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한 걸음씩 (8/75)

8. 한 걸음씩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온 이후로, 니아는 며칠 동안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필릭스는 니아와의 분위기를 더 발전시켜 나가려 애썼지만 그 또한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니아가 툭하면 잠들었기 때문이다.

‘자는 거야?’

마차 안에서 니아는 필릭스가 말을 걸 틈도 없이 잠들었다. 심지어 같이 저녁을 먹을 때는 음식을 입에 넣고 포크를 손에 꼭 쥔 채로 꾸벅꾸벅 졸았다. 요즘의 니아 프레슬리를 보면 마치 한 마리의 병든 닭을 보는 것만 같았다.

‘며칠 동안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한 기분이야.’

필릭스는 공작가 앞에서 니아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설마 그녀가 일부러 자신과의 시간을 피하는 건 아니겠지?

‘뭐 실수한 게 있나…….’

그는 여태까지 자신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지난번에 했던 대화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분명 문제가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요 며칠간은 잘못한 것이 정말 없는 것 같은데……. 아니, 니아는 요새 그에게 실수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잠만 잤으니까.

고민을 하며 정원 건너의 문을 바라봤다. 어서 그녀가 보고 싶었다. 오늘은 조금 더 밝은 모습의 니아가 나오길 바라는 필릭스였다.

얼마 뒤, 저 멀리서 니아가 걸어 나왔다. 거의 눈을 감다시피 한 채였다. 눈도 제대로 뜨지도 못하면서, 또 양손에는 책을 가득 들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군.’

가까이서 본 니아의 얼굴은 더욱 가관이었다.

다크서클은 턱 밑까지 내려왔고, 눈은 몇 년 만에 빛을 본 죄수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게다가 눈동자는 힘을 잃은 채 탁한 색을 띠었다.

필릭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니아는 정말이지…… 해골 같았다.

‘졸려 죽을 것 같아……. 마차에서 좀 자야지.’

사실 니아 프레슬리는 요 며칠간 계속 밤을 새웠다. 기본서들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시저가 추천해 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한번 시작하니 끝도 없이 빠져들어 밤을 새우고 공부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 잡생각들이 사라졌다.

‘다른 생각이 안 나니까 좋아. 괴물이고 뭐고 그런 생각이 안 드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어려워 중간중간 욕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하다 보니 오기가 들어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벅 프릴리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니아 프레슬리의 존재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고 마치 책과 대결을 하듯 승부욕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무언가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미묘한 성취욕도 니아를 찾아왔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즐거운 것이었다.

“바보야, 이건 방어술이 아니라 공격술이잖아. 이딴 걸 질문할 시간에 책이나 한 권 더 읽어. 거기 그…… 파란색 책.”

모든 것이 처음인 니아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질문도 많이 쌓였다. 다행히도 밤새 쌓인 그녀의 질문은 도서관에서 시저 카르만이 해결해 줬다.

“이게 마지막이야. 이제 나한테 말 걸지 마!”

엄청나게 귀찮아하는 것이 니아에게도 보였지만, 그래도 시저 카르만은 물어보면 재깍재깍 대답해 줬다. 또 의외인 것은, 시저가 니아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꽤 잘해 준다는 것이었다.

‘물어보지 않은 것까지 대답해 준단 말이지…….’

시저는 니아가 물어본 것 이상의 것까지 설명해 줬다. 본인은 자신이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 니아에게 도움이 되었다.

‘도대체 너를 공작가가 왜 후원하냐는 말을 말끝마다 들어야 했지만…….’

그 정도 말은 아무 타격감이 없었다. 뭐, 맞는 말이기도 했고.

니아는 마차에 올라 재빨리 눈을 감았다. 한시라도 빨리 잠이 들어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다.

“꼴이 왜 그 모양이지?”

물론 니아의 바람은 오래가지 못했다.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깨운 것이다.

니아는 힘겹게 눈을 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네……?”

잠에 취한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병든 닭 같은 모양새이잖아. 혹시 요새 잠을 못 자나?”

필릭스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가 또 심기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왜 시비야……. 도련님, 저 좀 내버려 두세요.’

요즘 필릭스와 있을 때 잠만 자긴 했지만, 그래도 최근 그의 목소리와 태도가 변함없이 부드러웠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또 필릭스가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이다. 그것도 꽤 부루퉁한 말투로…….

니아는 점차 잠이 깨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게…….”

설명을 하려던 그녀의 말 사이를 필릭스가 잘랐다.

“요새 마차에 타기만 하면 잠이 들잖아. 밥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고. 지금 네 꼴이 어떤 줄 알아? 곧 쓰러진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아니, 그게…….”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필릭스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쌓인 것이 많은 듯했다.

“마차에서도 툭하면 자고, 밥 먹을 때도 자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

“요즘 널 보면 불안해 죽겠어. 그러다가 정말 사람 없는 곳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지? 내가 언제나 네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특히 더 심한 것 같군. 정말 못 봐 줄 정도라고!”

말을 마친 필릭스는 안쓰러움과 걱정이 섞인 눈으로 니아를 바라봤다. 감정 조절에 실패해 화를 내듯 말하기는 했지만, 누가 들어도 걱정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다.

하지만 비몽사몽 한 니아에게 마치 자신이 너무 추레해서 눈 뜨고는 못 봐 줄 정도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내 얼굴이 그렇게 심한가.’

니아가 퀭한 자신의 얼굴을 어색하게 매만졌다.

“제가 요즘 기본서를 읽느라 계속 밤을 새웠거든요. 읽어야 할 양이 많아서…… 아직도 좀 남았습니다.”

천천히 필릭스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요 며칠간 보지 못했던 필릭스의 경악 어린 표정이 다시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니아 프레슬리, 미쳤나?”

“뭐라고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필릭스 때문에 니아는 잠이 완전히 깨 버려 덩달아 소리쳤다.

