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꽃 한 송이
“어이, 필릭스. 왜 그러는 거야.”
필릭스는 퀭한 얼굴로 힘없이 검술 연무장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런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연무장의 사람들 중, 그의 기분을 알고, 그에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앨버트 브라이트뿐이었다.
“알 거 없잖아.”
냉랭한 말을 하는 필릭스였지만, 누가 봐도 우울함에 허우적대는 목소리였다. 평소의 그 오만하기 그지없던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나 마나 그 하녀 아가씨 때문이군. 천하의 필릭스가 이런 모습까지 보이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앨버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친구를 두고만 볼 순 없지.’
“필릭스, 내게 다 얘기해 보게. 자네는 그동안 관심이 없어 몰랐겠지만, 이 아카데미생 절반 정도는 내게 연애 상담을 했다고. 우리는 십오 년 지기 아닌가? 나를 믿고 다 털어놓도록 해.”
‘그중 팔 할은 필릭스를 짝사랑하는 영애들이긴 했지만. 뭐,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앨버트는 누가 봐도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네며 필릭스를 쿡쿡 찔렀다.
평소라면 손모가지를 부러뜨리기 전에 꺼지라고 소리쳤을 필릭스지만, 정말 상황이 급한지 그는 금세 앨버트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체면 따위는 집어치워 버린 모습이었다.
괴로운 얼굴로 이야기를 꺼낸 필릭스는 그가 언제부터 니아를 좋아했는지, 그리고 그녀를 붙잡기 위해 어떤 계약을 했는지도 털어놨다.
‘그렇게 된 거군. 신은 필릭스에게 모든 걸 주셨지만 사랑에서만큼은 톡톡히 고생을 시킬 모양이야.’
계속 말을 이은 필릭스는 어젯밤 내내 니아가 울었다는 얘기를 하다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귓가에서는 아직도 그녀의 울음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죄책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후……. 필릭스, 그래서 자네 지금 그 하녀, 니아 프레슬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는가?”
필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에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밖으로 나왔어. 바로 공작가 앞에 있더군.”
도망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그가 뛰쳐나가자마자 발견한 것은 아카데미복을 입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니아의 뒷모습이었다.
그녀를 바로 붙잡으려던 필릭스는 옷을 보고 멈칫했다. 왜 아카데미복을 입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지?”
“아카데미로 향하더군.”
니아는 아카데미로 갔다. 놀라운 일이었다. 니아 프레슬리가 다시 아카데미로 향하다니. 필릭스는 그것이 마치 어떻게 해서든 일 년을 버텨 공작가를 나가겠다는 니아의 강력한 의지인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천천히 걷는 니아의 뒤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고 밝아 오는 하늘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그는 몇 번이나 가까이 다가갔다 멈칫거렸다. 니아 프레슬리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래 쫓아가기만 했다고?”
황당한 눈빛의 앨버트를 향해 필릭스는 무거운 어깨를 으쓱했다.
“가까이 가려고 했는데…….”
한숨을 푹푹 내쉬며 걷는 니아를 바보처럼 지켜보기만 했다.
‘맛있겠다…….’
그러다가 니아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맛있겠다고?’
니아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니 빵 가게였다. 갓 구운 빵들이 하나씩 진열되고 있었다. 니아는 그곳에서 한참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순간 필릭스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기 걸어가는 여자애한테 이 빵들을 줘.”
“네?”
황당해하는 빵 가게 주인에게 필릭스 쿠아란은 달리온 하나를 던졌다. 빵 가게 주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가장 큰 봉투에 빵을 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니아가 잠시라도 시선을 던진 가게가 있다면 모두 들어가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품에 안겨 준 음식들이 아카데미에 도착할 때쯤이 되자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필릭스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 하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잖아. 어쩌다 필릭스 쿠아란이 이런 머저리로 변한 거지? 뒤에서 여자애한테 먹을 거나 몰래 가져다주는 천치나 다름없잖은가.”
상황을 모두 들은 앨버트 브라이트가 빈정거렸다. 그는 자고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게 해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필릭스는 그의 말에 별생각이 없는 듯 중얼거렸다.
“십 년간 난 니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나 봐. 도대체 그동안 난 뭘 한 거지.”
“…….”
“난 그 애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니아의 상처받은 얼굴이 너무 두려워. 왜 날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걸까.”
진지하게 말하는 필릭스였지만, 앨버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이 연애 초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개조해야만 하는 것인가!
“후. 이보게, 잘 들어. 니아 프레슬리에게…….”
낙심한 필릭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 시작하는, 자칭 타칭 연애박사 앨버트 브라이트였다.
오늘도 니아 프레슬리는 수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수업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가 어디에 쓴다고 이 어려운 것을 배우는지 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차례, 과목명도 기억이 나지 않는 수업들이 끝나고 세 번째 수업이 시작되었다.
‘와…….’
한눈에 봐도 키가 꽤 크고, 목선이 다 드러날 정도로 짧은 머리를 한 여자가 강의실로 걸어 들어왔다. 어깨에는 여러 개의 큰 가방을 멘 채였다. 그녀가 칠판에 이름을 크게 적었다.
“이름은 딕시 댁스터. 오늘 처음 보 아카데미에 부임했다. 잘 부탁하지.”
