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아카데미 (5/75)

5. 아카데미

‘왜 그때 그 말에 홀려 가지고.’

“꿈이니 선택이니 그게 다 뭐라고.”

니아는 한숨을 쉬고, 괜히 이불을 퍽퍽 쳤다가 또 한숨을 내쉬기를 반복했다.

“진짜 홀리는 기분이 들었는데. 설마 내가 그 얼굴에 맘이 약해졌나.”

설마 내가 그토록 외모에 약한 사람이었던가.

니아는 필릭스를 본 적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가 제대로 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맹세컨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에게 동요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미운 감정이 지배적이었지. 어찌 되었건, 니아가 그토록 아팠던 건 필릭스 쿠아란의 저주 때문이었으니까.

“아카데미 같은 데를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귀족들만 득실거리는 곳에서 니아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지만 고민 끝에, 니아 프레슬리는 자신의 새로운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은 더 이상 몸의 무언가를 빼앗기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것. 그리고 계약서를 썼으니 일 년 뒤에는 반드시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아마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니아는 이 마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어떻게 일 년을 버틸지만 생각하는 거야.”

니아는 침대 구석으로 가 등을 기대었다.

“내 정체만 들키지 않으면…… 그러면 모든 게 괜찮을 거야.”

이 말은 떨림을 멈추려고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 같았다. 에슬란 제국에서 그녀와 같은 존재가 얼마나 환영받지 못하는지 아니까.

어떤 일이 생기든 간에, 그 사실만 들키지 않으면 돼…….

니아 프레슬리는 결국 떨리는 마음을 잠재우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그녀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떨림이 그저 두려움이 아닌, 설렘을 동반한 감정이라는 것이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잠재우려고 눈을 감는데, 그녀의 머릿속에 한 노래가 떠올랐다. 에슬란 제국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괴롭히는 익숙한 음들에, 니아는 천천히, 조그만 목소리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아는 그 노래를.

괴물 벅 프릴리, 악당 벅 프릴리

살인마, 살인마, 살인마! 벅 프릴리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지, 괴물!

악한 마법만 쓰지, 괴물!

공주를 납치해 눈을 파먹었다네

사람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네

하지만 에슬란은 벌하지

하지만 에슬란은 이기지

그는 죽어 돌이 되었네!

승리의 함성은 끊이질 않네!

에슬란, 에슬란, 에슬란 만세!

드디어 니아가 필릭스와 함께 아카데미에 가는 첫날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야. 내 인생에 아카데미라니. 그냥 조용히, 아무 일 없이 아카데미에서 일 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일 년을 조용히 버티자 다짐한 니아였지만 귀족들만 있는, 귀족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에 간다는 것이 두렵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니아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곱게 걸어 놓은 아카데미복을 쳐다보았다.

필릭스가 얼마 전 직접 주고 간 아카데미복. 연한 갈색의 공식 복장, 팔루다멘툼이었다. 옷에는 아카데미의 황금 문장이 박혀 있었다.

사실 이렇게 좋은 재질의 옷은 처음이었다. 엄청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질은 최고급이라는 것을, 옷에 대해 잘 모르는 니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옷을 쓸어내리며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니아가 방에 걸어 놓고 몇 번이나 눈길을 주던 그 아카데미복을 입고 나서자, 하인들이 눈에 띄게 수군거렸다. 갑자기 니아가 아카데미복을 입고 나오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얼마 전까지 존재감도 없이 있던 여자아이가 귀족의 옷을 입고 나타나다니.

‘남들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일 년 뒤에 떠날 몸이고, 이건 다 계약의 일종이니까.’

하지만 니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빛을 보내는 에보니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무시하고 저택 정문을 향해 고개를 돌려 버린 니아였다.

멀리 필릭스가 마차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니아는 마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긴장하지 말자, 니아 프레슬리.’

다짐을 몇 번 되뇌자 어느새 필릭스 바로 앞에 도착했다. 그동안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공작가의 크고 화려한 마차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카데미에 가는데 왜 이렇게 꾸민 거람.’

필릭스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니아도 오늘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매끈한 모양새였다.

편하게 내리고 있던 머리는 위로 올렸고, 눈빛은 오늘따라 더 날렵해 보였다. 요 며칠 사이 일만 아니었다면 니아도 하녀들이 그렇게 떠드는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소유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저렇게 완벽하게 태어나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안 해도 저주를 술술 풀어 주는 사람도 있고.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거지’ 하는 뒷말도 잊지 않았겠지만.

‘비교되게.’

니아는 괜스레 자신이 너무 초라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사실 필릭스는 매우 굳어 있는 상태였다.

니아와 함께 아카데미에 다닐 생각에 설레 밤을 설친 그는, 오늘 새벽 말똥한 눈으로 깨어나 아카데미에 갈 준비를 했다.

이미 차고 넘치는 아카데미복이지만, 조금 더 자란 키에 맞추어 새로 주문한 옷을 입었다. 그리고 머리를 이리 넘기고, 저리 넘기고, 내려 보고, 별 시도를 다 했던 것이다.

“길리, 이건 좀 별로지 않나?”

새벽에 불려 온 공작가 집사 길리는 감기는 눈을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것도 멋지시지만……. 가르마를 타서 넘기는 게 더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사실 길리의 속마음은 그랬다.

‘거적때기를 입어도 사람들은 다 도련님밖에 보지 않을 겁니다. 과도하게 잘생겼으니까요!’

하지만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가는 이 곱게 자란 도련님이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오랫동안 필릭스를 봐 온 길리는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멋지다고 하면 대충 생각하는 거냐고 비꼴 게 분명하니까. 한 번 정도 더 애매한 표정으로 답하고……. 그다음에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바로 그거라고 말하면 되겠지.’

하지만 오늘따라 더욱 끈질기게 물어 오는 필릭스 때문에 길리 포바즈는 두 시간을 시달리고 말았다. 그는 잘난 도련님이 아카데미에 갈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완벽한 하루를 만들겠어. 기대해, 니아.’

필릭스는 니아가 가까이 오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미소를 지으며 마차 문을 열어 줄 계획이었다.

마침내 저 멀리서 니아가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멋있는 표정. 멋있는 표정을 짓자. 지금이야. 미소를 지어, 필릭스 쿠아란!’이라며 머리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니아가 더 가까이 온 순간,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웃기 위해 끌어 올리던 입매는 굳었으며 숨은 멈춰졌다. 어떤 감각기관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니아 프레슬리에게로 향하는 눈을 제외하고는.

항상 단정한 하녀복이나 무채색의 옷만 입던 니아였다. 옷에는 상관없이 그녀는 늘 눈이 부셨는데, 아카데미복에 하얀 망토까지 두르자 필릭스의 눈에는 심각할 만큼 예뻐 보였다.

그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관심도 없어 보이고, 모습조차 잘 보여 주지 않는 여자아이를 십 년이나 짝사랑할 수 있는지에 관해.

니아를 너무 오래 보지 못할 때면 스스로가 만들어 낸 환상 속 인물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그가 니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니아 프레슬리가 예쁜 것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명명백백한 진실이자 진리였다.

콩깍지가 제대로 쓰인 그의 눈에는 그 어떤 여신보다도 니아 프레슬리가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팔불출 같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오늘 도련님이 유달리 멋지시지 않니?”

“어떻게 매일 더 멋있어지실까. 정말 잘생기셨단 말이지!”

멀리 창문 너머에서 하녀들이 오늘따라 도련님이 더 잘생겼다며 수군댔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필릭스는 니아의 모습이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그를 향해 오늘따라 더 진중해 보인다 말하는 하녀도 있었다. 뭐, 아주 틀린 말이 아니긴 했다. 필릭스는 니아를 보며 ‘저렇게 눈에 띄는데, 아카데미에서 수작이라도 부리는 놈이 있다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심각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

하지만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라 필릭스는 정작 니아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가 굳어 있는 사이 니아가 그를 지나친 것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직접 열어 주려 했던 마차의 문을 니아가 연 상태였고, 심지어는 ‘도련님, 타시지요.’ 하며 마부처럼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안으로 들어가라 손짓하고 있었다.

