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한겨울의 첫사랑 (2/75)

2. 한겨울의 첫사랑

차디찬 겨울.

온 세상은 얼어붙었으며 정원에서는 어떠한 생명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 필릭스의 눈에 걸린 그 누군가는 홀로 봄빛을 품은 듯 반짝였다.

‘그 애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고, 멀리 있었지만 확실했다. 요 며칠간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느라 지쳤던 필릭스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픔 따위는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붙잡지 않으면 연기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몇 달간 보이지 않았듯이, 이번에 잡지 못하면 영영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는 추위도 잊은 채 그 애가 있는 정원으로 달려갔다.

‘만나야 해. 찾아야만 해. 붙잡아서 말해야 해. 다시 한번 웃어 달라고…….’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무리 며칠 동안 아팠다고 해도, 아무리 니아가 그리웠다고 해도, 보고 싶었다고 해도…….

하지만 그렇게 달려간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나무 사이사이, 하다못해 쌓인 낙엽까지도 다 들춰 보았다. 하인들이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찾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몸에 두꺼운 담요가 둘리고, 하인의 품에 안겨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눈은 그 애가 있었던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 그 애를 아예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움 속에 야위어 식음을 전폐할 때쯤. 모든 것이 귀신이었나 고민하려는 찰나, 소녀를 만났다.

그토록 그리던 만남이었는데.

문제가 있다면 소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티가 날 정도로 그를 피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니아 딴에는 그가 자신을 개미 똥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확신하에 그랬던 것이지만 필릭스는 반가운 와중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를 피하고 있어……?’

그 애에게 다가서려는 찰나, 집사 길리가 그를 막아섰다.

“도련님, 잠시만.”

“비켜, 길리.”

공작가 안에서 필릭스의 말은 곧 법이건만 집사는 미친 것인지 계속 앞을 막아섰다. 필릭스가 거칠게 그의 손을 쳐 내자, 이젠 아예 필릭스의 몸을 잡아 고정시키는 길리 포바즈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비키지 못해? 야, 너. 움직이지 마. 움직이는 거 다 보여.”

길리가 자신의 앞을 막은 사이, 그 애가 고개를 숙인 채 꼬물꼬물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필릭스는 급한 마음이 들어 소리쳤지만, 아이는 움찔하더니 아예 몸을 돌리고 뛰기 시작했다.

“야, 야!”

결국 아이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고, 분노한 필릭스와 길리만 남았다.

길리가 난처한 얼굴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 애는 병이 있어서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도련님.”

“뭐?”

필릭스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길리에게 되물었다.

“병이 있다니? 아프다고? 얼마나 심한 병인데?”

“들어 보니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극도로 싫어한다는군요. 어차피 병이 있는 이상, 저 아이에게 다가가는 사람도 없겠지만.”

“얼마나 아픈데? 많이 아프대?”

필릭스는 처음으로 마음이 찢어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실감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엄청 마른 듯 보였는데 아프다니.

누군가 다가오는 것조차 싫어한다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필릭스도 아플 때면 누군가 곁에 오는 것만으로도 온 우주의 짜증이 몰려왔다.

필릭스는 또 처음으로, ‘차라리 내가 아프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기함할 일이었다.

“치료 중이랍니다. 병이 있다는 것 빼고는, 그냥 뭐 평범한 하녀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아이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고, 그녀를 신경 쓰지 않는 것 또한 이미 불가능했다.

필릭스의 머릿속은 온통 그 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다.

“누가 가까이 오는 걸 싫어한다고?”

“네. 매우 싫어한답니다. 말을 거는 것조차 말이죠. 어쩌면 자신의 병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기 싫은 건지도 모르죠.”

“……심장이 아파.”

“네?”

“심장이 너무 아파. 왜 이러지?”

심장을 부여잡는 필릭스를 보고 길리가 재빨리 대답했다.

“의원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좀 달라. 그냥…….”

“예?”

“이름을 알려 줘.”

“무슨…….”

“그 애 이름을 알려 달라고.”

“…….”

“빨리.”

“니아…… 프레슬리입니다.”