딕시 댁스터 교수는 몸에 비해 큰 겉옷을 입고 있었다. 어깨가 조금 남는 큰 사이즈의 재킷, 그리고 삼백 년 전쯤에나 유행했을 것 같은 통 넓은 바지에서 그녀의 강한 개성이 느껴졌다. 흙이 잔뜩 묻은 낡은 신발도 눈에 띄었다.
‘저런 옷을 입은 사람은 처음 봐…….’
니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삼 일 전, 시눅스 제국에서 이 년간 진행한 전갈 연구를 마치고 돌아왔다. 배 안에서 독전갈 한 마리가 빠져나와 하마터면 이 자리에 서지 못할 뻔했네만, 뭐. 가벼운 해프닝이었네.”
딕시 댁스터 교수는 독전갈 탈출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담백하게 말하고는 놀라울 정도로 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니아는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꼬리와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놀라워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주의사항을 말해 주지. 난 학생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네. 따라서, 이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 나와 대화를 하고 싶은 학생은 명심하도록 해. 내가 에너지를 쏟을 가치가 있는 순수한 학문적 주제를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을.”
빠르게 할 말을 하는 딕시 댁스터는 내로라하는 귀족 자제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수업을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보라는 태도를 보였다.
“아, 그리고 이전 생명술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 생명술 수업은 실습이 많다는 것을 미리 경고하지. 안타깝게도 생명술은 마법 중에서도 재능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학문이지.”
댁스터 교수의 말에 몇몇 학생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따라서. 내 시간만큼은 재능이 없는 사람은 듣지 않아도 좋아. 그 시간에 다른 학문을 공부하는 것이 자네들에게도 이득일 테니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할로나 허니가 자존심 상한다는 듯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본인에게 생명술에 특별한 재능이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 너희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적으로 내가 판단한다.”
할로나가 걸음을 멈췄다.
“따라서 지금 나가려는 학생, 그대로 나가면 아카데미 법 위반이야.”
팔짱을 낀 채 당당히 말하는 댁스터 교수를 돌아본 할로나는 쿵쾅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자존심이 꽤 상한 얼굴이었다. 할로나는 있는 힘껏 노려봤지만 댁스터 교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돌아섰다.
“여기 들어 있는 건 생명술에 특화된 2급 마정석이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오직 마법이 가능한 자의 손에서만 빛이 나지. 생명술에 특화된 마정석이니, 자네들이 생명술에 재능이 있을수록 더욱 강하게 빛날 걸세.”
댁스터 교수는 마정석이 잔뜩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학생들에게 돌렸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떨떠름하게 마정석을 하나씩 손에 쥐기 시작했다.
주머니가 오자, 니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마정석을 꺼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초록빛 마정석이었다.
‘태어나서 마정석은 처음 봐. 이런 건…… 평생 볼 일 없을 줄 알았는데.’
니아는 보석처럼 생긴 마정석을 실제로 만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마정석을 꼭 쥐어 봤지만, 역시나 빛은커녕 미동도 없었다.
‘빛날 리가 없잖아.’
자신에게 마법의 재능이 있을 리 없으니, 마정석이 빛을 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니아는 작은 기대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더 듣는다 해도 이해도 못 할 수업인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거지…….’
댁스터 교수가 꽤 마음에 들었음조차 알지 못하는 니아는 빛을 내지 않는 마정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져 본 것만으로도 어디야. 이 귀한 걸.’
그녀는 마정석을 책상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댁스터 교수는 돌아다니며 학생 한 명 한 명을 직접 관찰하고 있었다.
“시저 카르만 학생. 훌륭하군.”
“카레나 비비고르 학생……. 아쉽지만 다른 재능을 찾아봐야 할 것 같네.”
“할로나 허니 학생, 놀랍게도 아주 미약한 재능이 있네. 본인도 몰랐는가? 아주 소소하지만…… 음, 아예 없는 건 아니니 내 수업을 계속 듣도록 하게.”
건조하게 말하고 자리를 뜨는 댁스터 교수의 행동에 할로나는 좌절한 듯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댁스터 교수는 어느새 수십 명을 지나 니아 가까이 오고 있었다. 니아는 기꺼이 나갈 준비를 했다.
“니아 프레슬리 학생. 왜 자네의 손에 마정석이 없지?”
“저…… 이미 확인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던데요.”
딕시 댁스터가 인상을 찌푸렸다.
“확인은 내가 하는 것이지 자네가 하는 게 아니야. 다시 손에 마정석을 올려놔.”
“…….”
니아는 마정석을 다시 쥐었다. 역시나 변화가 없었다.
“상상해 보게. 작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큰 나무가 되는 상상을.”
‘그런 상상을 한다고 될 리가.’
니아 프레슬리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마정석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 순간이었다.
“이, 이게 왜…….”
마정석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약하지만 확실히 반짝이는 연녹색의 빛깔.
당황한 니아가 말을 더듬었다. 딕시 댁스터 교수가 짙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합격이네, 니아 프레슬리 학생. 수업을 계속 들어도 좋아.”
댁스터 교수는 역시나 건조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그녀는 다시 단상으로 내려가다가, 멈칫하더니 니아를 다시 돌아봤다.
“옷에 흙이 잔뜩 묻었군. 보기 좋네.”