‘하…….’

필릭스는 푸른 하늘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첫 순간부터 자신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 도 없었다.

“갈 길이 멀어…….”

한숨 섞인 필릭스의 말에 니아는 고개를 들었다.

‘안 타고 있길래 문까지 열어 줬더니, 왜 저런담.’

필릭스는 살짝 퉁명스러워진 니아의 얼굴을 보고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니아 프레슬리, 넌 내 예상을 처음부터 빗나가고 있군.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러고는 재빨리 먼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니아는 크고 곧게 뻗은 손을 바라보았다.

‘이건…… 잡으라는 거지?’

“감사합니……. 악!”

필릭스가 니아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끌어당겨진 니아는 균형을 잃고 거의 넘어질 뻔했다. 하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필릭스가 단단히 그녀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힘 조절이 안 되나!’

이미 마차에 탔는데도 점점 조여 오는 듯한 필릭스의 손에 니아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니아를 답답하게 조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얼굴은 거의 맞닿을 정도였다.

니아는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안간힘을 써서 필릭스를 밀어냈다. 그제야 그는 정신이 들었는지 천천히 손을 놓아주었다. 순간 니아는 튕겨 나가듯 필릭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아, 하. 도련님, 앞으로 제 스스로 마차에 탈 수 있습니다.”

니아의 헐떡이는 말투에 필릭스는 대답하지 않고 갑작스레 고개를 돌렸다. 니아는 그런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하지만 필릭스가 그녀의 눈을 피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의 거대한 포부가 무색할 정도로 한심스러운 이유였다.

방금 니아를 거의 안아 버렸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에 갑작스레 또 두근거린 게 두 번째 이유였다.

필릭스 쿠아란의 목과 귀가 붉은 노을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안간힘을 다해 그를 밀었던 니아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이유는 그와 달랐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니아의 얼굴에서 붉은색이 사라졌다. 반면, 발갛게 물든 필릭스의 귀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아무 말도 안 하네?’

아카데미로 가는 동안 필릭스가 또 당황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할 거라고 예상했던 니아는 의외로 가만히 있는 그를 보며 놀랐다. 심지어 그녀가 힐끔 쳐다보자, 눈을 한번 마주치고는 흠칫 놀라더니 아예 그녀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군. 이상해.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니아는 자신이 십 년간 이 도련님의 반의반도 몰랐음을 또다시 실감하며 달리는 마차 창문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처음 사탕을 입에 문 아이처럼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이렇게 빠르게 풍경들이 지나가다니!’

황량한 벚나무 가지들이 순식간에 니아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불자 하늘 높이 뻗은 가지들이 찰랑거렸다. 나뭇가지가 만든 그늘이 마차 안에 들어왔다.

‘꽃이 피면 훨씬 더 아름답겠구나.’

마차라는 것을 생전 처음 타 보는 니아에게 빠르게 지나가는 수도의 풍경은 재미있는 책 한 권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구불구불한 길 너머 작은 집들과 첨탑들이 보였다. 그리고 밀과 옥수수밭이 있는 평야를 지날 때, 니아는 반복되는 풍경에도 전혀 지겹지가 않았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자연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귀엽기는, 니아 프레슬리.’

그리고 그 모습을 힐끔힐끔 보는 필릭스 쿠아란은, 자신의 귀여운 아가씨가 그렇게 사랑스러웠다. 그는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린 니아를 아카데미로 가는 내내 턱을 괸 채 바라봤다.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도련님, 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마부 휴가 소리쳤다. 점점 속도가 줄어들던 마차는 곧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니아, 내리지.”

미소를 머금고 있던 필릭스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니아는 길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그를 따라 내렸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었다.

니아 프레슬리는 고개를 들어 아카데미를 바라보았다. 순간,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카데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웅장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공작가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그녀였지만, 아카데미를 바라보니 다른 의미의 헛웃음이 나왔다. 막연히 상상만 했던 일이 아가리를 벌리고 묵직한 현실로 변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건물의 특징 중 하나는 ‘결코 과하지 않은 화려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카데미가 신경 쓴 것이 있다면 바로 ‘위엄’이었다.

화려함은 곧 사치, 사치는 귀족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과시가 아닌 지식의 배움터로서의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였다.

‘이러니 겁을 안 먹으려야 안 먹을 수가 없잖아…….’

아카데미는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 추측할 엄두도 나지 않는 무채색의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니아의 눈에 벽에 꽂힌 깃발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카데미의 문장이 촘촘히 박힌 깃발은 바람에 거칠게 흩날렸고, 저 멀리 아카데미의 정중앙에 위치한 높은 시계탑은 이곳이 지혜의 성지임을 자랑하는 듯했다.

니아의 긴 갈색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흩날렸다. 펄럭이는 망토 안에 몸을 숨기고, 날리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감춘 니아는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내가 무슨……. 도대체 필릭스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런 곳에……. 귀족 나리들에게 하녀는 재밌는 먹잇감일 뿐이라고.’

많은 귀족들이 당당한 걸음으로 유리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니아는 자신과는 다른 그들이 두려웠다. 귀족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 또 그녀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설마 매질을 하지는 않을 거야. 계속 심부름을 시킬 수는 있겠지만……. 혹시 아카데미의 청소를 시키려나?’

“들어갈까?”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는 니아를 보고 그저 아카데미의 경관에 조금 놀란 것뿐이라 생각한 필릭스가 다가섰다.

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필릭스 쿠아란은 바람 따위 전혀 상관없다는 듯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유히 날리는 머리칼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더해 줬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필릭스 쿠아란…….’

그는 이 아카데미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니아와는 처음부터 너무도 달랐다. 타고난 천재라 불리는 그에게는 어쩌면 우스울 정도로 별것 아닌 공간일지도 모른다.

“가자, 니아.”

사실 필릭스는 긴장으로 굳어진 니아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볼까 생각 중이었다. 아니, 손이라도 잡아 볼까…….

아마 그는 시도했을 것이다. 어떤 시끄러운 녀석이 그의 어깨에 감히 손을 올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브라이트 백작가의 막내아들 앨버트 브라이트였다. 니아도 공작가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어렸을 적 몇 번 공작가에 와서 놀곤 (필릭스의 말로는 귀찮게 알짱거리곤) 했는데, 점차 발길이 끊겼다고 들었다. 하녀들 말로는 필릭스의 싸가지에 질려 나가떨어진 것이라고 했다.

“……무슨 짓이지, 앨버트 브라이트.”

필릭스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마치 부모님의 원수 대하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필릭스, 내 마음을 읽었나? 딱 자네를 찾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래, 우리가 서로를 안 지도 십오 년이 지났으니 눈빛만 봐도 통할 시기가 된 거지. 안 그래?”

하지만 남자는 이런 필릭스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역시 소문들은 다 거짓이었나?’

니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어떤 귀족도 저 아쉬울 것 없는 도련님에게 감히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이라기에는 앨버트의 팔이 계속 필릭스의 어깨에 살포시 얹혀 있었다.

“필릭스 자네…….”

“앨버트 브라이트, 제발 그 말투 좀 어떻게 하지.”

필릭스가 듣는 게 고역이라는 듯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중후해 보이지 않는가?”

“전혀.”

필릭스는 짙은 피로가 밴 한숨을 내뱉었다. 앨버트 브라이트는 개의치 않고 신나서 말을 이었다.

“자네, 오늘 보리스 발디 단장이 온다는 걸 정말 까먹은 건 아니겠지?”

필릭스는 앨버트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잠시 생각하곤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아, 그 대머리 말인가.”

“큰일 날 소리를! 아무리 자네라도 황궁 기사한테 그렇게 말했다간 자네 인성 문제에 관한 소문이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질 거라고. 그럼 언제 귀족 아가씨들이 자네에게서 등을 돌릴지 모른다고!”

“그거 나쁘지 않군.”