니아 프레슬리.

필릭스는 입안에서 니아의 이름을 굴려 보았다. 니아. 니아. 니아 프레슬리.

심장은 여전히 아플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묘한 떨림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예쁜 이름이었다.

그 후 십 년간 니아를 만났던 매 순간순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랐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다가 우연히 몇 번. 필릭스에게는 그 우연이 운명처럼 느껴지게 몇 번.

필릭스에게는 대단했지만 니아는 전혀 몰랐던, 그녀는 눈치챌 수 없던 순간들.

그와는 달리 완벽하게 필릭스를 피해 십 년을 보냈다고 생각한 니아 프레슬리였다.

그 니아 프레슬리가 눈앞에서, 그것도 밝게 미소 짓는 모습을 본 필릭스가 말을 건 것은 불가항력일지도 모른다. 그는 너무 오래 참았다.

하지만 그런 필릭스에게 니아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재앙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것도, 그녀를, 십 년간, 짝사랑한, 남자, 앞에서.

‘절대 그렇게는 안 돼. 날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넌 내게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니까.’

사흘 뒤, 니아 프레슬리는 힘겹게 짐을 들고 지하실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니아, 정말 멀리 떠나는 거야? 생각해 보면 공작가만큼 일하기 좋은 곳도 없어. 넌 일도 잘 안 하……. 아니, 어쨌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안 될까?”

공작가의 하녀 에보니 레인즈가 니아를 졸졸 따라오며 말했다.

에보니는 오 년 전 공작가에 들어온 하녀였다. 그녀는 공작가에서 눈에 띄지도 않고 (니아는 필릭스를 피해 다닌 것뿐이지만)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 아무도 다가가지 않았던 니아에게 유일하게 말을 건넨 사람이었다.

“절대로 싫어. 이미 오래전에 결정한 일이고, 이젠 한순간도 이곳에 있기 싫어.”

단호한 니아의 말에 에보니는 울상을 지었다. 니아는 이유는 얘기해 주지 않은 채 언제나 공작가가 끔찍한 곳이라는 듯 말했다.

니아가 결심을 한 지는 꽤 오래전인 것 같았고, 그래서 변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유일한 또래 하녀가 떠난다는 생각에 슬퍼진 에보니는 정문 앞까지 따라가며 어떻게든 니아를 설득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저, 그래도 니아……! 벼, 병도 다 나았다면서!”

니아를 급히 부르며 따라나서려는데 바로 앞에 서 있는 니아 때문에 에보니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지하 계단 문 앞에서 공작가의 그 도도한 도련님이 벽에 몸을 기댄 채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아. 얘기 좀 할까?”

필릭스는 팔다리가 저릿할 정도로 달콤한 음성으로 니아에게 말했다. 눈빛마저 꿀을 바른 듯 달콤했다.

에보니는 갑작스러운 도련님에 등장에 놀란 후,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잽싸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필릭스가 부른 당사자인 니아의 얼굴을 봤다.

저렇게 달콤하게 도련님이 널 부르고 있어……!

기대감에 부풀어 바라본 니아의 얼굴은…… 마치 똥을 씹은 것만 같았다. 이 상황을 엄청나게 불만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평소 눈치가 없기로 유명한 에보니도 알 수 있었다.

“거기, 너.”

갑자기 달라진 음성에 에보니가 화들짝 놀라 필릭스를 바라보았다. 방금 니아를 부를 때만 해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

“예? 저요?”

“그래, 너. 이름이…….”

“저, 저는……!”

에보니는 아주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은 에보니 레인즈라고 외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 년간 일했지만 이름 하나 모르는 이 도련님에게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아무튼 너. 니아의 짐을 제자리로 돌려놔.”

하지만 차가운 도련님은 그 말만 남긴 채 니아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에보니는 니아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가는 도련님의 등을 원망스레 쳐다보고는 니아의 짐을 옮겼다.

니아의 짐에 흠집이라도 나면 안 되니, 아주 조심스럽게!

니아는 자꾸만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한 느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 자신을 보는 이 도련님의 따사로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오히려 경계심을 일깨웠다.