“네가 얼마나 오래 아팠는지 기억나지 않는 거야? 게다가 얼마 전에는 물에 빠져서 젖은 꼴로 들어오지 않았나! 몸 관리를 철저하게 해도 모자랄 판에, 뭐 하는 짓이야?”

“…….”

니아의 화가 가열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필릭스는 또다시, 내뱉고는 후회할 말을 시작했다.

“뭐, 기본서? 그거 좀 읽는다고 갑자기 공부를 잘하게 될 것 같나? 그런 기본서 따위를 읽느라 밤을 새우는 건 맹추 같은 짓이야!”

“…….”

“비리비리해 가지고 말이야.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지지?”

마지막 말을 내뱉고 씩씩대던 필릭스는 니아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얼간이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보고 책임지라고 말해 주면 좋겠다.’

니아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말을 떠올린 자신이 한심해지려는 찰나였다.

“누가…… 천문학의 천 자도 모르는 저를 아카데미에 집어넣어서요. 그 감당은 제가 스스로 해야 하는지라. 무슨 말인지 아시죠?”

부들부들 말했지만 확실히 비꼬는 듯한 니아의 어조에 필릭스는 또 하, 코웃음 쳤다. 방금 자신의 상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는지를 깨달으면서.

“지금 내 탓을 하려는 건가? 네 몸은 생각 안 하냐고! 체력도 약하잖아. 몸으로 하는 건 다 젬병인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필릭스는 화가 나 소리쳤다.

누가 그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방법을 알려 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공작가 외동 아드님은 그런 거 몰랐다.

“젬병……. 하! 저도 체력은 좋지 않지만 그…… 그…… 회복력은 끝내주거든요!”

“웃기고 있네.”

니아의 말이 가소로워 죽겠다는 듯 필릭스가 딱 잘라 대답했다.

“뭐요? 진짜거든요. 저 회복력은, 자세히는 말 못 하지만 진짜 대박…….”

“그러는 사람이 십 년간 병을 회복 못 했나?”

“…….”

할 말이 없어진 니아였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만, 그리고 그녀에게 소리치고 있는 남자와도 깊은 관련이 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이야기할 수가 없군.’

니아는 가까스로 ‘너 때문이잖아!’ 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화를 참았다.

“또 밤을 새워서 이런 꼴로 내 앞에 나타나면…….”

“나타나면요?”

니아가 부루퉁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돈 주기로 한 거 취소하겠다!”

필릭스가 화를 못 이겨, 마차 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그 고함 이후 정적만이 감도는 와중에, 니아는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인간을 본다는 듯 필릭스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치사하고, 치졸하고, 유치한 인간…….’

그녀는 더 이상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고 씩씩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내가 밤을 새운 게 저렇게 화낼 일이냐고.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야. 진짜 재수 없어.’

니아는 여전히 무거운 자신의 눈꺼풀에 힘을 줬다. 침묵이 감도니 눈치 없이 또 잠이 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 버리면 꼴이 우스워진다. 아무리 잠이 와도 참아야 했다.

‘절대 잠들지 마, 니아 프레슬리.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으란 말이야.’

마음속으로 열심히 중얼거렸지만, 사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든 적 없는 그녀에게는 소용없는 속삭임이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니아 프레슬리는 두 눈을 완전히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쌔액쌔액, 여린 숨을 쉬기 시작했다.

“허, 잠들었어…….”

필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사람이 눈을 몇 번 천천히 깜빡이더니, 고개를 툭 떨구고 잠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러게 왜 잠을 안 자는 거냐고…….”

필릭스는 방금까지 자신과 말다툼하다 잠이 든 니아가 어이없고, 또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하여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게 분명한 니아의 볼을 살짝 건드리며, 필릭스는 겉옷을 천천히 벗었다.

“내가 하는 말은 다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란 말이야, 이 아가씨야.”

필릭스가 옷을 덮어 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제발 아프지만 말라고.’

그 속마음을 아까 말했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요령이 없는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걱정으로 가득 찬 필릭스의 속도 모른 채 잠이 든 니아는 잠꼬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오.”

‘뭐라는 거지?’

필릭스는 니아의 입가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니아가 또 한 번 입을 벌렸다.

“레오…….”

이번에는 니아의 말을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레오? 강아지 이름인가? 꿈을 꾸나 보군.’

필릭스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지금 삐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니아에게 강아지를 한 마리 선물해 줘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고민을…….

“도련님! 도착했습니다!”

시간이 꽤 지난 뒤, 휴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휴는 큰 목소리로 싸우던 도련님과 니아의 대화를 다 엿들어 꽤 긴장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무서웠다.

‘도대체 니아 쟤는 도련님하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감히 도련님께 소리를 다 지르고, 저렇게 발칵 성을 돋우다니. 저러다 큰일 나지.’

휴는 그 조용해 보이던 하녀 니아 프레슬리가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주인과 소리를 내어 싸우다니. 아무래도 자신이 알고 있던 니아와는 다른 듯했다.

“저, 도련님 도착…….”

휴는 화가 난 도련님의 모습을 예상하며, 심호흡을 하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쉿.”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필릭스가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대며, 오직 고갯짓으로 문을 닫고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휴는 마차 안의 풍경에 잠깐 멈칫했다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그는 다시 마부석에 앉았다. 방금 본인이 본 풍경이 믿기지 않았다.

‘맙소사…….’

마차 안에는 필릭스의 것이 분명한 큰 겉옷을 덮고 잠들어 있는 니아가 있었다. 아주 깊은 잠에 빠졌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필릭스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것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도련님이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봐.’

늘 차갑고 오만한 모습만을 봐 왔던지라, 필릭스의 은은한 미소는 꽤 놀라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 조금은 알겠군.’

그동안 이상했던 필릭스의 모습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가는 휴였다.

한참 동안 니아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던 필릭스가 슬며시 그녀를 불렀다.

“니아, 일어나.”

그 목소리에 니아는 눈이 번쩍 뜨였다.

‘자 버렸다…….’

눈앞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을 흔들고 있는 필릭스가 보였다.