피식 웃는 필릭스를 보며 앨버트는 더욱 과장된 얼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초록빛 머리를 가진 이 남자는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했지만, 필릭스가 계속 대꾸를 해 주는 것을 보아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잇, 필릭스! 두 달 뒤면 황궁 검술 대회에 나가는 사람이 맞는가? 자네 빼고 다 새벽 연습을 왔단 말이지. 아무튼 곧 발디 단장이 올 테니 그때까지 대회 참가자들은 모두 모여야 해. 솔직히 자네야 빠져도 그만인 실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우리는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한 명이라도 빠지면 조랑말 배에 매달려 밥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앨버트가 침까지 튀겨 가며 속사포처럼 쏟아 내더니 자신의 말에 본인이 더 소름 돋는다는 표정을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뭔가 묘했다. 그리고 그 묘한 감정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니아가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이 느낌, 이 분위기는…….

‘뭔지 알겠다!’

니아 프레슬리는 곧 정답을 찾아냈다.

앨버트는 그녀를 보지 않았다. 말 그대로였다. 그냥 보지 않았다.

‘무시하는 건가.’

니아는 나름대로 공작가 하녀로서 십 년의 경험치를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특히나 귀족이) 그냥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시하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건 분명 의도적이야.’

확실했다. 그녀는 지금 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녀를 이미 알고 있는 걸까? 공작가의 피후견인이라는 것도? 귀족이 아니라는 것, 하녀라는 것 전부?

‘완전히 무시할 거라는 예상도 했어야 했는데.’

귀족들이 그녀를 아예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니아는 이 귀족이 방금 보인 행동에 대해 곰곰이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안 가.”

앨버트의 재촉에 필릭스가 먼 곳을 바라봤다.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그의 말에 앨버트 브라이트는 더욱 경망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 정말 이렇게 애처럼 굴 건가? 발디 단장이 칼 대신 무엇을 날카롭게 가꾸는 줄 아나? 바로 신발 코일세, 신발 코. 왜 그러느냐고는 절대 묻지 말게. 내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가 바로 정강이를 찔렸거든. 그래, 바로 그런 용도였네. 쓸모없는 질문을 하는 학생을 처리하는 용도!”

필릭스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앨버트 역시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타격 하나 없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촉박하네. 얼마나 급했으면 내 자네를 찾으러 여기까지 나왔겠어!”

필릭스가 그제야 어깨에 올라와 있는 팔을 팍 떼어 내었다. 앨버트 브라이트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니아를 데려다주고 가지.”

“거짓말 같은데…….”

저놈이 쉽게 올 리가 없었다. 저 하녀가 있는 곳에 세월아 네월아 하고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게 뻔했다.

반면 필릭스는 조금 전부터 아무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는 니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가 데려다주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고개도 숙이고…….’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과 떨군 고개 때문에 니아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조금 불안해진 필릭스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무릎과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 때문에 여전히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니아?”

“…….”

“니아. 고개 좀 들어 봐. 얼굴이 안 보여서 그래.”

“…….”

“많이 긴장했나? 그래서 그래?”

아까 앨버트를 대하던 냉랭한 말투는 온데간데없고, 꿀을 바른 듯 다정하기만 했다.

필릭스는 니아가 자신의 말에도 한참 고개를 들지 않자, 앨버트를 휙 째려보았다.

‘너 때문이잖아!’

정말로 이 둘은 눈빛으로 대화가 가능한 걸까?

앨버트가 필릭스의 눈빛을 보는 순간 억울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쳐다도 안 봤다고!’

앨버트가 입 모양으로 뻐끔댔다.

정말 쳐다도 안 봤는데…….

이번엔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억울한 눈치였다.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아예 니아를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면 어떡하느냔 말이야.’

필릭스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을 보냈다가 다시 니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다독여 보려던 찰나,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에게 다가서던 필릭스는 하마터면 턱을 맞을 뻔했다. 뛰어난 반사 신경으로 바로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도련님, 가 보셔야 하는 것 같은데 가시죠. 저는 알아서 가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니아는 필릭스와 앨버트를 남겨 둔 채 아카데미 정문을 순식간에 지나쳐 갔다. 그리고 방향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표지판을 발견했는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니아?”

필릭스는 멀어지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이름을 허망하게 불러 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우울해 보였는데……. 이상하게도, 필릭스를 떠나 아카데미를 향해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꽤나 경쾌해 보였다. 마치 음표처럼 통통 걷고 있는 것 같달까.

“따라가 봐야겠어.”

필릭스가 니아를 쫓아가려 하자, 앨버트가 그의 망토를 끌어당겼다.

“놔두라고. 부담스럽게 행동하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라네, 친구.”

앨버트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필릭스의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니아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본 필릭스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너 때문에 마음이 상한 건 확실해 보였어.”

확신에 찬 필릭스를 향해 앨버트는 또다시 억울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놈이?

“그거야 네가 쳐다보지 말라고, 쳐다보면 죽인다고 협박했으니까!”

“…….”

“그리고 확실하긴! 네가 그렇게 감추지 않아도 본인이 코빼기도 보여 주지 않더구먼. 다 자네의 뇌 내 망상이란 말이지.”

“…….”

“아무튼 나는 잘못한 것이 없……. 히익!”

필릭스가 앨버트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앨버트를 질질 끌며 검술 연무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거 놓게!”

소리치는 앨버트를 완전히 무시한 채 필릭스는 중얼거렸다.

“발디 단장을 기다리게 해서야 쓰겠어? 어서 가자고.”

앨버트는 필릭스의 힘을 이기지 못해 질질 끌려가며 생각했다.

‘이래서야 원……. 어째 예전보다 더 심각해진 것 같군.’

반면, 강의실로 향하는 니아 프레슬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갑작스럽게 발견한 희망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를 이렇게 무시해 준다면, 일 년 동안 무사히 다닐 수 있겠어!’

니아는 표지판을 따라 경쾌한 발걸음을 이어 갔다.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앨버트의 태도에서 그녀는 예상치 못한 희망을 발견했다.

‘머리에 돌을 던지거나, 호수 정원에 빠트리거나, 쇠꼬챙이로 찌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귀족들이 상종하기 싫다는 듯 무시만 해 준다면…… 일 년 동안 무사히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니아의 상상이 과장되긴 했지만, 실제로 어린 귀족들에게 농락당하는 하인들은 많았다. 짓궂은 귀족들이 하인 하나를 불구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공작가에 암암리에 돌곤 했던 것이다.

‘이런 귀족 자제들만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오히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무시해 준다면, 니아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요. 다들 급이 안 맞는 하녀한테는 관심도 가지지 말아요!’

하지만 니아 프레슬리의 바람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행복한 상상은 그녀가 천문학 강의실로 들어가는 순간 와장창 부서졌다.

“네가 그 공작가가 후원을 한다는 사람이구나!”

“도대체 어떤 천재길래 그 공작가에서 아카데미에 다 보내 주는 거야?”

“필릭스와 같이 마차를 타고 왔다는 게 사실이야? 부러워 죽겠네…….”

“공작가 하녀라는데, 맞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공작의 후원을 받은 거야?”

수십 쌍의 눈동자와 수십 개의 입들이 니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니아는 그대로 돌아서 도망갈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얘, 말 좀 해 봐. 갑자기 마법 능력이라도 발현했다든지, 아니면 공작가와 연이라도 있는 거니?”

“할로나, 당황하잖아. 그런 건 조심스럽게 물어야 하는 거라고.”

“뭐 어때! 아카데미에 온 이상 곧 밝혀질 텐데. 필릭스가 검술 연습 때문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직접 물어봤을 텐데 말이야.”

“필릭스가 퍽도 네 질문에 대답해 주겠다. 그가 황궁 검술 대회에 나가지 않았더라도, 너는 어차피 이 애한테 직접 물어봐야 했을 거야. 필릭스는 네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화사한 금발에 큰 리본을 꽂고 있는 할로나는 앙칼진 눈으로 카레나를 쳐다봤다.

“닥쳐, 카레나.”

