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다가온 검술 대회
시간은 어느새 더 흘러, 황궁 검술 대회가 닷새 앞으로 다가왔다.
시저 카르만을 제외하고는 딱히 친해진 아카데미 학생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하녀라고 대놓고 무시하거나 괴롭히는 학생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니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녀는 여전히 배움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푹 빠진 채였다.
필릭스와의 사이도, 변한 날씨처럼 계속 온화했다. 그는 종종 니아가 깜짝 놀랄 만큼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는 했는데, 어찌 됐건 그런 그의 모습도 그녀에게는 의외로 즐거운 요소 중 하나였다.
‘황궁 검술 대회라……. 정말 큰 대회이기는 한가 봐. 아카데미 전체가 다 들떠 있잖아.’
니아는 방어술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연습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던 필릭스도 이번 주 내내 바쁜 것 같았고…….
황궁 검술 대회는 귀족과 평민 모두 출전할 수 있는 제국 최고 규모의 검술 대회였다. 오직 성인이 된 자들만 출전할 수 있으며, 높은 성적을 거둔 자는 단번에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다. 때문에 갓 성인이 된 기사 지망생부터 숙련된 기사들까지, 지원자는 넘쳐났다.
황궁 검술 대회는 오 년마다 열렸는데, 그날은 귀족과 평민 모두 축제가 열린 듯 제국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어느새 닷새 앞으로 다가온 검술 대회에 시장 바닥은 물론이고,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온 에슬란 제국이 들썩거렸다.
‘오늘은 내가 필릭스에게 가 볼까. 마침 오늘은 예습도 끝냈고 말이야.’
덮은 책과 창밖을 번갈아 바라보던 니아가 결심했다는 듯 과감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필릭스가 매일 기다렸으니까, 오늘은 내가 가서 기다리는 거야. 검술 대회 준비로 정신도 없을 테니까.’
니아는 검술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시, 한번 와 봤던 길이라 찾기 쉽다.’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 니아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치 나비가 춤을 추듯 걷는 그녀였다.
‘왜 이렇게 들뜨지. 나도 아카데미의 분위기에 휩쓸려 버렸나 봐.’
요새 자꾸 심장이 뛰고, 들뜨는 자신이 어색해 니아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진정하자, 니아 프레슬리!’
그렇게 다짐하며 걸음을 멈춘 그녀는 저 멀리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사실 아카데미의 청소부 버그 길리온이 자신의 키 이상으로 쌓아 올린 무기들 때문에, 조그만 니아를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뭐야, 저……!”
옆으로 다가와 시야를 가득 막는 무언가를 알아챈 니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거대한 물체에, 그녀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하며 자리를 피했다.
“뭐야, 앞에 사람 있습니까?”
“바로 앞에 있어요!”
혹시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세라 니아가 크게 외쳤다. 그리고 그가 지나가기 편하게 최대한 옆으로 몸을 옮겼다.
‘십 년 감수했네. 그래도 피했으니 됐어.’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아마 연무장으로 무기를 옮기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커다란 무기들을 혼자서 들고 가다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옆으로 피한 니아는 번뜩이는 무기들을 보며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였다.
“그럼, 피해서 지나가겠습니다!”
우렁차게 외친 버그 길리온은 니아가 피해 있던 그곳으로, 정확히 그 자리를 향해 돌진했다.
그 결과 니아는 팔 한쪽에 감각이 사라진 것을 느낀 채, 무기와 아카데미 청소부와 함께 바닥에 드러눕고 말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버그 길리온은 흘러나오는 피를 닦고, 상처 부위를 한쪽 손으로 가리고 있는 니아를 향해 있는 힘껏 고개를 숙였다. 아카데미 청소부인 그는 덜덜 떨고 있었다.
버그 길리온은 무기들을 연무장으로 배달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아카데미 학생에게 무기를 거의 퍼붓다시피 해 버렸고, 그 결과 이 조그만 귀족 여학생은 무기 아래 깔려 버렸다.
“저기,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냥 저를 보내 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은데…….”
니아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커다란 덩치의 울먹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부디, 아가씨 부디 치료를 받고 가 주세요.”
길리온은 자신이 귀족 아가씨를 다치게 했다는 데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피를 흘리는 니아를 들쳐 엎고는 아카데미 의원에게 달려왔던 것인데…….