니아는 불길한 예감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지만, 맹수의 덫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순진한 토끼가 되어 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니아, 참 안타깝게 됐어.”

필릭스는 다정하게 말을 시작했다.

니아는 제발 좀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마디만 더 들으면 왠지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제발, 부디, 잘 가라는, 그동안 수고했다는 형식적인 인사나 하려고 부른 것이길……!

‘닥치라고 해 볼까? 난 이제 공작가 하인도 아닌데. 주인도 아닌 사람한테, 닥치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니아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이였다.

“네 결혼은 취소됐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네 마음 다 안다는 듯 필릭스는 니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순식간에 본론을 꺼내 버렸다.

“예?”

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다시 말해 줄까? 너와 그 기사 나부랭이와의 결혼은 취소됐어.”

“…….”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은, 그래서 너는 새롭게 정착할 집도 없다는 거야.”

“…….”

경악한 니아가 진심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한 군데 네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

“에슬란 제국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저택이야.”

“…….”

“바로 이곳, 공작가지.”

필릭스는 싱긋 웃으며, 아연한 니아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끝냈다.

니아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불이 뜨거워지면 붉은색을 넘어 흰색으로 간다더니, 지금 자신이 꼭 그 꼴이었다. 머릿속도, 얼굴도 창백해져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뿌듯하다는 듯 니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살려 줬나 봐. 내가 누구 때문에 그 세월을…….’

니아는 지금까지 살려 놓은 게 아깝긴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 년간, 매해 꼬박꼬박 그의 저주를 풀어 온 것이 살짝 후회가 되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생명의 은인에게 이런 태도는 좀 곤란하지 않은가?

“그런 눈빛도 할 수 있구나.”

필릭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조금 담백해진 어조에 니아는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예?”

“넌 나를 항상 피해 다녔잖아. 네 눈을 제대로 본 게 얼마 만인지. 네가 아프다니 이해하려고 했지만, 네가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상처를…….”

필릭스는 말하다 말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니아가 노려보는 게 신기해 의미 없는 말을 지껄였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 필릭스 쿠아란.’

자신이 십 년간 그녀를 몰래 짝사랑해 온 것을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할 것이 분명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야지.

필릭스는 혹여 니아가 무슨 질문이라도 해 올까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니아는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맙소사. 피해 다닌 걸 알고 있었다니. 항상 눈치채지 못하게 숨어 다녔는데?’

자신이 그를 피해 다닌 것을 필릭스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정말 열심히 피해 다녔는데…….’

자신을 알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해 본 적도 없었고,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니아는 사소한 일은 잊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떠날 텐데, 도련님이 자신을 알건 모르건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말했듯이, 어차피 공작과의 약속은 끝났으니까.

“공작님께서는 분명 저한테 약속하셨어요. 그리고 분명히, 분명히 약속을 지키셔야만 해요. 아무리 도련님이라 하더라도 저와 공작님의 약속을 깰 수는 없어요!”

니아의 말에 필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니아는 ‘무슨 소문이요!’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어젯밤 헬릭시로 요양을 떠나셨어. 적어도 삼 개월간은 머무를 예정이시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지만, 니아는 창문 밖에 번개가 내리치는 줄 알았다.

반면, 며칠 전 필릭스는 아버지의 요양 소식에 세상이 자신의 편임을 확신했다. 이렇게 타이밍이 좋을 수가. 그는 만족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랬다.

“말도 안 돼……. 내 꿈이 이렇게 한순간에…….”

여태껏 산전수전 다 겪어 온 니아였지만 이 경우는 도가 지나쳤다. 아무리 신이 자신을 미워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굴 건 없지 않은가?

“내 남편…… 내 남편은 어떻게 됐어요? 오늘 만나기로 했단 말이에요…….”

혼이 다 빨려 나간 채로 겨우 질문하는 니아에게 필릭스는 갑자기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네 남편이라는 거야. 넌 오늘 결혼 안 해. 그리고 당분간은…… 결혼할 일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그 마을 기사 잡놈을 네 남편이라고 부르지 마.”

