭스 탓인지, 그가 우승하는 그림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번에 우승하면 또 얼마나 그 콧대가 올라갈지……. 사람이 인간미 있게, 좀 지기도 하고 그래야지 말이야.’

하지만 필릭스가 누군가에게 밀리고 실망하는 것을 상상하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차라리 필릭스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더 낫겠다 싶은 니아였다.

‘그냥 우승하세요, 도련님.’

그리하여 니아는 그의 승리를 기원했다.

“이리 와, 니아!”

생각에 빠진 니아를 에보니 레인즈가 잡아당겼다.

“왜 이래?”

“설마 이런 꼴로 황궁에 가려는 건 아니겠지? 네가 마차에 태워 준다고 했으니, 내가 특별히 오늘 널 도와줄게!”

에보니는 자신만 믿으라며 니아를 방으로 질질 끌고 갔다. 니아는 다 삼키지 못한 빵을 씹으며, 영문도 모른 채 에보니에게 끌려갔다.

“자!”

“세상에…….”

에보니의 옷장 안을 바라본 니아는 입을 떡하고 벌렸다.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봐, 니아! 오늘은 특별히 뭐든지 다 허락할 테니까.”

“세상에, 에보니! 네가 왜 그렇게 늘 돈이 없나 했더니. 여기다가 돈을 다 쏟아부었구나.”

에보니가 연 그녀의 옷장에는 하녀의 옷장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화려하고, 다양한 드레스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으느라 죽는 줄 알았어. 물론 귀족들이 입는 드레스에 비해 당연히 질이 떨어지고 보석도 진짜가 아니지만……. 그래도 멀리서 보면 우리도 귀족 영애처럼 보일 거라고!”

에보니가 그렇게 말하며 짙은 초록색 드레스를 니아의 몸에 대보았다.

“음, 이것보다는…….”

“됐어. 뭐라도 묻으면 어쩌려고. 난 괜찮으니까…….”

“씁! 잔말 말고 이 에보니 레인즈만 따라오세요, 아가씨!”

신나게 이것저것 몸에 대보는 에보니였다. 결국 니아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이거다!”

에보니가 옅은 하늘색 드레스를 니아의 몸에 대보더니 소리쳤다.

“입어 봐, 니아. 우리 머리 장식도 꽂자.”

니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에보니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니아도 더 이상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하녀복을 입고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니아는 드레스를 들고 팔과 다리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런 옷도, 이런 순간도, 그녀에게는 너무 어색해 자꾸 팔이 엇나갔다. 옷을 끌어 올릴 때마다 너무 심하게 휘청거려 그때마다 에보니가 니아를 단단히 잡아 줘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하늘빛 드레스를 다 입은 니아. 그녀는 멋쩍은 듯 드레스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이쯤 되면 에보니가 한마디 할 만한데, 아무 소리가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에보니에게 물었다.

“이상해……?”

바라본 에보니의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역시나 어울리지 않는 걸까?

“정말…… 정말 예쁘다, 니아!”

에보니가 감탄하며 외쳤다.

평소 칙칙한 옷만 입고 다니던 니아였다. 요새는 조금 달라졌지만 몇 년간 우울한 표정만 짓고 있고, 행복해 보이지가 않았는데…….

하지만 이렇게 드레스를 입혀 놓으니 정말로 공작가 영애가 따로 없었다. 짙은 갈색 머리가 윤기로 빛났고, 달라붙은 드레스는 니아의 얇은 허리를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아래로 부드럽게 퍼지는 하늘빛 드레스를 입은 니아는 막 피어난 한 떨기 바람꽃 같았다.

“자, 이제 완성이야.”

에보니는 드레스를 입은 자신이 어색해 자꾸 두리번대는 니아의 머리에 진주 장식을 꽂아 주었다.

“이상한 것 같은데…….”

중얼거리는 니아를 향해 에보니가 활짝 웃어 보였다.

“내가 남자라면, 너에게 당장이라도 사랑에 빠지고 말걸. 너무 잘 어울려. 정말 예쁘다고, 니아 프레슬리!”

