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62화 (62/76)

〈 62화 〉 #62. 그녀의 과거(9) ­ 마지막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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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그녀의 과거(9) ­ 마지막 한 걸음

[18년_11월_24일_토요일]

[09:00]

의식을 되찾은 현지의 눈앞에 펼쳐진 건 익숙한 책상이 아닌, 조금 낯설게 느껴질 천장이었다.

“….”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언제까지나 누워있을 수도 없었기에.

현지는 저릿한 몸을 일으켜, 8년 동안 마주했던 어두운 책상 앞으로 향했다.

책상 위엔 공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절실한 바람이 적힌 일기장이 아닌, 텅 비어있을 뿐인 공책.

그것이 새로운 미래가 펼쳐졌다는 것을 무엇보다 분명하게 의미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토록 시렸던 계절이 되돌아왔다는 것도 의미했기에.

귓가에 맴돌던 부모님의 목소리를 떨칠 수 없었던 현지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허망한 게 아니었다.

거짓말 같은 세상 속에서 거짓말만 반복하던 연기를 더는 이어갈 수 없다는 게 두려운 것이었다.

“싫어… 싫어….”

그리고 시간은 현재를 인정하기 시작한 현지에게로 견디기 힘들 강한 두통을 흘려보냈다.

“…하윽!”

새로운 과거가 기존의 과거를 지우고, 그 자리를 대신 꿰차려는 것이었다.

위험했다.

그토록 바랐던 계절에 심고 온 사랑의 씨앗.

누구보다 절실했던 마음에 낙인처럼 새겨둔 절망의 씨앗.

인형이 바랐던 계절이 사랑이라는 한 송이 꽃을, 현지가 바랐던 계절이 절망이라는 덩굴을.

“상혁아….” / “돌아가야 해….”

전혀 다른 형태의 인격이, 하나의 마음에 공존하게 된 것이었다.

▶▶▶ ▶▶▶

[12:00]

외롭고 쓸쓸한 자취방에서 시작된 이 길은 상혁과 함께했던 따스한 집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현지의 자취방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어 시리기만 할 그녀의 본가로 이어져 있었다.

익숙한 분위기가 현지의 목을 조이듯 환영해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본가 현관문 앞에 서 있는 현지 또한, 이곳에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직감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로지, 절망 하나만을 견뎌내면 됐다.

용기를 낼 필요도, 힘껏 웃어 보일 필요도 없었다.

마주한 현실을 인정하고, 상혁에게 돌아가면 끝이었다.

하지만 현지는 과거에서 두 눈에 최면처럼 걸었던 부모님의 모습을 되새기곤, 자신을 맞이할 그들의 얼굴에 밝은 미소로 화답하겠다는 것처럼.

“엄마, 아빠…!”

있는 힘껏 밝은 목소리를 내며, 굳게 잠겨있던 현관문을 열었다.

“나 왔어…! 어디야…?”

물론, 텅 빈 집 안에선 비참한 목소리만 메아리쳐 돌아올 뿐이었다.

누구도 받아주질 않는다는 게, 더는 최면이 걸어지지 않는다는 게 서러워진 것이었을까.

“아니야… 아니라고….”

현지가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짙은 절망이 휘감긴 마음에 세게 긁어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놓아줬잖아… 이제 상혁이랑 나아가면­”

“난 놓아준 적 없다고…!”

도대체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현지는 정답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기회를 쥐여준 노인도, 무너진 저를 일으켜 준 상혁도, 원래라면 상혁의 옆에 있었을 윤서도 아닌,

제게 소중한 사람들을 되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도망치기 위해, 인형 아래 짓밟힌 척 숨어있던 김현지, 자신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 그래…! 다시… 다시 한번 돌아가면 되잖아… 돌아가서 되살리면 되잖아…!”

그렇기에 자신을 내일이 아닌, 또다시 과거로 떠밀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또다시 과거에 매달려야 했다.

소중한 물건을 찾아야 했다.

서둘러야 했다.

“아니야….”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울려온 목소리가 현지의 행동을 멈춰 세웠다.

“여기가 아니야… 상혁이가, 상혁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덩굴로 감출 수 없었던 한 송이 꽃, 상혁과 함께 내일로 나아가고 싶었던 마음.

인형이 왼손 약지에 끼워진 헐거운 반지를 꽉 쥐고, 과거로 향하려는 현지를 막아서는 것이었다.

“도대체 뭐가 아니야!”