다시 돌아서 내려가는 댁스터 교수의 넓은 등과,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찍힌 모래 자국을 보자 니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펄떡이기 시작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제는 빛이 사라진 마정석을 보며, 니아는 방금 자신이 본 상황이 모두 허깨비가 아닌가 의심했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리가 없지 않은가.
‘맙소사…….’
아쉬운 표정으로 짐을 챙겨 강의실을 나가는 몇몇 학생을 바라보며, 니아는 계속 중얼거렸다.
“맙소사…….”
그리고 딕시 댁스터 교수는 몇 학생들이 나가자마자, 첫날이라고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 수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큰 가방 중 하나를 열더니, 작은 화분을 꺼내 아까의 마정석처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화분 안에는 씨앗이 들어 있다. 오늘은 씨앗에서 싹을 틔워 보는 것으로 하지.”
니아는 자신 앞에 놓인 마정석과 화분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에 마정석을 들고 화분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어……?’
니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방금…… 화분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잘못 본 건가…….’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에 딕시 댁스터 교수가 말을 멈췄다. 집중하여 교수의 말을 듣고 있던 학생들도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니아 프레슬리가 의자와 함께 넘어진 채, 놀란 눈으로 자신의 화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아의 화분에, 꽃 한 송이가 자라나 있었다.
딕시 댁스터 교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니아 프레슬리 학생, 뭐 하는 짓이지? 앞으로는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시작하는 일은 없도록 하게.”
그녀는 엄한 목소리로 니아에게 경고한 뒤 수업을 이어 나갔다. 다른 아카데미생들도 딕시 댁스터의 말에 금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니아는 태연할 수 없었다.
‘내가 설마…… 꽃을 피워 낸 거야?’
믿기지 않았다.
겨우 다시 의자를 세워 앉은 니아는 자신 앞에 작게 솟아 있는 꽃 한 송이를 바라보았다. 얇은 연분홍빛의 꽃잎을 가진 꽃 한 송이가 분명 눈앞에 피어 있었다.
‘방금까지는 여기 아무것도 없었는데…….’
“방금 니아 프레슬리 학생처럼, 어렸을 적부터 연습이 되어 있다면 꽃 한 송이를 만드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자, 다들 어디까지 연습이 되어 있나 보자고.”
댁스터 교수의 말에,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 마정석을 손에 쥐고 자신 앞에 놓인 화분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실 생명술에 재능이 있는 귀족들은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이 초급 생명술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생명술은 타고난 재능이 가장 중요하기에 모두가 같은 모습의 식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의실 안에는 크고 작은 식물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할로나, 큭, 정말 귀엽다!”
할로나가 피워 낸 작은 싹을 보고서 오리온 헛슬러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 댔다.
할로나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화분 속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겨우 작은 싹만 고개를 내밀었을 뿐 그녀의 식물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이 머저리가!”
할로나는 자신을 놀리는 오리온을 향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본인도 이 반에서 자신의 식물이 가장 작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그냥 나가게 내버려 두지……! 이 정도 재능은 없는 게 나은 수준이라고.’
책상에 고개를 묻은 할로나가 생각했다. 자신의 작은 재능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애매한 재능은 희망 고문일 뿐이었다.
반면,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시저 카르만……. 정말 훌륭하군. 이 씨앗이 가진 모든 잠재력을 이용했네. 더 큰 식물이라도 어렵지 않겠어. 가령, 버드나무라도.”
주위를 둘러보던 딕시 댁스터가 시저 카르만이 피워 낸 커다란 꽃을 보고 말했다.
시저 카르만이 피워 낸 꽃은 다른 사람들의 꽃보다 훨씬 강렬한 색깔과 굵은 줄기, 그리고 압도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시저 카르만은 댁스터 교수의 칭찬이 그리 놀랍지 않은지 고개를 한 번 까딱, 흔들 뿐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부럽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저 카르만은 그런 눈빛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생명술 관련 서적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꽤 크고 단단한 꽃을 피워 낸 학생들이 있었다. 몇 명은 교수의 칭찬을 받았고,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니아에게는 그들을 보고 부러워할 여유가 없었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꽃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멍하니 앞에 놓인 연분홍빛 꽃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음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니아 프레슬리를 뒤로하고, 그날 수업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수업이 끝나 정문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던 니아는, 공작가 마부 휴를 발견했다. 그는 밖으로 나오는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저 아저씨가 왜 저러지…….’
생각하며 정문을 나선 순간, 니아는 휴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니아!”
“휴 아저씨, 도련님 기다리세요?”
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널 기다리고 있었어. 꼭 널 마차에 태워 데리고 오라고 하시던데.”
니아는 필릭스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생각만으로도 벌써 오금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맙소사. 아직 필릭스 얼굴을 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혹시 도련님, 많이 화나셨나요……?”
니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휴는 당연하다는 듯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덥수룩하게 난 수염이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함께 흔들렸다.
“그런 눈치였어. 네가 한 번만 더 걸어서 공작가에 왔다간 날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하셨거든. 크게 소리치시진 않았지만…… 말씀하시는 내내 오싹한 기분이 들더구나.”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됐다. 아무튼 네가 어제처럼 걸어서 공작가에 왔다간 내가 잘릴 판이니, 날 봐서라도 더 이상 걸어 다니지 마.”
단호하게 말하는 마부 휴의 모습에 니아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필릭스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새벽 일찍 아카데미에 걸어왔건만, 결국에는 피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참, 병이 나았다는 건 사실이지?”
