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현실 (12/75)

12. 현실

니아는 눈물에 젖어 잠에서 깼다. 꿈을 꾸며 자신도 모르게 운 모양이었다. 필릭스의 베개가 다 젖어 있었다.

“이 꿈은 늘 이렇게 끝나지. 끔찍하게도…….”

니아는 계속 흐르는 눈물과 잔뜩 흘려 버린 땀을 닦으며 이불 속에서 벗어났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는 새벽이었다. 적막 속, 니아와 동그란 달만이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악몽을 꾼 날이면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힘들었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니아 스스로 자꾸 과거에 빠져들어 갔다.

‘안 돼. 이러지 말자. 자꾸 떠올리지 마. 미쳐 버리기 전에 네가 멈춰야 해.’

니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커다란 인영이 눈에 걸렸다.

‘필릭스……?’

필릭스가 침대 앞 소파에 몸을 구기고 잠들어 있었다. 그의 큰 키에 맞지 않는 작은 소파였다.

‘불편할 텐데.’

니아는 담요를 들고 살며시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담요를 덮어 주며 아까 전 필릭스의 따듯했던 손길을 생각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보살핌이었다.

니아는 필릭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조각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잘생기기는 참 잘생겼지.’

솔직하게, 필릭스의 얼굴은 불공평했다. 왜 신이 이 남자에게만 모든 것을 다 줬는지 따지고 싶을 정도로.

그를 피해 다니던 시절에도 얼굴 하나는 인정하는 바였다. 그리고 요새 자꾸 자신에게 예고도 없이 얼굴을 들이밀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 니아였다.

‘공작가 공자님에, 천재에, 뭐 얼굴까지 이렇게 만들어 놓냐.’

괜히 투정해 봤지만, 잠든 필릭스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날렵한 콧날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입술도 보였다. 번듯한 이마가 턱까지 매끄럽게 이어져 있었다.

잠이 든 그의 얼굴에서는 평소 종종 보이던 오만함과 날카로운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아이처럼 순한 모습이었다. 니아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필릭스는 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야. 살리길 참 잘했어. 그동안 수고했다…… 니아 프레슬리.’

이 순간, 그가 그녀의 비밀을 모른다는 것이 다행처럼 느껴졌다. 니아가 그를 대신해 십 년을 아팠다는 것을 그가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사이는 될 수 없었겠지.’

복잡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니아 한 사람으로 족했다.

‘영원히 이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기를.’

소망을 빌었다. 자신과 필릭스, 두 사람을 위해. 지금의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 큰 욕심은 아닐 거라는 믿음으로.

니아는 그녀를 간호하다 잠든 것이 분명한 필릭스를 향해 붕대를 감지 않은 쪽 손을 뻗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제멋대로 손이 움직인 것이다.

굳게 닫힌 눈꺼풀에 손끝이 닿은 순간, 니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불에 덴 듯 움찔거리는 손을 황급히 내리려 했다.

빨리 내렸어야 했는데.

이미 필릭스는 눈을 떠 니아를 보고 있었다.

“……니아?”

필릭스가 나른한 눈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니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잠에 푹 빠져 있던 사람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이 맞닿은 순간, 왠지 시간이 정지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필릭스의 눈동자는 심연과 같았다. 마치 니아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은 깊은 바다색. 그의 눈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순간은 마치 영원처럼, 니아를 덮쳐 왔다.

“어디가 안 좋은 건가?”

갑자기 필릭스가 니아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니아의 얼굴이 커다란 손에 의해 반쯤 다 가려졌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필릭스는 멍하니 굳어 있는 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어쩐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니아?”

“물…….”

그제야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 말이나 뱉긴 했지만 여전히 몸은 굳어 있는 채였다.

“……뭐야, 목이 마른 거였어? 누워 있어. 가져올게.”

필릭스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애석하게도, 그가 방에서 나갈 때까지도 니아는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필릭스가 물을 전해 주고 다시 침대에 눕혀 줄 때에도, 심장의 떨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러다간 필릭스가 터질 듯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상해. 왜 이렇게 심장이…….’

“아직 몸이 안 좋은가 본데……. 혹시 모르니 해열제를 먹자.”

필릭스가 벌게진 니아의 이마를 짚어 보고, 자신의 이마와 번갈아 짚으며 열을 확인했다.

그는 달뜬 얼굴로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니아가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마주친 짙은 바다색 눈동자.

벌렁이는 심장 탓에, 필릭스가 다시 소파로 돌아간 뒤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니아였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니아는 필릭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먹은 약이 잘못되었는지 계속 심장이 뛰고, 식욕도 없었다.