그녀와는 반대로 칠흑같이 검은 머리의 카레나는 할로나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더니, 목소리를 바꾸어 니아에게 물었다. 그것도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그녀는 태세 전환이 참 빨랐다.

“저기, 너도 필릭스만큼 천재인 거야? 공작가에서 아카데미에 보내 주다니, 정말 이례적이야.”

“카레나, 아무리 공작가가 후원해 줄 정도의 실력자라지만 그럴 리가 있겠어? 필릭스는 몇 세기 동안 보지 못한 검술 천재라고. 게다가 얼굴은 또 어떻고! 너도 반쯤은 필릭스 얼굴 보러 아카데미에 오는 거 아니야?”

“난 누구처럼 얼굴이나 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난 단지 정말 궁금해서…….”

다시 할로나에게로 고개를 돌린 카레나는 마치 속마음을 들킨 듯 발끈했다.

“흥, 그러시겠지. 얼굴에 전혀 관심이 없겠지. 그럼 큰 키나 떡 벌어진 어깨에도 관심이 없겠네? 제발 카레나, 나처럼 솔직해지는 게 어때서? 난 솔직히 필릭스가 없었다면 집에서 가정교사들을 불러들였을 거야.”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튀는 두 여자의 대화에 니아는 눈치를 보며 슬슬 물러났다. 여전히 그녀를 좇는 수많은 눈동자들이 있었지만 일단은 이 틈을 타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싸움을 하는 두 여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니아를 따라오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심지어 공작가의 숨겨진 사생아가 아니냐는 질문을 심각하게 물어본 남자 아카데미생도 있었다.

“사, 사, 사, 생아요?!”

너무 놀라 ‘사’를 세 번이나 말해 버린 니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얼간이처럼 보였을 게 분명했다.

‘이건 악몽이야…….’

교수가 들어오자 모두들 못내 아쉽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지만, 니아 프레슬리의 머리는 수십 마리의 벌떼가 윙윙거리는 듯 어지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소문이 난 거야. 저 귀족들은 뭐 저렇게 궁금한 게 많고. 난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평범한 하녀일 뿐인데…….’

놀라운 것은 무시도, 괴롭힘도 아닌 호기심으로 무장한 귀족들에게 질문 공세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뺨이라도 한 대 맞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의 걱정스러움이 니아의 머릿속을 채웠다.

‘난 진짜 아무것도 아닌데.’

니아는 이제 저들이 자신에게 물리적인 가해를 할 거라는 예상은 집어던지기로 했다. 귀족들의 순진한 눈빛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궁금해할 뿐, 괴롭힐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날 무시해 주길 기대했던 마음도 버려야겠어.’

니아는 폭발적인 관심에,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평화롭게 아카데미에 다닐 거라는 기대를 꾸깃꾸깃 접어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사실 그랬다. 보 아카데미에는 아주 가끔씩 평민들이 입학했다. 전부 입학 전 탁월한 능력이 제국 안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거나, 못해도 공작가 정도 권력가의 눈에 든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아카데미의 우등생이 되었고, 아무리 평민이라 하더라도 귀족들은 절대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것을 모르는 니아는 그들의 관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떤 실력자일까? 순수하게 빛나는 눈으로 뒷자리의 니아를 힐끔거리는 아카데미의 귀족들을 보며 니아는 절망했다.

‘길리가 가끔 가져다주는 소설책을 읽었던 게 전부인데…….’

니아는 이름뿐일지 몰라도 하녀였고, 배움의 기회를 일절 얻어 보지 못한 평민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엘리트 교육만을 받아 온 귀족들이 기대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니아 프레슬리? 공작가의 첫 피후견인이군. 아주 기대가 크네. 보 아카데미에서 평민으로 처음 졸업한 애슐리 밀러만큼 뛰어난 성적을 보여 주길 기대하지.”

교수의 말은 최악인 니아의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만들었다.

솔직히 말해, 니아는 저 칠판에 적힌 글씨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늘 보던 에슬란어인 것은 분명한데, 내용은 외계에서 온 것만큼 생소했다. 이상한 기호들도 틈틈이 섞여 나와 니아의 머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저걸 다 이해하고 있는 거야?’

니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귀족 학생들을 바라보며 좌절감을 느꼈다.

교수가 잠시 쉬어 가자며 새롭게 발견한 별자리를 칠판에 그려 주는데, 그것조차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쉬어 가자면서, 무슨 그림을 30분 동안 그리고 앉아 있어?’

니아는 쉬어 가자는 게 이제부터 어려워질 거라는 귀족들의 은어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다음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나라의 정치체계에 대해 배우는 ‘이정치학’은 에슬란 제국의 정치체계도 잘 알지 못하는 니아에게는 고역일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수업인 ‘마법의 역사학’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삼십 년간 아카데미에서 마법의 역사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가 니아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한 것이다.

“니아 프레슬리 학생?”

“네……. 네?”

“어린아이도 웃고 갈 만한 가벼운 질문 하나 하지. 자네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서야.”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그러지 마……!’

니아의 불안한 눈빛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버도네 교수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업적을 세운 마법사의 이름은 바로…….”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니아는 가장 훌륭한 마법사는 물론, 아는 마법사도 없었다.

“츠치 버도네이네.”

‘하, 다행이다.’

다행스럽게도 버도네 교수는 마법사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는 ‘또 자기 자랑 시작이군’이라는 학생들의 수군거림 따위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 듯했다.

츠치 버도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법사의 후손이라는 것은 아리갈리 버도네 교수의 가장 큰 자부심이었다.

니아는 그런 그에게 우선은 안도했다. 하지만 아리갈리 버도네는 니아가 방심하기도 전에 진짜 질문을 던졌다.

“츠치 버도네가 지정한 마법의 제1원칙이 무엇일까?”

“…….”

모든 시선이 니아에게로 향했다. 온 아카데미생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렸지만, 당연히 니아 프레슬리는 단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르는데 어떻게 답해요!’

이런 니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간은 흘러만 갔고 교실 안의 정적은 길어졌다.

‘빌어먹을…….’

니아는 땀으로 가득 찬 손과 손톱을 책상 아래에서 미친 듯이 뜯었다. 그 순간이었다.

“마법의 제1원칙. 모든 마법은 마정석의 힘을 빌려 일어난다.”

구석진 자리의 누군가가 정적을 깨고 외쳤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음성이었다.

“시저 카르만! 자네였군. 고맙네. 그래, 모든 마법사는 마정석이 있어야만 마법을 쓸 수 있네. 마정석이 떨어져 괴물에게 잡아먹힌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란 말이지. 마정석도 잘 조절하며 써야 하는 걸 우리 마법사 지망생들은 명심하시고, 자. 이제 그 마정석의 근원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워 볼…….”

모두 니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니아는 느낄 수 있었다.

‘공작가의 피후견인이라더니, 왜 질문에 대답도 못 하지?’

‘벙어리야?’

실망스러운 눈빛, 이상하다는 눈빛. 왜 저러는 거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모습.

아카데미에서의 첫날, 니아 프레슬리에게 보 아카데미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아침부터 필릭스에게 멱살이 잡혔던 앨버트 브라이트는 연습 중에도 틈틈이 원망스러운 눈길로 자신의 십오 년 지기를 쳐다봤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하녀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몰래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필릭스 쿠아란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말렸다. 평소라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갔겠지만, 보리스 발디 단장이 온 이상 그의 멋대로 하게 놔둘 수는…….

“앨버트 브라이트, 내가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 궁금한가?”

‘빌어먹을, 도대체 이 양반은 눈이 등에도 달린 거야 뭐야.’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상처 없이 검술 대회에 나가고 싶다면 집중하길 바라네.”

보리스 발디가 자꾸 다른 곳을 힐끔거리는 앨버트에게 경고했다. 그의 대머리가 반짝하고 빛났다.

보리스 단장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본 후 앨버트는 다시 필릭스를 째려봤다.

‘그 애 일이라면 무조건 흥분하기는. 참 짝사랑 질기게 하는군.’

