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67화 (67/76)

〈 67화 〉 #67. 변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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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변화(5)

[18년_11월_29일_목요일]

[19:07]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시간이 점점 사라지는 기억이 떠올랐다.

내 탓에 잃어버린 과거를 되돌리려는 것이겠지만, 이젠 내가 잃어버릴 차례라는 게 무서웠다.

‘고마워.’

그가 고백을 받아주며 뱉었던 수줍은 한마디가,

‘미안.’

고백을 거절하며 뱉은 차가운 한마디로 변해버렸다.

새롭게 뒤바뀌는 기억이 사무치게 서러운 형태로 고쳐지고 있었다.

‘이런 기억은 사라져주지 않으려나.’

고백을 거절당하는데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설 뿐인 내 모습이 정말 비참했다.

윤서에게 돌아가고 싶었던 것쯤은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선 거야.

내게 꿈만 같았던 날들을 전부 없었던 일로 되돌릴 거라면, 정말 그럴 거라면.

널 사랑하는 이 마음까지도 전부 지워주지 그랬어.

상혁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나빠, 미워, 너무해, 정말 싫어.’

대개가 원망과 미움이 섞인 말들뿐일 테지만, 그래도 정말 보고 싶었다.

그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나 준다면, 윤서의 내일을 앗아가려는 이 손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너는 나타나지 않겠지.

나타나더라도, 내게서 이 아이를 지켜내려 하겠지.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죽을 만큼 미웠던 윤서가 조금 더 미워졌다.

내가 대체품일 뿐이었다는 게 너무나 괴로웠다.

내가 빼앗은 상혁의 옆자리가 처음부터 윤서의 자리라는 걸 알았다면…….

틀려, 상혁이를 먼저 알게 된 건 분명 나였잖아.

그런데도 내가 사라지면 되찾아갈 거잖아, 빼앗아 갈 거잖아.

‘죽어, 싫어, 미워, 하지 마, 아니야, 안 돼…….’

손은 마음에게 몇 번이고 가로막혀도 윤서의 가슴만 가리킬 뿐이었다.

저항할 힘조차 없는 이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고 싶었다.

내 손이 바라는 것과 내 마음이 바라는 것을 구분할 수 없었기에.

그렇기에 자꾸만 망설이게 되는 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발 그만……. 오빠는 언­”

“닥쳐, 닥쳐, 닥치라고!”

그러니까 네가 미운 거야.

흑백으로 물든 세상에 버려진 내 모습은 이렇게 비참하기만 한데.

네가 살아갈 세상엔 상혁이가 있으니까, 다채롭고 따스하기만 하겠지.

부러웠다. 그저 행복하고 싶을 뿐이었다.

질투가 죄책감마저 집어삼켜 버린 것일까.

나는 쥐고 있던 과도로 윤서의 가슴을 내려찍으려 했고, 그런 순간.

“윽…!”

또다시 두통이 느껴졌다.

이번엔 또 어떤 과거가 사라진 것일까.

기억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는 건, 부대 앞에서 고백을 거절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는 뜻이겠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데, 새로운 과거가 자꾸만 떠오르려 했다.

신입생 시절에서도 멈추지 않는 기억이 불안했다.

두통과 불안에 멈춰 섰던 손을 움직이게 하려 했지만,

“컥­”

이번에는 그런 와중에 누군가에게 걷어차여, 복도 난간에 몸을 처박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자, 낯선 아저씨가 내게서 윤서를 지켜내듯 서 있었다.

“우선 칼부터 내려놓읍시다.”

“언니, 이제 그만해…….”

그래. 너는 살아서 전부 되찾으려는 거구나.

윤서의 내일을 앗아가지 못한 지금부터는 상혁과 윤서의 미래가 펼쳐지겠지.

그것만큼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나만 사라지면 되는 거였지…….”

나는 몸을 일으켜 낯선 아저씨의 발치에 과도를 강하게 내던지고, 그대로 자취방을 향해 달렸다.

“잠, 잠시만! 김현지 씨!”

그가 나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현관 안으로 들어서 문을 잠글 수 있었다.

이것만으론 부족할까 싶어서 체인을 걸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게 되었다.

“…….”

[김현지 씨, 김현지 씨! 당장 문 열어요!]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는 몸을 살짝 내밀어, 싱크대 아래쪽에 내려뒀던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곳엔 제멋대로 펼쳐질 내일을 막아줄 낚싯줄과 못, 그리고 망치가 담겨있었다.

윤서를 죽이고 싶었던 손, 그것을 막아섰던 마음.

나를 죽이고 싶었던 마음, 그것을 막아섰던 손.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이질적인 여자가 되어버린 걸까.

이런 모습이 싫어서 상혁이가 떠나려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서러운 마음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서둘러야 해, 이 방법마저 가로막히면 내일을 마주해야 하잖아.

나는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바라보며 바닥에 못을 박았다.

