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다른 마음 (9/75)

9. 다른 마음

마차를 향해 걷는 니아와 필릭스의 분위기는 조금 묘했다.

가는 길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호수 위 잘 다듬어진 돌다리를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물론, 멀리서 바라봤을 때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이상했다. 필릭스는 니아의 조그만 얼굴을 살피느라 분주했고, 니아 역시 무언가 생각에 빠진 얼굴이었다.

‘이 반응이 아닌데…….’

분명 멋있는 모습을 보여 줬다 생각했는데 그녀의 반응이 너무 미적지근했다.

“피가 묻었어요.”

중간쯤 다리를 건넜을까, 니아가 손수건을 건넸다. 필릭스는 재빠르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어디에 묻었는지 몰라 망설이던 찰나였다.

“여기요.”

니아가 손수건을 다시 가져가더니 직접 필릭스의 볼 주변에 갖다 대었다. 필릭스는 순간 정지한 듯 숨을 참았다.

니아의 속눈썹과 눈동자가 그대로 보였다. 깊은 눈동자도, 반듯한 눈썹도, 아래로 길게 떨어진 속눈썹도 참 예뻤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그녀가 이 호수에 몸을 던지라고 말하면, 당장에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참 중증이군.’

“내 피 아니야.”

필릭스가 걱정 말라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진짜로 피를 흘렸어야 했는데’ 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진짜로 상처가 났다면 니아가 더 걱정해 주지 않았을까?

“그러시겠죠.”

하지만 대답하는 니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조금 묘했다. 채념한 듯 담담한 말투였다.

그녀는 피를 닦은 손수건을 고이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다리 위를 걷기 시작했다.

“오늘 나 어땠어……?”

필릭스가 그 뒤를 재빠르게 따라가며 물었다. 그는 니아의 입에서 자신이 기대하는 말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멋있었다고 말해라, 제발.’

“왜 천재라고 하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정말로.”

니아가 여전히 무덤덤하게 말했다. 기대에 가득 찼던 필릭스는 갑자기 확 식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그것뿐이야?”

그가 발걸음을 멈췄다. 니아의 입에서 다른 말을 이끌어 내고 싶었다.

“다른 영애들은 내가 검술을 하는 걸 보면 꽤나 좋아하는 눈치던데.”

하다못해 필릭스는 니아가 작은 질투라도 보여 주기를 바랐다.

“안 그래도 황자님께서 도련님이 이번 검술 대회로 더 많은 인기를 얻으실 거라고 하시더군요. 좋으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아니잖아!”

필릭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름대로 자제를 하려고 했지만, 말이 또 날카롭게 나갔다. 필릭스는 숨을 크게 내쉬며 진정하려고 애썼다.

‘니아에게 소리 지르지 마, 필릭스 쿠아란.’

그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 반응이 아니잖아. 네 생각은 어땠냐고 묻고 있는 거다.”

겨우 부드럽게 말을 건넨 필릭스에게 니아는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심각하게 생각하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

“사실?”

필릭스가 니아의 말을 거울처럼 따라 했다.

“조금 그랬습니다. 그,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하나요? 너무 뛰어난 사람을 보면 느끼는 감정 말이에요. 제가 그걸 도련님께 느낀 것 같아요.”

“…….”

“저도 꽤나 열심히 하고 있고, 또 조금씩 늘고 있지만…… 도련님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조금…… 그냥 저 혼자 씁쓸한 생각이 들었어요.”

“뭐……?”

“…….”

“왜…… 이야기의 방향이 그쪽으로 튀는 거지?”

필릭스의 물음에 니아는 어깨를 작게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필릭스 쿠아란은 살면서 상대적 박탈감 따위는 느껴 본 적이 없을 테니, 이참에 자신이 알려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언제나, 언제나 성공만을 거듭했을 남자니까.

“솔직히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연습했을 텐데 말이죠. 너무 실력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대련을 하고도 도련님께서는 상처 하나 없고…….”

“…….”

“보 아카데미에서 연습할 정도면 다른 분들도 평균 이상으로 잘하는 분들일 텐데. 심지어 도련님께서는 공작가의 자제시고 용모도 수려하시니, 세상이 조금 불공평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 비꼬는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제 생각을 물으시길래 답한 것일 뿐…….”

“…….”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는 니아를 보며 필릭스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상대적 박탈감이라. 그녀의 입에서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게다가 오늘 자신이 니아에게 멋있어 보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기대했던가. 필릭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요즘 니아와 꽤나 분위기가 좋았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더 다가가면 그녀도 곧 마음의 문을 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니아는 마치 그 싹을 다 없애 버리겠다는 듯 말 한마디로 그의 마음을 후벼 팠다.

‘십 년간 널 좋아하고, 내 마음이 매 순간 끝을 모르고 자라나고 있대도……. 나도 상처받아. 네가 그러면 나도…… 아프단 말이야.’