하지만 이 아가씨는 치료를 거부한 채 보내 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길리온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귀족 영애가 치료도 하지 않은 채 가 버린다면, 그래서 팔에 흉터라도 남는다면! 버그 길리온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길리온보다도 더 간절했다. 누군가 그녀를 치료하게 된다면 몸의 비밀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까.
“아가씨, 제발……!”
그리하여 버그 길리온도, 니아도 모두 미치고 팔짝 뛰겠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니아의 팔에서 피 몇 방울이 또 흘러내렸다. 길리온은 땅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며 본인의 머리칼을 있는 힘껏 두 손으로 잡아당겼다. 그와 함께 입으로는 절규했다.
“아악……!”
“아이고…….”
동시에 니아의 입에서는 곡소리가 나왔다.
이것을 다행이라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무기가 팔에 박힌 탓에 니아의 상처가 꽤 깊었다. 이미 다른 생채기나 멍들은 사라져 버렸지만, 팔에 난 상처만큼은 낫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팔을 보일 수는 없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리만큼 상처가 빠르게 낫고 있었으니까. 니아는 그냥 이 상황을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저, 그럼 붕대를 감을게요. 제가 직접요. 그럼 괜찮겠죠?”
니아는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의원이 들고 있던 붕대를 휙 빼앗았다. 그리고 재빨리 자신의 팔에 돌돌 감았다. 몸을 사선으로 돌려 교묘하게 상처가 잘 보이지 않게 선 채로.
니아는 그렇게 붕대를 감고, 의원에게 마무리를 부탁했다. 그제야 길리온의 얼굴에 짙게 그어졌던 금들이 옅어졌다.
“감사합니다…….”
길리온이 커다란 두 손을 모아 울먹였다.
하지만 의원도 길리온처럼 불안한지 니아에게 마법약을 먹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 약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자고 가는 게 어떻겠냐며 속 답답한 이야기로 시간을 질질 끌어 댔다.
‘그런 약 안 먹어도 다 나을 거라고요.’
니아는 약 두 알을 꿀꺽 삼키고, 잠은 집에 가서 자겠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의 부루퉁한 얼굴에 버그 길리온은 또다시 몸을 벌벌 떨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진동했다. 귀족 영애가 단단히 화가 나 더 이상의 치료를 거부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니아는 그런 길리온을 보자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게 평민의 모습이야. 원래 니아 프레슬리의 입장이라고.’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버그 길리온에게 잘못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다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니. 니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가 이렇게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었고, 조금 다치는 것 따위로 과도한 걱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아닌데.’
잠시 씁쓸해진 니아는 탁한 미소를 짓다가, 생각을 정정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생각을 바꾸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녀는 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길리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 귀족이 아니에요. 공작가의 후원을 받아 아카데미에 다니는 하녀랍니다.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혹시 그냥 제가 걱정되신 거라면…… 감사해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염려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괜찮고, 괜찮아질 테니까요.”
니아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따라오려는 길리온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는 아카데미 병실을 나섰다.
‘늦었는데…….’
정문으로 뛰어가는 니아였다.
열심히 뛰다 보니 어느새 필릭스가 보였다.
필릭스는 도서관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니아가 나오지 않자 도서관을 전부 뒤진 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휴에게 니아의 행방을 묻기 위해 살벌하게 달려 정문에 도착했던 것이다.
“눈 꼭 뜨고 지켜봤는데 절대 안 지나갔습니다.”
휴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그는 정문에서 니아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니아가 저 멀리서 팔에 붕대를 감은 채 토끼처럼 뛰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니아! 이게 무슨……. 너 팔이 왜…….”
필릭스의 놀란 얼굴을 예상했다는 듯, 니아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짝 부딪혔어요. 기다리셨죠? 죄송…….”
하지만 그녀는 말을 다 끝마칠 수 없었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컴컴해지더니, 어지럼증과 함께 세상이 완전히 암전으로 변했다.
“니아, 정신이 들어?”
니아가 번쩍 눈을 뜨자 의원과 이야기하고 있던 필릭스가 재빠르게 다가왔다.
“여기는…….”
익숙하지 않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몸을 감싸는 푹신한 느낌에 고개를 돌려 보니, 지나칠 정도로 넓은 침대에 자신이 누워 있었다.
