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65화 (65/76)

〈 65화 〉 #65. 가야 하는 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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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가야 하는 길(2)

아직도 사랑하는데, 언제까지나 사랑하고 싶었는데.

현지가 내게서 한순간에 멀어져 버렸을 때, 마음에 남은 건 그리움뿐이었다.

손을 꼭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바라본 손바닥엔 커다란 구멍만 남아있었다.

서로를 놓아주지 않으려 깍지를 꼈던 손가락엔 온기조차 남아있질 않았고,

홀로 남겨진 내 손은 차갑게 굳어, 손을 붙잡았던 모양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들을 깨달았을 땐, 흐릿한 세상에 홀로 남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지난날들에 후회가 차올랐다.

‘현지를 놓아주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미련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며 살아가도, 흘러가는 시간만큼은 붙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현지가 저 자신을 포기할 때까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었고,

더는 붙잡고 싶지 않은 세상에 홀로 남겨져서도 무엇하나 알아낼 수 없었다.

현실도피를 시작한 것도 이때쯤인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기력한 나 자신이 싫어서, 그래서 현지는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려 했다.

저도 모르게 펼친 자기방어 기제 따위가 아니었다.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몸은 가까워도 마음만큼은 그러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그저 사랑하는 여자의 몸을 탐할 뿐인 추악한 남자였던 것일까.

어떤 생각을 반복해도 내가 최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뿐이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 내게, 내일로 나아가는 세상이 벌을 내렸다.

사랑스러운 얼굴에 그리던 장난기 가득한 표정도, 얇은 입술로 흘리던 밝은 웃음소리도.

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져 갔다.

그래서 어제로 뒷걸음질쳤다.

내일을 알리는 햇빛을 가리고, 칠흑으로 뒤덮인 어제를 펼쳐 현지의 모습을 지켜내려 했다.

어두운 집에선 현지의 모습을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서로의 모습만큼은 곧잘 떠올릴 수 없었다.

내 기억은 현지와 함께한 8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흐릿해져 있었다.

원래부터 흐릿한 것인 줄 몰랐기에, 잊혀지는 과거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어제로 뒷걸음질치면 칠수록, 나를 집어삼키려는 내일이라는 구멍이 발밑을 잡아 당겨왔다.

그곳으로 떨어지면 현지를 만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다.

결국은 내일로 나아가고파 하는 내가 정말 싫었다.

그래서 단 한 번만 현실을 마주하고, 현지를 향해 떠나려 했다.

나 자신을 포기하려 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마주한 현실에서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흐릿하게 남아있던 이성의 끈, 이미 끊어진 그것을 붙잡고 말았다.

….

소중한 물건을 바쳐야 한다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면, 그랬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겠지.

이때의 나는 현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기에 내게 있어 가장 소중한 물건, 약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바쳐 첫 번째 과거로 향했다.

현실에서 외면했던 햇빛이 현지의 모습을 따스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현지를 되살릴 수 있다는 희망만 되뇔 뿐이었다.

전부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지는 첫 번째 과거의 끝자락에서 윤서를 살해하고 말았다.

과정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를 되살리기는커녕, 나를 도와주던 윤서를 죽게 만든 것이었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한들, 윤서를 죽음이라는 상황으로부터 내버려뒀다는 점.

그게 바로 내가 저지른 첫 번째 죄였다.

현지는 미뤄둬야 했다.

윤서를 되살려야 했다.

그래서 현지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적었다고 기억하던 편지를 바쳐 두 번째 과거로 향했다.

그리고 난 윤서를 되살리는 것을 우선으로 해야 했던 두 번째 과거에서 두 번째 죄를 저질렀다.

차선이라는 핑계로 윤서에 대한 죄책감을 외면하며 현지를 되살릴 방법을 찾았다.

누가 뭐래도, 내가 결정한 길이었다.

그렇기에 내겐 윤서를 되살려내도, 그녀의 얼굴을 예전처럼 마주할 자격이 없어진 것이었다.

상념에 잠겨 단서를 찾아다니던 그 무렵엔 현지의 모교 앞에서 유진을 마주했었다.

아니, 유진이 날 찾아온 거였지.

당시엔 처음 보는 얼굴보다, 묘하게 익숙한 말투가 신경 쓰였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감각을 윤서와 함께 갔던 분식집에서 느꼈는데, 난 그런 감각을 외면하려 했다.

다급해던 탓일까.

그저 현실을 외면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 첫 번째 과거와 두 번째 과거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내게 소중한 물건을 바쳐 향한 과거에서 자꾸만 윤서와 얽히게 됐다는 것.