에보니의 말에 니아는 그제야 조금 설레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카데미복보다도 훨씬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는데, 그녀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빨리 가자. 휴 아저씨가 기다리시겠어.”

에보니는 니아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두 사람 다 하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큰 마차에 한 명 더 태운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요? 어차피 목적지는 똑같은데, 상관없잖아요!”

소리치는 에보니와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니아였다.

“이번 한 번만이다.”

제발 같이 마차에 타게 해 달라며 애원하는 두 사람을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휴는 마지못해 허락하고 말았다.

“혹시나 도련님께서 아시게 되면,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니아의 말에 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타라고 손짓했다. 두 사람은 그가 마음을 바꿀세라 재빨리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처음 타 본 에보니는 신기한 듯 고개를 두리번대며 화려한 마차 안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만져 보고, 심지어는 이거 진짜냐며 두들겨 보기까지 했다.

“와아, 니아! 이렇게 풍경이 빨리 움직이다니, 너무 아름답다.”

창문 밖으로 태양과 마을이 빠르게 지나가자 에보니가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그녀는 니아가 아카데미에 가던 첫날 차마 입 밖으로 뱉어 내지 못했던 말들을 신이 난 듯 조잘댔다. 니아는 그런 에보니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필릭스 앞이라 너처럼 좋아하지 못했어. 필릭스에게는 별것 아닌 일일 테니,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제는 니아 자신에게도 익숙해진 풍경과 장소들이었다.

“그렇지. 특히나 저녁 시간에 더 아름다워. 이 언덕을 지날 때쯤 해가 지기 시작하거든.”

니아는 손끝으로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니아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주던 에보니는 황홀하다는 듯 두 손을 모았다.

“넌 항상 이 풍경을 보는 거구나. 게다가 아카데미에서 공부까지 하고……! 네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나도 한번 공작가를 나간다고, 짐 싸 들고 나가는 척해 볼까?”

순수하게 물어 오는 에보니의 모습은 니아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니아는 잠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복잡한 사정이 있어. 아직도 필릭스 도련님이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니아는 말하다 슬쩍 에보니의 눈치를 봤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에보니의 눈에는 그녀가 너무 부럽지 않을까? 같은 하녀 처지인데도 자신은 일도 안 하고, 하는 것이라고는 아카데미에 다니며 공부하는 것뿐이니…….

“저기, 에보니. 미안해. 나만 아카데미에 다니고…….”

니아의 말에 에보니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만 아카데미에 다니고, 갑자기 후원을 받고 있잖아. 게다가 나는 이제 일도 안 하고.”

“니아, 설마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에보니가 미간을 구긴 채 니아의 손을 꼭 잡았다.

“니아, 처음에는 나도 무슨 일인가 했어. 공작가를 나간다고 짐까지 싸던 네가 갑자기 아카데미를 다닌다고 하니까.”

“…….”

“게다가 넌 말도 잘 안 해 주고……. 그게 서운했다면 서운했지 다른 건 절대 아니야. 난 오히려 좋은걸? 네가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얼마나 밝아졌는데!”

“내가 밝아졌어?”

니아의 물음에 에보니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지금까지 내가 본 너 중에 가장. 그리고 난 네가 아카데미에 가게 돼서 공작가를 떠나지 않은 것도 너무 좋아. 넌 내 친구잖아!”

그녀의 말에 니아는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은 에보니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에보니는 어째서 이렇게 자신을 아껴 주는 걸까? 늘 무심하게만 대했는데.

“난 너한테 해 준 것도 없는데.”

니아의 말에, 에보니가 잡은 두 손을 더 꼭 쥐었다.

“때로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어, 니아. 내가 처음 공작가에 들어왔을 때 또래라곤 너뿐이었어.”

새로 들어왔다고, 잘 부탁한다며 밝게 이야기하던 열다섯의 에보니가 떠올랐다. 병이 있다고 했는데도, 몇 번이나 일부러 차갑게 대했는데도.