니아는 원망을 정말 한 움큼 담아서 필릭스를 쳐다봤다.

도대체 이 도련님은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이러는 걸까? 무슨 억하심정이길래?

공작이 없다고?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기 계약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 어떤 사기 계약보다 끔찍했다. 십 년간 순순히 몸 바치는 사기를 당하는 사람은 니아밖에 없을 것이다!

“공작님을…… 만나게 해 주시죠. 직접 얘기해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제가 정말, 매우 곤란하거든요.”

몸까지 부들대는 니아를 필릭스는 이제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말했지만, 아버지는 요양을 가셔서 적어도 삼 개월은…….”

뻔뻔하게 말하던 필릭스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순간 표정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숨을 크게 내쉬며 그를 바라보던 니아가 결국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눈에 너무 힘을 주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런 상황에 놓인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른다.

“니아……? 지금 뭐…….”

필릭스가 충격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화가 난 것은 저인데 왜 그가 더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을 하는지, 니아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저…… 니아,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심했지.”

필릭스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니아를 십 년 동안 좋아해 왔지만, 니아의 눈물은 단연코 처음 봤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잘못했다’라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니아, 제발 울지 마.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다시는 이런 식으로 널 놀라게 하지 않을게. 제발…….”

필릭스는 급기야 안절부절못했다. 니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급하게 거둬들이고, 발을 앞뒤로 왔다 갔다, 아주 미친놈 같았다.

니아도 이 상황에 소리 한번 못 지르고 울고 있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눈물이 아니라 독침을 눈물에서 뽑아내 도련님 이마 한가운데에 던지고 싶었다.

“내가 정말 잘못했어. 네가 이렇게 힘들어할 줄은 몰랐어……. 울지 마, 울지 마, 제발.”

“위로…….”

니아가 중얼거렸다.

“응? 응. 내가 위로해 줄게. 그깟 기사 놈보다 훨씬 더 잘해 줄 거야. 돈이든 뭐든, 네가 원하는 것도 다…….”

“위로하지 말라고요!”

니아는 기어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그녀의 고함에 필릭스는 얼음이 되고야 말았다.

결국 쭈그려 앉아 한참을 울고 난 니아는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빨개진 눈으로 일어섰다.

“……니아?”

작게 웅크린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만을 보고 있던 필릭스는 그녀가 벌떡 일어서자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리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눈치를 봤다.

“저기 니아…….”

무슨 말이라도 했다가 그녀를 다시 울릴까 봐 필릭스는 조심스레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니아가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더 심장에 무리가 갔다. 그녀의 자그마한 코가 빨개지는 것을 보자, 스스로에 대한 죄악감이 들었다.

조금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의 입에 칼을 무는 일이 있더라도 그녀가 울 정도로 몰아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심했군.’

니아를 붙잡는 것에만 너무 정신이 팔려 있었다.

“더 이상은 여기서 못 살아요. 갈 거예요. 막지 말아 주세요.”

마음을 단단히 굳힌 듯한 그녀의 모습에 필릭스는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것은 결코 자신이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필릭스는 니아에게 결혼이 취소됐음을 알리고, 실망하는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고 했다.

그리고 기뻐하는 모습. 필릭스에게 보내는 고마움이 가득한 눈동자. 환한 미소. 그것을 원했을 뿐인데.

니아의 눈물을 보고 나니 물먹은 종이처럼 흐물흐물해져 필릭스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니아는 더 이상 도련님의 꼴도 보기 싫어 뒤를 돌아 떠나려고 했다. 그마저도 바로 붙잡히고 말았지만.

니아는 자신의 팔을 잡은 채 애절한 눈빛을 하고 있는 그를 죽일 듯 쳐다봤다. 필릭스는 눈알을 굴리더니, 그녀의 눈빛에 굴복이라도 한 듯 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왜요,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쏘아붙이는 니아를 향해 필릭스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아카데미!”

“예?”

“아카데미에 보내 줄게. 일 년. 그보다 더 길게 다녀도 좋아.”

필릭스는 이런 식으로 멋없이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니아는 울었고, 화가 난 듯 보였고……. 그 원인은 자신이 분명했기에 마음이 성급해졌다.