조금 전까지 거침없이 사냥하던 사자의 모습은 없었다. 이제 상처 입은 한 남자만이 존재했다. 진짜 화살을 맞았다 해도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노력 중이야.”

필릭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작게 중얼거려 니아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네?”

니아가 되묻자 필릭스가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도 노력 중이라고. 그리고 그렇게…… 잘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야.”

“아…….”

니아가 처음 보는 필릭스의 괴로운 얼굴에 당황하여 입을 벌렸다.

“나라고 모든 것을 거저 얻는 것은 아니라고.”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어요. 당연히 노력하셨겠죠. 도련님의 노력을 비하하려던 의도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니아가 빠르게 변명했다. 하지만 필릭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됐어.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니까. 적어도 검술에서는 나는 천재가 맞다.”

필릭스의 말에 다시 니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지만, 너무 우울한 표정이라 감히 토를 달 수가 없었다. 또다시 호수 위 둘뿐인 다리에 침묵이 어렸다.

“음……. 노력한 천재신 거죠?”

겨우 니아가 말을 짜냈는데, 필릭스는 그게 아니라는 듯 여전히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집에 가면 서재로 가 봐. 거기에 네 공부에 필요한 서적들을 채워 놨다.”

이 말을 끝으로 필릭스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왜 저러는 거지……?’

연못을 지나, 마차 앞까지 도착해서도 필릭스는 말이 없었다.

평소에는 니아가 창문을 바라보고, 필릭스가 그런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꼴이었는데,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공작가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의 눈을 피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고, 니아 프레슬리는 눈치를 보며 가는 내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마차가 멈춰 서자 필릭스는 대련에서 이긴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힘없이 공작가로 들어갔다.

‘아까 내가 말실수를 했던 건가?’

평소처럼 정원이라도 한 바퀴 돌고 가자는 말도 없었다. 은근히 저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오려는 발걸음도 없었다. 늘 보여 주던 웃음도 사라진 채로, 그는 그대로 계단 위로 올라가 버렸다.

니아는 어떻게 봐도 작아 보일 수가 없는 널따란 필릭스의 등이 오늘따라 왜소해 보이는 것 같아 눈을 비볐다.

‘신경 쓰여.’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끼다가 문득 필릭스가 한 말이 떠올라 서재로 향했다.

무거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니아의 눈앞에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서재의 가장 앞쪽 벽면이 모두 그녀에게 필요한 기본서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필릭스에게는 더 이상 필요도 없는 책들일 텐데…….’

니아는 새것임이 분명한 책들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뭐야. 왜 이렇게까지…….’

아까의 상처받은 필릭스의 눈이 떠오르면서, 니아는 무언가가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잡아야 해.’

그녀는 자신이 한 말들을 곰곰이 되짚기 시작했다.

‘아무리 필릭스 쿠아란이라도 노력을 아예 안 하지는 않았을 거야. 누구든 노력을 폄하당하면 화가 날 수밖에 없는 법이라고. 아까는 확실히 내가 주제넘은 말을 해 버린 게 맞아.’

어떻게 필릭스의 마음을 풀어야 할까, 니아는 이것저것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이불도 덮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마치 실연을 겪은 듯 마음이 아팠다. 아니, 사실상 실연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평생 니아가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내가 평생…… 그 애를 바라보기만 할 수가 있을까.’

필릭스는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일 년 뒤에 니아가 나가는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끔찍한데…….’

마음이 아파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니아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빛나지도, 이렇게 비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니아 프레슬리는 마치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천사 같았다.

“도련님. 저녁 안 드십니까.”

어두워진 방 안에 길리가 찾아와 물었다.

“생각 없다. 그…… 니아나 따로 챙겨 줘. 갑각류 위주로. 좋아하거든.”

필릭스의 말에 길리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도련님을 쳐다봤다. 다른 모든 면에선 완벽해 정떨어지게 하는 인간이 사랑 앞에서는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지 모를 일이었다.

“네. 뭐 따로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없어.”

“네. 그럼 주무십시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길리를 필릭스가 붙잡았다.

“길리.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생각하지?”

필릭스 본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하지만 너무도 진지하게 물어 오는 그의 모습에 길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도련님은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가 늘 뛰어났다. 듣는 이를 삐뚤어지게 만드는 재주도 뛰어났고.

“글쎄요. 도련님처럼 잘나신 분들은 이해하기 어려우실 단어입니다.”

꽤 반항적인 어조였는데도 필릭스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소리치거나 비꼬는 기색도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래도 말해 봐.”

“혹시 열등감이라는 단어를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사전적 정의는 알고 있어.”