“다른 귀족 집에서 맞고 쫓겨나, 운이 좋아 공작가로 왔었어. 그때 내가 공작가에 니아 네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했는데.”

“…….”

“네가 있어서, 그때의 내가 버텼어, 니아.”

“에보니…….”

니아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감동받은 표정은 처음 본다, 니아. 너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구나?”

어색한 이 얼굴을 에보니는 감동받은 표정이라고 말했다. 아, 지금 내가 그런 얼굴이구나. 중얼거린 니아는 어색하게 웃다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에보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또 뭐가?”

장난스레 묻는 에보니를 향해 니아는 말없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뭐가 미안하고 고맙냐니까?”

에보니를 보는 니아의 눈 속에 미처 감추지 못한 슬픔이 비쳤다.

네게 말하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는 게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이런 나를 아껴 줘서.”

순간 에보니 레인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눈의 그녀는 곧 참지 못하겠다는 듯 시원스레 입을 벌렸다. 금세 마차 안은 그녀의 싱그러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넌 참 진지하기도 하지. 응, 맞아. 난 네가 좋아, 니아!”

그녀의 웃음에 답하듯 니아도 밝게 웃었다. 우정을 주고받는 이 순간만큼은 니아 프레슬리도 평범한 여자아이가 된 것 같았다.

한참을 까르르대던 두 사람이 웃음을 멈출 때쯤, 니아는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나도 하녀 일을 좀 도울게. 너무 나만 생각했었나 봐.”

그 말 한마디에, 훈훈한 분위기에 잠겨 있던 에보니는 당황했다.

“아,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야. 한 사람 몫이 얼마나 큰지 잘 아는걸.”

에보니는 잡고 있던 니아의 손을 놓았다. 갑작스러운 니아의 말은 에보니의 심장을 쿵 떨어뜨렸다. 손에 땀이 찰 정도로.

‘네가 아카데미에 다닌 이후로 오히려 일이 줄었어…….’

그랬다. 니아가 일을 하면 그 일을 뒤처리하느라 늘 다른 사람들이 더 고생했던 것이다.

넌 하녀 일에는 전혀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말을 애써 삼킨 채, 에보니는 니아를 향해 겨우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이상함을 느낀 니아가 그녀의 표정을 살피려고 했지만 이미 에보니 레인즈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돌린 후였다.

황궁에 도착한 니아와 에보니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에보니는 드레스를 양손으로 잡은 채 종종걸음으로 달려갔고, 그 뒤를 황궁의 모습에 정신이 팔린 니아가 따라가고 있었다.

“정말 아름답고 크다. 온통 황금빛이야.”

에보니의 말에 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대국 에슬란 제국의 황궁은 정말로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온통 황금으로 칠해진 황궁의 모습은 이 나라 황제 후인 엘로이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지난번에 만난 황자가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 그날 그를 만났던 것이 더 꿈처럼 느껴졌다.

특별한 날이니만큼, 오늘은 백성들에게 황궁을 개방한 에슬란 제국이었다. 황궁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이미 황궁에서부터 시장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헉, 니아! 빨리 줄 서야 할 것 같아. 이러다 대회가 다 끝나고 들어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에보니가 줄을 서기 위해 니아를 끌어당겼다.

“잠시만. 도련님이 주신 게 있는데, 이걸 보여 주면 빨리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니아가 품속에서 황궁의 표식이 박힌 조각을 꺼냈다. 새벽에 필릭스가 건네주고 간 것이었다.

잠결에 받았을 때는 돌멩이인 줄 알았지만 확인해 보니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황궁 표식이 새겨진 패였다.

“우와, 대박이다! 이것만 있으면 되는 거야? 이런 거 귀족들만 받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에보니의 물음에 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보니가 ‘정말 사랑해 니아.’라고 외치며 그녀를 껴안았다.

“확인했습니다. 두 분, 따라오십시오.”

노랑빛 망토를 하고 지나가는 병사에게 표식을 보여 주니, 병사가 직접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가 안내해 준 곳은, 대회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자리였다. 그곳에서는 대회 시작 전 연습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게다가…… 황제야. 황제라니, 황제가 보여.’

