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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계약 (3/75)

3. 계약

“잡을게요. 그 기회.”

‘됐어……!’

니아의 말에 필릭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순간 니아에게 입을 맞출 뻔했다. 이성의 마지막 끈이 겨우 그를 말렸지만. 하지만 눈빛은 감출 수가 없었다.

아, 사랑스러운 니아 프레슬리.

“조건이 있어요.”

필릭스는 누구라도 녹을 만큼 달콤한 눈웃음을 보내며 말했다.

“뭐든, 뭐든 말해, 니아. 다 들어줄게.”

“딱 일 년. 딱 일 년 동안 그 아카데미에 다니겠어요. 대신!”

“그래. 일 년이어도 좋아. 충분해.”

“대신, 그다음에 저한테 기사 남편 소개해 주세요. 공작가를 떠나서 함께 살 수 있는.”

“……뭐라고?”

“기사 남편. 기사 남편.”

앵무새처럼 중얼거리는 니아를 보며 필릭스가 정색을 했다. 지금 얘가 뭐라고 하는 거지? 기껏 그 결혼할 놈을 멀리 보내 놨더니…….

“제 꿈은 기사 남편을 만나 가족을 이루는 거였어요. 제가 나중에 또 어떤 꿈을 갖든 간에 이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니아는 어쩐지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꿈을 더 넓고 크게 가지라니까. 기사 나부랭이가 뭐가 좋다고.”

“전 딱 기사 남편이 좋은걸요.”

순간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지만, 어찌 되었건 니아가 공작가에 머무르며 아카데미에 다닌다고 했으니…….

필릭스는 열을 식힌 후 그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금은 퉁명스러웠던 분위기가 다시 온화하게 바뀌었다.

“자, 이제 계약서를 씁시다.”

이어진 니아의 말에 또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져 버렸지만.

“뭐?”

“계약서요. 방금 말한 내용, 다 문서로 적어 둘 거예요.”

“니아, 설마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도대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야?”

다시 능글맞아지는 음성에 니아는 코웃음을 쳤다.

“제가 방금 공작님에게 크게 뺨을 한 대 맞아서요. 더 이상 구두 계약은 안 합니다. 귀족 나리들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니아, 난 아버지와 달라. 너와 한 약속은 추호도 어길 마음이 없어.”

“그럼 계약서에 그 말도 적으면 되겠군요.”

니아의 단호한 말투에, 필릭스는 부들거리며 종이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조금 꾸물대자 니아가 빨리하라고 뒤에서 외치는 바람에 종이를 뭉텅이로 꺼내 버렸다.

필릭스는 슬쩍 니아의 눈치를 살피고 섬세하게 글씨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 프레슬리가 보 아카데미를 일 년간 다녀 수료증을 취득하면, 그녀가 기사 남편을 얻어 공작가를 나갈 수 있도록 한다.>

“잠시만요. 기사 남편이 아니라 작은 마을 기사 남편으로 바꿔 주세요.”

단호한 목소리에 필릭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

“작은 마을 기사 남편? 꼭 그렇게 적어야 하나?”

“…….”

니아가 정색을 하며 바라보자 필릭스가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뭐……. 황궁 기사나 기사 단장, 이런 건 안 될까? 그게 더 좋잖아…….”

필릭스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은근하게 물었지만 니아는 거침없었다.

“작은, 마을, 기사, 남편. 양보는 없어요.”

필릭스는 손을 부들대며 니아가 말한 대로 적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이나 지키는 기사 따위, 그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필릭스는 진심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썼어, 니아. 만족해?”

은근히 불만 섞인 목소리였지만 니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릭스가 두 장의 종이에 써 내려간 유려한 서체를 바라보았다. 괜스레 재수가 없었지만 주눅 들 필요는 없었다. 니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요. 이제 사인하면 되죠?”

니아의 물음에 필릭스가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난하는 거냐는 얼굴.

“나도 쓰고 싶은 내용이 있거든?”

“아……. 네, 뭐. 적으세요.”

떨떠름했지만 납득하며 니아는 다시 펜을 꺼내 들었다.

<만약 니아 프레슬리가 수료증을 취득하지 못하면, 니아 프레슬리는 공작가를 나갈 수 없다.>

“그, 수료증 취득은 일 년만 다니면 나오는 거죠?”

살짝 꺼림칙함을 느낀 니아가 필릭스에게 물었다.

“일 년간 다니면 그냥 나오는 거야.”

필릭스는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곧 좋은 아이디어를 들었다는 듯 사악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수료증 규정을 조금 엄격하게 바꿔 볼까…….’

반면, 반드시 아카데미를 일 년간 무사히 다녀 수료증을 취득하리라 마음먹는 니아였다. 그게 그녀의 생각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것은 생각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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