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66. 마지막 과거(1) 사랑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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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마지막 과거(1) 사랑의 형태
[09년_11월_23일_월요일]
[19:00]
이번만큼은 필연이라는 인과를 깨부숴야 했다.
어딘가 망가진 기계처럼 같은 실패만 반복할 뿐이었던 내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든지, 걱정만 앞선다든지, 조금은 두렵다든지.
불안과 잡념을 떨쳐내기 위해 세게 감았던 눈을 다시 떠봤을 때.
두 다리가 이제는 익숙한 거리를 세차게 달리고 있었다.
거봐, 몸도 마음도 한쪽을 가리키고 있잖아.
그런 내가 누군가와 함께할 미래를 선택한다는 건 죄가 되겠지.
고개를 살짝 돌려보면, 등 뒤로 늘어지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눈에 담겼다.
난잡하게 뒤섞인 느낌이 들었지만, 이것들은 분명 새로운 미래를 그려갈 물감이 되어줄 녀석들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저, 현지가 따스한 계절을 그려갈 이곳이 절망으로 얼룩지지 않도록.
지금이라는 과거로 찾아올 겨울을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새하얀 도화지를 선사하는 게 내가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 될 테니까.
그렇게 익숙한 카페를 등지고, 빨간불을 밝히던 신호등을 건너, 드문드문 떠오르는 시내 거리를 달렸다.
28살의 현지가 나를 찾아온 것처럼, 29살의 내가 현지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머금고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지금 내 모습, 조금은 멋지게 보이지 않으려나.’라던지, ‘이곳에선 내가 오빠가 되는 게 아닐까.’ 같은 쓸데없는 생각도 해낼 수 있었다.
물론, 가쁘게 차오르는 숨이 현지에게 오빠라고 불리는 망상만큼은 막아섰고,
달려갈 뿐이었던 두 발 역시, 이하 동문이란 것처럼 시끄럽게 비명만 질러댈 뿐이었다.
뭐야,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있는 것 같은데.
이번만 기분 탓인 거라 쳐줘야겠다.
그리고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독백이 밑천을 드러낼 무렵이 되어서야 도착한 시내 끝자락.
가쁜 숨을 견디려 고개를 들자, 주황색 꽃잎으로 물든 공원을 마주할 수 있었고,
“…….”
얼굴엔 쓸데없이 헤픈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나를 무심하게 지나치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익숙한 탓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꽤 가깝게 지냈던 학원 친구.
나는 한유나의 팔뚝을 잡아채, 그녀가 귀에 끼우고 있던 이어폰을 잡아당기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유나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내 모습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에? 이상혁? 네가 왜…….”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수년 만에 만난 친구에게 가장 어울리는 감상도 보였다.
아니, 아니. 그거 말고 더 있을 거 아니야. 멋지다든지.
“아니, 근데 왜 땀범벅이야…? 그리고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
“그러게 말이다…….”
“설마, 현지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거야? 뭐야! 관심 없는 척하더니!”
유나는 내 모습이 웃긴다는 것처럼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등 짝을 조금 아프다 싶을 정도로 때려댔다.
그래, 이 녀석이랑은 이런 분위기로 지냈었지.
“현지 공원 안쪽에 있으니까”
“알아. 전부 알고 있으니까. 일단, 이건 압수.”
“갑자기 뭐야…! 내놔!”
유나에게서 이어폰을 빼앗았다. 그것을 찢어 갈기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꾹 참고 말을 이었다.
“이거 현지한테 주고 올 테니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인생 선배의 강탈을 아니지, 아니지.
인생 선배의 다정한 조언을 받아들이긴 조금 어렸던 것일까.
유나는 제 이어폰을 되찾아가려 했지만,
“야, 야…!”
공원 안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따라서는 것까진 관두려는 모양이다.
“……. 어떻게 이리도 쉽게 바뀌냐.”
그토록 바꿀 수 없었던 과거가 이렇게 쉽게 바뀌는 게 씁쓸했지만, 그래도 이대로만 간다면 유나는 되살아날 테니까.
그 부분만큼은 안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에……. 에? 잠, 잠시만! 주고 온다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뒤편에서 여러 질문이 날아들었지만, 애써 못 들은척하며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금목서 나무가 가득한 이곳이 현지와 내가 그려질 마지막 장소였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두리번거리자, 공원 의자에 앉아있는 현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른 계절에 찾아온 첫눈처럼 옅게 흩날리는 주황색 꽃잎.