어쩐지 붙잡고 있는 모양새가 애매하더라니. 그는 니아가 아직도 병이 낫지 않았을까 봐 걱정된 모양이었다.
“완치됐는데요.”
니아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휴가 허허, 하고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도련님은 마차 안에 계세요?”
그러자 휴가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니아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도련님은 아까 공작가로 먼저 가셨어. 내가 마차에 태우고 갈 사람은 너뿐이라고.”
휴는 다른 이도 아닌, 같은 하인 처지의 니아를 마차에 홀로 태워 가야 한다는 것이 어이없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니아도 민망해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휴는 마차에 오르며 요 며칠간 공작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니아는 병에 걸린 것으로 유명한 하녀였고, 일도 하지 않는 저런 아이를 공작님께서 왜 내치시지 않는지가 하인들 사이에서도 늘 의문이었다.
그런 니아가 어느 순간 아카데미복을 입고 등장했다. 정말이지, 그녀가 공작의 사생아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어제는 정말 살벌했어. 도련님 표정도 얼마나…….’
게다가 어젯밤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들어온 니아와, 하인들을 내쫓고 소리치던 도련님. 명령대로 응접실을 떠나며 바라본 두 사람은 모두 위태로워 보였다.
갑자기 아카데미를 다니게 된 니아 프레슬리와 요새 어딘가 변한 듯한 필릭스 도련님. 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오고 갔는지 심히 궁금해지는 휴였다.
하지만 경험상, 귀족과 관련된 일은 알면 알수록 자신만 힘들어진다는 것을 휴는 잘 알고 있었다.
‘괜한 참견은 말아야겠지.’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니아는 다행이란 표정으로 잽싸게 마차에 탔다.
그녀를 심란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공작가의 충실한 하인인 마부 휴는 자신의 호기심을 눌렀다.
마차는 곧 공작가를 향해 출발했다.
공작가에 도착한 니아의 머릿속은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는 화가 났을 것이 분명한 필릭스에 대한 생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아까 피워 낸 꽃송이에 대한 생각이었다.
‘분명 화가 났을 거고, 벌을 줄지도 몰라. 아무리 계약을 한 사이라지만, 필릭스는 공작가 도련님이고 난 하녀인걸…….’
니아의 상상은 저 하늘 높이 뻗어 갔다.
‘그나저나 그 꽃은 정말 내가 피운 게 맞나…….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걸 내가, 내가 어떻게…….’
소박하나마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들뜨는 마음도 하늘 높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왠지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어제처럼 필릭스가 자신을 기다릴 것만 같아, 니아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들어가기 싫다.’
속으로 생각하던 그녀는, 정원 안쪽의 새싹들을 바라보았다.
‘귀엽네…….’
니아는 들어가기 싫은 마음, 정원에서 조금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가장 구석진 곳, 새싹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까 내가 어떻게 했더라.’
작은 새싹들을 보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의 감각. 내가 어땠었지…….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음…….”
니아는 애꿎은 흙을 툭, 툭, 만지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반면, 쪼그려 앉아 있는 니아 프레슬리를 애타게 바라보는 눈빛이 있었다.
‘저기 앉아서 뭐 하는 거지?’
필릭스는 검술 연습도 마다하고 니아보다 먼저 공작가에 와 있던 참이었다. 속는 셈 치고, 앨버트 브라이트의 조언대로 한번 해 볼 생각으로.
그래서 마부 휴에게 니아를 꼭 마차에 태워 오라고 엄포를 놓은 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응접실에서 창문 밖만 바라보며 니아가 오기만을 고대했다.
‘그녀가 왔다.’
니아가 정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필릭스의 가슴은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여전히 더러운 그녀의 아카데미복을 보니 또다시 마음 한편이 쓰라렸고, 다가오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엄청나게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니아가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그늘 안에 쪼그려 앉아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흙장난을 하는 것인지 손으로 계속 흙을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갸우뚱거렸다를 계속 반복했다.
한참을 기다리던 필릭스는 생각했다.
‘더 이상은 못 기다려. 저기서 뭘 하는지…… 직접 확인해야겠어.’
애가 타는 필릭스였다. 그는 니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생각에 집중한 니아는, 필릭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아, 맞다! 무슨 씨앗인지 궁금했던 것 같아!’
고민하던 니아는 가까스로 조금의 기억을 떠올렸다.
‘상상해 보게. 작은 씨앗에서 싹이 트고, 큰 나무가 되는 상상을.’
순간 딕시 댁스터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니아는 자신 앞의 새싹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될까?’
니아는 새싹 하나를 바라보며, 이 새싹이 무슨 종류의 꽃이 될지, 어떻게 자라날지 상상했다. 그러고 나서 기대감에 찬 눈으로 새싹을 바라보았다.
‘…….’
“될 리가 없지.”
하지만 새싹은 미동도 없었다. 니아는 애꿎은 흙만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한 번만 더 해 보고 들어가자.’
왠지 아쉬워진 그녀는 한 번만 더 시도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니아는 아까보다 더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새싹은 뿌리부터 자라나기 시작하겠지. 점점 자라날 거야. 물과 햇살을 머금고선, 서서히 잎이 생기고, 꽃잎이 피기 전 봉우리가 맺히겠지. 그리고 하나하나…….’
