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64화 (64/76)

〈 64화 〉 #64. 가야 하는 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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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가야 하는 길(1)

[19년_12월_02일_금요일]

[08:30]

제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던, 나 하나만을 감시하던 시계들이 전부 멈춰 서 있다.

시간 선에 한계가 찾아온 것이었다.

아니, 새로운 시간 선이 태어나려는 것이겠지.

그리고 작은 충격에도 부서질 것처럼 무수히 많은 금을 머금은 모래시계.

네 녀석한테도 한계가 있다는 게 적잖이 충격이다.

지금은 긴 시간 써 내렸던 이야기를 끝마쳐야 하니, 죽어가는 너를 추억할 여유가 없다.

미안하지만, 옛 생각을 떨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보면, 맞은편 자리에 생긴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어느샌가 상혁이 돌아와 있었다.

“….”

그가 되살리려 하는,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을 여자.

김현지는 8년이라는 시간과 인과를 버텨내지 못했었다.

미약했던 심신이 현재로 돌아오며 달고 온 마음의 병.

그것에 썩어 문드러진 마음이 결국, 제 삶마저 포기하게 했다.

그토록 바라던 계절이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안타까웠다.

막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최선의 도피라는 걸 나 역시도 공감하기에 막아서지 않았다.

뭐, 애초에 막아설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상혁은 어떨까.

8년이라는 시간뿐만이 아닌, 모든 진실과 모든 절망을 마주한 이 남자가 과연 인과를 버텨낼 수 있을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에 내가 흘리는 옅은 기대감이 차올랐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렇기에 시작이 될 전율이 무기력한 몸을 떨리게 했다.

상혁이 모습을 드러낸 지 한참이 지났지만,

“….”

그런 그를 잠자코 기다려봐도, 모든 것이 멈춘 이곳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나를 전율케 하는 기대감, 나를 초조케 하는 침묵이 점점 불안해졌다.

나도 모르게 상혁이 무너지지 않길 바라게 됐다.

하지만 상혁은 텅 빈 눈으로 텅 빈 모래시계만 바라볼 뿐이었다.

눈도 뜨고 있고 숨도 쉬고 있는데, 분명 의식이 돌아왔을 터인데.

그건 현지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래, 갈피를 놓쳐버린 거겠지.

막을 앞둔 세상, 그것을 구성하던 모든 게 무뎌진 지금이기에.

고통 따위는 느낄 수 없을 것이었다.

과거에서 일으킨 변화가 전부 떠오르지만, 현재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게 유일하게 선명한 직감으로 느껴졌을 테니까.

제가 살아 숨 쉬는 지금이라는 시간이 전부 김현지게 의해 뒤바뀐 세상이란 걸 알게 됐으니까.

그런 변화가 벌어지기 이전의 과거, 원래 펼쳐져야 했을 과거에 대한 상상을 시작한 게 분명했다.

이윤서, 제가 원래 사랑했다던 여자와의 이야기.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을 원래의 이야기를 말이다.

혼란스러움을 표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해가 간다.

나도 그랬으니까.

“…처음엔 당신을 원망했습니다.”

“….”

드디어 시작된 대화의 서두가 몹시 당황스러웠다.

상혁이 하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 덤덤한 말투, 모든 걸 포기할 것 같은 분위기가 두려웠다.

“어째서 현지에게 접근한 것인지, 그마저도 부족해 제게까지 접근한 것인지.”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혁은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하고 싶은 말만 덤덤하게 털어놓을 뿐이었다.

“그런데 현지의 과거를 전부 마주하고 나서야, 그런 마음이 조금 무뎌졌습니다.”

그저 허탈해 보인다는 말로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상혁의 입가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의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현지에게 기회를 줬던 점이 고맙고, 제게 그런 현지를 되살릴 기회를 쥐여준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 모습을 글로써 표현할 자신이 없다.

“당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어떤 결과를 바랐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지금은 한 가지 질문에 확답이 듣고 싶을 뿐입니다.”

“…말씀하시죠.”

이 이야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

그가 바라는 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길 바라게 된다.

“유진이가… 제 딸이 과거로 올 수 있었던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유진을 과거로 보내준 건 미래의 나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그런 짐작을 되새기고 나서야 상혁이 선택한 길을 확신할 수 있었고,

“….”

결국은 이 방법뿐이라는 게 씁쓸했다.