심지어는 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황제도 잘 보였다.

황제가 앉은 자리와 그가 입은 옷 모두 황금빛으로 빛났다. 심지어는 머리 색까지 연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듯했다.

황제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반짝거렸다.

‘황금색과 붉은색. 나 같은 건 평생 저 근처에도 가지 못하겠지.’

니아는 이 나라 최고의 자리에 앉은 이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낮은 관중석에서, 가장 높은 곳의 황제를 바라보는 니아.

살면서 또 황제를 볼 기회가 있을까? 설사 있다 해도 이렇게 가까이서는 아닐 것이다.

‘아론 황자도 있네.’

황제 옆에는 지난번에 만났던 아론 황자가 있었다. 니아와 만났던 날보다 훨씬 화려한 옷을 입고, 그날처럼 해사한 미소를 백성들을 향해 짓고 있었다. 한 나라의 황자다운 모습을 완벽히 갖춘 그였다.

“니아, 정말 대박이야.”

에보니가 후인 황제와 아론 황자를 슬쩍 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니아도 동감하는 바였다.

고급 귀족들이나 앉을 만한 이런 좋은 자리에서 황족들까지 보다니. 살면서 처음이자 다신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 니아와 에보니는 떨리는 표정으로 함께 자리에 앉았다.

니아의 눈에 경기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보였다. 평민, 귀족 모두 빽빽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니아는 다시 한번 황궁에서 열리는 검술 대회가 이 나라의 얼마나 큰 축제인지 실감했다.

“이 자리를 얻으려고 아버님을 얼마나 졸랐는지 몰라. 얼마나 애교를 떨어야 했다고.”

“나야말로! 하지만 정말 고생한 보람이 있어. 이 자리면 필릭스 도련님의 얼굴이 바로 보일 거야!”

“어떤 갑옷을 입으실지 기대된다. 지난번처럼 은빛 갑옷을 입으신다면, 나는 완전히 빠질 거야…….”

“그날 정말 대단했지! 필릭스 도련님이 우승하고 칼을 들어 올리는 그림이 팔릴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어머, 너 그 그림 가지고 있니? 그거 가지려고 내가 얼마나 애를 썼다고!”

“나도 구하기 힘들었어. 내가 어떻게 구했냐면 말이야…….”

니아와 에보니는 시끄러운 경기장 안에서도 유독 소란스러운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딱 봐도 귀족 집 영애들로 보이는 이들이 깔깔대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종종 보였던, 필릭스의 추종자들 같았다.

‘여기서도 역시나 필릭스는 인기가 많군.’

온몸을 치장한 저 귀족 영애들은 대회장에 온 목적이 필릭스인 게 분명했다.

소문은 들었지만, 필릭스의 인기가 저 정도라니. 왠지 니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필릭스가 다른 사람 같아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은 니아와 에보니가 적당히 흉내만 낸 옷들과는 다르게, 딱 봐도 화려하고 장인들의 노고가 한 땀 한 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보석은 말할 것도 없었고.

‘나름 화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옷이 수수해 보일 정도잖아.’

니아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연한 하늘색과 몸에 딱 맞는 드레스가 은근히 맘에 들었는데.

하지만 저들 옆에 서면 누가 봐도 니아는 하녀로 보일 것 같았다. 순간 가짜 보석들이 박힌 자신의 옷이 조금 부끄러워져 몸이 움츠러들었다.

‘왜 이래, 니아 프레슬리. 이 정도도 내겐 과분하지. 아카데미에 다니더니, 나도 모르게 귀족들 세상에 물들었나 봐. 괜한 비교를 다 하고.’

하지만 곧 자신의 처지를 상기하며 정신을 차린 니아였다. 그녀는 방금 자신의 생각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니아, 도련님이야!”

에보니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필릭스가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경기장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와!!

경기장이 떠나갈 듯 함성이 울려 퍼졌다. 옆의 귀족 영애들도 필릭스를 향해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필릭스 도련님…….’

