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결혼을 하려 했는데 (1/75)

1권 차례

1. 결혼을 하려했는데

2. 한겨울의 첫사랑

3. 계약

4. 십년 전, 겨울

5. 아카데미

6. 꽃 한송이

7. 저주받은 몸

8. 한 걸음씩

9. 다른 마음

10. 다가온 검술 대회

11. 꿈

12. 현실

13. 황궁 검술 대회

14. 레오 아리데오

15. 고아가 된 소년과 소녀

1. 결혼을 하려 했는데

니아 프레슬리는 미소 지었다. 그녀는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간 지독하게 앓았지만 이제 몸은 씻은 듯이 나은 상태였다. 정신 또한 또렷했다.

‘이번에도 잘 견뎠어, 니아 프레슬리.’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늘 조용히 있던 니아가 흥얼대며 청소를 하자 주변의 공작가 하인들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심하게 앓았다더니, 결국 미친 거 아니야?”

“글쎄, 저 애가 저렇게 청소를 하는 건 처음 보는군.”

“됐어, 신경 끄자고. 병이라도 옮으면 어쩌려고.”

니아는 하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 시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곧 이곳을 떠난다.

십 년간의 그 끔찍한 약속을 완벽하게 지켜 냈다. 이제 꿈꾸던 대로 작은 마을에서 기사와 결혼할 일만 남았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오순도순 살기만 하면 된다. 다시는,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행복해. 정말로!’

니아 프레슬리는 열 살에 공작가에 들어와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하녀였다.

진한 갈색 머리에 깊은 녹색 눈동자. 평균을 웃도는 키에, 꽤 마른 몸을 가진 니아는 힘을 많이 써야 하는 하인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약한 몸에,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손에.

사실 그녀가 공작가 하녀로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니아는 특이했다. 오히려 공작가에서는, 니아 프레슬리는 큰 병을 앓고 있으니 곁에 가면 안 된다는 소문이 돈 지 오래였다.

제대로 일을 하지 않고, 병도 있다는데, 그렇다고 쫓겨나지는 않는 이상한 존재. 그것이 바로 니아 프레슬리였다.

꿈에 부푼 니아는 계속해서 미소를 흘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뒤에서 살벌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채.

“흠흐음.”

공작가의 외동아들 필릭스 쿠아란은 미소를 지으며 청소하고 있는 니아를 경악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니아 프레슬리가 응접실에 버젓이 나타나, 게다가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청소를 하고 있다니 충격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환하게, 아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왼쪽 볼에 작은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이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십 년 만이었다. 아니,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제대로 본 것 또한 십 년 전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필릭스는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얼추 청소가 끝났는지 니아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모은 쓰레기를 밖으로 가져가려는 것 같았다.

“니아 프레슬리.”

니아는 낮고 차가운 음성에 살짝 오싹한 기분이 들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오만하기로 소문난 공작가 도련님 필릭스 쿠아란이 서 있었다.

게다가 눈빛이 뭐랄까.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믿었던 애인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눈빛이었다. 네가 어떻게 거기 서 있느냐는 표정과 함께.

하지만 놀란 것으로 치자면 멀거니 서 있는 그보다 그녀가 더 할 것이다.

니아는 이 도련님이 자신의 이름을, 그것도 성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러웠다. 십 년간 그녀는 그를 피해 공작가에서 유령처럼 지냈다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마주쳤을 때는 머리를 최대한 조아리며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나를 알고 있었다니?’

당황도 잠시, 니아는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안도감에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공작과 계약이 끝나고 마주쳐서 천만다행이야. 저주가 끝나기 전에 만났으면 어쩔 뻔했어. 공작이 나를 가만둘 리 없지.’

그녀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네?”

돌아온 대답은 더욱 황당했다.

“왜 웃고 있는 거지?”

왜 웃고 있냐고? 실없이 웃지 말라는 경고인가? 공작가를 떠날 생각을 하니 기분이 너무 좋았던 것뿐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 도련님은 그녀가 웃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 소문대로 성격이 더러운 모양이지?

니아는 나빠지려는 기분을 애써 달래며 미소 지었다. 보조개가 살짝 파였다.

“하하, 기분이 좀 좋아서요. 무슨 문제라도……?”