“내 방이야. 니아,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야? 도대체……!”
필릭스가 화를 간신히 억누르는 말투로 말했다. 그는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지만, 환자인 니아가 충격을 받을까 봐 나름대로 조심하는 중이었다.
“뭐에 좀 부딪혀서……. 아니, 전 괜찮은데요. 제 방으로 가면 안 돼요?”
니아의 말에 필릭스는 마치 그녀가 심하게 다쳐 제정신이 아니라는 듯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의원, 도대체 병명이 뭔지 밝혀내.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는 게 말이 돼!”
필릭스가 모르트 독테를 닦달했다. 십 년 전부터 공작가 의원을 담당해 온 모르트 독테가 니아를 힐끔 바라봤다.
‘그냥 다쳐서 잠시 쓰러진 거겠지, 무슨 병명까지……. 저주가 풀리니 세상이 다 제 것처럼 보이나 보지.’
모르트 독테는 건방지게 소리를 지르는 필릭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 혀를 잘근잘근 씹었다. 물론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반면 니아는 필릭스의 과한 처사에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문 순간, 모르트 독테 의원과 눈이 딱 마주쳤다.
니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모르트 독테 의원…….’
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혹시 약을 먹었나……. 푸른색 빛이 나는 마법약이라든지.”
그가 그 옛날 그 순간처럼 니아의 귀에 속삭였다. 어쩐지 기분 나쁜 목소리로.
그는 갑자기 불려 온 터라 불만이 그득하게 쌓인 채였다. 게다가 치료를 할 사람이 니아 프레슬리, 이 괴물이라니?
“음, 네. 무슨 마법약이라고 주던데요. 자고 가라고 했는데 제가 그냥 나왔어요.”
니아는 그닥 모르트 독테를 쳐다보고 싶지 않아 멀리 창밖을 바라보며 답했다.
어렸을 적엔 아주 잠시 그를 구원자라고 여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니아를 공작에게 팔아넘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십 년간 화를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달려든 순간들을 니아는 처절하리만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따라서 서로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은근히 날 선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물론 니아에 대한 걱정으로 정신이 나가 있는 필릭스에게는 이 이상한 기류를 알아챌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상한 약 먹인 거 아니야?”
그렇게 묻는 필릭스에게 모르트 독테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독한 마법약을 먹으면 어지러움에 잠시 정신을 잃을 수 있습니다요. 약에 취약한 몸이라면 더더욱……. 아마도 회복이 빨라지는 마법약을 먹어 정신을 잃은 것 같군요.”
‘전혀 필요 없었겠지만.’
모르트 독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오히려 이 기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저주가 끝나고 공작은 기다렸다는 듯 요양을 갔다. 그리고 그 아들은 저 저주받은 몸을 아카데미에 넣었고, 이제는 둘이 매일같이 붙어 다녀…….’
그는 순간 멈칫했다.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저 아들놈이 비밀을 다 안 건…….’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모든 비밀을 안다면 이런 식으로 요란하게 니아 프레슬리를 진찰하라고 법석을 떨지도 않았을 테지. 저 몸은 치료 따위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말이야.
‘그럼 도대체 왜? 저 계집애를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텐데 왜 저렇게…….’
그 몰래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고민에 빠진 모르트 독테에게 필릭스가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이제는 괜찮은 거야?”
“깨어났으니 괜찮을 겁니다. 조금만 지나면 씻은 듯 나을…….”
“그렇다면 니아의 팔부터 다시 치료해. 아카데미 의원 따위가 한 치료를 믿을 수나 있겠어?”
필릭스의 말이 끝나는 순간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해 있던 모르트 독테와 니아의 눈이 동시에 딱하고 마주쳤다.
‘팔에 감각이 많이 돌아왔는데…….’
니아는 이미 붙어 버린 듯한 뼈를 느끼며 모르트 독테를 향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안 된다는 사인이었다.
독테는 대충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치료해. 조심스럽게. 니아는 오랫동안 병에 걸렸었던 몸이다.”
모르트 독테가 꾸물거리자 필릭스는 다시 한번 닦달했다.
마음이 급해진 니아가 필릭스를 먼저 설득하기 시작했다.
“저, 도련님. 저 정말 괜찮아요. 저 별로 다치지도 않았고…….”
“넌 입 다물고.”