“상대적 박탈감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저는 도련님을 모시는 하인이지만, 그 전에 남자로서 도련님께 느끼는 감정과 흡사하죠. 어떤 남자라도 도련님 같은 남자를 보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도련님께서 열등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사전적 정의로만 알고 계신다는 건, 그 감정을 실제로 느껴 본 적이 없으시다는 거겠죠.”

“……그렇다.”

필릭스는 부정할 여지가 없는 듯 순순히 인정했다.

“한마디로…… 노력하고 싶지가 않아지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공작가의 자제가 되고, 도련님처럼 몸이 자라거나 잘생겨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아예 노력의 끈을 놓아 버리려는 마음이죠.”

“날 보고 그런 생각을 한다고?”

“네. 아마 도련님께서는 평생 모르실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굳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거든요. 혹여나 누군가에게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그냥 넘기십시오. 도련님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니, 가까워지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길리는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는 사라졌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그가 남긴 말에 필릭스는 더욱 침울해졌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 니아 프레슬리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가까워질 필요가 없는…….’

“난 너한테 한 발짝만 더 다가설 수 있다면, 심장이라도 바칠 수 있는데…….”

중얼거린 필릭스는 창문을 타고 넘어온 달빛 기둥을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달이 떠 있었다. 아니, 창문 너머로 니아 프레슬리가 떠 있었다.

‘날 괴롭히려고 태어난 존재. 사랑스러운 니아 프레슬리…….’

다음 날 아침, 니아는 아직도 눈에 띄게 우울해 보이는 필릭스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평소에는 이것저것 그녀에게 질문을 하지 못해 안달인데, 오늘은 눈도 쳐다보지 않았다.

“저기, 도련님.”

니아가 부르자마자 습관처럼 고개를 돌리는 필릭스였지만, 이내 다시 침울한 표정으로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제가 어제 생각을 해 봤는데요.”

“……무슨 생각.”

“노력으로 못 이룰 건 없는 것 같아요.”

“뭐……?”

니아의 말에 필릭스의 우울한 표정에 살짝 기대감이 어렸다.

필릭스는 니아에게 그런 기대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표정을 정돈하며 말했다.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해 봐.”

“그, 생각해 보니 제가 어젠 정말 잘못 말씀드린 것 같더라고요. 도련님께서는 남들보다 훨씬 노력하셨을 거예요.”

“…….”

“그러니까 제 말은, 도련님의 실력이 순전히 타고난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이룬 성과라는 거죠. 저도 꾸준히 노력하면 도련님처럼 실력을 키울 수 있고요. 어떤 분야에서든지 말이죠.”

니아의 한마디 한마디에 필릭스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은 채 눈이 커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노력하셔서 그만큼의 실력을 갖게 되셨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멋있으십니다.”

이제 필릭스의 커진 눈은 니아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니아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방금 뭐라고 했어?”

“대단, 하시다고요?”

“아니, 그거 다음에.”

“멋있으시다고요?”

“그래, 그거. 니아 프레슬리, 정말 내가 어제 멋있었나? 좀…… 달라 보였어?”

엄밀히 말하자면 어제의 모습이 아니라 실력 자체를 두고 말한 것이지만, 니아는 갑자기 밝아진 필릭스에게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맞는 방향으로 이 도련님의 화를 풀고 있는 것 같았다.

“네. 무지 멋있으셨습니다. 제가 귀족 영애였어도 도련님께 반했을 거예요.”

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레 반응을 살폈다. 필릭스는 목부터 이마까지 전부 빨개진 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우세요? 창문을 좀 열까…….”

“나 계속 노력해도 돼?”

갑작스레 필릭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네? 네…….”

“사실 그만두려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어. 잠시 기가 죽은 것뿐이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몰랐지만 니아는 그냥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꽉 잡은 두 손이 신경 쓰였다.

“이렇게 노력하는 건 처음이야. 다른 건…… 너무 쉬워서 노력할 필요가 없었거든.”

‘그 정도로 검술을 익히는 데 노력했단 말인가?’

어제는 내가 정말 실수한 게 맞구나 하고 생각하는 니아였다.

“그러셨군요. 꼭 성공하실 겁니다.”

니아가 진지한 눈빛으로 필릭스의 손을 더 꼭 붙잡아 주었다.

“네가…… 네가 직접 노력하면 된다고 말한 걸 잊지 마, 니아 프레슬리.”

말을 하던 필릭스가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춰 왔다.

요새 들어 그의 미소를 정말 많이 봤지만, 지금 그가 짓는 미소는 무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저 미소는 조금 해로운 것 같아.’

역시 마차가 더운 것이 확실했다. 니아는 달아오르는 공기에 필릭스의 손에서 기어코 손을 빼내어 창문을 열었다.

아카데미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빠르게 흘러갔다. 아직은 추위에 떨어야 하지만 봄바람이 조금씩 아카데미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날씨만큼이나 빠르게 변화를 겪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의 니아 프레슬리와, 지금의 니아 프레슬리를 동시에 본다면 두 사람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미묘하게 달랐다.

