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저주받은 몸
아카데미에 도착하고, 필릭스는 역시나 검술 연습 때문에 니아와 함께 갈 수 없었다.
대회는 한 달 뒤였고, 그동안 필릭스는 아카데미에서 임시로 만들어 놓은 기사단에서 연습을 해야만 했다. 아카데미 입장에서는 우승자가 나와야만 체면이 서기 때문에, 관리가 은근히 철저했다.
‘두 달이나 같이 수업을 듣지 못한다니.’
확 기사단을 때려치울까 고민하게 되는 필릭스였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야. 그래도…… 우승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해. 그럼 니아 프레슬리도 내게 반하겠지.’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쌩 가 버리는 니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필릭스는 다시 한번 굳은 결심을 다졌다. 가장 멋진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반면 필릭스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강의실에 온 니아는 오늘, 이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어제 생명술 수업에서 나름 성공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니아는 어쩐지 수업들에 조금은 적극적으로 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천문학 책을 뒤적거리며, 어떻게든 받아들여 보려 머리를 눌러 댔다.
<숙련된 마법사도 시세포의 크기에 의해 1분각보다 자세히 분해해 볼 수는 없으며, 확대 렌즈를 끼거나 특수 마법이 걸린 장치를 써서 관측하더라도 겨우 0.1분각의 정밀도의 위치밖에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다른 사람들은 정말 이런 게 이해가 된다는 말인가? 니아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오직 ‘숙련된 마법사’, 딱 여섯 글자까지였다.
‘이래서는 오늘도 멍만 때리다 수업이 끝나겠어.’
하지만 다행히도 니아도 들을 만한 수업이 있었다. 바로 ‘에슬란의 역대 악인들’에 대해 배우는 수업이었다.
“여러분,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은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 마정석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어쩔 수가 없군요.”
자애로운 미소를 띤 카산드라 교수가 말했다.
“자, 자. 지루하다는 표정 짓지 말아요. 마정석의 탄생에 대해 배워야, 희대의 마정석 사기꾼 오르빅에 대해 배우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학생도,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하는 학생도 있었다. 니아는 그나마 이 수업이 그녀가 이해 가능한 수업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범생 편에 합류했다.
“위대한 황제 에슬란이 에슬란 제국을 세웠을 때. 그때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모두 알 거예요. 그때 제국에 등장한 마법사가 있죠. 그게 누구죠?”
“벅 프릴리입니다.”
카레나가 안경을 손끝으로 올려 세우며 답했다.
카산드라 교수는 친절한 그의 학생에게 눈을 찡긋하고 말을 이어 갔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죠. 벅 프릴리가 얼마나 끔찍한 악당, 괴물인지를. 그는 마정석 없이도 마법을 했고, 심지어는, 심지어는……!”
차분한 듯 보이던 그녀가 갑자기 뭔가에 홀린 듯 목소리를 높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마치 겁을 주려는 듯 손가락을 굽혀 학생들을 위협하는 자세를 취했다.
“몸에 어떤 상처를 내도 그 상처가 다 아무는 저주받은 몸을 갖고 있었답니다!”
과장되게 말하는 카산드라 교수에게 누구도 겁먹지 않았지만 니아 프레슬리는 달랐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가고 있었다.
“에슬란 황제께서는 그의 신비한 재능을 높이 사 황궁으로 불러들이셨죠. 그의 탐욕스러운 본성을 알지 못한 채. 황제께서는 그 괴물을 불러들여서는 안 됐던 거예요…….”
카산드라 교수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살인을 하기 시작했죠. 한번 살인의 맛을 본 그는 멈추지 않았답니다. 그는 마법의 능력을 사용해 사람을 찢어 죽이고, 재로 만들고, 때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어요. 살려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를 즐기며…….”
대부분이 그녀의 말에 빠져든 가운데, 니아의 입술만은 창백하게 생기를 잃어 갔다.
“그의 욕망은 어디까지였을까요. 벅 프릴리는 에슬란 제국을 집어삼키는 꿈을 꾸었답니다.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거죠. 에슬란 제국 역대 최악의 살인마 벅 프릴리. 에슬란 황제를 죽이려 했지만……. 하지만 에슬란 황제께서 누구십니까. 결코 쉽게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벅 프릴리의 암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거든요. 자, 여러분! 여기서 다 같이 책상을 두들겨 주겠어요? 그래, 효과음 말이에요.”
