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63. 변화(4)
* * *
#63. 변화(4)
[18년_11월_29일_목요일]
[19:05]
결과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서로에게 고통뿐인 시간만 반복될 줄 알았다.
같은 결과를 반복할 뿐인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써 내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모든 진실을 마주하고 모든 절망을 끌어안았다 한들, 과거를 바꾸는 것만큼은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왔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왔는데, 전부 끌어안음으로써 모든 걸 포기했는데.
불행의 원인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무엇하나 해낼 수 없는 허무한 인생을 견뎌왔는데.
그런데 지금 이곳이라는 과거에, 미약하지만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려 하기 시작했다.
“왜…?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넌 몰라… 네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원망할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기에, 저 자신을 포기하겠다는 비관적 결론에 다다랐던 현지.
그런 그녀가 인생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게 하필이면 윤서였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희망의 주인, 원망의 화살을 돌릴 수 있다면 가장 돌리고 싶었을 존재를 말이다.
“…넌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아 갔어.”
윤서를 바라보는 현지의 두 눈에 시퍼런 서슬이 담겨 있었다.
그건 날 선 과도가 현지의 손목이 아닌, 윤서의 목을 향해 겨눠진 탓.
상혁이 일으킨 작은 변화가 쌓이고 쌓여, 현지의 선택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었다.
가장 바라지 않았을 형태로 말이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모든 걸 빼앗아 갔다고…?”
하지만 윤서는 이런 위험한 상황에 겁도 없이 미간을 세게 찌푸리며 반문하다,
제 목을 겨눈 과도가 아닌, 현지의 두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착한 척, 그거 전부 연기였지?”
“뭐…?”
“…오빠가 참 불쌍하네. 언니가, 아니… 네가 이딴 사람인 줄 알았으면”
“닥쳐…!”
“곁에 있지 않았겠지. 절대로….”
“닥치라고….”
“내가 빼앗았다고? 하… 웃기지 마. 네가 내게서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 간 그날, 웃고 있던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역겹게, 추악하게 웃고 있었을 거잖아. 틀려?”
윤서는 태연한 얼굴로 현지를 도발했지만, 몸이 떨리는 걸 막을 수 없는 탓에 이라도 세게 물었고,
“….”
현지는 이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아무런 대답 없이 윤서에게 몸을 날렸다.
다만, 이런 상황을 전부 유도했던 것인지.
제게 달려오는 현지와 그녀의 손에 쥐어진 과도를 끝까지 바라보던 윤서.
그런 그녀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몸을 옆으로 크게 틀었고, 과도가 목을 스쳐 허공을 베었다.
언젠가 추리 소설에서 읽었던, 상대방의 감정을 격양케 한다는 식의 대처법을 써먹은 것이었다.
곧이어, 윤서는 동작이 커다랬던 탓에 중심이 기울어진 현지를 그대로 밀쳐 넘어트린 뒤,
그녀가 가로막고 서 있던 현관으로 달려 문고리를 당겼지만, 애석하게도 현관문이 열리질 않았다.
현관문에 달린 안전고리 탓이었다.
몇 초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
“…죽어.”
어느새 몸을 일으킨 현지가 윤서에게 다가왔고,
날카로운 과도가 다시 한번 윤서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순간이었다.
“….” / “끄윽…!”
상혁이 네 번째 과거에서 일으킨 변화.
그것이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굉음이라는 형태로 도달한 것이었다.
상혁이 현지의 고백을 거절한다는 새로운 이야기.
그런 이야기와 크게 닿아있지 않았던 윤서는 이 커다란 굉음을 느끼지 못하는 기색이었고,
자신 하나만을 겨냥한 변화를 온몸으로 느꼈을 현지는 전보다 커다래진 고통에 시야마저 흐릿해졌을 테지만,
이미 몸을 던진 직후라는 게 문제였다.
“하읏…!”