바닥에 못을 내려찍을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지만, 견뎌야 했다.

‘무서워, 아니야, 마주하고 싶지 않잖아.’

입밖에는 내지 않고, 마음으로만 되새기던 말들.

그건 분명 누구도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을 텐데.

‘현지야.’

어째선지 귓가에 상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

함께 가본 적 없었을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던 우리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었다.

‘지금으로 이어진 거냐…….’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헤아릴 수 없는 크기의 의문이 차올랐다.

‘괜찮아. 전부 괜찮으니까. 잠깐만 진정해줘.’

“어째서…? 어째서 네가 거기 있는 거야…?”

‘저쪽 봐볼래? 저기에 카메라 감독 숨어있는데.’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유나는 분명…….”

‘걱정하지 마, 전부 맡겨줘.’

“그럴 리가 없다고…….”

‘그래도 역시,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거짓말……. 너는 윤서를 바랄 뿐이잖아, 나와의 과거를 전부 끊어낼 거잖아…….”

‘슬슬 가야겠다.’

그랬을 그가 나보다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하려는 일도, 바라는 것도, 무엇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나와의 추억을 끊어내는 게 미안해서, 그래서 유나를 되살려준 거야…?”

‘지금 네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내게 중요한 것…?”

‘여기서 유나 손 꼭 잡고, 아버님한테 전화 드려.’

“에…? 잠, 잠시만…….”

‘받을 때까지 계속 걸면, 분명 이쪽으로 오실 거야.’

이 이상 떠올릴 자신이 없었다.

상혁이가 하려는 일을 예상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하려 했던 마지막 일을 망설이게 될 것 같은 탓이었다.

나는 떠오르는 기억에서 도망치듯. 책상 앞에 있던 의자를 현관까지 끌고 와, 그곳에 올라섰다.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싫어……. 싫어…! 싫다고!”

그런데도 자꾸만 떠오르는 기억 탓에 눈물이 흘렀고, 그런 탓에 형광등에 줄을 걸기가 어려웠다.

“아니잖아……. 나와의 과거 따위는 전부 끊어내고, 윤서에게 돌아가려는 거잖아…….”

유나만이 아니었다.

상혁이는 부모님까지 되살리려는 게 분명했다.

‘네가 놓친 게 아니야, 네게 없었을 뿐이야.’

“무슨 뜻이야……. 그게 무슨 뜻이냐고…….”

‘이만 갈게.’

“가지 마……. 대답해…….”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남자는 그렇게 멀어져만 갔다.

그런 과거를 떠올릴 뿐이었지만, 어째선지 그런 뒷모습마저 흐릿해진 기분이 들었다.

“붙잡아, 붙잡으라고…!”

이런 마음을 머금을 수 없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미웠다.

유나에게 붙잡힌 나는 공원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과거에선 느낄 수 없었던 불안이 지금의 내게로 불어왔고,

“그의 사랑은 참으로 올곧았군요. 그걸 미래의 저도 통감한 모양입니다.”

뒤편에서 조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광등에 매려 했던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자, 싱크대에 기대 서 있는 노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랑을 끝까지 부정할 생각인가요?”

“……. 아니야, 아니라고…! 상혁이는 내가 아니라 윤서를…!”

“그는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당신이 살아갈 미래를 펼쳐주려 하고 있습니다.”

“잠, 잠시만……. 미래를 포기하면서…? 그게 무슨 뜻이죠…?”

“당신이 과거를 바꾼 탓에 그의 세상은 변화를 일으키기 힘든 미래였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당신이 겪은 두통의 수천, 수만 배의 고통을 견뎌내면서 모든 진실을 마주했고, 두 번째 변화를 일으키려는 모양이고요.”

“그니까 그건 전부 윤서를­”

“하, 당신과 그녀를 전부 되살리기 위해서죠. 그런데도 당신이 끝끝내 죽으려 하니까, 그러니까 제가 갈 수 없었던 과거까지 가버린 거고요.”

“갈 수 없었던 과거…?”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트라우마를 마주한다 한들, 그런 과거에 추억은 없을 테니까. 제가 살아갈 미래를 바쳐 과거로 향한 겁니다.”

“살아갈 미래를 바친다니…? 아니,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그가 당신을 되살리고 싶어서, 당신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해서. 제 목숨을 바쳤다고요. 그래, 마치 당신이 일기장을 바쳤던 것처럼.”

“에…?”

내가 과거로 향하기 위해 바쳤던 물건.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일기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혁이가 제가 살아갈 미래를 바쳤다는 말까지 수차례 되새기고 나서야,

“당신은 그런 마음을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이렇게 짓밟아댈 뿐이라는 겁니다.”

노인이 하려는 말도, 상혁이 했던 말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네가 놓친 게 아니야, 네게 없었을 뿐이야.’

“안 돼…….”

‘이만 갈게.’

“안 돼, 안 된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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