카산드라 교수의 말에 학생들이 책상을 두들기며 울림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북소리처럼 울리며 듣는 이로 하여금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좋아요, 좋아. 하지만 알다시피 그는 저주받은 몸! 쉬이 죽지 않았답니다. 그 끔찍한 괴물이 글쎄 제국의 하나뿐인 공주를 납치해 도망을 쳤……!”
그녀는 점차 크게 말하다 호흡 곤란이 온 듯 말을 끊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후, 도망을 쳤어요. 그리고 이 새ㄲ, 아니, 이 괴물 놈은 보란 듯이 공주의 두 눈을 파먹었지요. 황제를 자극하려고, 공주의 눈을, 이 썩을, 문드러질, 하…….”
어디선가 안타까운 탄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공주에 대한 슬픔의 탄식이리라.
“분노한 에슬란 황제께서는 직접 그를 처단하십니다. 사흘 밤낮을 그 괴물과 싸우셨고, 결국 승리하시죠. 여러분, 일단 박수 주세요!”
자그마한 함성과 함께 교실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 괴물 놈이 죽은 자리에 돌이 하나 남는데, 그것이 바로…… 여러분 모두가 알다시피 마정석이에요.”
‘괴물이 죽어 돌이 되었다더니. 그게 마정석이었구나.’
니아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생각했다.
“그 후 우리는 마정석을 이용해 마법을 할 수 있게 되었죠. 뭐, 후에 마정석 하나로 여러 개의 마정석을 만들어 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마법의 역사학 교수님께서 잘 알려 주실 거라 믿고 더 얘기하지 않을게요.”
카산드라 교수는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와 미소 지었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초대 황제 폐하 덕분에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모두가 알다시피 요즘 세상에 마정석 없이 마법을 하는 일은 이치에 어긋난, 뭐 그런 일이라는 거죠. 그런 일이 있을 리도 없고요. 에슬란 폐하께서 마정석을 얼마나 힘들게 얻어 내셨는데 말이에요. 벅 프릴리를 보세요. 어긋난 존재니 어긋난 행동을 하잖아요?”
“옳은 말씀이세요.”
“난 이렇게 내 말에 대답해 주는 학생이 참 좋더라. 이럼 또 내가 기운이 나서 뭐라도 더 얘기해 주고 싶어지잖아요. 뭐…… 가끔가다 몇백 년에 한 번씩 벅 프릴리 같은 사람을 봤다는 제보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다 그거죠. 그거. 그 뭐더라, 찌, 찌…….”
“찌라시요, 교수님.”
“맞아요! 참 똑똑하기도 하지. 어머, 마정석 사기꾼 이야기를 해 준다는 걸 다른 소리를 너무 많이 했네. 자, 여러분! 그럼 내 교재 188페이지를 펴 봐요. 자, 오르빅은 희대의 마정석 사기꾼으로…….”
‘어긋난 존재.’
니아는 교재를 펴지 않았다.
‘어긋난 존재는 어긋난 행동을 한다.’
어제의 니아는 마정석 없이 꽃을 피웠다.
‘나는 상처가 아물고, 마정석 없이 마법을 할 수 있다.’
니아 프레슬리는 생각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런 니아 프레슬리의 귓가에 벅 프릴리가 속삭이는 듯했다.
‘너는 나랑 같아. 괴물이라니까? 이미 알고 있었잖아. 네가 괴물이라는걸.’
천문학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니아는 여전히 앞선 카산드라 교수의 수업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천문학을 통해 미래를 점쳐 보는 연습을 하도록 하지. 매우 섬세한 작업이라는 걸 명심들 하게. 별들이 시시각각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순간의 실수로 전혀 다른 미래를 예언할 수도 있네.”
교수가 칠판에 우주의 모습을 띄웠다.
“움직이는 별들을 잘 살펴보게나. 예언의 내용은 종이에 적어 수업 끝날 때 내는 걸로 하겠네. 자세하게 적을수록 좋지만, 틀린 내용이 있다면 감점이 있으니 주의들 하게.”
자세히 살펴보니, 별들이 정말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니아의 눈에는 그냥 움직이는 반짝이는 것들, 그뿐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카데미생들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각각 종이에 미친 듯이 내용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 반짝이기만 하는 것들로 뭘 알 수 있다는 거지…….’