필릭스는 니아에게, 그 기사와 결혼하는 대신 제국의 귀족들만 다니는 보 아카데미에 자신과 함께 다니자고 할 생각이었다. 필릭스는 이미 일 년째 그곳에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공작가 피후견인 명목으로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거든. 네가 공작가의 후원을 받게 되는 거지.”

“그게 무슨……. 장난도 적당히 하시죠, 필릭스 도련님.”

니아는 질린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빨갛게 충혈된 그녀의 눈을 보는 필릭스는 마음이 아팠지만,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

“너…… 아카데미에 들어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아무리 뛰어난 평민이라 할지라도 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야. 황제의 명령 정도는 있어야 할 거다.”

“…….”

“네가 평민이라 해도,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순간 네 미래는 활짝 열리는 거라고 할 수 있지. 기사 나부랭이의 월급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돈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필릭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니아가 더 신경 쓰여 눈치를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넌 책 읽는 걸 꽤나 좋아하잖아? 마주쳤을 때마다 손에 책을 들고 있던데. 혹시 내가 잘못 봤나?”

“…….”

니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네가 배움에 흥미가 있다고 느꼈어. 아카데미에 가면 상상 이상의 지식들이 네게 쏟아질 거다. 물론, 아까 말했듯이 일 년을 다닌 걸로도 먹고 살 수 있을 거고. 네가 원한다면 한 이 년 정도 다녀도 괜찮지. 참고로 나는 이 년 정도 느긋하게 아카데미를 다닐 생각인데…….”

입을 앙다문 니아의 표정을 살피며 필릭스는 말을 마쳤다.

그녀를 바라보는 건 늘 즐거운 일이지만, 지금은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지 몰랐다. 필릭스는 니아의 작은 입술을 시한폭탄이나 되는 양 바라보았다.

“저기요, 도련님.”

“그래, 니아. 잘 생각해 봐. 다신 없을 기회가 될 거라니까?”

필릭스는 기대를 한 움큼 얹은 표정으로 니아에게 애걸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생각보다 더 냉정한 것이었다.

“아니요, 됐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뭐라고?”

당황한 필릭스가 중얼댔다.

“분수요, 분수. 저는 공작가의 하녀고…… 공작가에 있기 전에는 하녀보다도 훨씬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 스스로 충분히, 아주 충분히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하거든요.”

“…….”

“그래서 저는 올라가지 못할 곳은 쳐다도 보지 않아요. 가지지 못할 것을 갖고자 욕심을 낸 적도 없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욕심은 마을 기사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소박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마저도 누구 때문에 하지 못하게 됐지만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니아의 목소리에 필릭스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니아…….”

“아카데미라고 하셨습니까? 도련님이 다니는 그 아카데미요? 귀족가 자제분들만 다닌다는 그 아카데미 말이죠. 제가 그곳에 다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가서 귀족분들 장난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죠.”

“…….”

“공작가에서 사는 것도 지긋지긋한 마당에, 귀족 자제분들이 모두 모인 곳에 가서 마음 편하게 공부나 하라……. 됐습니다. 거절하죠.”

“…….”

“거절합니다.”

단호한 거절에 필릭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시는…… 볼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니아는 차갑게 돌아섰다.

아까까지는 분명 저 남자가 미칠 듯이 싫었는데, 아카데미 얘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둘은 분명 다른 감정이었다.

자신의 오랜 소원을 짓밟은 것은, 뭐랄까,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 얘기를 하자 니아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

‘비참해.’

그래, 그 정체는 비참함이었다.

니아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괴물 같은 몸과 능력을 원한 적은 없었다.

‘필릭스는 저주가 끝나기라도 하지. 내 몸은…….’

니아는 이 저주스러운 능력 때문에 죽을 수도 없었다. 죽을 수 있었다면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몸이 끊임없이 재생된다는 것은 다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저주였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능력 따위 없어도 니아의 삶은 충분히 비참했다.

니아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십 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네가 그 아이였어! 맙소사, 이 모르트 독테가 발견하다니! 세상에, 세상에……. 그래,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야…….’