“됐다…….”
슬며시 눈을 뜬 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오직 새싹들만 가득 찬 공간에 꽃 한 송이가 자라나 있었다. 바로, 니아가 바라보고 상상했던 그 새싹이 있던 자리였다. 새싹이 순식간에 자라더니 꽃잎을 피워 낸 것이다.
‘세상에! 정말이지 믿기지 않아. 정말 내가…… 내가 한 거야.’
니아가 두근거리는 심장과 흥분을 애써 감추고, 꽃으로 변한 새싹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니아 프레슬리.”
낮게 깔린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니아는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필릭스 쿠아란이었다. 그는 니아의 예상보다도 훨씬 굳은 표정이었다.
“아, 저 도련님……. 그게…….”
당황한 니아는 어제의 일에 대해 변명을 시작하려 했지만, 필릭스 쿠아란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앉아 있는 니아를 내려다보았다.
“아, 저 그게…… 오늘 아카데미에서 한 생명술인데…… 그냥 한 번 다시 해 보려고……. 제가 아카데미에서 꽃을 피웠거든요…….”
니아는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그러자 필릭스의 얼굴은 더더욱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금 넌…… 마정석이 없잖아.”
필릭스는 창백해진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더니, 결국에는 니아를 혼자 남겨 두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야…….’
손에 묻은 흙을 털어 낸 니아는, 멀어지는 필릭스를 바라봤다. 갑자기 오더니 또 갑자기 떠나고. 게다가 저런 얼굴로…….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나.’
겨우겨우 좋은 쪽으로 생각한 니아는 다시 새싹들을 쳐다봤다. 여전히 가운데 홀로 핀 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하나만 더 해 볼까……?’
하지만 고민 끝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제오늘 여러 일로 갑작스러운 피로가 몰려드는 듯했다.
‘피곤할 만하지. 오늘은 일찍 자자.’
니아가 허리에 힘을 주며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순간 다시 들려온 목소리에 허리를 휘청할 뻔했다.
“니아 프레슬리!”
갑자기 저택에 들어갔던 필릭스가 씩씩대며 나오고 있었다. 들어간 지 채 일 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저래?”
방금 못 낸 화를 다시 내러 오는 걸까? 그녀에게 제대로 벌을 주려는 걸까?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필릭스는 금세 니아 앞에 도착했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니아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니아 프레슬리, 내가 방금 들어간 건…….”
“…….”
“오해하지 마. 잠깐 당황해서 들어간 거지 네가 보기 싫어서 들어간 게 아니야.”
‘오해 안 했는데.’
“너한테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할 말이 있어. 따라와.”
필릭스는 니아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십 년간 공작가에서 살았지만 필릭스의 방은 처음이었다. 그를 피해 다니느라 바빠 그의 방은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때는 황혼. 큰 테라스에 비친 노을이 방 안으로 부드럽게 번져 가고 있었다.
넓은 방 안에 흰 천으로 덮인 큰 침대가 보였다. 흰 침대와 카펫이 깔린 바닥은 붉게 타는 노을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역시 공작가 도련님은 대단하네. 매일 이런 방에서 자고, 먹고…….’
니아는 감탄 섞인 눈으로 방을 둘러봤다. 다른 세상 구경하듯 구석구석 살펴보던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감각을 자극했다.
‘뭐지? 이 황홀한 냄새는……?’
니아는 두리번대며 냄새의 근원을 찾으려 애썼다. 화려한 방에 대한 관심이 사라질 정도로 유혹적인 냄새였다.
“니아, 앉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필릭스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통통한 칠면조가 따뜻한 김을 내뿜으며 아름다운 자태로 니아에게 손짓했다.
‘미쳤다…….’
니아는 홀린 듯 필릭스가 빼내어 준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호화스러운 음식에 영혼을 뺏긴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필릭스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목소리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니아, 어제는 말이야, 내가 좀 실수를 한 것 같아.”
“…….”
“연습이 늦어질 것을 생각 못 했던 내 잘못이 커. 아니, 모두 다 내 잘못이야. 첫날에 제대로 이야기도 해 주지 않고 널 보내 버렸으니…….”
“…….”
“앞으로는 네가 그렇게 다쳐서 오는 일 없게, 걸어 다니지 말고 마차를 타자. 나와 함께. 어때?”
니아가 답을 하지 않자 그는 다시 물었다.
“어때, 니아 프레슬리?”
사실 니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필릭스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참자. 참자. 지금 손을 댔다간 쪽만 팔릴 뿐이야. 이성을 저버리지 말자…….’
그녀는 눈앞에서 유혹하는 음식들에게 손을 뻗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중이었다. 배고픔과 자제력이 그녀의 몸속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니아, 화난 건 알지만, 나랑 대화를 좀…….”
답지 않게 눈치를 보며 말하는 필릭스 덕에 니아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물론 시선은 여전히 음식에 고정한 채였다.
“아……. 죄송해요, 도련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그러니까 나와 마차를 타고 다니자고, 항상. 네가 다치는 일 없게. 괜찮지?”
“아, 마차.”
시선은 역시나 계속 고정.
“게다가 공작가의 피후견인이 그 먼 거리를 늘 걸어 다니면 소문이 어떻게 나겠어. 네가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고 다치고 그러면 공작가 체면이 어떻게 되겠냐고. 그러니까…… 응?”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어요.”