그는 붉은빛이 감도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큰 몸에 딱 알맞게 붙은 갑옷을 입은 필릭스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매일 보는 그이니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던 니아였다. 하지만 실제로 갑옷을 입고 웅장하게 등장하는 필릭스를 보니, 그녀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또 심장이 아파…….’

니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또 이러지? 너무 큰 환호성 때문일까? 아니면 이 경기장의 열기 때문에?

날리는 짙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긴 필릭스는 잠시 두리번대더니, 한곳을 향해 시선을 멈췄다. 그리고 한번 맞춘 시선을 다른 어느 곳으로도 돌리지 않았다.

‘……날 보고 있어.’

필릭스는 이 수많은 사람들 중 니아 프레슬리를 시간이 멈춘 듯 바라보고 있었다.

“꺅! 날 봤어, 날 봤다고!”

“아니야, 나야! 나라고!”

필릭스가 자신을 쳐다봤다고 우기며 싸우기 시작하는 귀족 영애들을 향해 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나도 착각한 걸까?’

하지만 다시 필릭스를 바라본 니아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보고 있어.’

필릭스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경기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붉은빛의 그는, 감히 눈을 뗄 수 없다는 듯 니아 프레슬리만을 응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한 폭의 그림이라 착각할 만큼 그는 그렇게 긴 시간 미동이 없었다.

니아는 저도 모르게 심장 부근을 왼손으로 꽉 쥐었다.

그때, 필릭스 쿠아란이 움직였다. 정확히는 그의 입술을. 그는 기도하듯 중얼거렸다.

‘니아 프레슬리.’

정적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자, 참가자분들은 다들 이리로 오십시오!”

심판의 안내에 필릭스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짙게 뱉는 숨에서 긴장감이 역력히 느껴졌다. 그도 한참 동안 사람들과 같은 감상을 느끼고 있었던 탓이다. 대상은 달랐지만.

니아를 발견하자마자 누군가 귀를 막은 듯 함성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며, 온몸의 감각이 니아에게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만이 반짝이고 있었고, 이 세상에 그녀만 존재하는 듯 홀로 선명했다.

그렇게 홀로 탐이 났다.

그리하여 이 순간 그에겐 니아 프레슬리가 그림이자 작품이었다. 몇 번이고 앓았던 어린 시절의 열병보다도 더 뜨거웠다.

“에슬란 제국의 황제, 후인 엘로이의 이름으로 황궁 검술 대회의 시작을 허한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황제가 대회의 개막을 명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한번 경기장이 떠나갈 듯 큰 함성이 울려 퍼졌다.

꽤나 많은 지원자들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확실히 기억하기 어려웠지만, 니아는 지난번 연무장에서 본 아카데미 학생들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의 조금은 장난스러웠던 모습과는 다르게, 경기가 시작되자 진지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들이었다.

본격적으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첫 경기 시작합니다! 소년과 중년의 대결! 젊음과 노련함의 싸움이로군요!”

꽤나 중후해 보이는 남자와 갓 성인이 된 듯한 소년이 등장했다. 상반된 두 남자의 대결에 사람들은 환호했다.

칼날이 오고 갔다. 아슬아슬한 검 끝은 소년과 남자의 목으로, 다리로 향했다. 날렵한 쇳소리가 서로에게 날아들었다.

몇 번 칼이 서로 맞닿았을까. 소년은 십여 합도 겨루지 못한 채 스스로 칼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소년을 이긴 남자는 포효하며 자신의 칼을 높이 들어 보였다. 함성이 쏟아지며 관중석이 들썩였다.

‘울고 있어.’

시합에서 진 소년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그에게는 이 시합이 꽤나 간절했던 모양이다. 니아는 그가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소년에 대한 연민이 가시기도 전에 바로 다음 참가자들이 등장했고, 또다시 새로운 승자와 패자가 나뉘었으므로 그는 금방 잊힐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승자와 패자가 생기고, 바로 다음 시합을 치르기 위해 초록 머리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저 사람은…….’

“앨버트 브라이트.”

니아의 중얼거림에 경기에 푹 빠져 소리를 지르던 에보니가 돌아봤다.