하지만 나는 소중한 물건이 펼쳐주는 과거가 계속해서 윤서에게로 이어진다는 상황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윤서와 유진이 내게 눈치가 없다고 말한 건 잔소리 따위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뭐, 두 사람이 이런 상황을 알고 뱉은 말은 아닐 테지만, 이것도 나름 내 인생의 복선인 거겠지.

두 번째 과거에서 돌아왔을 때, 난 무너져 있었다.

하다못해 윤서만큼은 되살려내고 무너져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는 죄책감이 괴로운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일으켜 세운 게 유진이었다.

현지를 되살려야 윤서도 되살릴 수 있는 거라며.

유진은 내가 시간을 역행한다는 정신 나간 상황도 개의치 않고, 내가 가장 바랐던 조언만 해줬다.

그렇기에 무너진 마음을 이끌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다음은 현지에게 등단 선물로 받은 것이라 믿고 있었던 만년필.

그것이 세 번째 과거를 펼쳤다.

이때의 난 쌍둥이라든지, 도플갱어라든지. 별 같잖은 추리 놀이에 빠져 있었다.

그게 정말 역겹기 짝이 없는데.

그런 나를 걱정하며 울먹이는 윤서의 얼굴, 그것을 바라보자 외면하고 있던 죄책감이 돌아왔다.

최악의 감각이었다.

그리고 윤서가 바닥에 내던진 선물 봉투, 그곳에 만년필이 들어있던 거겠지.

내가 소중히 여겼던 물건의 정체를 인제 와서 알아차렸다는 게 내가 저지른 세 번째 죄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도 모른 채 세 번째 과거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나보다 먼저 돌아온 죄책감에 온몸을 지배당할 수밖에 없었다.

윤서의 죽음이 반복되는 게 괴로워, 더는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전부 내려놓으려 했다.

현지와의 인연을 끊으면, 윤서는 되살아날 테니까.

그대로 둘의 인생에서 사라지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의미가 조금 외로운 형태로 변해버린 각오를 굳게 다지며, 현지가 고백할 때 줬다고 기억하던 목토시를 바쳐 네 번째 과거로 향했다.

차라리 과거가 거기서 끝났다면, 그랬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현지의 고백을 힘겹게 거절하고, 무너지려 하는 세상에서 마주한 건.

아직도 떠올려 낼 수 없는 원래의 미래라는 기억과 점점 잊혀져가는 유진의 모습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일까.

그걸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아무것도 알아차려 주지 못했다는 게 미안해질 뿐이다.

유진에게 아빠라는 말을 들었을 땐 당황스럽기만 했고, 과거는 그런 내게 의문을 품을 시간마저 쥐여주질 않았다.

유진이 그토록 밝게 웃어 보였는데, 그토록 슬피 울고 있었는데.

유진이 세상을 떠나갈 때, 딸을 안아주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자식이 죽어가며 남긴 일기장을 통해 과거를 마주하려 할 뿐이었다.

현지를 붙잡기 위해 과거를 펼치는 모습, 역겹고 추악한 그 모습이 내가 저지른 네 번째 죄다.

….

혼자선 마주할 수 없었을 이야기, 미래에서 찾아온 딸이 펼쳐준 이야기.

마주한 과거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참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거를 마주했기에 알 수 있었다.

현지가 과거를 바꾸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윤서와 함께 미래로 나아가 유진을 만나게 됐겠지.

반지도, 편지도, 만년필도, 목토시도.

현지를 되살리기 위해 바친 물건이 전부, 윤서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인 것이었다.

현지가 바꾼 과거에 윤서와의 물건이 남아있는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상은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윤서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그걸 현지의 절망을 전부 마주하고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지도 이걸 느꼈을 테니까, 그러니까 좌절하고 세상을 떠나려 했던 거겠지.

미안했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딸에게 가정을 지킬 기회를 받았는데, 나라는 인간은 도무지 그런 미래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상상하는 것마저 해낼 수 없었다.

윤서와 함께였다는 미래에, 자꾸만 현지가 그려지려 할 뿐이었다.

행복했던 기억도, 열렬히 사랑했던 마음도 전부, 현지 하나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이 전부 뒤바뀐 것이라 해서, 이런 내 마음을 거짓된 것이라 여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떡해야 할까.

사랑하는 여자의 과거를 전부 마주했는데, 이제야 그녀의 절망을 끌어안아 줄 차례가 왔는데.

과거는 내가 사랑했던 여자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지를 포기하고 윤서와 함께할 미래를 붙잡아야 할까.

당연하게도 어느 한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과거, 이곳에서 마지막 죄를 저지르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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