“니아, 아파도 먹어야 낫지. 날 봐서라도 좀 먹어 봐.”

필릭스는 거의 애원했다. 마치 단식투쟁을 하는 자식을 둔 부모 같았다.

반면 니아의 마음속 외침.

‘그쪽을 쳐다볼 수가 없다고요!’

필릭스는 못내 걱정스럽다는 듯, 어제처럼 니아의 입에 직접 수저를 가져다 대었다. 순간 니아는 또 숨이 멎는 경험을 했다. 어색한 몸짓으로, 그를 의식하며 로봇처럼 입을 벌렸다.

자신이 음식을 어떻게 씹어 어떻게 넘기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니아였다.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음식도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정말 왜 이러는 거야.’

필릭스가 빈 그릇을 길리에게 전해 주러 간 사이, 니아는 그제야 살았다는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신경도 쓰이지 않던, 붕대를 감은 팔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단단히 감은 붕대를 보자 니아는 또다시 어제 모르트 독테가 저지른 만행이 떠올랐다.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차올라 왔다.

니아는 멀쩡한 손으로 (사실 양팔, 양손 다 멀쩡했지만.) 포크를 쥐고 식탁을 쾅 내리쳤다.

‘남의 몸은 그렇게 잘 써먹더니, 그깟 둘러대는 거 하나 못 해 가지고……!’

길리에게 빈 접시를 주고 약을 받아 오던 필릭스는, 그런 니아의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니아가 다친 팔 때문에 많이 속상한가 보구나…….’

다 나을 때까지 자신이 그녀의 오른팔이 되어 줘야겠다 다짐하는 필릭스였다.

아까와는 달리, 니아는 필릭스가 제발 연무장으로 꺼져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니아, 그냥 내가 계속 여기 있을까?”

필릭스가 제발 자신을 붙잡아 달라는 듯 물었다.

‘제발 가라, 가!’

“아니오. 제발 그스르그으(가시라고요).”

니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카데미 안의 모든 학생들이 그녀와 필릭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필릭스가 강의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는 이 순간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람 하나로 확연히 달라진 공기.

특출한 외모와 그의 분위기가 공간을 점령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필릭스에게 이끌렸다.

물론, 그 옆에 딱 붙어 있는 니아에게도 시선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니아는 너무 부담스러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특히나 저 여학생들의 눈동자. 니아는 자신을 녹여 버릴 듯 강렬하게 노려보는 여학생들의 눈동자가 신경 쓰여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아픈 널 두고 가면 내가 어떻게 편한 마음으로 연습을 하겠어. 옆에서 네 필기라도 대신 해 주는 편이 낫지.”

말려도 말려도 결국 교실까지 니아를 따라온 필릭스가 이제는 계속 교실에 머무르겠다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를 봤다간 아침처럼 가슴이 뛸까 봐 눈을 내리깐 채로, 니아는 왼쪽 팔로 필릭스를 쿡쿡 찔렀다. 그리고 조용히 그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제발 가세요…….”

필릭스가 자신을 보지도 않고 말하는 니아를 향해 속상하다는 듯 어깨를 떨구더니, 결국 기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어. 대신 시간 내서 중간에 꼭 올게.”

니아는 제발 그가 시간을 내지도 말고, 그래서 오지도 말기를 바랐다. 이런 속마음을 필릭스가 알아주면 좋으련만.

그가 떠나고, 역시나 니아에게는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니아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붕대를 감은 오른쪽 팔을 내밀었다.

“하하, 우리 도련님이 워낙 친절하셔서…….”

하지만 필릭스의 추종자 중 한 명인 할로나 허니조차도 니아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필릭스가 친절하다고?’

결코 성립할 수 없는 명제였다. 아카데미생 중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윽.’

말을 뱉자마자 민망한 것은 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짙은 후회감이 밀려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친 거냐?”

시저 카르만이 수업 하나가 끝나자마자 니아에게 와서 물었다.

니아는 그냥 그렇게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 설명을 하자니 너무 길었고, 또 간간이 거짓말도 섞어야 했다. 차라리 원하는 대로 생각하게 놔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널 주려고 쓴 건 아니지만, 오늘 내가 한 필기를 봐도 좋아.”

시저는 차갑게 그의 공책을 니아에게 던진 후 돌아섰다.

‘웬일이야?’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지만, 곧 아예 처음부터 싹 다 베껴야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니아였다.

다음 수업이 끝나고도 시저는 필기를 한 종이 두 장을 던져 주었다. 그러고는 말도 없이 떠나려는데, 그런 그를 니아가 붙잡았다.