어두운 골목에서 번뜩이는 눈으로 니아에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 바로 모르트 독테 의원이었다.

니아에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처럼 보이던 그 손길.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환희에 차 중얼거리던 목소리와 컴컴한 골목에서도 선명하던 욕망에 찬 얼굴이었다.

‘그때 독테 의원이 무슨 생각으로 날 공작가에 데리고 가는지 알았더라면, 난 그를 따라가지 않았을까?’

하지만 결국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마련이니까.

니아는 그 순간 그의 탐욕스러운 표정을 보지 않았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둡고 텁텁한 분위기도.

어쩌면 자신을 발견해 준 그를 제멋대로, 매우 따듯하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냉큼 그를 따라나섰던 것이겠지.

그를 따라 걸었다. 어린아이에게 보폭을 맞춰 주지 않는 그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니아를 골목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니아 프레슬리는 그때, 분수도 모르고 기대란 것을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니아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길고 길었던 그녀의 십 년을 떠올렸다. 그 기억 속에서 유일하게 좋은 일은, 쿠렐 쿠아란 공작이 그녀에게 대가를 약속했다는 점이었다.

니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그 단호한 목소리.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거라. 들어주겠다.’

차가운 음성에, 니아는 힘겹게 대답했다.

‘십 년 뒤에, 다 끝나고 작은 마을에서 기사와 결혼하게 도와주세요…….’

‘소박한 걸 바라고 있다고 생각했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고, 내 가족이 생기고…… 예전처럼.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랐어. 그뿐이었어.’

그런데 자신과 약속한 공작은 사라지고, 이 도련님은 제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팔자 좋게 아카데미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십 년간 공작가에서만 살았는데 혼자 나가서 살다간…….’

단 한 번도 혼자 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언제나 함께할 누군가를 꿈꿨었다.

니아는 최악을 상상해 보았다.

‘이 능력을 들켰다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이용하려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탐낼까? 괴물이라며 그녀에게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얼마나 더 죽고 싶어질까.’

혼자서는 너무 두려웠다.

그녀가 혼자 살았던 기억은 모두 처절하게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아무리 많은 돈이 니아에게 있다 해도, 든든한 울타리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녀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만 했다.

니아는 자신 앞의 떨리는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혼자 밖에서 살면 어떨까요.”

자신도 모르게 툭, 말이 튀어나왔다.

필릭스는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녀가 하는 말에 당황스러운 듯했지만 최대한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답했다.

그는 삼 년 전에 괴담처럼 돌았던 이야기를 지금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인 양 겁을 주기 시작했다.

“요즘 길거리에서는 일가친척 없는 여자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버린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더군.”

필릭스는 말을 하다 추진력을 받았는지 술술 말을 이어 갔다.

“너도 들은 적 있겠지? 문둥병 환자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간을 빼 먹는다는 소문을. 어린아이뿐만이 아니야. 젊은 몸을 노리는 자들도 많다.”

필릭스는 그 말을 하는 동시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정말 위험해.’

니아에게 첫눈에 반해 고백하는 머저리 같은 놈들이 생길 수도 있고……. 아무튼 니아 혼자 나가 살았다가는 심각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했다.

필릭스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걱정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니아…….”

그는 혼자 사는 여자들에게 황궁에서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린다고 거짓말을 쳐 볼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니아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 그만하세요.”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여유롭게 말하던 그가 갑자기 그녀 바로 앞까지 얼굴을 내밀었다. 질린 니아의 얼굴이 놀라 더 하얘졌다.

“아파?”

순식간에, 믿을 수 없게도, 그는 걱정스러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그 얘기는 더 듣고 싶지가 않아서……. 혼자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았으니까요…….”

니아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일단 혼자 사는 건 보류해야겠어. 당분간은.’

당장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쏙 사라졌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당분간은 아니었다. 니아는 창백한 얼굴로 겨우 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필릭스는 입을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에 필릭스는 언제라도 그녀를 붙잡을 수 있게 살짝 허리를 낮추었다.