“이틀……? 정도면 아주 말끔하게 나을 것 같은걸요, 하하.”
“아무래도 환자가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군. 의원, 빨리 진찰해라. 아까부터 왜 이렇게 꾸물거리지?”
“전 진짜 괜찮은데요…….”
“빨리.”
이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나서야겠다 싶은 모르트 독테가 입을 떼었다.
“저, 도련님. 그러면 잠시 나가 주시겠습니까……. 진찰을 할 때 옆에 사람이 있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지요. 게다가 환자의 몸을 봐야 할 수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독테의 말에 필릭스가 당황하여 소리 질렀다.
“뭐, 뭘 본다고?”
“진찰을 하다 보면…….”
“모가지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내가 보는 앞에서 똑바로 치료해. 당장.”
“…….”
“감히 누구 몸을 만진다는 거야…….”
필릭스가 입을 다문 모르트 독테 앞에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어쩐지 화가 난 듯한…….
왜 화가 났지? 저 계집애가 아픈 게 뭐라고?
‘뭘까, 지금 내가 모르는 게 뭐지…….’
눈살을 찌푸리며 니아 프레슬리를 바라보는데,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필릭스 쿠아란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모르트 독테는 깨달았다. 필릭스가 왜 이 저주받은 하녀를 아카데미에 보냈으며,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을 쓰며 걱정하는지. 저 목소리, 저 행동, 그리고 저 눈빛까지도.
‘일이 이렇게 될 수가 있다고?’
모르트 독테는 흰자가 다 보일 정도로 크게 눈을 떴다. 그러고는 입을 가렸다.
그가 손으로 가린 입안에서는 거칠게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실은, 기쁨을 참지 못한 그가 내뱉는 소리였다.
‘재밌군, 아주 재밌어.’
아무것도 모르는 저 애송이가 사랑에 빠졌다.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저 저주받은 몸, 저 괴물. 공작이 그 누구보다 증오하는 존재.
알고 나니 모든 것이 설명됐다. 아주 간단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일이, 얼마나 대단하고, 얼마나 복잡하며,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르트 독테는 알고 있었다.
단숨에 생각을 정리한 그는 니아를 쳐다봤다. 그저 저주받은 몸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어리석은 계집을. 은근히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니아는 모르트 독테의 입꼬리가 경련하는 것을 보고 움찔했다.
‘왜 날 봐……? 왜 웃어?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녀는 답답해 미치겠는데, 모르트 독테는 어쩐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출 생각이 없는 듯 올라간 입꼬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이지…….’
결국 니아 프레슬리는 결심했다는 듯 굳은 말투로 말했다.
“의원님, 진찰해 주시죠.”
차라리 필릭스의 시야를 조금 가리고 빨리 붕대를 감아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모르트 독테는 붕대를 가지고 니아에게 다가왔다. 니아가 그에게 속삭였다.
“그냥 대충 붕대만 다시 감아 주시죠. 도련님 쪽으로 등 돌리시고…….”
모르트 독테가 잽싸게 니아의 팔에 묶여 있는 붕대를 풀었다. 굳은 핏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 상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는 진찰하듯 니아의 팔을 꾹꾹 눌렀다. 성의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니아는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다.
“아……! 악!”
그녀가 어색하게 비명을 질렀다.
‘너무 과했나.’
이 와중에 모르트 독테는 니아의 발연기에 놀라고, 니아는 자신의 연기가 너무 과하진 않았나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만은 그 연기가 매우 실감 나게 느껴진 듯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리라는 듯, 또 자신이 더 고통스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니아, 많이 아픈 거야? 내 손이라도 잡고 있을래?”
견딜 수 없다는 듯 당장이라도 침대 위로 올라올 기세인 필릭스를 보며 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완전 괜찮습니다.”
필릭스는 무언가 아쉽다는 듯 재빨리 붕대를 감고 일어서는 모르트 독테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니아의 상태는 어떻지?”
“다른 곳은 괜찮고, 팔에 살짝 금이 간 것 같습니다……. 닷새 정도면…… 바로 나을 겁니다.”
모르트 독테가 이제는 평소의 실실거리는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네?”
하지만 니아는 그의 입에서 나온 닷새라는 말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왜, 니아? 아파!?”
니아의 소리에 빠르게 반응한 필릭스가 놀라 물었다.