“응, 니아? 뭐라고?”

“앨버트 브라이트. 백작가 도련님이셔……. 필릭스 도련님 친구분.”

에보니가 힐끔 그를 다시 보더니 말했다.

“잘생겼다! 그럼 난 저분 응원할게!”

다시 경기장을 향해 비명을 지르는 에보니였지만, 니아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대회에 등장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벌하게 대결을 할 거라고?’

저 장난스러운 도련님이 상대방의 목을 향해 검을 겨눌 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처럼 편안하게 경기를 바라볼 수가 없어진 니아였다.

하지만 경기는 바로 시작했고, 앨버트는 진지한 눈빛으로 상대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앨버트가 상대방의 허리를 칼로 베었다. 피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에 니아는 놀라 멈칫했지만, 피를 본 관중들의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저 사람 너무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경기를 당장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야?’

하지만 니아의 걱정과는 다르게 경기는 계속되었다.

피를 흘린 상대도 전력을 다해 다시 앨버트를 공격했고, 앨버트는 그 공격을 피해 달아났다. 그들의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경기장 바닥에도 피가 더 흩뿌려졌다.

니아는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끔찍하게 여겨져 눈을 감고야 말았다. 사람이 사람을 베고, 또 그것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너무 끔찍하잖아.’

니아는 이 순간에서 벗어나, 그냥 공작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어, 어……!”

눈을 감고 함성의 진동에 자신을 맡기고 있던 니아는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순간, 숨이 헉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칼에 찔렸어. 앨버트 브라이트가…….’

방금까지 상대를 농락하던 앨버트의 옆구리에 칼이 꽂혀 있었다. 순간 방심한 앨버트의 몸에 상대가 마지막 힘을 다하여 칼을 꽂아 넣은 것이다.

“결과는 예상 밖이군요! 시합이 더욱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앨버트는 자신의 몸에 꽂힌 칼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어, 어떡해, 에보니? 방금 칼에 찔렸잖아. 저렇게 놔두면 죽는다고!”

니아가 옆의 에보니를 흔들었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보며 사람들은 어떻게 환호성을 지를 수 있지?

“니아, 왜 그래?”

에보니가 당황해 소리 지르는 니아를 향해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방금 사람이 찔렸잖아!”

니아의 말에 에보니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많이 놀랐구나, 니아. 처음 경기를 보면 그럴 수 있지.”

“…….”

“하지만 경기 중에 목이 잘리는 사람도 있다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게,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니아, 봐 봐. 지금 병사들이 들것에 저 도련님을 실어 가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귀족가 자제분들이 죽는 일을 막기 위해 바로 옆에서 의원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의원이 있다고, 죽을 사람이 사는 것은 아니잖아. 저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러면……!”

“그러면 운이 나쁜 거겠지.”

“…….”

“하지만 운이 좋으면 엄청난 부와 명예도 얻을 수 있잖아. 내게도 저런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갔을지도 몰라. 내 인생을 한번 걸어 보는 거지!”

다시 신난다는 듯 말하는 에보니였다.

니아는 지금 있는 이 대회장과 검술 대회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두려워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해도 환호성만 들려올 이 공간이.

그리고 동시에 떠오른 생각은, 필릭스 쿠아란 또한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검술에 있어서는 완벽을 자부하는 그지만,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필릭스 쿠아란은 신이 아니었고,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앞이라고 해서 무뎌지는 것은 아니니까.

니아 프레슬리는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겨우 치맛자락을 잡았다.

‘검술 대회가 이렇게 잔인한 곳인지 몰랐어.’

곧장 필릭스 쿠아란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가 앨버트 브라이트처럼 칼에 찔리거나 어딘가 다치게 된다면 너무도 끔찍할 것 같았다.

“도련님이 다치면 안 되는데…….”

물어뜯는 입술 사이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새어 나왔다.

‘도련님에게 칼이 겨눠진다는 상상만으로도 아파. 심장이.’