그렇게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니아는 필릭스가 자신을 계속 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부끄럽고 자존심이 상했다.

‘니아 프레슬리, 이 한심한 것!’

그녀는 스스로 자학했다.

“몇…… 몇 시예요?”

당황하지 않은 척 필릭스에게 물었다.

“수업 시작하기 5분 전이야.”

필릭스의 말에 니아가 ‘뭐요?’ 하고 소리쳤다.

빠르게 일어서는 그녀의 몸에서 필릭스가 덮어 준 겉옷이 흘러내렸다. 니아는 자신의 몸에서 뭐가 떨어져 내렸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벌떡 일어섰다.

“아!”

급하게 일어서던 그녀가 마차 천장에 머리를 찧었다.

“니아, 괜찮아? 그러게 조심 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손길을 피해 니아는 재빨리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필릭스를 한번 돌아보고는 뛰기 시작했다.

‘수업을 5분 남기고 깨우다니.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뭐야. 생긴 거랑 다르게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어?’

전속력으로 달리자 목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숨이 차 죽을 것만 같았다.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찰나,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짜 망했어!’

니아 프레슬리는 계단을 두 개씩 뛰어 올라가며 제발 교수가 지각하기를 빌었다.

“필릭스 쿠아란, 자네 오늘은 또 무슨 일인가. 며칠 동안 꽤 괜찮지 않았어?”

또다시 우울하게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필릭스가 보였다. 앨버트 브라이트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섰다.

“잘돼 가는 것 같더니, 왜 이러는가. 지난번에 시키는 대로 잘했지?”

필릭스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맛있는 것도 먹였을 테고, 사과도 제대로 했겠지. 선물도 줬겠고……. 설마 필릭스 쿠아란씩이나 되는 인물이 값어치가 떨어지는 선물을 하진 않았을 거야, 그렇지?”

앨버트 브라이트가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의 친우가 그 정도 머저리는 아니었길 바라며.

“옐로우 사파이어였어. 자네 생각에도 너무 싼 보석을 선물해 준 것 같나?”

“아니, 아니. 그 정도면 공작가 하녀가 꽤 만족했을 것 같군. 거기서 생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말해 보게.”

필릭스가 이야기를 토해 내도록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난번 앨버트의 조언이 성공한 이래, 필릭스는 은근히 그에게 또다시 상담을 하고 싶은 눈치였다.

“실은, 오늘 아카데미에 오는 길에 니아와 싸웠어. 그리고 거의……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냈다.”

“뭐? 도대체 왜?”

침울하게 말하는 필릭스를 보니 앨버트는 벌써 목덜미가 당기는 것 같았다.

“니아가 계속 밤을 새워서 몸이 안 좋아 보였거든.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아니, 이보게…….”

“그리고 난, 너무 곤히 잠들어 있어서 깨우기가 어려웠던 것뿐인데. 조금만 더 재울까 망설이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흐른 것뿐이라고!”

갑자기 필릭스가 억울한 듯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앨버트는 자신도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맹세코 니아에 대한 걱정뿐이었어.”

“…….”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애초에 십 년 동안 짝사랑만 한 남자의 연애 상담은 받는 것이 아니었나,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앨버트였다.

그날, 아카데미 기사단은 모두 하루 종일 필릭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며칠간 빨리 연습을 끝내기 위해 열심이었던 필릭스였지만, 오늘은 정말 누구 한 명 걸리기만 하라는 식으로 무섭게 연습에 임했던 것이다.

“왜, 왜 저러는 거니.”

후작가의 백터 쉐리가 겁에 질려 앨버트에게 물었다. 그의 포동포동한 몸이 부르르 진동했다.

“글쎄…….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은 짐승의 거친 몸부림이랄까. 아마 후회 중이라 저럴걸세.”

앨버트의 말에 백터는 더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후회를 저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지금 필릭스의 대련 상대는 다리를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겨우겨우 필릭스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검 한 번 막기도 버거워 보였다.

결국 상대는 스스로 검을 놓치고 나자빠졌다. 백터는 히익! 놀라더니 도망치기 위해 등을 돌렸다.

“거기, 백터 쉐리?”

필릭스의 낮은 음성에 백터의 머리털이 쭈뼛 섰다.

“으……응?”

“나랑 연습 좀 할까?”

그 말이 백터에게는 마치 지옥행 열차를 타 보지 않겠냐는 권유처럼 들렸다.

“나, 나는 모, 몸이 안 좋은데…….”

“그럴수록 운동을 해서 풀어야지. 이리 와.”

어림없었다. 백터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검을 꾹 쥐고 거북이 기어가듯 필릭스에게로 다가갔다.

“빨리 좀 오지. 너무 기다리게 하면 화가 날지도 모르잖아.”

작은 중얼거림에 백터는 울상을 지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커다란 몸덩이를 흔들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검 들어.”

차갑게 말하는 필릭스를 향해 백터 쉐리는 최후의 수단으로, 꼭 이래야만 하겠냐는 애원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필릭스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지, 그는 검을 든 채 빠른 속도로 백터에게 다가왔다.

“아, 안 돼!”

백터 쉐리는 눈을 감고 소리쳤다. 칼날이 몸을 스칠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죽기는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는데……!

‘……응?’

백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혹시 내가 죽은 건가? 몸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해, 필릭스. 이러다간 기사단이 남아나질 않겠어.”

‘앨버트 브라이트! 필릭스와 좀 친한 것 같더니…… 역시 네가 나를 구해 주는구나.’

앨버트가 필릭스의 검을 막아 준 것이다.

백터는 선망의 눈으로 앨버트를 반짝반짝 바라봤다. 어쩐지 오늘따라 그의 초록빛 머리가 더 귀티 나 보였다.

“게다가…… 시간이 다 되었지 않나? 어서 하녀를 데리러 가 봐야지.”

앨버트의 말에 필릭스는 시계를 한번 쳐다보더니, 검을 휙 던지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정말 다행이다…….’