나는 이런 마음을 내색해주는 게 최선일 것 같아, 상혁이 지었던 미소를 따라 짓고 입을 열었다.

“상혁 씨도 그녀와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겠군요.”

“네.”

“가능합니다. 다만­”

“…감사합니다.”

정확한 방법이나 대가에 관한 건 궁금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차피 전부 포기할 거라면 어떤 것을 바쳐도 상관없을뿐더러, 마지막 장면을 정했다는 거겠지.

그 확고한 결정을 내렸더라도,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그 쓰라린 결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는 나이기에, 자꾸만 이입하게 된다.

“후….”

하지만 상혁은 숨을 길게 내쉬는 것만으로 마음을 다잡았다는 것처럼.

한층 더 굳은 표정이 되어 내게 말했다.

“꼭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역시, 더는 안 될 것 같다.

“09년 11월 23일 금요일. 그날에 대한 기억은 덕분에 전부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를 적어야겠다.

“뭐든 바칠 테니, 뭐든 상관없으니… 곧바로 출발하고 싶습니다.”

한 남자가 굳은 결심을 다짐하는 순간에 어울리는 행동은 아니지만,

난 내려놓은 팬을 집고 눈앞의 장면을 적어가며 입을 열었다.

“이게 마지막이 될 테니, 저도 한 가지 궁금한 점을 묻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네.”

“누가 봐도 불확실한데, 어째서 망설이지 않는 겁니까. 혹시 전부 포기했다는 심보로 행동하는­”

“딸이 그러더군요. 저도 엄마도 괜찮으니까, 아빠는 행복했으면 한다고.”

“….”

“그런데 저는 그 말을 듣고도, 현지와 함께할 미래만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거였나.

“하다못해 윤서랑 함께하고, 유진이가 태어날 세상을 상상하는 것마저 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랬던 거였어.

“…게다가 이대로 멈추면, 딸이 바랐던 행복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게 되겠죠.”

“전부 뒤바뀐 세상일지라도, 현지 씨와 함께했던 세상을 부정하진 않겠다는 건가요.”

“딸에겐 면목없지만, 이게 현지가 만들어낸 세상을 살아온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 듯합니다.”

지금, 상혁의 마음속에 남은 건 현지도 윤서도 아니었다.

되살릴 수 없었던 두 사람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두 사람 전부를 되살리겠다는 선택.

그런 선택을 머금고 전부 놓아주려는 마음, 강인하다 못해 고결하기까지 한 그 마음엔 딸에 대한 사죄뿐이겠지.

“…정말 오랜만이군요. 괜한 소리를 덧댈 수 없을 정도로 멋진 대화를 나눴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대화가 즐거워 말을 덧대자,

“비판 철학… 역시 어렵네요.”

가장 바랐던 대답이 돌아왔다.

“하하,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신기하네요.”

“이런 식인 만남이 아쉽지만…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끝은 아쉬운 법. 하지만 끝이 있기에 새로운 시작이 펼쳐지겠죠.”

아쉽지만, 이젠 보내줘야 할 시간이다.

“감사했습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아니, 그래…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를 바쳐야 한다는 걸 짐작하고 있던 것일까.

난 상혁이 내민 손을 붙잡고, 내게 낙인처럼 새겨진 힘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점점 흐릿해지던 상혁의 몸이 이내 금빛 알갱이가 되었고, 그것을 모래시계에 담아내자,

그를 머금은 모래시계가 재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준비해야겠군….”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끝마쳐야 좋을까.

그래, 상혁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적당해 보인다.

누구나 쉽게 아는 것이 사고라면, 그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게 철학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지금의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론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온 내 가 마주한 이 남자가.

내가 버텨온 영겁의 세월을 비판해준 덕이다.

그게 이 이야기를 끝마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감사했고, 이 그리운 감각을 놓아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마웠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팬을 내려놓으려 한다.

그게 아쉬우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라는 사람이 그려온 비참한 이야기가 막을 내릴 수 있게 된 거니까.

내게도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테니까.

“제목은 뭐가 좋으려나….”

지금부터는 상혁이 끝마칠, 그리고 새롭게 써 내릴 그의 이야기이기에.

“그라면 해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이 팬을 그에게 전하려 한다.

“그래….”

모래시계가 완전히 사라지자, 나를 감시하던 시계들도 재가 되어 흩어져갔다.

“과거를 바꾸는 방법… 이게 좋겠군.”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온 모양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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