필릭스의 눈동자에 또다시 충격이 어렸다.

“……따라와.”

갑자기 그가 니아의 팔을 잡더니, 위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니아는 팔목이 잡힌 채로 필릭스에게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고 애원해 보았지만 그는 ‘됐어. 평소에 청소라곤 하지도 않으면서.’라고 중얼거리며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이 도련님이 그렇게까지 하인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이 있었나?

내심 놀란 니아는 팔목이 저려 오자 신음을 내뱉었다.

“아…….”

아주 작게 낸 소리였는데도 용케 들었는지 필릭스는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니아는 놀라 잠시 숨을 멈췄다.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성미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니아는 잠시 속으로 감탄하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내가 아니라 어떤 여자라도 이 얼굴에는 덤덤하지 못할 거야. 어딜 보더라도 완벽하잖아.’

짐짓 속으로 변명을 하며 그녀는 굳은 표정을 풀고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아파 오는 팔목에 얼굴을 찡그렸다.

‘어……?’

그러자 필릭스 쿠아란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팔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귀족 도련님답지 않게 하녀인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깃털처럼 가벼운 손길로 그녀의 다른 쪽 팔목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필릭스가 니아를 끌고 도착한 곳은 그의 개인 서재였다. 문을 닫은 그는 한쪽 벽에 니아를 세워 둔 채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정신없이 다리를 움직이는 그를 보며 니아는 생각했다.

‘이 도련님이 왜 이러는 거지. 지금 모습만 보면 정서 불안 같은걸? 들은 얘기랑 다르게 왜 저러는 거야.’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차치하고, 서재를 왔다 갔다 하는 필릭스의 모습은 꽤나 불안정해 보였다.

니아는 삐딱하게 서서 그동안 들어 왔던 도련님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필릭스 쿠아란. 올해 스무 살이 된, 공작가의 외동아들. 어렸을 적에는 몸이 약해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가, 몇 년 전부터 검술 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검술의 천재라 불리며 모든 대회의 상을 휩쓸었다.

‘성격이 문제지.’

천재적 재능을 가진 공작가의 금지옥엽. 하지만 성격은 뭐랄까, 꽤 오만방자한 편이었다.

몸이 약해 공작가에만 갇혀 있던 어린 시절 때문일까, 공작이 너무 오냐 오냐 기른 탓일까. 그에게서 겸손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만, 그는 자신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재수 없게도.

‘세상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

이미 공작가 수저를 물고 태어난 데다 뛰어난 재능까지 갖춘 그가 사람들에게 더욱 경외받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다. 외모를 포함한 그의 신체적 조건이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

키는 멈출 줄 모르고 자라는 중이며, 어렸을 적 인형 같던 그의 외모는 나날이 선이 더 뚜렷해지며 빛을 발했다.

‘공작 아들로 태어나게 할 거면 저런 외모를 주지 말든가. 저런 외모를 갖게 할 거면 공작 아들로 태어나게 하지 말든가!’

니아는 떨떠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언젠가 들은 하녀들의 대화를 떠올렸다.

‘필릭스 도련님은 너무 완벽하셔서 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행복해져. 특히나 검술 연습을 하실 때 말이야!’

‘공작가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은 건 도련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거야.’

‘그 나른한 눈빛! 너무 차갑지만 않으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뭘 모르긴! 그게 더 치명적인 거야. 그게 더 매력적인 거라고!’

여기까지 듣고 니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떴다. 니아는 당시 몸서리를 치며 ‘저렇게 떠받들어 주니 성격이 그리 거만하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도련님을 보고 있노라니 니아는 소문의 구 할은 허풍이 아니었나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외모와는 별개로,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모습이 차갑기는커녕 조금 모자라 보이기까지 했다.

날카롭게 칼을 휘두른다던데. 지금으로서는 그가 진지하게 칼을 잡고 있는 모습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저거 진짜 천재 맞아?’

생각하는 순간, 필릭스가 걸음을 멈췄다. 니아는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움찔했다. 그녀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표정을 정돈하고 빠르게 다시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한참을 서성거리던 필릭스는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충동적인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니아를 바라봤다.

‘내가 왜 그랬지.’