안도감에 다리에서 힘이 풀린 백터 쉐리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필릭스는 자신이 오늘 기사단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곤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줄이야.’

니아는 늘 도서관에서 필릭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항상 버거울 만큼 많은 책을 들고 나와서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필릭스 본인이 아카데미에 데려오기는 했지만 니아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할 만큼 열심히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좀 더 차분히 말했어야 했어.’

분명 필릭스 딴에는 니아가 걱정되고, 그녀가 몸을 아끼지 않는 것 같아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 니아의 차가운 눈빛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게다가 앨버트에게서까지 한 소리 듣고 나니 더 그랬다. 오후 늦은 시간까지 생각을 거듭한 필릭스는 매우 후회 중이었다.

‘너무 소리쳤어. 왜 그랬을까. 하지만 니아 앞에선 감정 조절이 잘 안 된다고. 내가 걔를 너무 좋아하니까…….’

애꿎은 돌멩이라도 차려는 순간 저 멀리, 삼십 년간 아카데미에서 마법의 역사학을 가르친 교수 아리갈리 버도네가 보였다.

필릭스 개인적으로는 딴소리가 너무 많아 좋아하지 않는 교수였다. 멀리서 봐도 긴 수염과 커다란 덩치가 자기소개를 하고 있는 듯했다.

“오, 필릭스 군! 오랜만이군. 검술 연습으로 아주 바쁜가 봐.”

제발 말을 걸지 않고 지나가 줬으면 하는 필릭스의 바람과는 반대로, 아리갈리 버도네는 아주 잘 만났다는 듯 신나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예…… 뭐.”

“이번 검술 대회도 우승은 자네 차지인가? 경쟁자가 없어 심심하진 않나 걱정되는구먼!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버도네 교수에 비해 필릭스는 얼굴이 구겨졌다. 마구잡이로 침이 튀고 있었던 것이다.

“네. 우승할 겁니다.”

딱 잘라 말하자 버도네 교수는 마음에 든다는 듯 필릭스의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하지만 거의 사람을 치는 수준으로, 필릭스는 이를 악물고 그의 팔을 부러뜨리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눌렀다.

“그래, 자네라면 당연히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겠지. 하지만 실력을 전부 보여 줬다가는 아카데미 졸업 전에 황실에서 채 갈 수도 있으니 조심하게나!”

버도네 교수가 또 한 번 호탕하게 웃었다. 귀가 따가웠다.

“네, 그럼.”

버도네 교수가 웃느라 말을 하지 못하는 틈을 타 필릭스는 재빨리 인사를 하고 떠났다.

더 이상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필릭스가 멈춰 섰다. 그러고서는 다시 걸음을 돌려 버도네 교수에게 가기 시작했다.

“저, 교수님.”

필릭스의 부름에 버도네 교수가 돌아봤다.

“자네…… 방금 가지 않았었나?”

그가 너무 빨리 갔다 온 나머지 버도네 교수는 혹시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물었다.

필릭스는 그의 질문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용건을 말했다.

“니아 프레슬리에 대해 질문이 있는데요. 저희 집 피후견인 말입니다.”

살 아래 파묻힌 버도네 교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자네, 검술 대회 준비 중에 피후견인까지 챙기는 건가? 다른 학생들이 기가 죽는 이유가 있었구먼! 역시 내 애제자야! 하하!”

갑작스레 애제자로 승격한 필릭스가 썩은 미소를 건네며 이어 물었다.

“그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요. 니아 프레슬리는 어떤 학생입니까.”

“응? 자네, 뭐라고 했나?”

“니아 프레슬리는 수업에 잘 적응……. 아닙니다.”

“아냐, 아냐. 그 친구. 알지.”

“…….”

아리갈리 버도네가 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어쩐지 긴장이 되어 필릭스의 목 너머로 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그 애는 마법의 역사학에 전혀 재능이 없네.”

“…….”

“뭐, 다른 수업에 재능이 있겠지? 공작가 피후견인이니까 말이야. 뭐, 그렇게 기초 지식이 없기도 어렵겠지만 말이야.”

“…….”

“내가 그토록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는데도 대답 한 번을 못 하더군, 대답 한 번을! 태도가, 흠. 흠, 흠. 뭐 그런 학생이…… 다시 말하지만 다른 과목을 잘하면 되는 거지…… 흠!”

버도네 교수의 말에 필릭스는 그나마 짓고 있던 가식적인 미소도 집어치워 버렸다.

“질문하지 마십시오.”

필릭스가 구겨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응?”

“질문하지 마시고 좀 더 쉽게 가르치십시오. 더 쉽게, 재밌게!”

필릭스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발목이라도 잡힐세라 꾸벅 인사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니아에게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여느 때와 달리 가볍지가 않았다. 아리갈리 버도네의 말을 듣자 죄책감이 목구멍을 콱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내 욕심이었어. 아카데미에 다니게 한 건. 겪을 필요 없는 일을 내가 겪게 한 거야. 나 때문에 힘들기만 한 거야…….’

후회가 들었다. 단단했던 바위에 균열이 가는 느낌이었다.

스스로 완벽을 자부했던 그였다. 그런데 이토록 후회하고 반성하는 일이 많아질 줄이야.

인생은 알 수 없어 재미있기는 개뿔, 예상할 수 없이 찾아오는 일들 때문에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서관 앞에서 만난 니아는 정말로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니아 프레슬리는 여전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특히나 아침 수업에 지각을 해 모두의 주목을 받아 더욱 앙금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하녀 된 입장으로, 심지어 그녀에게 후원까지 해 주는 이 대단하고 고귀하신 도련님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니아, 아까는…….”

“죄송합니다, 도련님. 제가 아까는 너무 무례하게 굴었죠. 반성하고 있습니다.”