앨버트는 모든 것이 다 시시하기만 하다는 얼굴로 상대의 공격을 막는 필릭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팔 년 전이었나…….’

열두 살의 앨버트가 말했다.

“저기, 읽을 것 좀 가져다주지 않을래? 필릭스가 오지 않아 심심해서 말이야.”

초록빛 머리를 가진 이 소년은 집에 오면 반드시 널 죽여 버리겠다는 친우의 말을 무시하고 드디어 공작가에 놀러 온 참이었다.

무슨 꿀단지라도 숨겨 뒀는지 필릭스는 어린 귀족들을 위한 아베쎄 아카데미가 끝나자마자 집에 가 버리곤 했다. 그리고 집에 놀러 가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던 필릭스이기에 더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아카데미가 끝나자마자 달려 먼저 공작가에 도착해 버린 앨버트였다.

“어떤 책을…….”

‘참, 이런 하녀가 책에 대해 알 리가 없지. 괜한 걸 물어봤다.’

“아니야. 됐어. 지금 배가 좀 고프니까…… 그냥 먹을 것을 좀 가져다줘. 부탁해도 되지?”

열두 살의 니아는 처음 보는 도련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필릭스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 방으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그런 그녀를 생전 처음 보는 도련님이 붙잡은 것이다.

이름뿐인 하녀였지만, 심심할 때면 이것저것 일을 해 보곤 했던 니아였다. 어째서인지 아무도 그녀에게 일을 시켜 주지 않아 제풀에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그러던 와중에 니아에게 부탁하는 사람이 생기다니! 무언가 제대로 된 일을 해 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온전한 깨달음이 들이닥치자 니아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네!”

그녀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애매한 시간대 탓인지, 주방장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어쩌지.’

니아는 친절한 미소로 이런 부탁을 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던 초록 머리 도련님을 떠올렸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직접 하면 돼.’

니아는 주방장이 하던 것을 천천히 떠올리며 따라 하려고 애썼다. 그는 계란을 깨고, 무슨 하얀 가루를 넣고는 했다. 니아는 주방의 모든 뚜껑을 열며 두리번거렸다.

‘이건가? 음, 소량만 넣으시오……. 어느 정도가 소량이지?’

한 주먹 정도면 괜찮겠지.

니아는 가루를 한 움큼 집어 계란과 섞었다. 화로에 불을 붙이고, 냄비에 반죽을 넣어 돌리기 시작했다. 나름 기억나는 대로 따라 하고 있기는 했다.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나는 듯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요리란 뭐, 먹을 수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탄내가 진동을 했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고 니아는 유리그릇에 음식을 옮겼다. 그리고 혹여라도 식을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도련님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게…… 뭐야?”

도련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의 요리에 감탄한 것일까? 니아가 보기에도 자신의 음식이 꽤 나쁘지 않아 보이기는 했다.

“이건 음……. 계란 요리! 식기 전에 드세요!”

‘계란 요리가 아니라 석탄 요리 같은데.’

앨버트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탄내 가득한 이것이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는 걸 받아들이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래, 이리 줘!”

하지만 곧 앨버트 브라이트는 씩씩하게 활짝 웃어 보이고는 당차게 석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검은 재를 얼굴에 잔뜩 묻힌 채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이 꼬마 아가씨가 눈에 밟혀서.

앨버트는 니아가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이 어린 아가씨를 실망시킬 수는 없는 일이지.

“고마워, 잘 먹을게.”

앨버트의 작은 손이 호두알처럼 동그란 니아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순간 니아의 얼굴에 살짝 생기가 돌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앨버트 브라이트는 왜 필릭스가 그토록 자신이 공작가에 오는 것을 싫어하는지 알지 못했다.

“……앨버트 브라이트, 당장…… 그 손 떼.”

열두 살의 질풍노도 시기를 겪고 있던 필릭스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앨버트에게 달려와 그를 팍 밀쳤다.

넘어진 앨버트는 너무 놀라 친구와 그의 집 하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의 친구는 씩씩대고 있었고, 화들짝 놀란 하녀는 어느새 고개를 있는 대로 숙이고 달아나고 있었다.

“야! 엉덩이 깨지겠어!”

바닥에 제대로 부딪힌 앨버트가 소리를 지르며 엉덩이를 슬슬 문질렀다. 그런 그를 필릭스가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감히 어디다 손을 대는 거야. 다시 한번 이 집에 발을 들였다가는 그대로 죽여, 아니 산산조각 내 버릴 거다…….”

필릭스는 니아에게 한 번만 더 손을 대면 정말로 공작가의 모든 걸 걸고 널 끝내 버리겠다, 다시 집에 찾아와도 널 부숴 버리겠다 엄포를 놓았다. 그러고도 그의 협박은 계속되었다.

그 길고 긴 고문 끝에, 그제야 앨버트 브라이트는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공작가 도련님이 자기 집 하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에 눈이 먼 바보잖아, 이건.’

그 짝사랑이 그 후로도 팔 년이나 이어질 줄은 앨버트 브라이트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 팔 년의 시간 동안 필릭스가 당사자 몰래 마음만 간직하고 있을 거라는 것은 더더욱 예상치 못한 바였다.

며칠 전, 니아가 아카데미에 오면 쳐다도 보지 말라는 경고를 진지하게 하는 필릭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니아 프레슬리는 마법의 역사학 수업이 끝나자마자 지친 몸을 이끌고 정문으로 뛰어갔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쏟아지는 귀족들의 물음을 피해, 황공한 그녀는 도망쳐 버린 것이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어떻게 집에 돌아가지?’

필릭스는 그 무슨 기사 연습 때문인지 수업 시간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 넓은 아카데미 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니아였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완전히 혼자 남겨진 것이었다. 집에 돌아가야 했지만 필릭스도, 마차도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금세 실감했다.

가까운 곳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수업 시간에 봤던 귀족 무리였다. 니아는 행여 또 질문 공세가 퍼부어질까 두려워 나무 뒤로 급히 숨었다.

“벌써 필릭스를 못 본 지 일주일이 지났어. 연무장이라도 가서 보고 싶은데. 지난번에 할로나가 검술 연무장에 찾아갔는데, 쫓겨났다더라.”

“연습은 늘 저녁때나 끝나니까……. 오늘도 못 보겠다. 우울해! 난 잘생긴 얼굴을 봐야 정신이 안정된단 말이야.”

“너만 그런 줄 알아? 괜찮은 남자애들은 다 검술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가 버렸으니. 남은 남자애들은 다 올리버 켈란 같은 애송이거나 시저 카르만처럼 음침한 애들뿐이라고.”

“확실히…… 비리비리한 놈들만 남아 있기는 하지. 그래도 뭐 어쩌겠어. 두 달 뒤면 필릭스가 갑옷을 입고 출전할 테니 그것만 기다리는 수밖에.”

이야기는 필릭스가 갑옷을 입은 모습을 기대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검술 대회에서 필릭스가 무슨 갑옷을 입을지 퍽 궁금한 모양이었다. 니아 입장에서는 그게 왜 궁금한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필릭스 연습이 저녁 늦게까지 있다고? 그럼 난……?’

여자 귀족들이 필릭스를 찬양하건 말건, 필릭스가 갑옷을 입든 벗든, 그것은 니아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지금, 공작가로 어떻게 돌아가느냐였다.

필릭스가 늦게 끝난다면 자신은 혼자 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필릭스가 없다는 건 마차도 없다는 뜻이었다.

‘설마 혼자…… 걸어가야 하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필릭스를 기다려 봤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귀족들만 나타나더니 곧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정말 최악인 하루군.’

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필릭스를 찾으러 검술 연무장으로 가는 것도 좋지 않은 선택 같았다. 귀족도 쫓겨나는 마당에 하녀인 니아가 가 봤자 절대 좋은 꼴은 못 볼 것이 확실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안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니아는 결심을 하고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다소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는 니아의 발걸음은 꽤나 가벼웠다.

“그냥 기다릴걸…….”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당연하게도 니아 프레슬리는 후회 중이었다.