아슬아슬했고,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목을 겨눴던 과도가 흐릿해진 시야 덕에 조금 아래로 기울여져 어깻죽지에 박혔고,
제 어깨에 벌어진 상황을 두 눈으로 마주한 윤서는 고통에 벌어진 입으로 소리 없는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
처음엔 그저 뜨겁고, 그런 온도를 수차례 되뇌고 나서야 욱신거려오는 어깨.
하지만 지금이 공포도, 고통도 무뎌질 정도로 다급한 상황인 탓이었을까.
현관에 엎어진 윤서가 벌어진 입을 다물고 몸을 틀어, 제 위에 쓰러진 현지를 강하게 걷어차기 시작했다.
제 어깨에 박힌 칼과 옷자락을 붙잡은 현지가 나가떨어질 때까지.
그렇게 과격한 발길질이 이어지자, 조금씩 나가떨어지던 현지가 붙잡았던 것들을 놓고, 윤서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윽….”
한 번 더 강하게 걷어차여 져, 뒤편으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을 확인한 윤서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안전고리를 빼낸 뒤 현관 밖으로 나섰고,
현지는 그런 윤서에게 또다시 몸을 날렸다.
그렇게 엉겨 붙은 두 여자가 건물 복도로 굴러 나왔다.
“선배… 선배….”
정신 차려야 했다.
윤서는 제 몸을 붙잡은 현지를 발로 걷어차며 앞으로 기어나가 몸을 일으키려 했고,
그것을 견뎌낸 현지는 윤서의 어깨에 손을 뻗어 뽑아낸 과도를 그녀의 오금에 찔러 넣었다.
“도망… 도망쳐야 해….”
뒤늦었다는 걸 눈치채질 못한 것일까.
여차여차 몸을 일으킨 윤서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려 했지만, 어째선지 제대로 걷질 못했다.
한쪽 다리가 무거워진 건, 과격한 몸싸움 탓이 아닌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품고 나서야 아려오는 오른쪽 다리.
그것이 의아했을 윤서가 시선을 살짝 내려 제 다리를 확인했고,
“에…?”
오금부터 종아리 한가운데까지 찢어져 붉은 선혈을 뿜어대는 제 다리를 확인하곤,
하반신 전체에 힘이 풀려, 앞으로 쓰러지듯 넘어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과거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처럼.
전신 이곳저곳을 걷어차인 탓에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었을 현지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던 현지가 쓰러진 윤서의 몸 위로 올라탔고,
두 손으로 움켜쥔 과도를 윤서의 심장에 겨누곤, 달빛을 머금어 새하얀 눈물을 흘렸다.
비참할 정도로 서글픈 색의 눈물을 말이다.
어렴풋했지만, 점점 선명해지는 과거 탓에 마음이 흘리는 감정.
‘미안.’
상혁이 네 번째 과거에서 일으킨 변화, 단 하나의 변화를 분명히 떠올리고 만 것이었다.
“늦었잖아… 늦어버렸잖아…!”
“도대체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이것만큼은… 이것만큼은 정말 간직하고 싶었는데… 이게 마지막 하나였는데….”
전부 놓아준 마음에 남겨둔 단 하나의 보물.
저만을 위한 것처럼 보였던 계절에 피어오른 한 송이 꽃.
그것이 시든 것으로도 모자라, 새까맣게 썩어버렸다.
“하지 마… 저리 가…!”
차라리 모든 진실을 마주한 상혁이 지금의 제게 이별을 고했다면.
그랬다면 이 손을 멈출 수 있지는 않았을까.
“…같이 가자.”
과거를 찾아가 고백을 거절하는 상혁의 모습은 그저, 윤서에게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였기에.
그렇기에 윤서를 내려다보는 현지의 두 눈에 증오만 흘러내릴 뿐이었고,
모든 걸 놓아준 손이 돌이킬 수 없는 미래를, 죽음이라는 막을 그리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