“응?”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매우 죄송하지 않은 투로 니아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황한 필릭스에게 머리를 꾸벅 숙이고는 걸어갔다. 그러고는 마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더니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는 필릭스의 머리는 터질 것 같았다. 자신에게 화가 난 그녀를 보는 것 자체도 힘이 들었고, 스스로를 향한 후회감에 속이 아파 왔다.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른 채 평온히 잠든 니아를 바라보며 필릭스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랑이란 정말 어렵군. 내가 겪었던 그 어떤 일보다도…….’

처절하게 사랑의 고난을 겪고 있는 필릭스는, 자신이 이만큼이나 감성적으로 변할 수 있음에 새삼 놀라웠다.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했는데, 니아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사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너 하나로 인해 내 세상이 전부 변하는군.’

필릭스는 공작가에 도착하자마자 튕기듯 마차에서 내리려는 니아를 빠르게 붙잡았다.

“얘기 좀 해.”

니아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그를 빤히 바라봤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그녀는 짐짓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말씀하세요, 도련님.”

필릭스는 꽁해 있는 그녀의 말투에 한숨을 내쉬고는 애원하듯 말했다.

“그냥 좀……. 제발. 부탁하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니아는 잠시 멍해졌다. 필릭스 쿠아란이라는 사람이 하녀에게 ‘제발, 부탁하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도서관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한 순간 또 필릭스가 소리칠 시간이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그녀의 눈치만 살피며 졸졸 따라왔다.

얼마든지 앞지를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녀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마차에서도 그는 잠이 든 니아를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 마차가 덜컹거리는 바람에 그녀는 중간에 깨어났다. 하지만 눈을 뜰 수는 없었다. 필릭스가 쳐다보고 있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져서다. 그의 옅은 숨소리만이 마차 안을 가득히 채우고 있었다.

‘눈 마주치면 어색할 것 같아.’

무언가 민망했다. 그래서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밖으로 나가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필릭스가 꽤나 힘들어 보이는 얼굴과 조심스러운 말투로 니아에게 말을 건넸다.

‘갑자기 왜 이렇게 구는 거야. 변덕이 심해도 너무 심하잖아.’

하지만 부드럽게 다가오는 필릭스의 모습에, 결국 니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침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그였다.

필릭스는 그제야 니아에게 웃어 보였다. 다정한 미소였다.

“잠깐 좀 걸을까?”

니아는 순간 그의 미소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소가 반갑다니…….’

요새 필릭스는 그녀를 보면 웃었다.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녀의 말에도 소리 내서 웃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녀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겨우 오늘 아침 동안 그 미소를 보지 못한 것뿐인데 반갑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가 그녀를 보며 웃는 게 당연한 거고, 웃지 않는 건 이상한 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나도 참. 며칠 밤을 새워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야. 오늘은 정말 잠을 좀 자야겠다.’

자신의 피곤한 몸을 탓하며 오늘은 공부를 내려놓고 잠을 자겠다 다짐하는 니아 프레슬리였다.

필릭스와 니아는 정원을 나란히 거닐었다. 분수를 지나고, 아직 피어나기 전의 꽃들로 가득 찬 정원을 지났다.

이 시간이면 언제나 그렇듯 공작가를 방문하는 노을이 또다시 그들을 찾아왔다. 온 세상은 이미 금빛이었다.

“니아, 아까는 내가 말이 심했어. 내가 그랬던 건…… 네가 걱정돼서야.”

필릭스는 한참을 걷다 입을 열었다.

“……네.”

지는 석양을 바라보던 니아가 그의 말에 답했다. 잠시 함께 걸었을 뿐인데, 노을이 마음을 어지럽힌 탓일까. 그녀의 마음이 눈 녹듯 풀리고 있었다.

“네가 아파 보여서 걱정됐어.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싫은 게 아니야. 오히려 나는, 미안해. 내가 너를 아카데미에 다니게 해서 네게 힘든 일들이 생기는 것 같아서…….”

“…….”

“나는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날마다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필릭스의 눈동자에는 붉게 타는 태양이 담겨 있었다. 그의 눈을 이렇게 자세히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 차가운 눈매라고 생각했건만, 다시 보니 선했다. 분명 선한 느낌이 있었다.

“정말 미안해. 사과할게. 돈을 주지 않겠다 말했던 것도…… 화가 나서 뱉은 말이지 진심은 아니었어. 아까 내가 실수한 건, 용서해 줬으면 좋겠다.”

필릭스는 그의 눈을 계속해서 쫓는 니아 프레슬리 때문에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말했다. 하지만 니아는 그 모습이 붉은 노을에 비친 탓이라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괜찮아요.”

“…….”

여전히 진지한 표정의 필릭스를 향해 니아가 진짜라는 듯 웃어 보였다.

“다 까먹었어요. 저도…… 화내서 죄송해요. 하녀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녀의 말에 필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단 한 번도 니아 프레슬리는 자신에게 공작가의 하녀였던 적이 없었다. 그녀는 늘 그가 홀로 좋아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무슨 약속이요?”

“몸을 상하게 하지는 말아 줘. 네가 다치면…… 내 마음이 많이, 안 좋을 것 같아.”

필릭스의 말에 니아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의 말은 다정하고 달콤한 것이었지만 니아에게는 아니었다.

그가 가볍게 뱉은 저 말은 그녀에게 너무나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당신 때문에 제일 많이 다치고 상했어요. 몸도 마음도…….’

니아는 원망스럽게 변하려는 자신의 눈을 애써 감았다.

‘필릭스는…… 아무것도 몰라. 도련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활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약속드리죠.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안 그래도 한계다 싶어 오늘은 푹 자려고 했어요.”

밝게 말하는 모습에 안심이 되었지만, 필릭스는 문득 니아가 일부러 더 환하게 웃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녀가 자신의 사과를 받아 준 것, 그리고 더 이상 몸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별것 아니었을 행동과 말이, 니아가 하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필릭스는 이 순간, 자신의 행복은 모두 니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래 왔지만,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깨달음은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것이었다.

‘정말 사랑해, 니아.’