한 시간이 지나도록 공작가는커녕 중간에 위치한 시장도 다 지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슬슬 다리가 저려 왔다.

하지만 불행 중에도 다행인 일은 있었다. 고민 끝에 길을 묻자 사람들이 친절하게 알려 줬던 것이다. 박한 반응을 기대했던 니아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상한 일이야. 이 시장에는 다 착한 사람들만 있나 봐.’

약도를 그려 드릴까요? 묻는 사람도 있었고 함께 가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덕분에 니아는 확실히 길을 알 수 있었지만,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평화로움을 한시라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사건이 터졌다.

“거기 아가씨, 조심하슈!”

한 남자가 소리쳤다. 소리 들리는 곳을 향해 돌아보니, 남자아이 하나가 니아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어, 피해야 되는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남자아이를 니아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자신의 속도를 이기지 못한 아이도 니아를 비켜 가지 못하고 그대로 강하게 부딪혔다.

‘정말 재수 없는 날이다…….’

부딪혀 넘어지며 니아는 생각했다. 아카데미에서의 그 끔찍한 시간들로도 모자라 시장 바닥에 드러눕게 되다니. 오늘 하루 신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구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저놈이!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남자아이는 함께 넘어졌지만 바로 일어서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저 자식이…….’

속으로 중얼중얼 욕을 하며 옷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서는 니아에게 사람들이 몰려와 손을 내밀었다.

‘지금 날 일으켜 주려는 건가?’

니아는 얼떨결에 내민 손 중 하나를 잡고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아가씨, 혼자 계신 겁니까? 하인 하나라도 데리고 나오시지. 방금 그 남자애는 이 시장에서 유명한 도둑놈입니다. 하도 빨라서 잡기가 쉽지 않죠.”

“…….”

“차림을 보아하니 아카데미 학생이신 것 같은데. 댁이 어딥니까. 제가 모셔다드리죠.”

“아니,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놈은 힘이 없어서 아가씨를 모셔가다가 제풀에 지칠 겁니다.”

“아뇨, 제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니아를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니아는 당황스러웠다. 데려다주겠다며 말씨름하던 사람 중 누군가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만지지 마세요!”

니아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본능적인 자기방어였다. 하지만 곧바로 후회가 되었다.

‘큰일이다. 도와주겠다는 사람들한테 소리를 쳤으니. 때리는 건 아니겠지? 그럼 상처가 날 수도 있어. 도망쳐야…….’

예상은 간단히 빗나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놈이 귀한 아가씨의 몸에 감히 손을 대려고 하다니. 한 번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지요.”

“어이, 모리스! 어서 사과드리지 않고 뭐 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감히……. 용서해 주십시오.”

도망쳐야 하나 고민하던 니아에게 모리스라는 사내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고개까지 푹 숙인 채였다.

“괘, 괜찮아요. 사과는 받아들이지만……. 도움은 필요 없어요. 난…… 정말 괜찮아요.”

니아는 말을 쥐어짜 냈다. 감히 호의를 거절한다고 화를 내지는 않을까?

그녀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다들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을 뿐,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예에. 그럼 살펴 가십시오. 다들 들었지! 이 아가씨는 도움이 필요 없으시단다. 다들 헛물켜지 말고 돌아가!”

누군가 말하자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사라져 가는 사람들에게서 작은 소리가 울렸다.

“귀족 아가씨를 데려다주면 두둑이 챙겨 주지 않을까 했는데. 하녀도 없이 나온 아가씨답게 고집불통이구먼…….”

“귀족 아가씨들이 다 그렇지…….”

소리는 점차 멀어져 갔다. 니아는 그제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신에게 친절하게 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니아를 귀족으로 착각한 사람들이, 그녀를 데려다주고 보상을 받을 기대를 했던 것이다.

‘아카데미복을 입고 있어서 다들 친절했구나. 이 아카데미복 때문에.’

빠르게 사라진 사람들에, 다시 혼자 남게 된 니아는 씁쓸한 뒷맛을 삼켰다.

‘원래의 니아 프레슬리는 넘어지든 죽든 신경 쓰지 않겠지. 그냥 하녀일 뿐이니까.’

오늘 하루, 자신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처절하게 느꼈는데. 이미 충분히 깨닫고도 남았으리라 생각했는데. 가혹한 신은 니아의 위치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바람은 또 왜 이렇게 부는 거야.’

오늘처럼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눈에 먼지가 들어가기 쉬웠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기 쉬운 날은, 눈에서 눈물이 나기도 쉬웠다. 니아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보처럼 울지 마, 니아 프레슬리. 겨우 하루일 뿐인데. 아니, 아직 하루가 다 지나지도 않았는데 울지 말라고.’

니아는 울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레오가 보고 싶어…….’

그녀는 떠올리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해도, 힘든 순간이 오면 늘 떠오르는 그 이름을 생각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 계획이었다.

몇 번이고 니아에게 가려 했지만, 보리스 단장의 눈치를 보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놈 하나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어쩐지 아까의 니아도 그가 함께 가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고.

종합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머리 없는 보리스 발디 단장이 그가 잡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며 몰아붙이더니, 결국 본인을 이겨야만 오늘 연습을 끝내 주겠다고 도발한 것이다.

‘오늘은 연습이 일찍 끝나겠군.’

황궁 단장 따위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필릭스는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단장과 필릭스가 결투를 한다는 소문이 나자, 함께 연습을 하던 아카데미생들이 몰려들었다. 황실 기사를 꿈꾸는 그들인 만큼, 타고난 천재인 필릭스와 연륜으로 무장된 발디 단장의 대결 결과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판이 커지자, 나서길 좋아하는 앨버트 브라이트가 단판 승부가 아닌 3선 2승제로 바꾸자고 제안을 했다.

“싸움은 오래 볼수록 재미있지!”

속 타는 필릭스의 마음을 모르는 기사 지망생들은 모두 좋다며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다치면 제국의 큰 손실이니 갑옷을 입고 해야 한다, 좋은 무기를 써야 한다며 시간을 질질 끌었다. 빨리 니아를 데리러 가야 하는 필릭스는 속이 타들어 갔다.

“그냥 대충 하자고!”

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흥분한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끌어 시작한 대결은, 필릭스 생각처럼 쉽게 끝나지 않았다.

‘차라리 죽이는 게 더 편하겠어, 이 쥐새끼 같은 단장!’

역시나 연륜은 무시할 것이 못 되는지, 보리스는 깔짝깔짝 필릭스의 화만 돋우며 시간을 끌었다. 필릭스가 실전처럼 강하게 나오지 못할 거라는 걸 아는 발디 단장의 전략이었다.

‘진심이 아니라 이거지.’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조금 타박상을 입게 하더라도 끝내야겠다 생각한 필릭스였다. 그때 발디가 속삭였다.

“실전에서도 이렇게 할 건가?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지. 그들 중 열에 아홉은, 자만이라는 덫에 걸려 고꾸라지고 말더군.”

필릭스는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급소를 가격했다.

“억!”

보리스가 가슴을 쥐며 넘어졌다. 필릭스는 넘어진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귀에 대고 얘기했다.

“대충 할 생각 없습니다. 꼭 우승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거든요. 죽을힘을 다해 부딪칠 생각이니 쓸데없는 걱정은 마시죠.”

자신의 귀에 속삭이고 등을 돌려 떠나는 필릭스를 보며 보리스는 미소 지었다.

‘무언가 심경에 변화가 있었군.’

그동안은 너무 뛰어난 재능 때문인지 무엇이든 시시하다는 태도를 보였던 그였다. 그런 그를 열중하게 하는 무언가가 없었는데, 드디어 필릭스를 들끓게 하는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성장을 한 걸음 앞둔 천재의 모습이라…….’

스승으로서 꽤나 설레는 순간이었다.

“어이, 필릭스! 어딜 가는 겐가! 3판 2승제라고 했지 않나!”

미련 없이 떠나는 필릭스를 보고 앨버트 브라이트가 당황하여 소리쳤다.