그 후 계속 이어진 경기를 니아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눈은 경기장 쪽으로 향해 있었지만 정신은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제는 몇 번의 경기가 지나갔는지도, 아는 사람이 나왔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니아였다.

“와, 니아! 방금 봤어? 저 사람 벌써 열 번째 연승이야!”

정신이 나가 있는 그녀를 에보니가 흔들어 깨웠다.

“뭐라…… 뭐라 했어?”

제대로 듣지 못해 그렇게 중얼거리는 니아를 향해 에보니가 손가락으로 경기장을 가리켰다.

“저기, 저 모자 쓴 사람 말이야! 벌써 열 번이나 경기를 했는데, 전부 다 이기고 있다니까?”

에보니의 손끝에 걸린 남자는 갈색 모자를 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니아는 왠지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그는 날렵하게 몇 번의 공격만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미련 없다는 듯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그의 손에 들린 칼은 피를 뚝뚝 흘렸다.

‘저 칼에 몇 명의 피를 묻힌 거야…….’

“그래, 경기가 열릴 때마다 저런 사람이 꼭 하나씩 나온단 말이야. 이게 경기의 묘미지! 안 그래, 니아?”

에보니의 말에 니아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를 쓴 남자의 칼끝은 너무나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자비를 모르는 사람처럼 상대를 끝까지 몰아넣었다.

아무리 그런 경기라지만.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밟고 올라가 승리를 취하는 경기라지만……. 사람에게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승리를 하고도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은 니아를 긴장시켰다. 왠지 인간 같지가 않았다.

‘저 사람이랑 필릭스가 경기를 한다면, 필릭스가 다칠지도 몰라. 필릭스가 아무리 검술에 있어 천재라고 해도 방심하면 끝이야. 방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쩐지 저 사람은 정말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그녀는 경기장에서 눈을 뗄 수도, 떼지 않을 수도 없었다. 부질없는 바람임을 알지만,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디게 흘러 필릭스가 이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필릭스 도련님이야!”

하지만 에보니가 소리를 질렀고, 니아의 바람을 알 리가 없는 필릭스가 당당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그 기다림이 지루했다는 듯이 태연하게.

옆의 귀족 영애들은 또다시 필릭스를 향해 경기장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주위 사람들의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것은 물론이고, 그녀들이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가기 위해 서로를 밀치는 바람에 난간이 흔들릴 정도였다.

“저 날카로운 눈빛이 너무 멋있다고!”

“이번에도 우승은 필릭스 도련님 거예요! 여기, 여기 좀 봐 주세요!”

“날 봤어, 꺄악……!”

하지만 니아의 귀에는 그런 말들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필릭스 쿠아란이 걱정될 뿐이었다.

지체 없이 경기가 시작되었다. 필릭스는 검술의 신이 재림한 것처럼 날카롭게 상대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먼저 다리를 공격해 상대의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고, 관중들이 눈 한번 깜빡일 찰나에 그의 무릎을 꿇렸다.

모든 것이 그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듯 보였고, 바로 앞의 남자를 가지고 노는 모습은 우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필릭스의 상대는 한참 동안 맥을 추지 못하다 결국 스스로 칼을 놓아 버렸다.

승리의 함성에 몸을 맡기며 필릭스는 니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녀의 떨리는 마음도 모르는 채로, 환하게, 아주 환하게. 부서지는 햇살처럼 아름답게, 눈물이 날 정도로 찬란하게.

자랑하듯 짓는 미소가 그렇게 니아에게로 왔다.

“필릭스 도련님이 웃는 건 처음 봐! 저 모습, 저 모습은 평생 간직할 거야!”

그 순간 니아는 필릭스에게서 누군가를 겹쳐 보았다.

아마도 살아 있었다면 기사를 꿈꾸며 이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하니 아름다운 사람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레오, 너도 날 보며 저렇게 웃었을까.’

레오는 니아에게 습관처럼 기사가 되고 싶다 말했다.