필릭스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마음이 소리를 낼 줄 안다면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이미 니아에게 들렸을 말.

그러나 그의 마음이 보일 리가 없는 니아는 계속해서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카데미가 그렇게 끔찍한 곳은 아닌 것 같아요. 처음엔 정말 싫었는데……. 공작가를 떠날 때 어쩌면 좋은 추억 하나 정도는 가지고 갈 수 있겠어요. 어디 가서 제가 헬릭시의 정치까지 배우겠어요? 공부하는 거 좋아요. 이건 진심이에요.”

자신을 향해 더 환하게 웃는 니아를 보자 필릭스는 심장이 아파 왔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팠다.

이 심장 뛰는 소리가 혹시 니아에게 닿을까, 필릭스는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필릭스의 세상이, 붉게 타는 노을 아래 온통 니아로 물들어 갔다.

함께 노을 아래 서 있던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는 봄바람이 부는 듯했다.

물론 니아는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무척이나 바빴고 필릭스도 검술 대회 연습으로 인해 바빴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전에 없이 따듯했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니아의 공부에 대한 열의가 더욱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열정은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니아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필릭스와 함께 마차를 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연구에 미친 늙은 학자처럼 책을 읽어 댔다.

“표정이 조금 안 좋은 것 같은데.”

아카데미에 도착해 미련 없이 강의실로 향하려는 니아를 붙잡고 필릭스가 물었다. 마차에서 그녀의 표정만을 살피다, 이제야 묻게 된 그였다.

니아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필릭스의 눈에는 실망한 표정이 다 보였다. 이제 그는 그녀의 아주 사소한 표정 변화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게…… 오늘 도서관이 문을 닫는 날이라고 하더군요. 정기 검진?”

“정기 휴무.”

필릭스가 정정하자 니아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도서관을 못 갈 것 같아요. 질문이 쌓여 있는데 말이죠. 그래서 조금……. 그렇게 우울한 건 아니에요.”

말과는 달리 분명 표정은 우울했기에 덩달아 침울해지려던 필릭스였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 갑자기 그가 눈을 길게 휘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내 연습을 보러 와야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필릭스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 미소에 왠지 또 사냥당하는 토끼가 된 느낌이 들어 니아는 탐탁지 않았다.

“뭐, 어디 조용하게 공부할 수 있는 장소는 없나요?”

하지만 필릭스는 어림없다는 듯 대답했다.

“없어. 없으니까 오늘은 연습을 보러 와. 내가 매일 기다린 건 잊지 않았겠지?”

요즘따라 공부 의욕이 늘어난 니아가 약속시간보다 오래 도서관에 머물렀던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필릭스는 늘 약속시간보다 일찍 갔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더 지나서야 니아를 볼 수 있었다.

“알겠어요……. 검술 연무장으로 가면 되는 거죠?”

양심이 찔려 버린 니아가 금세 꼬리를 내리고 대답했다. 필릭스가 싱긋 웃었다.

“데리러 갈까?”

니아가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

“됐습니다. 저도 이제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대충 알아서요.”

필릭스가 그녀의 대답에 못내 아쉽다는 듯 한 번 더 강조했다.

“꼭 와야 해?”

니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좀 하면 안 될까?”

시저 카르만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니아에게 말했다.

“하나만 더 하자. 하나만.”

니아는 책장을 넘기며 표시해 온 부분을 시저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시저는 ‘정말 끔찍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녀가 보여 준 부분을 꼼꼼하게 보기 시작했다.

“꼭 말문이 트인 어린아이 같군. 질문이 폭포처럼 쏟아져. 애당초 질문을 받아 주지를 말았어야 했어!”

시저가 니아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 놓고는 또다시 투덜댔다.

“하지만 아예 헛짓거리를 하는 건 아닌 모양이야. 이제 꽤나 쓸모 있는 질문도 하는 걸 보니.”

시저가 다음 질문을 찾아 뒤적거리고 있는 니아를 향해 중얼거렸다.

수재인 자신의 객관적인 눈으로 보자면, 니아는 배움이 빠른 편이었다. 처음에는 뭐 이런 바보가 있나 싶었지만, 그동안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 이제는 스펀지처럼 지식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대화는 통할지도.’

시저가 동그란 니아의 정수리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다른 질문을 어디에 써 놨는지 계속 뒤적이고 있었다.

‘나도 좀 쉬자고, 니아 프레슬리!’

“니아 프레슬리, 이제 생명술 수업 시작이야. 꺼져.”

시저는 말을 내뱉고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내일은 니아가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궁금해하는 그였다.

생명술 수업이 끝나고, 니아 프레슬리의 기분은 아침의 우울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주 고조된 상태였다.

‘내가 토마토를 만들어 내다니!’

니아는 자신이 만들어 낸 토마토를 입에 쏙 넣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서 터졌다.

‘시저보다는 적지만 세 개나 만들었어. 세 개나!’

니아는 강의실 계단을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니아 프레슬리, 너 혹시 오늘 좋은 일 있니? 네가 이렇게 웃고 있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주변을 지나던 할로나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누가 하녀 아니랄까 봐 어딘가 어두침침해 보이던 니아였는데 오늘따라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왠지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러게. 좋은 일이 있어 보여, 니아.”

함께 지나던 카레나도 할로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말했다.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요.”

니아가 수줍게 대답했다. 말을 걸었던 할로나와 카레나가 놀랐다는 듯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거 드실래요? 맛있는데…….”

니아가 남은 토마토 두 개를 할로나와 카레나에게 각각 건넸다.

할로나와 카레나는 얼떨결에 그녀가 준 토마토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자리를 뜨던 그녀들이 동시에 말했다.

“귀엽다.”

그러고선 서로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니아는 수업이 끝나고 검술 연무장을 찾아 발을 옮겼다. 가는 길에도 어쩐지 신이 났다. 빨간 토마토 세 개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며 기분을 부풀게 만들었다.

“검술 연무장. 어디 보자…… 이리로 가면…….”