“너라도 있어야 말을 안 걸지.”

누군가 곁에 있어야 사람들이 덜 다가올 것 같았다. 여전히 하이에나처럼 니아를 바라보는 사람이 이 방 안에 한둘이 아니었다.

“귀찮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은 이미 니아 옆에 앉아 있는 시저 카르만이었다. 니아는 그에게 눈썹을 찡긋거렸다.

“뭐라고 말 좀 하시지.”

비위가 상한 얼굴로 시저가 중얼거렸다. 이딴 침묵에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쓸 수 없다는 듯이.

그의 말에 니아는 아침에 자신에게 있었던 기이한 현상에 대해 상담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말이지, 정말 신기한 일을 겪었어.”

“뭔데.”

“나 사실은……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거든.”

“그런데.”

뭔가 불길했다. 시저의 촉이 빨간 불을 세웠다.

“게다가 나는 아카데미를 일 년 다니고 바로 공작가를 떠날 생각이었어. 아니, 지금도 떠날 생각이야, 당연히.”

“그래서.”

“내가 공작가를 떠나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그 사람이 나를 너무 괴롭게 해서거든. 복잡하긴 한데, 대충은 그래. 그 사람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

“이제는 그렇게 싫어하지 않아.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

“어젯밤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더니 그 사람을 쳐다도 보지 못하겠는 거야. 나는 이제 그 사람을 싫어하지도 않는데 말이지. 왜 그런 걸까?”

시저 카르만의 촉, 칭찬할 만하다.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저의가 뭐지…… 니아 프레슬리?”

시저가 똥 씹은 얼굴로 물었다. 누굴 놀리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지금 내가 겪은 이 현상에 대해 학문적인 대화를 하고 싶어서지. 너도 내가 이렇게 된 원인이 궁금하지 않아?”

니아의 대답에 시저는 정말로 끔찍한 표정을 보였다.

혹시나 니아 프레슬리가 자신을 놀리는 것은 아닌지 심히 고민이 되었다. 저렇게까지 바보일 리가……?

“팔을 다쳐서 그런가? 너 혹시 의학도 좀 알아? 뼈가 부러지면 이런 증세가 생길 수 있니?”

시저 카르만, 또다시 정답. 니아는 바보가 맞았다. 그것도 아주 멍청했다.

“니아 프레슬리, 정신 차려. 이딴 이야기나 말할 거면 나한테 말 걸지 마. 아예 내 주변 십 미터 안으로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말란 말이야. 이런 건 제발 너 스스로 깨달으라고.”

시저가 니아의 머리를 꾹 눌렀다.

니아는 ‘아, 왜 이래?’ 하며 머리에 올린 시저의 손을 치웠다.

하지만 마음은 조금씩 편해지고 있었다. 시저의 저 하찮게 보는 표정이 니아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했기 때문이다.

시저 카르만이 저렇게 나올 정도라면 역시나 바보 같은 고민이었던 거겠지? 부질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아 절로 웃음이 흘렀다.

니아는 장난스럽게 입 모양으로 ‘고마워’ 말했다. 시저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기다가, 정말 별꼴을 다 본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내가 어제 본 천문학개론 말인데…….”

새로운 주제를 꺼내는 시저의 말에 눈을 반짝이던 니아가 석상처럼 굳었다.

“둘이 뭐 해?”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무게감이 더해지고,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뭐 하냐고.”

“필릭스? 네가 또 왜…….”

앞머리로 가려진 시저의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로 당황이 드러났다.

“둘이 재밌어 보이던데.”

착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표정이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보지 못했지만 시저에게는 너무도 잘 보였다.

니아 프레슬리에게 너희 도련님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신호를 보내려는데, 시저 카르만의 눈에 바보처럼 멍하니 굳어 있는 니아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자연스레 시선이 조금 더 아래로 가, 니아의 어깨에 얹혀 있는 필릭스 쿠아란의 팔이 보였다.

은근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필릭스 쿠아란과, 필릭스 쿠아란의 팔이 걸쳐져 있는 니아 프레슬리. 니아 프레슬리는 로봇처럼 숨도 어색하게 내쉬고 있었다.

‘그런 거로군……?’

시저 카르만은 수재답게, 니아 프레슬리가 한 말과 지금의 상황을 종합하여 가장 정답에 가까운 판단을 내렸다.

니아 프레슬리가 시저가 아닌 자신을 보도록 몸을 돌리는 필릭스 쿠아란. 그런 그의 눈을 쳐다도 보지 못하는 니아 프레슬리.