니아는 빈 종이를 바라보며 깃펜을 돌렸다. 주위를 슬쩍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니아뿐이었다.
쓸 수 없기도 했지만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 어떤 의욕도 들지가 않았다. 아직도 괴물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떡하지…….’
그때 누군가 니아를 펜으로 쿡쿡 찔렀다. 니아가 깜짝 놀라 옆을 바라봤다.
“제국력 150년쯤의 하늘의 모습으로, 가장 강하게 빛을 내는 두 별은 두 명의 황자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라고 써.”
아카데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니아지만, 건방진 목소리로 답을 알려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모든 수업에서 교수들에게서 극찬을 받는 사람 정도는 확실히 기억했던 것이다.
‘시저…… 카르만.’
짙은 검은색 앞머리가 그의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때문에 표정을 전혀 알 수 없었고, 니아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곤 거만하게 뻗은 코와 움직이는 입술뿐이었다.
니아는 어쩐지 괴짜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고, 고마워.”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반말을 중얼거리며, 시저가 말한 대로 종이에 적어 나갔다.
‘뭔가 내용이 부실한 것 같기는 하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행이다.’
니아는 슬쩍, 빼곡하게 채워진 시저의 종이를 보며 생각했다. 단 두 줄밖에 쓰지 못한 그녀의 종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니아는 일단 백지로 내지 않는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공작가는 도대체 너를 왜 후원하는 거지? 알 수가 없군.”
자신의 종이를 훔쳐보는 니아가 한심하다는 듯 시저가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팔로 자신의 종이를 가렸다.
‘알려 줘 놓고서는 왜 가려?’
어차피 더 베낄 생각도 없었는데.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지만 니아는 그의 말을 그대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공작가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이 남들 눈에 얼마나 어이없게 비칠지 알았기 때문이다.
“다들 그만! 여기까지 하게. 더 이상 손을 움직이면 부정행위로 간주하겠네!”
모두가 아쉬운 듯 펜을 놓았고, 시저와 니아는 서로 다른 의미로 이미 과제가 끝나 있었기에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이 화면은 제국력 153년의 하늘이네. 다들 알고 있었는가?”
교수의 말에 몇 명은 몰래 종이에 적어 둔 내용을 바꾸었다. 시저 카르만은 그 모습이 우스운지 허, 하고는 짧게 비웃음을 날렸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시저 카르만 학생이 적은 내용을 듣고 수업을 마칠까?”
교수가 너를 무척 신뢰하고 있다는 눈빛으로 시저 카르만을 바라봤다. 막상 그런 교수를 바라보는 카르만의 눈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제국력 153년의 밤하늘로, 가장 빛나는 두 별은 황자 두 명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조금 더 환한 빛을 비추는 쪽이 먼저 태어나는 황자를 의미하겠고……. 동그란 원을 그리며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긴 별들은 밤의 여신 닉스의 별자리입니다. 별들이 저만큼 제자리를 떠나 다른 자리로 이동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네요. 폭풍의 별 캄타페 또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니, 그해 제국에 폭풍이 불어 사고가 있을 것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닉스의 별자리와도 연관이 아주 없지는 않겠죠. 그리고…….”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시저 카르만의 모습에 니아는 입을 떡 벌렸다. 저렇게 많은 걸 알고 있으면서…….
니아는 두 줄 쓴 것을 제외하고 텅 빈 자신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시저 카르만은 계속해서 아는 것을 남김없이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교수가 막았다.
“그만, 그만! 거기까지. 아주 정확하네! 자네는 타고난 천문학자야.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어떤 위대한 학자가 될지 궁금해지는구먼. 다들 보고 배우길 바라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남들은 보지 못했지만, 니아는 시저 카르만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문학 수업이 끝났다. 니아는 오늘도 생명술 수업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불행히도 오늘 남은 수업은 모두 천문학과 같이 지루한 수업뿐이었다.
모든 수업이 끝나자, 니아는 도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늘 있던 일 때문인지 발걸음이 터덜터덜, 힘이 없었다.
아카데미 어디에서도 높게 뻗어 있는 시계탑을 볼 수 있었고, 도서관은 바로 그 옆에 위치해 있었다. 덕분에 니아는 어렵지 않게 도서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디든 상상 이상이군…….’