“자, 우리 공작가 피후견인. 니아 프레슬리, 이것 하나 답해 보겠나?”

천문학 교수가 별자리 하나를 보여 주며 니아를 콕 집어 물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히 설명해 보게.”

교수의 물음에 니아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제 시저에게 물어봤던 거다……!’

애써 흥분된 얼굴을 감추며 입을 열었다.

“빛이 희미하게 반짝거리다가 사라지는 것은, 전쟁이 끝나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별자리를 보며 전쟁의 시작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불길함을 강조하듯 붉은색의 별이 계속해서 폭발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 가는 것은 딱 그 모습만 봐서는 바로 알기가 어려웠다. 전쟁이 끝날 시기에 별은 희미하게 빛을 잃었는데, 그것이 황족의 죽음 등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훌륭하네. 황제의 죽음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함정에 빠지지 않았군. 자리에 앉아도 좋네.”

자리에 앉는 니아는 막 피어나기 직전의 꽃처럼 상기된 모습이었다.

그다음 시간은 생명술 수업이었다.

“니아 프레슬리, 마정석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군. 마정석을 아껴 쓰는 것이야말로 마법사가 가져야 할 미덕 중 하나인데. 좋은 습관이네.”

딕시 댁스터 교수는 의외라는 듯 니아에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니아의 마정석은 마법을 한 번 더 쓸 수 있을 정도로 본래의 색깔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박이다……!’

니아는 이제 감추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그녀를 본다면, 왼쪽 볼의 보조개가 계속해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니아는 활짝, 밝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 덕인지 아니면 봄기운 때문인지, 강의실의 분위기도 무언가 더 밝게 바뀌는 것 같았다.

“아주 날아가시겠어.”

시저가 꼴불견이라는 듯 도서관을 나서며 니아를 향해 중얼거렸다. 니아는 아직도 기분이 좋은 듯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살짝씩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음정, 박자 다 맞지 않아 시저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어, 지금 가는 거야? 나 물어볼 거 있는데.”

“그래, 이 머저리야. 오늘은 더 이상 네 질문 받아 줄 기운이 없어. 천천히 좀 해, 천천히.”

시저의 구박에도 니아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오늘 계속 칭찬을 받아서이기도 했고, 시저의 욕은 이제 너무 많이 들어 단련된 탓이기도 했다. 이제 그의 욕이 없으면 무언가 심심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 잘하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

“얼씨구.”

시저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

니아는 품 안 가득 책을 안아 보였다.

“처음엔 정말 어려웠는데, 이제 재밌는 것 같기도. 너도 그래?”

“글쎄, 나는 네가 좀 무서워지려고 하는데…….”

정말로 기뻐 보이는 니아를 보며 시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라. 뭐, 확실히 빨리 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군. 그럼 난 간다.”

평소 멍청이라며 자신을 갈구기만 하던 시저가 칭찬 비슷한 말을 하고 떠나자 니아는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 시저 카르만도 자신이 잘하고 있다 인정을 해 준 느낌이었다.

‘내가 이런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니.’

니아는 자신이 요즘 느끼고 있는 이 생소한 감정들이 너무 놀라웠다.

‘아프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아. 죽어 있다가…… 깨어난 사람이 된 기분이야. 이런 게 바로 살아 있다는 건가 봐.’

처음으로 배움의 기쁨과 성장의 설렘과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 니아 프레슬리였다. 생애 처음 맛보는 감정에 오히려 두려워질 정도랄까. 그 끔찍한 인생의 주인공 니아 프레슬리가 감히 이런 행복을 겪어도 되는 건가 해서…….

‘더 이상 배고플 걱정도, 아플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공부만 할 수 있다니.’

별다른 걱정 없이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도 아득했다. 행복이 너무 오랜만이라.

하지만 완전히 행복하다고만 하기에는, 종종 니아를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었다. 바로 행복이 끝날 것에 대한 두려움. 니아는 행복이란 그 끝이 존재함을 알기에 두렵기도 했다.

‘너무 들뜨지만 말자. 불쌍한 니아 프레슬리에게 신이 잠시 행운을 가져다준 거야. 좋은 추억 하나쯤 가지고 떠나라고…….’

끔찍한 과거의 아픔 또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공작가에서 보낸 십 년의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니아는 여전히 분노와 한없는 슬픔으로 가득 찼다.

아직도 혼자서 버텨야 했던 밤이 생생했다. 그리고 비밀을 들키면 이 세상 사람 모두 그녀에게서 등을 돌릴 거라는 것도, 얼마든지 상황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절대 그렇게 돼서는 안 되지.’

끔찍한 비극 같았던 자신의 삶에 잠시나마 찾아온 희극.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기도 했다. 니아에게는 이 순간들이 두려울 만큼 소중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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