그동안 말 한번 걸어 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서재까지 끌고 올라와 버리다니. 싫어하면 어떡하지.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침착해, 필릭스 쿠아란.’

필릭스는 속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니아 프레슬리.”

“네, 도련님.”

니아는 아까의 미소를 싹 지운 상태로 자신을 바라봤다. 더 긴장이 되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까 왜…… 그렇게 웃었지?”

그의 말에 니아는 누가 봐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아마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필릭스는 분명 대꾸도 하지 않고 벌레 보듯 하찮은 시선만 보냈을 것이다.

필릭스 자신도 이 질문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건 십 년 만이라고.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니아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는 듯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필릭스는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뭐,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해서. 병이 혹시 다 나았나? 이젠, 괜찮은 거야?”

이어진 그의 말에 니아는 저도 모르게 머저리를 쳐다보는 듯한 눈빛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의 날카로운 얼굴은 어디 가고 멍청한 표정의 남자 하나가 앞에 서 있으니.

말투는 또 어떤가. 그를 짝사랑하는 귀족 아가씨나 쓸 법한 말투 아닌가.

니아는 도대체 어떻게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도련님이 한 질문의 숨은 의도를 찾기란 이 넓은 공작가를 혼자 청소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니아는 솔직하게 질문의 저의가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감히 하인 된 입장에서 공작가 도련님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뭐…… 이 정도는 솔직하게 말해도 상관없겠지.’

니아는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저 도련님이 원하는 답을 찾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느니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제가 곧 결혼을 하거든요!”

장담하건대, 필릭스 쿠아란은 심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계속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던 그지만, 지금만큼은 누가 봐도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릭스는 그 날카로운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니아를 계속 쳐다봤다. 듣지 못할 말을 들었다는 듯이. 어쩐지 눈빛이 조금 애절한 것도 같아 니아는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왜 죄책감을…….’

이런 생각이 드는 니아였지만, 강하게 맞춰 오는 시선에 눈을 피해 버렸다.

“다시 말해 봐.”

필릭스가 한 발 다가왔다. 한 걸음이라지만 보폭이 넓었기에 니아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아졌다.

“네?”

니아가 뒤로 물러서며 답했다. 왜, 왜 가까이 오는 거지?

“다시 한번 말해 보라고.”

니아는 방의 공기가 싸늘해진 것을 느꼈다. 게다가 이 거대한 도련님은 지금 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결혼을 하게 되어서요. 곧 공작가에서 나가게…….”

“만나는 사람이 있었던 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릭스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했던 그의 눈이 어느새 가늘어져 있었다. 아까의 바보같이 어색해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니아는 대답하기가 애매해 말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이 도련님은 자신이 가진 저주에 대해 모른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몰라야 한다. 그가 십 년간 저주에 걸렸던 것도, 그리고 그 자신도 모르게 그 저주가 풀렸다는 것도.

그 때문에 공작과의 거래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었다. 필릭스의 저주는 공작과 자신이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제 꿈이…… 기사와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는 거라. 그…… 공작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여전히 필릭스의 눈은 매섭게 빛났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셨다고?”

“네.”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건가? 근데 결혼을 해?”

필릭스가 사냥감을 공격하듯 물어 오자 니아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만나는 사람은 없지만, 공작님께서 신랑감을 찾아 주시겠다고 약조하셨거든요. 이제 곧 그 약조한 날이고…….”

필릭스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하, 내뱉었다.

“지금 모르는 놈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는 건가? 내 앞에서? 제정신이야?”

말끝에 분노가 묻어 있는 듯하자, 니아는 이 도련님이 왜 이러나 궁금해졌다.

‘왜 화를 내지?’

아무리 그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나, 누구 덕분에 이렇게 완벽한 도련님으로 살 수 있는 건데. 은혜도 모르는 이 도련님 앞에서 니아는 점점 분노가 차올랐다.

“네. 공작님께서 좋은 남편을 찾아 주신다고 했거든요. 공작님이 양심이 있다면 좋은 남편감을, 아니, 이 얘기는 됐고…….”

“…….”

“어쨌든 공작님이 소개해 주신 작은 마을의 기사와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오순도순 살 겁니다. 이곳에서 평생 하녀로 사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훨씬 좋지 않을까요?”

“…….”