제국 최고의 규모를 자랑하는 도서관답게, 위를 향해 올라가는 원형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아닌 책에 기가 눌려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며 둘러본 도서관은, 평생 이곳에서 일한다고 해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책이 많았다.
원형 계단 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천장이 있었다. 창을 통과한 햇살이 니아에게로 강렬히 내려왔다.
‘눈부셔…….’
부서지는 햇살을 피하기 위해 니아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을 찾았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발에 힘을 주어 살금살금 걷다 보니, 구석진 곳에 작은 책상 하나가 보였다. 햇살이 거의 비치지 않고, 소파처럼 포근해 보이는 의자와 함께인 책상이었다. 이 도서관과는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니아는 그곳이 마치 햇빛이 없는 늪지대 같아 마음에 들었다.
‘여기로 책을 가져와서 읽으면 되겠다.’
니아는 갖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책을 찾아 떠났다. 여전히 발소리는 죽인 채였다.
겨우 마법학 코너에 도착한 니아는, 작은 절망감과 허탈함을 느꼈다.
‘이렇게 많으면…… 도대체 뭘 읽으라는 거야.’
기본 지식도 없는 니아를 반기는 것은 마법학과 관련된 수많은, 난이도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이었다. 무엇을 향해 손을 뻗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걸 다 어떻게 읽어.”
니아는 원망 섞인 눈으로 책들을 바라봤다. 기가 죽다 못해 사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축 처진 니아의 작은 어깨는 커다란 책꽂이와 대비되어 더욱 왜소해 보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뭐라도 한 권 읽어야겠지. 어차피 필릭스도 기다려야 하고.’
니아가 바로 눈앞의 책을 뽑으려고 천천히 손을 뻗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손을 쳐 내며 휙, 먼저 책을 집었다.
“내가 먼저 집었어.”
당당하게 말하는 말투에 자연스럽게 뒤로 고개가 돌아갔다. 니아는 황당한 눈빛으로 뒤에서 손을 뻗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시저 카르만?”
놀랍게도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시저 카르만이었다. 바로 오늘 니아에게 말을 걸어 왔던.
니아는 놀라서 도서관인 것도 잊고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시저 또한 그녀를 발견하고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니아…… 프레슬리?”
여전히 눈을 가린 긴 앞머리 때문에 눈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말투만으로 그가 그녀를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이 책을 탐내려는 거라면 그만둬. 네 수준에 읽을 만한 책이 아니니까.”
시저는 마치 그녀가 책을 빼앗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운지 잡은 책을 꼭 감싸 안았다.
“책은 안 뺏어. 그 책이 무슨 책인지도 모르는걸…….”
니아가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시저 카르만은 미련 없다는 듯 ‘그럼 이만.’ 하고 자리를 뜨려 했다.
가만히 있던 니아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그녀는 떠나려는 시저 카르만의 팔을 급하게 붙잡았다.
“잠깐!”
“뭐, 뭐지? 왜 이래. 아까도 말했지만 이 책은…….”
“책은 됐다니까. 대신…… 나 좀 도와줄래?”
니아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어쩌면 오늘 하루가 우울하게 끝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팔을 잡고 미소 짓는 니아. 시저 카르만의 앞머리 속 눈동자가 불길함을 감지한 듯 살짝 흔들렸다.
“이제…… 됐지?”
시저 카르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지금 배우는 수업의 기본서들이라는 거지?”
니아가 품 안에 책을 한 아름 안고서 확인차 물었다.
시저는 정말 귀찮은 걸 발견했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했잖아. 아베쎄 아카데미 입학할 때나 보는 수준의 책들이야.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들어 있다고.”
‘정말 이상한 애야…….’
공작가의 피후견인이라는 이 여자아이는, 처음 등장했을 때 혹시나 자신의 자리를 뺏을 만한 귀재는 아닐까 시저를 걱정시켰다.
그러더니 도대체 후원의 목적을 알 수 없는 실력과 (정말 공작가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믿을 뻔했다.) 정신이 어딘가로 팔려 나간 얼굴을 보여서 자신을 안심시키더니, 이제는…….
“이거 읽고 궁금한 거 생기면 물어봐도 될까? 네가 아카데미에서 제일 공부 잘하잖아.”
자신을 칭찬하는 척하며, 아카데미 최고 수제 시저 카르만을 본인 성장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거기에는 질문 같은 거 필요 없을 만큼 쉬운 내용뿐이야.”