니아가 너무도 쉽게 긍정하자 필릭스의 눈에 도리어 의심이 서렸다. 게다가 그녀는 이제 사무적인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필릭스가 애매한 낯으로 물었다.
“……정말?”
“네, 도련님. 충분히 알아들었다니까요.”
“…….”
“공작가 체면이 중요하긴 하죠. 저따위가 망치면 안 되는 거고.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이 아니라…….”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네, 그럴게요!”
니아는 여전히 사무적인 미소를 띤 채로 답했다.
음식에 홀려 아무 말이나 지껄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녀도 아카데미에 걸어 다니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오늘 다시금 깨달았던 것이다.
‘일 년 동안 그 거리를 걸어 다녔다간 성격이 파탄 날지도 몰라.’
어제 본인 성격이 파탄 났던 건 까맣게 잊은 채, 니아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그녀에게서 진심을 읽은 필릭스는 눈을 접어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랗게 접히는 눈꼬리와 함께 그의 얼굴에서 어린아이 같은 순수가 비쳤다. 화가 났을까 봐 걱정했던 니아의 고민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여유를 되찾은 필릭스 쿠아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귀족다운 화법으로 고고하게 물었다.
“그리고, 내가 너무 배려가 부족했지?”
“네?”
“네가 함께 마차를 타 주면, 5달리온을 줄게.”
“…….”
“어차피 너도 아카데미에 다니면서 혼자 쓸 돈이 필요하겠지.”
“…….”
“그러니까 그, 품위 유지비 같은 거라고나 할까. 너는 이제 내 사람이니까…….”
“…….”
니아가 대답을 하지 않자 필릭스가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하녀 연봉보다 많지 않나……?”
니아는 너무나 솔직하게 마음속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물론, 악의는 없었다.
“음,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필릭스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5달리온이 적단 말인가? 5달리온은 하녀의 이 년 치 연봉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니아의 입에서 적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당황스러움은 점차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필릭스는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너무 쪼잔한 남자처럼 보인 것 같았다!
‘이런, 바보같이. 통 크게 영지 하나를 준다고 할 것을……!’
“…….”
‘지금이라도 말을 바꿔 볼까. 아니야, 그럼 더 우습잖아. 아니, 그냥 영지를 준다고…….’
필릭스의 자존심에는 타격을 입혔지만, 이미 말했듯이 니아는 악의가 없었다. 정말 솔직한 그녀의 속마음을 말로 꺼낸 것뿐이었다.
그동안 니아가 공작에게서 받은 돈은 하녀 월급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돈이었다. 그러니까 필릭스가 제시한 금액이 그녀에게도 큰돈이기는 하지만, 굳이 그에게서 돈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많지 않다고 말한 이유도 다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니아도 하녀인 만큼 눈치라는 것이 있긴 있었다. 침묵이 맴돌던 가운데, 어색함을 견디다 못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필릭스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만들었다.
“그냥 받을까요……?”
마치 꾸역꾸역 적선하듯 받아 준다는 어조에 필릭스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원하는 만큼 주겠다. 절대 이만큼 받지 마.”
“……?”
“원하는 만큼 말하라고!”
‘또 이러네. 또 이상하게 굴어.’
니아는 그동안 초점이 어긋난 듯 구는 필릭스를 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건 니아가 그 순간, 마치 복불복 게임 하듯 전혀 알 수 없는 이 도련님의 마음을 맞춰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하는 만큼 뭐? 얼마를 말해야 만족할 건데? 주는 대로 받겠다고 해도 이러네. 10달리온? 아냐. 처음에 5달리온을 말했으니까 음, 대충…….’
“7달리온……?”
필릭스가 그제야 조금 편안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고서는 또 입꼬리를 올린 채 거만하게 중얼거렸다.
“10달리온으로 해.”
“예?”
“10달리온으로 하자고.”
니아는 만족감을 찾은 그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대답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감사하네요…….”
“조건이 있어.”
갑자기 조건을 내거는 필릭스에게 니아는 일순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래, 돈을 그냥 줄 리가 없지.
“역시 또 무언가가 있군요.”
무언가 거대한 함정을 기대하는데, 그가 의외로 별것 아닌 이야기를 꺼냈다.
“마차는 반드시 나와 같이 타는 거야. 네가 늦게 끝나면 난 널 기다리겠다. 그러니까 너도 내가 늦게 끝나면 날 기다려야 돼.”
그렇게 말하는 필릭스는 뭐가 부끄러운지 어느새 귀가 빨개져 있었다.
‘뭐야.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네, 그럴게요.”
니아는 그를 기다려야 하는 게 귀찮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뭐……. 그렇게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순순한 대답에, 필릭스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니아의 대답도, 그녀가 가까이 앉아 있는 이 상황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귀엽기는…….’
필릭스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본격적으로 니아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꿀이 떨어질 듯 달콤한 눈빛이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필릭스는 그녀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니아는 무언가, 음…… 초조해 보였다. 속눈썹이 떨리고,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이…… 안절부절못하는 다람쥐 같은 모습이랄까?
“니아, 왜 그래? 할 말 있어?”
필릭스가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물었다. 니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답했다.
“배 안 고프세요?”
“응?”