그런 꽃잎에 물든 현지의 모습은 정말 화사했다.
예쁘네.
과거가 비참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가 이곳이었더라면.
나는 이번에도 한눈에 반했으려나.
“하…….”
하자, 해야지. 할 수 있잖아, 해야 하잖아.
“현지야.”
“…….”
내 목소리가 낯설었던 것일까. 현지는 멍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돌려 나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사람이란 것 같은 반응이 조금 서러웠지만, 견뎌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몇 초도 되지 않았던 짧은 순간에 멍할 뿐이었던 표정이 굉장히 어두워졌다.
“여긴…….”
현지는 작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하더니,
“설마…….”
무릎 위에 올려진 일기장을 바라보고선,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지금으로 이어진 거냐…….”
이건 공원에서 유나의 연락을 기다릴 뿐이었던 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과거를 바꾸려고 돌아온 현지의 모습이 분명했다.
나는 서둘러 공원을 나서려는 현지의 어깨를 붙잡아 당겨, 내 얼굴을 바라보게 하며 말했다.
“괜찮아, 전부 괜찮으니까. 잠깐만 진정해줘.”
“이, 이거 놔요…! 나는 지금”
“저쪽 봐볼래? 저기에 카메라 감독 숨어있는데.”
여유로운 척할 뿐인 내가 공원 바깥쪽 수풀을 가리키자,
불안에 젖어있던 현지의 눈도 그곳으로 향했고,
“에…? 유, 유나가…! 어째서…?”
우리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유나는 제 모습을 들켰다는 걸 알아채곤, 멋쩍은 듯 양손만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친구의 모습까지 확인한 현지가 입만 살짝 벌린 채로, 다시금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젠 부모님 걱정이 시작되려나.”
“…….”
“걱정하지 마, 전부 맡겨줘.”
옅은 희망을 머금은 표정이란 건 이런 얼굴을 뜻하는 걸까.
“그래도 역시,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손목시계를 바라봤다. 분침이 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가야겠다.”
“잠, 잠시만……. 혹시 네가 이상혁이야…?”
고마워, 알아차려 줬구나.
“……. 아니야. 그리고 지금 네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
“…….”
“너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
“해야 할 일…?”
“응. 여기서 유나 손 꼭 잡고, 아버님께 전화 드려. 받을 때까지 계속 걸면, 분명 이쪽으로 오실 거야.”
“그게 무슨……. 안 돼, 지금 당장 시내로 가야”
낯선 남자에게 부모님을 맡기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겠지만, 아이린은 변수를 만드는 법이니까.
나는 단호해야 했다.
“그래야 두 분 모두 살릴 수 있어.”
“…….”
무섭게 말한 것 같아서 미안했다. 그런데도 정말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붙잡은 어깨를 놓아줄 시간이다.
서로에게 마지막이라는 것마저 나 혼자만 아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정말 마지막이니까.
그러니까 입맞춤 정도는 하고 싶었다.
최소한 사랑했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결국은 그런 마음을 못 이겨, 어깨를 붙잡았던 손으로 현지의 목을 붙잡아 당겼고,
“…!”
그런 상황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현지의 품에선 알싸한 향기가 느껴졌다.
“이것도 복선이냐…….”
그래, 새롭게 피어오르려 하는 봄에 나라는 씨앗을 심어선 안 되는 거니까.
나는 당황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지를 놓아주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의미는 불명일 테지만,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마지막…?”
“네가 놓친 게 아니야, 네게 없었을 뿐이야.”
“에…?”
무엇이 없는 거냐고, 그리고 무엇이 다른 거냐고 되묻고 싶은 표정이네.
하지만 그런 마음도 새롭게 펼쳐질 계절로 덮어가길 바랄 뿐이니까.
네가 내게 품었던 마음이 피어오를 필요가 없을 만큼 행복한 내일을 살아가길 바랄 뿐이니까.
“이만 갈게.”
내 사랑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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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유나에게 현지를 맡기고 미친 듯이 달렸다.
현지 아버님이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핸들을 돌렸던 이유.