시저 카르만은 싫다는 티를 팍팍 냈다. 그를 쉽게 봤다면 아주 실수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쉬운 남자가 아니…….
“그건 읽어 봐야 알지. 허락한 걸로 알고 있을게.”
니아가 그의 말을 끊고 방긋거렸다.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시저 카르만은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겨우 숨을 고른 그였지만, 니아 프레슬리의 막돼먹음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뭐…… 뭐야!”
니아가 구석진 자리의 책상에 탁, 하고 책들을 내려놓았다. 시저 카르만은 당당한 그녀의 모습에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왜? 무슨 문제 있어?”
니아가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문제가 있냐고? 모든 게 문제였다.
“여긴, 여긴 항상 내 자리라고. 더 이상…… 건방지게 구는 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니아 프레슬리.”
‘어쩐지 계속 따라오더라니……! 이제 내 자리까지 뺏으려 하고 있어.’
자신은 아카데미 최고의 수재였다. 물론 종합적인 면에서는 필릭스 쿠아란에게 뒤지기는 했지만……. 어찌 됐건 몸을 쓰는 일을 제외한 다른 수업에서는 타고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자부했다. 그런데 그런 이 시저 카르만에게 이 하녀는 감히 겁도 없이 굴고 있었다.
‘이 자리는 절대 빼앗길 수 없다고.’
이 넓은 도서관에서 이만큼 햇빛이 들지 않는 자리는 이곳밖에 없었다. 어두운 구석에 웅크려 앉아 박사 수준의 책을 읽는 것은 시저 카르만이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아까부터 이 이상한 입학생은 자신의 평정심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귀족으로서 가르침을 줘야만 정신을 차릴…….
“뭐야.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알았으니까 그만 노려봐. 난 이 옆에, 바닥에서 보면 되니까.”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는 그런 그를 순식간에 쫌생이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경고를 별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한 니아 프레슬리는 책상 바로 옆 양탄자 위로 책을 옮겼다. 그러고는 벽에 기대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저는 의연하기만 한 그녀의 행동거지에 기가 차 죽을 지경이었다.
‘내 눈은 보이지도 않을 텐데 내가 노려보는 걸 어떻게 알아. 아무런 말이나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야.’
와중에 불만 섞인 생각을 하며, 시저는 손 뻗으면 닿을 자리에 앉은 니아를 바라보았다. 평온하고 고요했던 자신의 아카데미 인생에 귀찮은 거머리가 달라붙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반면 니아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 나가고 있었다. 어쩐지 시저 카르만이 만만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나도 모르게 계속 반말을 해 버렸네. 뭐라고 안 했으니까, 상관없나?’
저녁 늦게까지, 시저 카르만은 오늘 안에 다 읽으려 했던 <상급 방어술>을 열 페이지밖에 보지 못했다. 니아 프레슬리의 질문이 거의 폭격기처럼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날 그는, 영혼이 탈탈 털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가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니아를 보고 싶은 마음에, 필릭스는 연습을 일찍 끝내려고 전력을 다하는 중이었다.
마지막 대련 상대까지 미련 없이 무너뜨리고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기사단생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필릭스는 그런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도서관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니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도서관 앞에 도착한 그는 정신없이 서성거렸다. 아직 약속한 시간이 되지 않아 니아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일 분이 마치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니아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또 뭐야?’
니아를 발견하자마자 환한 미소로 달려가려던 필릭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니아가 머리통이 다 가려질 정도로 책을 높이 쌓은 채 비틀비틀, 위태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니아!”
필릭스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을 뺏어 들었다. 그제야 짙은 갈색 눈이 보였다.
니아가 필릭스를 올려다봤다.
“아, 도련님. 오셨어요? 주세요. 제가 들게요.”
어림없다는 듯 필릭스가 그녀의 팔을 피하더니 정문을 향해 바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책들은 다 뭐야. 도서관을 다 털어 갈 셈이야?”
필릭스가 빼앗은 책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음, 그게…… 기본서들이에요. 마법 역사학이랑 천문학, 방어술, 공격술…… 생명술도 있고요. 아, 기사론에 관한 기초 책도 빌렸어요. 제일 책이 얇던걸요.”
“……그래?”