‘소가 웃다가 토하겠구먼.’

이 상황이 너무도 우스워지기 시작한 시저 카르만이었다.

‘바보 같은 것들.’

필릭스가 그동안 눈치 없는 니아 프레슬리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그리고 또 얼마나 고생할지 눈에 훤히 보이는 시저였다.

‘뭐, 상관없나.’

시저 카르만은 미련 없다는 듯 자리를 떴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다 니아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니아, 네 계획은 부질없는 듯. 이미 발목이 단단히 잡혔는지도?”

시저의 말에 니아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고, 필릭스는 시저의 뒷모습을 가늘게 뜬 눈으로 좇았다.

시저 카르만이 자리로 돌아간 후, 필릭스는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시저 카르만과는 언제부터 친해졌지?”

그렇게 물으며, 필릭스는 니아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제야 니아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자연스레 숨이 내뱉어지자, 잠시 정지한 것만 같던 사고도 다시 시작되었다.

“언제부터더라…….”

니아는 언제부터 시저가 편해졌는지를 생각하다, 또다시 쏠린 시선에 입술을 깨물었다.

“도련님, 검술 대회가 얼마 안 남았는데 연습하셔야지 자꾸 이렇게 오시면…….”

“어떻게 친해졌냐니까.”

필릭스가, 자신이 물어본 건 그게 아니라는 듯 부드럽게 다시 물었다.

“모르는 걸 가르쳐 줬어요. 제가 모르는 건 다 시저에게 물어봤거든요.”

“……어디서?”

니아는 필릭스를 올려다보았다가 재빨리 눈을 내렸다. 또 숨을 쉬는 것이 의식이 되었다.

왜 이러지…….

니아는 자신의 모습이 필릭스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도서관에서요.”

“언제? 설마…… 매일? 그건 아니겠지?”

필릭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매일은 아니죠.”

니아의 대답에 필릭스의 입술은 자연스레 호선을 그렸다. 그는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니아의 손을 잡으려다 그녀의 다음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주말에는 아카데미 안 오잖아요.”

필릭스 쿠아란은 눈을 감고,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려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그래, 니아. 친구가 생겼다니 좋네. 공부하다가 궁금한 게 생겼다면 나한테 물어봤어도 좋았을 텐데……. 그렇지?”

“저래 봬도 쟤가 가르치는 데 소질이 좀 있어요.”

시저 카르만이 옆에서 듣고 있었더라면, 니아에게 눈치 없는 말 좀 그만하라며 툭툭 치기라도 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시저 카르만은 이미 멀리멀리 떠난 후였다.

세상이 나를 왕따시키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을 왕따시킨다는 마인드의 시저 카르만이지만, 그런 그라도 필릭스 쿠아란의 표적이 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도련님…….”

여전히 필릭스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로 니아가 물었다.

“응?”

“제가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건데요.”

니아가 주위를 재빨리 살폈다.

“절대 사람들이 우리를, 정확히는 도련님과 함께 있는 저를 쳐다보는 게 싫거나, 부담스럽거나,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요.”

“…….”

“도련님이 다른 분들 연습할 때 안 한다고 생각하니 제가 좀 불안하고, 또 아무리 타고나셨다지만 연습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실까 싶고…….”

“…….”

“혹시라도 도련님이 우승을 하지 못하신다면, 저 때문에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신 도련님이 제 탓을 하거나,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

“저는 다친 저를 원망하면서 도련님께 너무도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 것 같아서요…….”

니아는 필릭스 쿠아란이 그녀의 말 속에 숨은 의미를 잘 찾아내 주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오라는 그녀의 깊은 뜻을!

그가 곁에 있어 봤자 수업에 집중도 안 되고, 자꾸 숨만 이상하게 쉬어지는 마당에 필릭스가 있을 필요가 없었다.

“니아…….”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빙빙 돌려 말한 걸까? 아니면 너무 노골적이라 그가 기분이 상한 걸까?

“네가 날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어.”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필릭스 쿠아란도 어떤 면에서는 니아만큼 눈치가 없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널 원망하지는 않아…….”

필릭스가 마치 고백을 하듯 니아의 손을 잡았다. 순간 강의실에는 모두가 헉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우승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야.”

“…….”

“그래도 네가 그렇게까지 날 생각해 주는데…… 알겠어.”

“…….”

“네 마음 편하게 연습하러 갈게. 그래도 아프면 날 바로 부르고.”

“…….”

“괜히 다른 사람한테 뭘 부탁할 필요는 없어. 알겠지?”

니아가 대답하지 않자, 필릭스는 애가 탄다는 듯 다시 물었다.