그건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더라도, 현지를 치게 될까 싶었던 불안 탓일 것이다.
물론, 현지가 아니었더라도, 운전자 대부분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런 결론을 내렸을 땐, 인근 가게 앞에 놓인 소화기를 들고, 더욱더 미친놈처럼 달려갈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꺅!” / “뭐, 뭐야!”
그래, 미친놈 달려가잖아. 다들 길 좀 비켜라.
그렇게 현지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사거리 도로로 들어서며 느낀 점이 있었다.
많이 무서웠겠지.
그나저나, 나름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인데 소화기를 들고 달려가는 미친놈이라니.
멋 떨어지네.
슬슬, 쓸데없는 잡념을 해댈 여유도 없어 보인다.
사거리 한복판에 도착하자, 언덕 위에선 버스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며 내려오고 있었고,
바로 앞 저만치에선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를 하얀색 승용차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현지의 아버님이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일까.
하얀색 승용차가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를 울려댔지만, 그쪽으로 들고 왔던 소화기를 뿌렸다.
이걸 뿌리면 시야 확보가 안 될 테니까, 핸들이 아닌 브레이크를 밟겠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절실함이 닿아준 것일까.
저만치서 아스팔트 도로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왔다.
“제발…!”
전부 맡겨달라고 했지만, 결국 운명에 모든 걸 맡기고 자빠졌다니. 마지막까지 최악이네.
그런 내게 어이가 없어 미소가 지어졌고, 고개를 돌리자 웃음만 나왔다.
피할 생각도 없었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버스가 조금은 밉게 느껴진 탓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차에 치여, 그대로 죽어야 했다.
누구도 선택할 수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놓아주는 것뿐이었다.
내가 죽어야 현지와 윤서의 인연도 사라질 테니까, 그래야 현지와 윤서가 살아갈 수 있으니까.
얼른 가서 유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해야겠지.
어쩔 수 없잖아.
선택할 수 없었는걸. 아니, 선택해선 안 되는 거잖아.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지만, 그런 소리가 버스에 내 몸이 부딪히는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뭐랄까, 이젠 이명만 들려오는 것 같네.
나는 버스에 치여 날아가면서도 현지의 부모님 차량을 찾았다.
그리고 신호등을 지나치지 않고 멈춰선 하얀색 승용차를 발견했을 땐,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고,
그제야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엔 주마등이 펼쳐진다던데, 나는 내가 날아가는 장면만 마주할 뿐이었다.
현지도, 윤서와 유진이도 전부 놓아버린 탓이려나.
그래, 그런 나니까 독백으로 끝내는 게 어울리는 거겠지.
해냈어. 현지야, 잘해낸 것 같아.
네게 가장 소중했던 사람들, 전부 되살린 것 같아.
다행이야.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왔잖아? 이젠 전부 꼭 붙잡고 내일로 나아가는 거야.
가족에 관한 건 잘 모르지만, 어머님 아버님한테 효도하고.
유나랑 같이 놀러 가기도 하고, 조금은 지겨울지도 모르겠지만, 대학 생활도 열심히 즐기고.
그러다 보면 좋은 남자도 만날 수 있을 거야.
아, 이건 유나가 알아서 해 주려나.
그리고 원래는 국어 선생님이었지? 회사원보다는 그쪽이 잘 어울리더라.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끝도 없는데, 그런 와중에 자꾸만 윤서가 생각나.
그 녀석 괜찮을까, 나 없어도 힘든 일 잘 견뎌야 할 텐데.
윤서랑 함께할 미래는 떠오르지 않지만, 어째선지 마음이 아려와.
밉다. 정말 밉지?
이런 걸 보면, 네가 나를 원망할 만도 했구나 싶어.
평소엔 얼마나 자주 이랬을까. 그럴 때마다 네가 얼마나 상처 입었을까.
자주 쥐어박지 그랬어.
저기 근데, 슬슬 바닥에 떨어지려는 모양이야.
아직도 나를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쫓아오는 버스가 무서워.
저 녀석,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기도 하고.
아프려나, 아플 거야. 괜찮아, 잠깐이겠지.
시야가 흐릿해. 독백도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다.
미안해 현지야.
끝까지 못난 나지만, 정말 많이 사랑했어.
나는 분명 김현지를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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