그는 아버지인 퍼시를 따라 검술을 연습했고, 끝까지 니아를 지키기 위해 애썼다. 선하고 바른 아이였다. 죽지 않고 그대로 자랐더라면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기보다는 누군가를 지키는 정의로운 기사가 되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목이 메어 왔다. 레오 아리데오가 이젠 그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게. 니아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열 살에 머무른다는 게. 그래서 니아 프레슬리는 죽을 때까지 레오 아리데오가 꿈을 이루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게…….

다시 쳐다본 그 자리에는, 레오의 잔상이 아닌 필릭스 쿠아란만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니아는 아릿해진 마음을 다잡았다. 여전히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그 후로도 필릭스는 연속해서 승리만을 거머쥐었다.

그가 검을 들 때마다, 또 필릭스를 향해 누군가 검을 겨눌 때마다 니아의 심장이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필릭스의 압도적인 실력으로 인해 모든 시합은 빠르게 끝났고, 어느덧 경기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마지막 경기야, 니아! 역시 아까 그 남자와 필릭스 도련님이 붙게 됐어! 정말 올해 경기는 최고야, 최고!”

정말이었다. 모자를 쓴 사내가 떨어지기를 바랐지만 그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저 사람은 안 돼. 저 사람은 위험해.’

알 수 없는, 하지만 더없이 강렬한 예감이 니아의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로 필릭스와 모자를 쓴 사내의 마지막 경기가 시작되었다.

관중들도 긴장되는지 경기장이 고요해졌다. 결승전을 바라보며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날 선 침묵만이 가득 찬 경기장에, 두 남자의 칼이 시끄러운 쇳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제발, 제발…….’

니아는 두 손을 모으고 경기를 바라보았다.

이전 시합들에서는 상대방을 빠르게 제압하던 두 사람이 서로 맞붙자 쉽지가 않은 듯 팽팽하게 칼날을 부딪쳤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을 짓던 필릭스도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필릭스를 상대하는 남자의 팔도 힘겨운 듯 떨렸다. 두 사람 모두 인간 같지 않은 실력으로 서로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필릭스의 경기를 지켜보는 니아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니,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경기를 하며 처음으로 힘에 겨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당장이라도 경기를 중단시키고 싶었다.

순간, 남자의 날카로운 칼이 필릭스의 볼을 스쳤다. 경기장의 관중들은 놀란 듯 순간 탄식을 내뱉었다.

“피가 흐르잖아…….”

필릭스의 볼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니아는 너무 놀라 입을 벌렸다.

그녀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필릭스가 남자의 팔을 빠르게 베어, 그의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다. 검을 놓친 남자는 당황했는지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필릭스가 그를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빠르게 칼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필릭스를 막아서지 못한 남자는 밀려나고 있었다.

일 초, 이 초, 삼 초…….

정적이 흘렀다.

와아!

승리의 칼을 높이 들어 올린 필릭스와 함께, 올해의 우승자를 맞이하는 에슬란의 백성들은 오늘 중 가장 커다란 함성을 내질렀다. 에슬란의 깃발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흩날렸다.

‘정말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야…….’

몸에 힘이 다 빠진 니아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온몸의 피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신께 감사를 드려야겠네. 아마도, 내 인생 처음으로.’

니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니아 자신에게는 늘 고되게 굴었던 신이 타인을 위한 기도는 들어주었다. 괘씸한 신이었으나 기뻤고, 그래서 감사했다.

니아는 반쯤 뜬 눈으로 경기장을 다시 바라봤다. 기운이 다 빠져 눈을 뜨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필릭스의 우승의 순간을 기억해야 하니까.

‘많이 다친 건가, 저 사람……?’

하지만 이상하게도 힘겹게 뜬 눈은 패한 남자에게로 향했다. 마음과는 달리 자꾸만 시선이 갔다.

모자를 쓴 남자는 자신의 팔을 감싼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결국 팔을 누르며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쓰고 있던 갈색 모자가 힘없이 벗겨졌다. 경기 내내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순간, 니아는 모든 것을 잊고 벌떡 일어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 선한 눈동자. 저 얼굴은 분명했다. 자신이 그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 어떤 순간이라도, 그리운 저 얼굴을 니아는 기억했다.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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