“게다가 저는 청소는 질색이라…… 몸 쓰는 일도 싫고요. 굳이 밥을 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면 내 가족을 위해서 하는 게 좋겠죠.”

니아는 말을 퍼붓느라 필릭스의 얼굴이 어느 정도로 굳는지 보지 못했다.

필릭스 쿠아란은 니아의 한마디 한마디에 머리가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만나는 놈도 없고, 아직 결혼을 한 것도 아니야.’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아버지와 니아가 무슨 거래를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우선 니아가 결혼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결혼하는 것을 막고, 공작가를 나가는 것까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오늘 내가 니아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 결과가 어땠을지 생각하자 필릭스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니아의 웃는 모습에 돌처럼 굳어 그녀를 지켜만 봤다면? 니아가 결혼한다며 공작가를 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을 거란 사실에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필릭스는 질끈 이를 악물었다. 하마터면 니아를 다른 남자에게 보낼 뻔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집 안에서 사라져 버린 니아. 그런 그녀를 찾아 떠난 자신. 니아와 다정한 그녀의 남편을 본 순간 그를 죽이는 자신과 벌벌 떠는 니아의 모습까지.

‘최악을 방지해야지.’

“니아.”

갑자기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니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까까지는 화가 난 것 같았는데, 그래서 자신도 화가 나 쏘아붙인 건데……. 갑자기 미소 띤 얼굴에다 이토록 다정한 목소리라니.

“네……?”

니아는 순간 더 무서워져 겁먹은 초식 동물처럼 답했다. 필릭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언제 공작가를 떠날 예정이지?”

세상 달콤한 목소리로 물어 오는 그에게 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대답했다.

“사흘 뒤…….”

사흘 뒤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필릭스의 눈이 반짝,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좋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

“…….”

“이제 가 봐.”

웃는 낯으로 뱉는 단호한 어조에 니아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했다.

말한 대로 나갔다가 왜 나가냐고 붙잡는 건 아닐지, 공작가의 하녀가 결혼을 하겠다고 떠난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냐고 소리 지르는 건 아닐지……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진짜로 나가도 될까?

“정말이야. 가 봐도 좋아.”

필릭스는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니아는 갑자기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세상 재수 없는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경악했지만, 말을 바꿀세라 빠르게 인사하고 문을 잡아당겼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문을 연 순간.

“아.”

필릭스의 목소리가 니아의 발을 잡았다. 또 왜 부르는 거지? 그냥 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니아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병은 다 나은 게 맞나?”

그가 갑작스레 물었다. 그것도 꽤나 진지한 눈빛으로. 그럴 리 없겠지만, 그의 표정은 마치 니아를 무척이나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병 같은 것에 걸린 적도 없지만…….’

니아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따듯한 미소를 짓자, 니아는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아 서둘러 서재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닫힌 서재의 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동안 몰랐던 게 신기할 정도로 이상한 성격이네. 십 년간 안 걸린 게 다행이야. 이제 곧 떠나니, 오늘처럼 시달릴 일은 없겠지.’

마음 편한 생각을 하며 니아는 홀가분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 안에서 그 도련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로.

서재 안의 공기는 누구 하나 죽어도 모를 정도로 어두웠다.

“사흘 뒤라…….”

필릭스는 니아가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바라보기만 하는 건 이제 끝났어.’

그는 눈을 나른히 감았다 떴다. 마치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먹잇감을 드디어 사냥하려는 맹수의 눈이었다.

필릭스는 니아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십 년 전, 눈 내리던 겨울이었다.

그때 자신은 스스로 생각해도 제멋대로이긴 했는데, 그 당시에 아픈 적이 많아 더욱 예민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으니까.

아버지인 공작 또한 몸이 약한 그가 죽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었던 건지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의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무튼 그날, 필릭스는 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곤란한 표정의 하인들을 보며 한심한 것들이라 중얼거렸다.

하인들이 비위를 살살 맞춰 주는 것이 지루해질 때쯤, 밖에 나가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던 쿠아란 공작이 도착했다.

필릭스는 심사가 뒤틀려 있는 상태였지만 아버지에게 인사를 해야 했기에 응접실을 가로질러 갔다.