“혹시 이거, 먹어도 되나요? 제가 너무 배가 고픈데…….”
니아의 말에 필릭스가 나직하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고는 눈을 길게 휘고는 속삭였다.
“당연하지. 다 널 위해 준비한 거야, 니아 프레슬리.”
어떤 여자라도 반하고 말 표정과 눈빛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 니아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앞에 있는 작은 새우부터 먹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커지면서 왼쪽 볼에 보조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쳤다……. 너무 맛있다! 세상에 이런 맛이 존재하다니…….’
난생처음 맛보는 황홀함에 정말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달콤하고 짜고, 입안에서 사르르 음식이 녹았다.
공작이 나름대로 그녀에게 영양소가 갖춰진 음식을 가져다주고, 때로는 귀한 약재들도 먹이곤 했지만 (특히나 그가 먹인 맨달란 농축액은 구토 맛이 났다.) 이토록 화려한 적은 없었다.
‘이걸 평생 먹을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아…….’
니아는 닥치는 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입에 넣는 모든 것은, 상상 그 이상으로 행복감을 가져다주었다. 자신도 모르게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꾸밈없는, 완벽한 미소였다. 왼쪽의 작은 보조개는 사라질 줄을 몰랐고, 당연하게도 그 앞에는…… 니아의 웃음에 넋이 나간 한 남자가 존재했다.
‘저렇게 예쁠 수가 있다니.’
공작가의 외동아들 필릭스 쿠아란은, 눈앞의 너무도 사랑스러운 존재에 감격스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힘을 주어 쥔 나이프가 꺾이는 것도 모른 채.
‘헉! 먼저 드시라고 안 해서 화가 났나?’
니아는 볼이 빵빵해진 채로 필릭스를 바라봤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입을 움직이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방금 먹은 가재가 황홀하게 입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저, 도려니. 저마 머느 거 가타서. 아 드세야?(저, 도련님. 저만 먹는 것 같아서. 안 드세요?)”
니아는 입안 가득 음식을 씹으며 우물우물 필릭스에게 물었다. 마치 아기가 옹알이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필릭스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길리, 당장 가재 세 마리 더 구워 와. 당장.”
공작가의 젊은 집사 길리 포바즈는 가재를 가져오며 필릭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도련님은, 분노로 가득 찼던 어제와는 달리 현재 이 시각, 봄바람이 부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 원 참. 저렇게 쉽게 풀릴 거였단 말이지.’
필릭스는 누가 봐도 사랑에 푹 빠진 남자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놀랍게도 공작가의 하녀 니아 프레슬리였다.
길리가 가재를 가져오자,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던 니아 프레슬리는 기다렸다는 듯 가재 한 마리를 통째로 자신의 접시로 가져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껍질을 벗겨 내는 그녀의 모습에 길리는 살짝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더 소름 돋는 것은, 그 소름 돋는 장면조차 어여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그의 도련님이었다.
‘도대체 누가 불쌍한 건지…….’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는 짝사랑 상대를 보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필릭스인지, 아니면 필릭스에게 꼼짝없이 걸려 버린 니아 프레슬리가 불쌍한 것인지 길리 포바즈는 도통 알 수 없었다.
‘네, 네. 나갑니다, 나갑니다요.’
필릭스는 멀뚱히 서 있는 길리를 쳐다도 보지 않고 나가라는 손짓만 해 보였다. 니아를 바라보고 있는 따듯한 눈빛과는 사뭇 다른 손짓이었다.
길리 포바즈는 투덜대며 빈 접시를 들고 필릭스의 방을 나왔다. 앞으로의 일이 더욱 두려워졌다.
“맛있게 먹었어?”
필릭스가 달큼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니아는 길리가 새롭게 가져온 가재를 다 먹어 치운 다음에야 손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놓았다. 그렇게도 많은 양을 먹어 놓고, 식사 도구를 내려놓는 그녀의 손길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네. 정말 공작가 생활 십 년 중 최고의 순간이었어요.”
진지하게 답하는 니아를 향해 필릭스는 또 참을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까부터……. 원래 이렇게 웃음이 헤픈 사람이었던가?’
자꾸 그가 웃자 민망해진 니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필릭스는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계약 기념 선물이야.”
니아는 그가 내민 작은 상자를 받아 들었다.
“열어 보도록 해.”
작은 상자를 열자 노랑빛 보석이 보였다. 보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니아가 봐도 엄청난 세공의 흔적이 느껴졌다.
“이걸 왜…….”
“원래 계약을 하면, 선물도 하고 그러는 거야.”
“……우와.”
조금은 밋밋한 감탄사에 필릭스는 또다시 걱정스러워졌다. 아까처럼 너무 작다고 하면 어떡하지? 가령 ‘알이 너무 작은걸요’처럼 깜찍하고도 끔찍한…….
“예쁘네요, 정말로.”
하지만 보석에서 눈을 떼지 않는 니아를 보며 필릭스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사실 니아는 어제 그녀가 필릭스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옷 없이는 저 같은 건 길바닥에서 뒹굴든 죽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답니다. 길을 몰라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을 겁니다. 답례로 줄 작은 보석 같은 건 가져 본 적도 없으니까!’
‘그렇게 말했었지…….’
그가 어제 니아의 말을 듣고 이 보석을 준 것이든,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든 조금은 감동적이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보석을 선물한 적은 없으니까.
