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꿈
니아는 눈을 떴다. 그립고도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다 꿈이었던 건가?’
팔을 살펴봤다. 붕대는 더 이상 감겨 있지 않았다. 이리저리 팔을 돌려 보았다. 역시나 상처가 있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팔이 지나치리만큼 짧았고 양손도 단풍잎처럼 작았다.
“어머, 눈을 떴어요!”
“정말이군. 다행이야. 이 어린아이가 이대로 죽는 줄 알았다고.”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빠. 이 애는 누구예요?”
어린아이의 청량한 음성도 들려왔다.
“레오, 숲에서 데려온 아이란다. 쓰러져 있는 걸 보고 데려왔어. 이렇게 깨어나다니 신이 도우신 모양이다.”
니아는 눈을 끔뻑끔뻑, 몇 번이고 깜빡였다. 점점 시야가 넓어졌다.
밝은 빛에 적응이 끝나자, 옆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레오와 그의 아버지 퍼시 아리데오, 어머니 안나 아리데오가 있었다. 꼭 닮은 그 셋이, 니아를 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차가운 길거리에서 보낸 시간, 공작가에서 보낸 시간이 다 꿈이었던 것이다.
꿈이라면 다 용서할 수 있었다. 그 끔찍했던 시간들도 상관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마음속 깊숙한 곳부터 차오르는 안도감에 눈물이 흘렀다.
“어, 울어요. 이 여자애 운다고요. 어떡해요?”
레오가 당황해서 말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의 레오는 겁이 나는 듯 퍼시의 등 뒤로 숨었다.
“놀랐구나. 이제 다 괜찮아. 작고 소중한 아이야, 따듯한 죽을 가져올게. 약을 먹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안나는 니아의 머리를 쓰다듬다 귀 뒤로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부드럽고 따듯한 손길이었다. 그 손길을 느끼며 니아는 다시 포근한 잠에 빠져들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니아는 일곱 살이 되었다. 퍼시와 안나가 니아를 발견한 지 이 년이 흐른 뒤였다.
니아와 레오는 두 손을 잡고 함께 들판 위를 달리고 있었다. 화사한 봄바람과 조금씩 피어나는 꽃들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다.
“레오, 조금 천천히 달려! 니아 속도에 맞춰 줘!”
퍼시 아리데오가 저 멀리서 소리를 질렀다.
그 말에 레오는 니아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니아는 즐거운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레오도 니아의 웃는 모습이 좋아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퍼시와 안나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거리를 달렸을 때, 레오는 달리는 니아를 잡아 풀 사이로 앉혔다. 작은 두 사람이 풀숲에 숨어 버리자 그곳엔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니아, 비밀이야.”
레오가 자신을 해맑게 쳐다보는 니아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레오가 자신에게 무엇을 한 건지도 모르는 니아는 그저 ‘방금 뭐 한 거야, 레오?’ 물으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 앞의 레오가 왜 얼굴이 빨개졌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런 니아를 보고 레오도 따라 웃어 버렸다. 니아는 정말이지 어떤 색깔도 물들지 않은 순백의 소녀 같았다.
아이들이 사라진 쪽을 보고 있던 퍼시와 안나는 미소를 지우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있었다.
“당신도 봤죠. 니아, 저 아이…… 상처가 나면 바로 아물어요.”
안나가 불안한 듯 퍼시의 손을 꼭 잡았다. 퍼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의 가족이 되어 버린 여자아이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듯했다.
“도대체 니아는 어떤 아이인지……. 자기 이름을 제외하곤 이곳에 오기 전 기억도 다 잃었지 않소.”
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비밀로 해요. 레오에게도 티 내지 말고요. 저 어린 아이에게 저런 능력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이렇게 살 수는 없겠지.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군.”
“우리가 지켜 줘요, 여보.”
“펠링턴을 지키는 기사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당신과 저 아이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겠소.”
안나는 그대로 퍼시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퍼시는 이리저리 흘러내린 안나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올려 주며,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자신들에게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니아,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여덟 살이 되어 키가 쑥쑥 자라기 시작한 레오가 물었다. 아직 퍼시를 까마득하게 올려다봐야 했지만, 작은 니아에 비해서는 월등히 컸다.
“음, 기사랑 결혼하고 싶어!”
니아가 말들에게 먹이를 주며 대답했다.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말들이 먹는 것보다 떨어뜨리는 양이 더 많았다.
레오가 그런 니아에게서 먹이를 뺏어 직접 말들에게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근히 눈치를 보며 물었다.
“기사?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니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안나 아줌마랑 퍼시 아저씨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기사라고…….”
레오가 알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장래희망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마을을 지키는 멋진 기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돼. 더 이상 흐르지 마. 제발 시간을 멈춰 줘.’
니아는 점점 흐르는 꿈속의 시간에 불안했다.
그런 그녀를 비웃듯, 시간은 니아와 레오가 아홉 살이 되던 해를 향해 달려갔다.
어째서인지 새벽까지 안나와 퍼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둘은 금방 돌아오겠다 웃으며 약속했었다. 그 약속이 니아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그녀를 레오가 애써 다독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버지는 펠링턴 제일가는 기사라고.”
레오의 속삭임에도 니아의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불길했다. 너무나 불길했다. 니아는 레오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결국 동이 터 버렸고, 서로를 안은 채 잠이 든 니아와 레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레오 아리데오, 니아 프레슬리! 나오너라!”
둘은 그들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음처럼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병사가 끌고 온 수레 안에는 차가운 시신 두 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안 돼…….”
레오가 니아의 손을 놓고 차갑게 굳어 버린 그의 가족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차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처절한 울음소리였다.
레오는 병사를 때리고, 손에 피가 날 때까지 바닥을 치고, 하늘을 치고, 세상을 원망했다…….
‘악마의 장난이야.’
하지만 니아는 정말로 돌이 된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 꿈과 환영 사이에 있는 듯 느껴졌다. 마치 몸이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덤 앞이었다. 레오는 너무 울다 지쳐 더 이상 움직일 기운도 없는지 무덤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길게 자라 그의 눈을 가린 붉은 머리는, 마치 레오의 눈에서 흐르는 피눈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니아는…… 울고 있었다. 그래, 울고 있었다. 울고, 울고, 울고, 한여름에 내리는 소낙비처럼 그렇게 울고 있었다.
니아는 아홉 살의 니아가 울음을 쉽게 멈추지 않을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만 울음을 그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앞으로 너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 눈물을 흘리게 될 테니…….
차마 이것이 끔찍한 고통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듯, 니아는 눈을 감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