돌아온 아버지의 손에는 무언가 들려 있었다. 아니, 무언가는 아니었고, 조그만 인간이었다.

‘저게 뭐야?’

아버지 뒤로, 처음 보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이 간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는 자세가 구부정한 것이 어째 기분 나빴다. 당시 모든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필릭스였지만, 저 히죽대며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는 꼴이 특히 거슬렸다.

거슬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옆에 서 있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조그만 아이는 필릭스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 가장 꾀죄죄했다.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아이인지, 머리는 산발에, 얼굴은 땟국물이 묻어 가까이 가기도 싫었다.

더러운 외관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표정조차 우울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게다가 옷 같지도 않은 누더기를 입고 있었으며, 그 사이로 살짝 보이는 살은 꽤나 천박하게 느껴졌다.

“설마 사생아는 아니겠죠, 아버지?”

필릭스는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들어 공작에게 물었다. 최근에 쉐리 후작가에 사생아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에 하나라도 사생아가 맞는다면, 자신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집에서 같이 살 수 없다는 굳은 다짐을…….

“일단은…… 이 집에서 지낼 아이다. 늦었으니 넌 들어가 보거라.”

어딘가 확실치 않은 공작의 말에 필릭스가 눈을 가늘게 뜨려는 찰나였다.

아이는 공작의 어떤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갑자기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녀가 갑자기, 아주 갑자기 말이다.

지금 본인의 꼴을 보면 웃음은커녕 말도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아이는 계속 환하게 웃었다.

그는 그 웃음을 신랄하게 비웃어 주려고 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쫓아내 버리라고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열 살의 어린 필릭스 쿠아란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 거지 같은 소녀의 꼴이 어떤 햇살보다 빛났던 것이다. 필릭스는 사람에게서도 빛이 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저녁노을처럼 찬란하게, 풋사과처럼 싱그럽게.

눈꺼풀을 내리면 잠시라도 저 미소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필릭스는 필사적으로 눈을 뜨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눈에 가득 담은 필릭스는 소녀의 볼에서 보조개를 발견했다. 아주 작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랑스러운 보조개였다.

‘너무 예쁘다…….’

필릭스는 자신의 귀와 얼굴, 그리고 온몸이 빨개지는 것을 몰랐다. 그냥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

“아이고, 도련님! 열이 나시는 모양이에요. 얼굴에 열이 확 오르셨네. 그러게 저녁을 제때 드셨어야……. 어휴, 릴리! 도련님을 방으로 모셔다드려. 도련님, 죽과 약을 곧 대령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녀의 호들갑 떠는 말도 들리지 않았다.

“도련님? 아이고, 도련님! 정신 차리셔요! 릴리, 물수건부터 가져와야겠어.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아.”

그것이 니아와의 첫 만남이었다. 정말 거지꼴이라고 생각했는데, 웃는 순간 무릎이라도 꿇고 조금만 더 웃어 달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도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갑작스럽게.

밥을 먹다 화살이 날아와도 그토록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처음 필릭스는 설렘으로 밤을 새웠다. 하인들이 열을 내려 준답시고 새벽 내내 왔다 갔다 한 것이 문제였지만, 뭐,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차가운 물수건을 머리에 올리고 있는 필릭스의 머릿속에는 소녀의 웃음뿐이었으니까.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그 미소만 떠올라. 엄청 좋다…….’

그렇게 첫사랑에 빠진 필릭스는 설렘에 빠져 허우적댔다.

그 후로, 필릭스는 소녀를 보기 위해 헤매었다. 하지만 그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걸음도 하지 않던 마구간에 기웃거리고,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보았으나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하루 종일 이층 난간에 앉아 지나다니는 하인들을 바라본 날도 있었지만 그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평소와 달리 바쁘다는 말로 필릭스를 쫓아낼 뿐이었다.

그리고 지독한 아픔이 필릭스를 찾아왔다. 일주일을 심하게 앓았을까. 아니, 사실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방에만 갇혀 날짜 감각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더 이상 자신이 아픈 것인지, 아프지 않은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즈음,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겨울의 찬바람이 필릭스의 피부를 스쳤다.

커다랗게 뜬 달이 정원을 환히 비췄고, 그리고 그다음 그의 눈에 누군가가 가득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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