그녀가 지난 십 년간 받은 것이라고는, 몸속의 무언가를 판 대가로 받는 돈뿐이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필릭스에게 말했다. 지금 심정 그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도 있지만 꾹 눌러 담았다.
그에게는 어쩌면 별것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작가 외동 아드님에게 보석 선물 같은 건 흔한 일일지도. 니아는 혼자 애틋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네 아카데미복도 새로 줄 거고. 아예 새 아카데미복을 늘 준비해 놓으라고 할게.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도 좋아.”
“전 드릴 게 없는데요. 돈은 저보다 많으실 테고…….”
멋쩍게 말하는 니아를 향해 필릭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공작가에 남아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뭐 이렇게까지……. 감사합니다.”
니아는 갑작스러운 필릭스의 다정한 말투에 민망해져 눈을 깜빡거렸다. 오늘 그는 예상을 빗나가도 너무 빗나갔고, 오늘 하루 역시 어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꼭 마정석 같네.”
보석을 손에 든 니아가 중얼거렸다. 그 순간 필릭스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잠시 잊고 있었군.’
니아의 먹는 모습을 감상하느라 잊고 있었다. 마정석도 없이 꽃을 피워 낸 그녀의 모습을.
‘마정석도 없이 꽃을 피워 냈어. 그건 정말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마정석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보석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랑스러운 니아의 모습과는 별개로,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된 새로운 문제에 고민이 깊어지는 필릭스였다.
다음 날, 니아와 필릭스가 함께 탄 마차 안의 공기는 부드러웠다.
어제의 성공적인 타협으로 니아는 군말 없이 마차에 올랐고, 또 새 아카데미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도 필릭스 입장에서는 무척 흡족한 것이었다.
“오늘 끝나고 기다릴 거지?”
필릭스가 눈을 휘어 웃으며 니아에게 물었다.
너무 대놓고 쳐다보는 바람에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어제부터 이 도련님은 니아에게 너무 과분하게 굴고 있었다.
“물론이죠, 도련님. 약속했으니까요.”
순순한 대답에 필릭스는 그 어떤 취향을 가진 여자라도 넘어가고 말 법한 얼굴로 나른하게 웃었다. 니아는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늦게 끝나십니까?”
“황궁에서 열리는 검술 대회가 얼마 안 남았거든. 남아서 연습을 좀 더 해야 할 거야.”
필릭스가 자꾸 쓸데없이 미소를 짓자, 니아는 그가 미소가 헤픈 사람이라는 생각이 또 한 번 들었다.
누가 그를 차가운 사람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바보처럼 웃고만 있는데.
“그렇군요.”
니아가 필릭스의 검술 대회에는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그녀는 필릭스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에 입력했을 뿐, 정말로 그의 연습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다 잘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검술을 잘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니아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필릭스가 떠보는 투로 물어 왔다. 니아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모를 리가요.”
“정말?”
그가 해사하게 웃으려던 찰나, 니아가 그의 웃음 구멍을 막았다.
“도련님이 검술 대회에서 우승할 때마다 공작가가 얼마나 떠들썩했는데요. 시끄럽게 하루 종일 파티를 여셨잖아요. 지난해는 폭죽까지 쏘시더니.”
“……그래.”
니아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필릭스의 실망한 표정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수업을 듣는담. 질문이나 받지 않으면 좋겠는데. 음…… 생명술은 꽤 괜찮은 것 같아. 별것 아니라도 재능이 있는 거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푹 빠진 그녀를 바라보던 필릭스는 그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눈치를 보다 말했다.
“……오늘은 연습하지 말까?”
“예?”
뚱딴지같은 소리에 니아가 필릭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러니까…… 네가 기다리는 게 힘들다면 말이야. 연습이야 뭐, 사실 보여 주기 식으로 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의 말에 니아는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그래도, 기다리는 게 힘들잖아. 어디 있을 곳도 없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로요.”
거리를 두며 말하는 니아를 향해 필릭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다리는 게 무료하다면, 내 연습을 보러 와도…….”
“아, 도서관에 가면 되겠습니다. 일단 저도 아카데미 학생이니까 들어갈 수 있겠죠? 아카데미 도서관이 제국에서 가장 크다고 하던데.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좋은 점도 있기는 하군요.”
갑작스럽게 떠올랐다는 듯 경쾌한 니아의 말투에 필릭스는 낙담한 얼굴을 보였다.
“아, 그래. 넌 책 읽는 걸 참 좋아하지. 하지만 도서관은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니 네가 원한다면…….”
이번에도 필릭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니아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이제 한가롭게 소설책 같은 건 보지 못하겠죠. 아카데미에 들어온 이상 수업도 무슨 내용인지 한 번쯤은 알아듣고 싶고. 관련 서적을 찾아서 공부할 생각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니아의 말을 시무룩하게 듣던 필릭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번뜩였다.
“너만 원한다면, 내가 도와주지.”
“괜찮습니다. 저 혼자 열심히 해 볼게요.”
바로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얼굴이 되어야만 했지만. 니아의 거절은 아주 단호하고 깔끔했다.
오히려 대답을 한 니아는 도련님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생각에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었다.
“……맘대로 해라.”
은근히 니아가 다시 말을 바꿔 주기를 바라는 필릭스였지만 니아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