니아가 아카데미 지도를 들고는 방향을 살폈다.

“저기군.”

니아는 지도를 소리 나게 덮더니 확신에 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런 그녀를 봤다면 그쪽은 와인 한 통을 원샷 하고 봐도 아니다라고 말해 줬을지도 모르겠다.

지도는 죄가 없었다. 단지 타고나길 방향 감각 없이 태어난 니아의 잘못이었지.

‘이상하네. 분명 여기가 맞는 거 같은데.’

니아는 가도 가도 창고같이 외진 곳만 나오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때, 누군가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니아? 공작가 하녀?”

니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사람이었다. 분명 아카데미에 온 첫날 마주쳤던, 필릭스의 친구 앨버트 브라이트였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앨버트 브라이트가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연무장……에 가고 있는 중인데요.”

그녀의 말을 들은 앨버트가, 그 앞에서 부끄러울 니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풉, 푸흡…… 니아, 여긴 검술 연무장이랑 완전히 반대 방향이야. 여긴 무기 보관소로 가는 길이라고. 나처럼 칼날이 나갔을 때를 빼면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지.”

“…….”

할 말을 잃은 니아를 보고 앨버트가 개구진 얼굴로 물었다.

“필릭스가 연습을 보러 오라고 했나 보지?”

니아는 앨버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척이 좀 있는 거겠지? 필릭스 쿠아란, 내 자네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꼭 죽기 전에 보고 싶네.’

앨버트는 이번에도 필릭스의 연애사업에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니아에게 말했다.

“어차피 나도 연무장으로 가는 중이니 같이 가지. 날 따라오면 적어도 길을 잃지는 않을 거야.”

자꾸 자신을 보며 실실 쪼개는 앨버트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는 도련님인데다 지난번에 그녀를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던 사람이기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때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친한 척 구는 거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니아는 앨버트의 뒤를 따라나섰다. 저 도련님도 필릭스 못지않게 이상했다.

“필릭스가 먹을 건 잘 챙겨 주던가?”

조용히 가면 좋으련만. 앨버트는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계속 질문을 던져 왔다.

“……네.”

“선물도 몇 번 받았겠지?”

“……네.”

“갑자기 화낸 날 갑자기 사과하지는 않던가?”

“……네.”

니아는 어쩜 그렇게 실제로 본 것처럼 묻는지 앨버트가 신기해졌다.

“흠, 흠! 다 내 덕분이란 걸…… 알 필요는 없고. 필릭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족집게 점성술사처럼 물어서 니아를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곤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생각해……. 후원받는 하녀가 주인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 수 있다고.’

“솔직히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지 않은가.”

앨버트가 은근히 물어 왔다.

“뭐, 그렇긴 한데…….”

니아의 답에 앨버트가 그럼 그렇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말이야.”

“그런 성향이 있긴 하시죠.”

니아는 필릭스의 오래된 친구라 역시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며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필릭스는 정말 인간으로서는 별로인 것 같네. 얼굴과 집안, 실력 빼면 볼 게 뭐 있다고.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저기, 도련님. 친구분께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갑자기 단호해진 니아를 앨버트는 흥미롭다는 듯 쳐다봤다. 장난기 가득해 보이는 그 얼굴이 니아는 보면 볼수록,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했길래?”

“인간으로서 별로라고 하셨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사람이거든요.”

말을 끝마치고 니아가 앨버트를 째려봤다. 앨버트는 마치 ‘정답이야!’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수 없어.’

니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관심이 없는 앨버트는 그동안의 자신의 노고가 헛된 것은 아니었음에 홀로 감탄하고 있었다.

‘필릭스 쿠아란, 희망이 아예 없어 보이지는 않네. 수고했지. 수고했어. 아암, 내가 수고가 많았어.’

앨버트 브라이트는 그동안 수고한 자신의 몸을 스스로 쓰다듬었다.

그런 그를 니아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변태인가?’

물론 앨버트 브라이트는 자신이 변태로 취급받더라도 십오 년 지기의 사랑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검술 연무장에 도착한 니아는 살짝 겁이 났다. 입구 사이로 큰 덩치의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쇳소리도 들려왔다.

니아는 빠른 눈으로 필릭스를 찾았다.

“어이, 필릭스! 여기 자네 손님 왔네!”

옆에 있던 앨버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큰 덩치의 사내들이 일제히 니아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닥쳐요, 제발 좀!’

니아는 도끼눈을 하고 앨버트를 쳐다봤다. 정말 뭐지, 이 인간?

앨버트는 오는 내내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었고, 지금도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니아!”

필릭스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니아가 왔어.’

그는 그녀가 생각보다 늦게 오자 걱정이 되려던 참이었다. 일단은 니아가 무사히 연무장으로 찾아와 다행이었다.

하지만…… 왜 옆에 쓸데없는 것을 달고 오는 거지?

“앨버트. 네가 왜 니아와 같이 온 거지?”

필릭스가 니아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낮게 읊조렸다.

둘이 딱 붙어서 같이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앨버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있었다. 그것이 필릭스에게는 마치 니아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 좋아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아, 제가 오는 길을 좀 헤맸거든요.”

필릭스의 물음에 니아가 대신 답했다. 앨버트는 ‘바로 그렇지.’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그래서 내가 데리러 간다고 했잖아…….”

필릭스가 이를 악물고 니아에게 중얼거렸다. 니아는 그래도 결국 잘 도착했으니 됐지 않았냐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했다.

“니아, 저기 가서 앉아 있…….”

필릭스가 그녀를 의자 있는 쪽으로 데리고 가려던 순간, 큰 장정들이 하나둘 니아 앞으로 몰려들었다.

“오, 그 유명한 공작가 피후견인인가?”

“검술 연습 때문에 얼굴 구경도 못 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는군.”

“도대체 어떤 능력이 있길래 후원을 받게 된 거지?”