“됐다. 내가 급소를 찔려 더 이상 결투는 무리일 것 같으니. 타고난 천재 필릭스가 이 보리스 발디를 이긴 것으로 하자고!”

그렇게 해서 결투는 마무리되었고, 필릭스는 빠르게 뛰어 강의실로 갔다.

하지만 강의실 문은 닫힌 지 오래였고, 정문에서도 마부 휴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니아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 가 버렸다, 이거지…….’

필릭스는 부아가 치미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차와 말의 연결고리를 떼어 냈다. 그리고 말에 올라타더니, 공작가를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먼저 간 니아를 한시라도 더 빨리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마침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시간이었다. 노을이 사라진 어둠 속으로 빠르게 말을 달리는 필릭스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타고난 기사다운 기백이었다.

낮게 허리를 낮춘 그는 전속력으로 공작가를 향해 갔다. 호되게 말을 몬 결과,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기 전에 공작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싸늘한 음성이 공작가에 울려 퍼졌다.

“이 시간까지? 무슨 소리야.”

하인들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미친 거로군.”

필릭스 쿠아란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서늘하게 눈을 번뜩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은 도련님의 모습에 집사 길리 포바즈와 하인들은 몸을 사렸다.

“혼자서 어디를…….”

참지 못하고 화를 내려던 순간, 필릭스 쿠아란의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갔다. 그가 니아를 겁주기 위해 말했던 것들.

그는 니아가 얼마나 병약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생각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병이 다 나은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동시에 경보등이 켜지듯 니아의 모습이 깜빡깜빡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니아 프레슬리는 오늘 지나치게 예뻤다. 그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 건 분명 아닐 테지.

“안 되겠어. 어딘가 잘못된 게 분명해. 나가 봐야겠어. 당장 나가…….”

그 순간, 현관으로 생쥐 꼴을 한 니아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니아!”

필릭스는 사색이 되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이게 어떻게 된…….’

니아의 머리는 젖어 엉망이었다. 오늘 아침 자신을 설레게 했던 옷은 어디서 굴렀는지 흙탕물로 더러워져 있었다.

“저 왔습니다.”

니아는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필릭스의 화를 더 돋우기 시작했다.

기묘한 정적 가운데, 니아에게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꼴이야.”

필릭스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

“아…….”

니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닫았다. 말을 하려다가 말자 필릭스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잖아.”

다시 한번 낮게 읊조리는 그의 말에 니아는 그제야 필릭스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봤다. 그의 눈빛이 매섭도록 형형했다.

“그러니까 이건, 다쳐서…….”

“다쳤다고?”

“네, 아뇨. 아니, 그러니까 아니에요. 안 다쳤…….”

하지만 필릭스 쿠아란의 표정은 이미 되돌릴 수 없으리만치 일그러져 있었다. 걱정과 분노로.

“누구야, 누구……. 누가 감히…….”

“…….”

“죽여…… 죽여 버리겠어.”

“…….”

그의 말에 니아는 이제야 또렷하게 정신이 돌아옴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제정신을 완전히 놓아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절 죽이시려고요?”

“……니아?”

필릭스는 순간 멈칫했다. 니아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멍한 표정이던 그녀는 이제 그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도대체 또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니아 프레슬리는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새 옷이 더러워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에 살짝 묻은 흙도 다 털어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근처 강으로 가 깨끗이 씻었다.

오늘이 그녀에게 얼마나 불행한 날인지 한 번 더 생각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강가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한시라도 빨리 공작가로 돌아왔어야만 했다.

‘시원하다.’

차가운 강물로 얼굴을 씻어 낸 니아는 말끔해진 기분으로 강가를 떠나려 했다. 분명…… 떠나려 했다.

하지만 일어서다가 그만 자신의 긴 치맛자락을 밟고야 말았다. 아직 몸에 익지 않은 옷 때문이었다.

풍덩!

니아는 기우뚱, 몸의 중심을 잃더니 결국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강을 향해 넘어졌다. 그것도 그냥 넘어진 게 아니라 강 안에 고꾸라지다시피 처박혔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힌 니아는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일어섰다.

‘망할…….’

미역같이 변한 머리는 물론이고 옷도 전부 젖었다.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느라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진 옷은 회생 불가처럼 보였다.

옷이라도 말려 볼까, 기다리던 니아는 이미 어둑해진 날씨에 옷이 마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시 공작가를 향해 떠났지만, 어두워진 탓에 길을 찾아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젖은 옷은 바닥에 끌리고, 춥고, 배고프고…….’

끌리는 옷 때문에 니아는 몇 번을 넘어져야만 했다. 피가 흐르고 상처가 났다. 하지만 우습게도, 상처들은 금세 나아 버렸다.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이 옷은 내가 감히 입을 수 없다는 의미인 거야, 뭐야.’

오는 길에 니아는 당장이라도 벗어서 던져 버리고 싶은 아카데미복을 보며 내내 생각했다.

‘분수에 넘치는 것을 가지지 말라고, 욕심내지 말라고 신이 경고하는 건가? 행복은 꿈도 꾸지 말라고?’

열 번을 넘어졌을까. 하얀 달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니아는 겨우 공작가에 도착했다. 정말 오늘은 그녀에게 최악의, 최악의, 최악의 하루였다.

몰래 방으로 들어갈 수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니아는 환하게 켜진 현관 앞 응접실의 불과 자신을 향해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곳에 있다 따듯한 곳으로 들어오니 절로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 이 상황이 다 파악되지 않을 만큼.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어디에 있든지 주인공이 되는 필릭스, 그녀의 도련님이 눈에 띄었다.

니아는 평소에는 바라볼 수도 없던 그의 모습을 이제야 온전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허름해진 자신의 옷을 보았다. 스스로의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오늘 하루 불행으로 범벅이 된 니아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살면서 단 한 번도 하지 못한 일을 저질러 버렸다.

“정말…… 싫어.”

니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필릭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니아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싫다고요.”

하지만 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또 한 번 말을 내뱉은 니아를 보고 필릭스는 점점 차갑게 굳어 갔다.

니아가 자신을, 싫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뭐라고?”

“도련님이 싫…….”

“다들 꺼져!”

필릭스가 주변에서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꺼지라고!”

하인들은 필릭스의 고함을 듣고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말해 봐. 니아 프레슬리, 뭐라고 했지?”

“싫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해야 할 거야.”

필릭스는 으르렁댔다.

그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 보였고, 실제로도 화가 난 것이 맞지만 그 안에는 다른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송곳으로 그의 마음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느낌.

니아 프레슬리가 ‘싫다’고 말한 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타격감을 주었다. 물론 니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떻게 말 한마디가 이토록이나 아프지?

급기야 니아는 물에 젖은 망토를 벗어 거칠게 바닥에 던지며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제가 분수에 맞게 살고 싶다고 했죠. 난 바란 적도 없는데…… 이딴 옷 따위, 귀족들만 누리는 그런 아카데미 같은 거. 필요 없다고.”

“…….”

“나는 정말 평범하게! 그렇게 살고 싶었다고요. 기사의 부인. 그리고 행복한 가족……. 따뜻한 저녁 식사. 포근한 잠자리.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였는데. 옛날처럼…….”

니아 프레슬리는 급기야 헛웃음을 지었다.

“…….”

“왜 떠나려는 사람을 붙잡아서 이런 꼴을 만드십니까?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죽인다고요? 바로 접니다. 네, 제발 죽여 주시죠. 좀 죽고 싶어요, 저도! 이제 정말 다 끝내고 싶어!”

“…….”

“우습지 않습니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제가 이 꼴을 만들었다는 게. 누군가 알려 주는 것 같았어요. 마치 이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걸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처럼……. 네, 처절하게 알았습니다. 나 따위가…… 감히. 나같이 하찮은 계집애가 감히…….”

“……니아.”