“알겠어. 겁을 주려던 건 아니었다. 미안해.”

‘이 사람이 사과를 하다니.’

하녀에게 사과하는 귀족 도련님이라니, 흔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것도 필릭스 쿠아란처럼 성격 나쁜 사람이.

하지만 왠지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사과에 심장이 더 쿵쾅대는 것 같았다. 니아는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아주 만약에 공작가에 더 머문다고 해도, 아카데미까지 다닐 필요는…….”

필릭스 쿠아란이 갑자기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당황한 니아는 눈을 끔뻑거렸다. 갑자기 이게 뭐지?

“한 번만 상상해 봐, 니아.”

필릭스는 ‘제발’이라고 말하려다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제발’이라는 말을 넣으면 너무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미 충분히 매달리고 있지만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 ‘제발’이라는 말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면, 적어도 너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누구도 아카데미 출신을 무시할 수는 없거든.”

필릭스는 말을 이었다.

“네게 정말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넌 분수에 맞는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하지만,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내가 생각하던 새 삶은 아카데미에 가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그냥 가족을, 단지 가족을…….’

“아카데미에 다니게 된다면, 너는 앞으로 수많은 선택할 수 있다.”

‘선택?’

필릭스의 마지막 말에 단단하던 니아의 맘이 조금씩 흔들렸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아버지에게서도 들었던 단어였다. 선택.

과연 공작이 말한 선택이 정말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만.

니아는 양손으로 필릭스 쿠아란의 넓은 손바닥을 내렸다. 그러자 바로 그의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확신에 찬 짙은 눈동자에 빨려들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참 그 눈을 바라보다가 니아는 입을 열었다.

“선택이요?”

“그래, 선택. 넌 네 삶을 정할 수가 있어. 넌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마법사가 될 수도 있다. 하녀가 아니라, 아카데미 졸업장을 가진 니아 프레슬리라면 말이지.”

그리고 나랑 결혼하게 될 수도 있어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제외하였다.

그의 청산유수 같은 말은 계속되었다.

“넌 아예 다른 사람이 되는 거다. 아카데미 옷을 입고 아카데미에 가겠지. 귀족들이 즐기는 놀이를 하고. 지겨운 공작가 생활과는 다를 거야. 넌 십 년 동안 아팠으니까 해 보고 싶은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거 아니야.”

필릭스의 애절하고도 부드러운 말에, 니아는 천천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내가, 니아 프레슬리가……?’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니아의 목표는 언제나 가족을 갖는 것이었다. 다른 건 원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니아의 가장 큰 욕심…….

‘흔들리지 말자. 나 따위가 감히…….’

하지만 필릭스 쿠아란의 다음 말이 니아의 생각을 막았다.

“니아 프레슬리, 왜 더 큰 꿈을 꾸지 않지?”

그리고 올려다본 필릭스 쿠아란은 완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간 니아는 사람에게서 빛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당당한 사람,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홀린 듯이 듣게 되고,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인 것처럼 들리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말, 더 큰 꿈을 꾸게 된다는 말이 마음 깊은 곳까지 와닿았다.

‘……참 달콤한 말이야.’

하지만 과연 니아 프레슬리가 그가 말하는 것과 같은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일까? 니아 프레슬리가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일까? 이렇게나 갑작스럽게…….

‘하지만 십 년의 바람을, 이렇게 쉽게 바꿀 수는…….’

그저 설탕 같은 말장난일지도 모르건만.

평민인 니아이기에, 남들과는 다른 니아이기에.

니아 프레슬리에게는 기회가 독이 될지도 모르는데. 아주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지금까지와는 다른 니아 프레슬리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 어쩌면 나라도, 이런 나라도 달라질 수 있는 거잖아.

이 순간적인 충동이 어찌나 매혹적인지, 니아는 눈동자를 한곳에 두지 못했다.

“저는, 저는…….”

빠르게 진동하는 그녀의 눈동자에 승리를 예감한 필릭스 쿠아란은 그녀의 마음에 쐐기를 박았다.

“기회는 두 번 오는 게 아니야.”

그리고 그는 여유롭게 니아 프레슬리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