순식간에 니아를 둘러싸 시야를 막는 기사단이었다. 그들은 마치 니아가 아카데미에 처음 온 날처럼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들 뒤지고 싶은 거 아니면 당장 꺼져.”

살벌한 필릭스의 말에 바로 오합지졸이 되었지만.

“니아, 이리 와서 앉…….”

하지만 필릭스의 말은 한 번 더 끊길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없어 얼굴을 몰랐는데. 반가워.”

백발에 가까운 금발 남자가 니아에게로 와서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덩치 큰 사내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니아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하녀인 자신에게 악수를 건넨 이는 처음이었다.

백발의 남자는 하녀인 니아에게 아주 정중하게, 그리고 또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감겼다.

“제국 에슬란의 제1황자, 아론 엘로이다.”

남자의 이어진 말에 니아는 깜짝 놀라 내민 손을 급히 빼냈다.

‘황자……? 진짜로 황자?’

니아는 놀라서 얼이 빠진 눈으로 황자를 바라보았다.

“어, 저, 저…… 그…… 황자님을 뵙습니다. 제국의 축복이…… 그, 영원하기를…….”

당황한 니아가 말을 더듬자 필릭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니아, 그렇게까지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여긴 아카데미 안이다.”

그의 말에도 니아는 어쩔 줄을 몰랐다. 살면서 제국의 황자와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온몸이 긴장돼 바들바들 떨렸다.

“그래, 긴장할 필요 없어. 지금은 황궁에서 수업을 받고 있지만, 나도 예전엔 아카데미 학생이었으니까.”

“그러시군요…….”

아론의 말에도 몸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하하, 자꾸 그러면 나도 긴장돼. 긴장 풀어.”

따듯하게 말하는 아론을 향해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소리치고 있었다.

“공작가의 하녀라면…… 필릭스에 대해 잘 알겠네. 필릭스와 나도 오랜 친구거든. 이번 검술 대회에서 필릭스가 우승을 한다면 여성들에게 인기가 더 많아질 거야. 안 그래도 인기가 넘치는데. 그렇지?”

“네, 황자님. 옳은 말씀이십니다…….”

니아는 여전히 긴장하며 대답했다. 황자가 말하니 모든 말이 제국의 법처럼 들렸다. 감히 토를 달면 안 될 듯한. 그의 말을 무슨 예언 받들 듯 구는 니아였다.

필릭스는 그런 니아 프레슬리의 반응에 기가 막혔다.

“어,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닌데……. 하하, 긴장을 많이 한 모양이로구나.”

또다시 황자는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듣다 못해 필릭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 속삭였다.

“그만하시죠.”

황자는 또다시 웃어 보였다.

“왜. 내가 묻고 싶은 것이 많은데. 널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의 속삭임에 필릭스는 정말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황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론, 제발 입 닥쳐.”

그제야 황자는 알았다고 하며 물러섰다. ‘오랜만에 구경 온 황자에게 조금 불경했어.’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니아를 구석 의자에 앉힌 필릭스는 왠지 불에 활활 타오르는 사람 같았다.

“오늘은 봐줄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알아서 잘 피해. 다치게 하고 싶진 않거든.”

모두가 농담이라고 말해 달라는 듯 떨리는 눈빛으로 필릭스를 쳐다봤다.

‘그동안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야……?’

하지만 절대 진담인 듯,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이는 필릭스였다.

“화, 황자님. 오랜만에 필릭스와 검술 연습 하시죠. 저희는 오늘 충분히, 연습했지 말입니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자, 아론 황자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온화하게 웃기 시작했다.

“오늘은 구경만 하러 온 거야. 더스틴 자네도 그러지 말고 지원해 보는 게 어때? 내 친구긴 하지만, 제국 최고의 검술 실력자니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야.”

‘대충 분위기 보고 피하는 거면서, 말만 청산유수야!’

더스틴은 벌레 하나 죽여 본 적 없는 것처럼 평화로운 황자의 말투에 속으로 ‘에잇!’ 욕을 하고 자리를 떴다. 일단은 멀리 있는 게 상책이었다. 필릭스는 가까운 사람부터 족치는 경향이 있었다.

“백터, 이리 와.”

가장 겁이 많은 백터가, 가장 운이 나쁘게도 필릭스의 첫 먹잇감이 되었다.

“히……히익!”

백터의 비명 소리와 함께, 필릭스의 기사단 사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필릭스는 마치 도망치는 사슴 잡듯이 유연하게 한 명 한 명 빠르게 해치웠고, 슬금슬금 자신을 피하는 사람도 남김없이 불러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천재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게, 남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실력으로 빠르게 상대를 제압하는 필릭스였다. 그의 큰 키는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고 손에 든 검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다.

계속해서 필릭스의 대련 상대가 바뀌었다. 하지만 새로운 대련 상대자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칼을 놓치고 자신의 목을 필릭스의 칼 아래 내주고 말았다.

‘사자 같아…….’

그는 마치 이 연무장을 지배하는 밀림의 왕 같았다. 니아의 눈에 필릭스는 작은 먹잇감 정도는 앞발 하나로 가벼이 짓눌러 버리는 야생의 사자처럼 보였다.

“필릭스, 이러다간 보 아카데미에서 너 빼고 검술 대회에 나갈 사람이 없겠어. 우리 조금만 평화롭게 할까?”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이 필릭스밖에 남지 않고 나서야 황자가 다가가 그를 말렸다.

‘저 인간은 다 하고 나니까 이제 와서……!’

삼십 명의 아카데미 기사단은 모두 일제히 마음속으로 황자에게 쌍욕을 날렸다. 황자는 정확히 마지막 한 명까지 필릭스에게 당하고 나서 그를 말렸던 것이다.

필릭스는 황자의 말을 무시하고, 니아가 있는 쪽을 기대에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멋있었겠지?’

필릭스가 떨리는 마음으로 니아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그녀의 눈과 딱 마주쳤다.

필릭스의 심장은 대련을 할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쿵쿵 뛰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연무장에 그와 니아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금세 굳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있는 니아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