“아, 아니요. 저는 이틀…… 정도면 충분히 나을 것 같은데……. 의원님께서 닷새라고 하시니까…….”
니아가 모르트 독테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표정으로 마음속 말을 대신했다.
‘닷새 동안 이 답답한 붕대를 감고 있으란 말이야? 나는 이미 다 나은 걸 알잖아!’
“의원, 다른 데는 괜찮은 거 맞아? 자꾸 헛소리를 하는 걸 보면 열도 좀 있는 것 같은데.”
걱정스러운 필릭스의 중얼거림에 독테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 뼈가 부러졌으니 열이 좀 나서 헛소리를 할 수도 있겠죠……. 괜찮습니다요, 도련님.”
의원의 말에 필릭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열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말을 똑바로 해.”
필릭스가 낮게 으르렁대자 모르트 독테는 니아의 이마에 손을 팍! 대었다. 찰싹하고 찰지게 소리가 났다.
‘아니, 아프잖아!’
니아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모르트 독테를 쳐다보았다.
“열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마치 협박하듯 묻는 필릭스에게, 모르트 독테가 니아를 힐끔 보더니 답했다.
“열이 있습니다. 확실히, 열이 있군요…….”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는 분노의 눈빛을 보내는 니아를 뒤로하고, 독테는 다른 말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돌겠네…….’
“니아.”
필릭스의 목소리에 니아는 그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두려운 마음에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 모르트 독테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공작가의 하인들이 그를 힐끔힐끔 바라봐도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너무나 적절히 행운이 찾아 들어오는데 웃지 않을 수가.
‘십 년이 지나니, 또 다른 건이 내 품에 안겨 들어오는군…….’
“도대체 네 팔이 왜 그 모양인지, 똑바로 설명해 봐.”
필릭스는 급기야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설명을 들어야겠는지 매우 완강하게 나왔다. 별일 아니라고 말하는 니아를 계속 심문하며 곤란하게 만들었다.
결국 니아는 더듬더듬, 오늘의 사건을 전부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를 찾아가다 떨어지는 무기들에 깔린 것과, 청소부가 니아를 업고 의원에게 달려간 것까지.
“……그렇게 된 거예요.”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했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필릭스의 표정이 사나워져 니아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러니까 일종의 사고였죠.”
“그 청소부 이름이 뭐지?”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불건전했다. 꿍꿍이가 있을 때 나오는 딱 그 표정이었다.
니아는 왠지 청소부의 이름을 말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필릭스는 미소를 싹 지우고 성을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거야! 넌 항상 그래. 네 몸을 너무 안 챙긴다고!”
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받아쳤다가는 그가 정말 화를 낼 것만 같았다.
다친 건 그녀고, 아픈 것도 그녀인데 왜 이런 벌받는 기분이 들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아…….”
그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픈 척을 하는 수밖에.
“왜 또 그래. 많이 아픈 거야?”
니아의 신음에 필릭스는 역시나 다친 주인을 돌보는 강아지처럼 변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이마로 손등을 가져다 댔다.
“잘래요…….”
니아의 말에 필릭스는 더 화내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 것 같더니, 앞으로는 제발 조심해 달라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방을 나갔다. 역시 화가 난 건가 했지만, 조금 뒤 그는 양손에 죽과 약을 들고 돌아왔다.
“니아, 죽부터 먹고 자. 약 먹어야 하니까.”
니아는 필릭스가 손에 들고 오는 고소한 죽 냄새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렇지. 아프더라도 밥은 먹어야지!’
황홀한 냄새에 또 홀려 버린 니아였다.
“움직이지 말고 입만 벌려.”
필릭스는 괜찮다는 니아에게 기어코 직접 죽을 먹였다. 남이 떠먹여 주는 음식은 오랜만이라 낯간지러웠다. 가까이에 있는 필릭스의 눈을 쳐다보기도 민망했다.
니아는 약까지 꼼꼼히 먹인 필릭스의 눈치를 보다 말했다.
“도련님, 제 방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거기서 쉬면 될 것 같아요. 여긴 너무 크고…….”
“그 좁아터진 방에서 몸이 쉽게 나을 리가 없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그렇게 말한 필릭스가 어림없다는 듯 그녀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정말 괜찮다고 말하고 일어서려던 니아였지만, 약기운이 돌아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내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니아는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