“네. 매도 먼저 맞자 싶어서 천문학부터 봤는데……. 흠, 아주 기본서라 그런지 확실히 수업보다는 이해가 조금은 가더라고요. 물론 너무 어렵기는 한데. 아직 그 뭐더라? 에스카…….”
“에스카피아.”
“맞다, 에스카피아. 그 태초의 별인지 뭔지 하는 것밖에 못 읽었어요. 외울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아무튼요.”
손을 꼽아 가며 빌린 책에 대해 종알종알 말하는 니아를 보자 필릭스는 왠지 아기 참새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콩깍지가 십 년째 단단히 쓰인 그의 눈에는 지금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순간 끊임없이 재잘대는 그녀의 입에 입 맞추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덕분에 필릭스는 있는 힘을 다해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당장 초급 기본서들을 주문하라고 시켜야겠군.’
공작가 서재 벽 한쪽을 초급 기본서들로 가득 채울 생각을 하며, 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상상한 니아와의 아카데미 생활이었어.’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니아…….
더 깊은 사이가 되려면 갈 길이 먼 듯하지만, 필릭스는 오늘 꽤나 만족스러웠다.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마차에서도 니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가고 싶었던 필릭스였다. 하지만 니아는 마차를 타더니, 기다렸다는 듯 그의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갔다. 그리고 책에 코를 박고 읽기 시작했다. 기대와는 달리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였다.
‘뭐야, 니아. 나랑 대화를 해야 할 거 아니야.’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든 필릭스였지만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필릭스는 니아가 집중한 틈을 타 조심스럽게 질문을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언제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였다.
“저기, 니아…….”
“네…….”
그녀가 필릭스를 쳐다도 보지 않고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니아 프레슬리는 책 속으로 거의 빠져든 듯, 살짝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 본인이 집중한 상태라는 것도 모르는, 과도한 집중 상태였다.
“그…… 어제 정원에서 한, 그거 말이야.”
“네에……. 그거요.”
“혹시 내가 착각했을까 봐. 그날 마정석을 가지고 있었나?”
필릭스가 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맞다. 어제 도련님이 날 봤어. 마정석 없이 마법을 하는 걸……. 안 돼. 들키면 안 돼. 절대 안 돼.’
니아의 눈동자가 움찔했지만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네. 오른손에 쥐고 있었는데요. 그, 수업 시간에 받았거든요.”
니아의 말에 필릭스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미소를 띠었다.
“정말? 정말이야?”
반갑게 물어 오는 그의 모습에 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눈에 띄게 기뻐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우울해진 것이다.
“네, 정말로. 근데 왜요? 마정석 없이 마법을 하면 안 돼요?”
여전히 책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지만, 어쩐지 니아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필릭스는 책으로 가려져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는 대충 아무 말이나 답하며 고개를 뺐다.
“응. 평범한 게 좋으니까…….”
“평범이요?!”
그런데 니아가 갑자기 팍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필릭스가 걱정스러운 낯빛을 치우기도 전에 재빠르게 물어 왔다.
“무슨 문제 있는 거예요?”
“뭐?”
“마정석 없이 꽃을 만들면 안 되는 건가요? 뭐가 잘못됐는데요? 누군가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이상한 마법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꽃을 피워 낸 것뿐인데?”
갑작스럽게 니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한 필릭스는 그대로 얼음이 될 뻔했다. 니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양이같이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필릭스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답해 버렸다.
“……전혀 문제없어.”
바로 다음, 필릭스는 말을 정정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저렇게 열렬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니아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전 다시 책 좀 볼게요.”
니아는 대답을 듣자마자 다시 책 속으로 팍 고개를 묻었다. 그러고 덜컹거리는 마차 속에서 또다시 잘도 집중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귀여울 수가……. 눈을 저렇게 뜨는 건 반칙 아닌가?’
심장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뛰자 필릭스는 가슴을 꾹 눌렀다. 대화가 이토록 바보같이 끝난 것에 헛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 못하면서.
어찌 되었건, 그렇게 얼떨결에 두 사람의 대화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 모두 그 대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였다.
‘문제가 없기는. 그렇게 다행이란 표정을 지어 놓고선. 괴물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한 거잖아. 다 알아. 나도 다 안다고…….’
‘네가 마정석 없이 마법을 한다면, 너는, 아마도 너는……. 이 나라에서 버림받게 될 거다. 평범하게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