“그냥 죽은 듯이 일 년 살아 볼 생각이었습니다. 귀족 나리들이 하녀 따위 신경 쓰지 않길 바라면서,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저같이 못 배운 것은 귀하신 귀족들 수업 같은 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요. 사람들은 이 옷이 없으면 저 같은 건 길바닥에서 뒹굴든 죽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답니다. 길을 몰라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을 겁니다. 답례로 줄 작은 보석 같은 건 가져 본 적도 없으니까!”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소리치는 니아를 필릭스는 얼어붙은 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상처받은 그녀의 모습이 가슴에 사무치게 꽂혔다. 누군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악을 쓰는 니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니아 본인은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지금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필릭스는 잠시 심장 부근을 눌렀다가 니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어디를 다쳤는데.”

맞닿은 그녀의 손은 한겨울의 유리창처럼 차가웠다.

니아는 사납게 그의 손을 쳐 냈다.

“다친 데? 다 다쳤습니다. 멍들고, 피 나고……. 쓰라려서 죽을 것 같아요.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모두 찢겨서 이제는 멀쩡한 곳이 없습니다!”

“보자.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고 화는 그다음에 내면…….”

“근데 상처가 없어요.”

“…….”

“근데 상처가 없다고요. 상처 흔적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아픈 걸 아무도 모르더군요.”

“…….”

“상처가…… 없으니까.”

니아는 말을 하고, 자신이 더 고통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필릭스를 지나쳐 지하로 내려갔다.

오늘 하루, 울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그녀는 결국 좁은 방 안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소리는 새벽 내내 지하에 울려 퍼졌다. 필릭스는 니아의 방 앞 복도에서 서성거리며, 머리를 감싸 쥐고 그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울다 지쳐 잠든 니아는 그리운 꿈을 꾸었다.

소년과 소녀가 동산의 꽃밭에 함께 누워 있었다. 바람이 딱 좋은 감도로 피부에 스며들었고, 살랑이는 꽃들은 춤을 췄다. 그 사이에 파묻힌 소년과 소녀는 걱정거리 하나 없는 천진한 모습이었다.

“니아, 이 꽃 줄게.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나와 결혼하자.”

소년이 말했다. 소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소녀는 꽃을 손에 든 채 배시시 웃어 보였다.

“고마워, 레오.”

“멋진 기사가 되어 너를 지켜 줄게.”

소년의 야심 찬 말에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소년도 멋쩍은 듯 소녀를 따라 웃었다.

“너랑 나 닮은 아이 낳으면…… 참 좋겠다.”

중얼거리는 소년의 말에 소녀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는 어떻게 만드는 건데?”

순간 소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당황해 소리치는 소년이었다. 소녀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왜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화내는 거야…….’

소년과 소녀 사이의 침묵은 다행히도 머지않아 깨졌다.

“레오! 니아! 밥 식기 전에 어서 오렴!”

누군가 소리쳤다. 소년과 소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맞잡고, 그들의 따스한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꿈을 꾸는 내내, 니아는 그 시간에 영원히 머물러 있고만 싶었다. 세상의 차가움 따위 모르던, 그 찬란한 시절.

구정물 따위 묻지 않았던, 순백의 니아 프레슬리로.

필릭스 쿠아란은 먹을 것을 들고 니아의 방문 앞에 섰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그는 니아의 얼굴을 다시 보기 두려우면서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밤새 니아의 방문 앞에서 서성였던 필릭스였기에 그녀가 새벽 내내 훌쩍거렸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몇 번을 두드리고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대어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필릭스는 갑자기 걱정스러운 마음이 도져 문을 열었다.

“……왜 없어.”

니아 프레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몇 시간 전, 니아는 잠깐 행복했던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레오가 보고 싶다…….’

울다 지쳐 잠든 그녀를 찾아온 아주 그리운 꿈. 힘든 날이면 늘 찾아오는 꿈이었다.

잠에서 깬 니아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 한구석이 싸하게 아려 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생각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 차리자, 니아 프레슬리.’

어제는 세상이 자신을 최악으로 몰아붙였던 하루였다. 그래서 스스로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 감정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선명하게 깨달았다.

‘도련님한테 소리를 질렀어. 감히…….’

어제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스스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평소에도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저주나 니아의 희생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하고 세상 잘나기만 한 그가 얄밉기도 했고. 그런데 어제는 그 모든 걸 합친 것보다도 그가 미웠고, 그 때문에 비참했다. 아카데미에 억지로 가게 한 그가 싫었다.

하지만 세상 어느 하녀가 자신의 주인에게 옷을 집어 던지며 소리를 친단 말인가.

‘세상에. 심지어 팔도 때렸어…….’

내밀던 필릭스의 손을 냉정하게 내쳤던 것이 생각나자 니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망했다.’

두려움이라는 현실적 감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따지고 보면 어제 도련님이 잘못한 건 없는데. 그 몰골로 화를 내는 날 보고 얼마나 황당했을까.’

감히 필릭스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니아 프레슬리는 더러워진 아카데미복을 입고 조심조심 지하실을 기어 나왔다. 다행히 이른 새벽,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둠마저 잠이 든 새벽, 니아는 아카데미를 향해 또다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어제 같은 일들이 또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우선은 필릭스 쿠아란, 그를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어제 마차를 탔던 일들이 다 꿈같이 느껴졌다. 니아는 걸음걸음마다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앞으로 도련님 얼굴은 어떻게 보고, 아카데미는 또 어떻게 다니지.’

그놈의 계약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지금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앞으로 감당해야 할 현실들이 막막하게만 여겨졌다.

니아는 구불구불한 길들을 지나 시장 거리에 들어섰다. 장사 준비를 하는 몇몇 상인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의 기억이 생생한 니아는 두려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의 코끝으로 향긋한 냄새가 흘러들어 왔다.

‘당밀 롤빵 냄새!’

니아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빵 가게를 바라보았다. 신선한 빵 냄새에 배 속에서 꼬르륵하고 크게 진동이 울렸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가 고프다 못해 쓰렸다.

“맛있겠다…….”

꿀꺽 침을 삼킨 니아는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간절한 눈빛으로 갓 나온 빵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머니 속에는 땡전 한 푼 없었다.

‘당밀 롤빵아, 나중에 올게…….’

애타는 눈빛을 뒤로한 채 니아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고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갓 짜낸 우유……!’

‘신선한 소시지……!’

‘익힌 사과……!’

새벽의 시장은 괴로울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니아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애절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차라리 고개를 숙이고 뛰어가는 편이 낫겠어.’

그게 정신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가씨!”

누군가 니아의 어깨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니 빵 가게 주인이 있었다.

“네?”

아주 잠깐, 무심코 몸이 기울기는 했지만 결코 빵에 손을 대지는 않았는데. 양심을 파는 그런 일은 기필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아는 왠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쳐다보시길래.”

“예?!”

니아는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빵을 보았다.

“당밀 롤…….”

그가 친절하게 빵을 설명하려는데 니아가 그것을 막았다.

“당밀 롤빵!!!”

눈을 크게 뜨고 빵을 바라보는 니아를 향해 빵 가게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셔도 됩니다. 아니, 꼭 드시면 좋겠어요.”

그는 마치 니아가 엄청난 미식가라도 되는 양 계속 자신의 빵을 먹어 달라 고집을 부렸다.

“저는 돈이 없는데…….”

“괜찮습니다.”

니아의 거절에도 빵 가게 주인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어, 그럼 제가 어떻게…….”

“맛있게만 드세요. 그럼 이만!”

그는 니아가 뭐라도 줄 것처럼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당황하며 돌아섰다. 니아는 품에 빵을 가득 안은 채, 멀어져 가는 그를 가만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먹을 걸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긴 한데…….’

니아는 영문을 모르겠는 얼굴을 지었다가, 결국 빵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한입 앙 베어 물자, 순간 여기가 천국인가 했다.

니아는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빵을 계속 입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익힌 사과 좀 드셔 보세요.”

“우유랑 소시지 드셔 보지 않겠어요?”

니아가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사람들이 줄줄이 대령했던 것이다. 그들은 니아를 따라잡기 위해 달음박질이라도 한 건지 전부 헐떡이고 있었다.

그들이 준 음식들을 한가득 품에 안고 니아는 중얼거렸다.

“좋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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