“알겠지?”

또다시 석상처럼 굳어 버린 니아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가 필릭스를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였다.

필릭스 쿠아란은 그런 니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시선이 자신에게 오도록 천천히 손을 움직여 니아의 고개를 돌렸다.

필릭스와 니아의 눈동자가 나란히 마주쳤다.

“내 눈 보고 대답해야지, 니아.”

그 부드러운 음성에 니아는 홀린 듯 대답했다.

“알았어요.”

누군가의 앞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끄러워지는 것은 처음이라, 니아는 필릭스가 떠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뿐만 아니라 니아는 온종일 얼굴이 벌게져서, 몇 번이나 많이 아픈 것 같다며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니아는 주말이 오자마자, 팔이 다 나았다고 선언하고 붕대를 벗어 던져 버렸다.

필릭스는 니아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지만, 어쩔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모르트 독테도 다 나은 게 분명하다고 말했고, 니아가 자신을 믿으라는 듯 팔을 열심히 돌려 보였던 것이다.

무언가 떨떠름했지만, 필릭스는 너무도 좋아하는 니아를 보며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카데미에 가지 않는 주말, 니아는 아예 먹을 것을 쌓아 둔 채 공작가 서재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붕대를 푼 양손을 이용해 신명 나게 종이를 팍팍 넘겼다.

‘붕대 푸니까 이렇게 편한데. 앞으로는 다쳐도 필릭스한테 걸리지만 말자!’

붕대에 묶여 있느라 고생한 팔을 애잔하게 바라본 니아는 시저가 준 노트를 꺼내 필기를 베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늘 서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루 종일 공부만 할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니아는 ‘본격적으로 해 볼까.’ 하고 앞에 놓인 쿠키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공부를 하려면, 당부터 충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그런데 엎드려 누워 있는 니아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니아.”

기척도 없이 필릭스가 다가온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게 니아 옆에 누웠다. 그는 니아 앞에 있는 쿠키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 옆에 누워, 또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쿠키를 먹자 니아가 당황하여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역시나 이상한 기분에 재빨리 눈을 내렸다.

필릭스는 그런 그녀를 향해 미소 짓더니, 쿠키 하나를 더 들어 이번에는 니아 입에 넣었다.

“머 하시느 거에여?(뭐 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두 개의 쿠키를 입에 넣게 된 니아가 우물거렸다.

“조금만 같이 있자. 그래도 되지?”

니아가 쿠키를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연습 안 하세요?”

“오늘은 안 해도 돼.”

필릭스가 니아의 입에 우유를 갖다 대었다. 그 또한 너무도 자연스러워 거부하지 못하고 우유를 받아먹었다.

“도련님이 연습을 하셔야 제가 마음이 편안…….”

니아는 아카데미에서 써먹었던 레퍼토리를 또 써먹으려고 입을 열었다. 필릭스가 들어온 순간부터 책이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공부를 망치면, 전부 필릭스 탓이었다.

“잠깐 쉬는 시간. 쉬는 시간이야.”

필릭스는 그렇게 정정하고, 내가 열심히 하는 걸로 안 보이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안 보는 곳에서 열심히 하고 계시겠지만…… 적어도 집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솔직하게 답하는 니아가 귀여워 필릭스는 눈을 접어 미소 짓다가,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 꼭 우승하고 싶어. 긴장이 돼.”

“긴장 하나도 안 하신 것 같은데요?”

거짓말 말라는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에, 필릭스는 순식간에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야, 니아. 긴장돼 죽을 것 같아.”

니아가 반신반의한 표정을 보였다.

“안 그런 것 같은데…….”

필릭스가 순간 그녀의 손을 자신의 심장 부근으로 끌어당겼다.

“뭐 하시는……!”

“들리지, 니아? 엄청 빠르게 뛰고 있어.”

쿵, 쿵, 쿵. 아주 빠르게 필릭스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어쩐지 니아는 그 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져 손을 바로 떼지 못하고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박동 소리를 느꼈다.

“대회에 꼭 와 줘. 내가 우승하면, 네게 할 말이 있어.”

필릭스는 그 말을 마치고, 이제 가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가 떠나고 한참이 지나도, 니아는 자신의 손에 남은 그 촉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니아는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같지만, 달랐다. 자신의 심장을 만졌을 때와, 필릭스의 심장을 만졌을 때. 느껴지는 떨림이 전혀 달랐다.

필릭스의 심장은 무엇을 향해 뛰고 있는지. 또 니아의 심장은 무엇을 향해 뛰고 있는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하기에 두려워지는 니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