“놓아주면 되잖아, 이젠 놓아줄 수 있잖아! 상혁이가 있잖아….”

“….”

“상혁이 옆에 있으면 되잖아, 분명… 분명 행복했잖아….”

“내가 서 있을 자리가 아니었잖아….”

“하지 마….”

“마지막 하루가, 이 반지가 그걸 증명했잖아….”

“하지 말라고…!”

“너도 느꼈잖아… 상혁이가 사랑한 건, 내가 아니라 제 옆에 서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고….”

“….”

“내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자리, 윤서가 있었던 자리를 사랑했던 거라고….”

가장 바랐던 것들을 떠올려 냈을 때, 마주한 현실이 비참하기만 했을 현지의 이야기.

절망으로 뒤덮이기 시작한 그 이야기는 막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 ▶▶▶

[18년_11월_29일_목요일]

[19:00]

가면 뒤에 숨긴 모습과 가면이라 여겼지만, 진심이 되어버린 모습.

그중에서 저 자신을 구분할 수 없게 되는 마음의 병, 우리는 이를 카그라 증후군이라 부른다.

8년 동안 반복한 거짓말과 연기.

그런 시간이 한순간에 뒤바뀌며 찾아온 두통이 현지의 마음을 병들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병마저도 현지의 선택을 막아서진 못했다.

봄인 줄 알았던 계절의 끝자락에서 사랑을 부정당했고, 그것을 인형도 인정하고 말았기에.

내일로 나아가고 싶었던 꽃이 무기력하게 꺾여졌고,

가장 절실했던 바람은 새롭게 바뀐 과거가 지우려 했기에.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이 마지막으로 현실을 붙잡아 보려 했던 손에 들어간 힘마저 앗아가 버렸다.

다시 한번 과거로 향하겠다는 미련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유일하게 남은 박탈감,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외쳐댈 뿐이었다.

바랐던 것만이 아닌, 자신을 존재케 해준 의미를 잃어버린 현지가 도착한 이곳은 자신의 자취방.

본가에선 차마 할 수 없었던 결심을 이곳에서 이어가려는 것이었다.

“….”

전부 내려놨다면서, 남은 게 하나도 없다면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하려는 손이 주춤거렸다.

마음 깊숙한 곳 어디선가, 상혁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었다.

하지만 현지는 마지막 미련까지도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물어뜯으며 떨쳐냈고,

서둘러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집으로 들어서 부엌으로 향했다.

이곳에선 해낼 수 있을까.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끝나는 것일까.

형광등 조명을 머금어 반짝이는 칼날이 현지의 손목으로 향했지만,

“….”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이 그것을 힘겹게 막아섰다.

“역시 안 되네….”

아직도 살아있는 꽃이, 현실을 붙잡을 힘이 남은 손이 힘겹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사실은 죽고 싶지 않다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현지의 귓가엔 세상을 떠나가기 위한 마지막 길이 만들어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현지는 준비해둔 망치로 낚싯줄을 묶어둔 못을 형광등 아래, 좌우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박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건 며칠간 수도 없이 시도한 자살이 조금 전처럼 실패만 반복했기에.

한번 시작되면 저로선 막아설 수 없을 지독한 방법을 준비한 것이었다.

어느덧 못을 전부 박은 현지가 못 사이에 의자를 대,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마주한 형광등에 낚싯줄을 여러 겹 감아 걸더니 그것을 세게 잡아당겼고,

“튼튼하네… 다행이다.”

이 정도면 안심이라는 것처럼 살짝 웃으며 마지막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결국, 아무도 없네….”

누군가 열어주길 바랐지만, 그 뒤에 갇혀 바라보기만 했던 현관문.

결국은 이것이 제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라는 게 서러웠던 것일까.

웃는 얼굴의 인형이 눈물을 글썽였지만,

“…괜찮아.”

현지는 제 할 일을 꿋꿋이 이어갈 뿐이었다.

바닥에 박힌 못에서 늘어지는 수십 겹의 낚싯줄이 올가미 형식으로 묶여, 현지의 손목에 걸렸다.

목이 조여 숨을 쉴 수 없게 되더라도, 살고 싶다는 미련과 죽음이란 두려움에 멈추고 싶어질지라도.

자살을 멈추기 위한 손이 허리 위로 올라가려 할 때마다 올가미는 점점 세게 조여져, 손목을 아래로 당길 것이다.

이게 인형의 미련도, 저 자신의 본능까지도 막아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로써 준비를 끝마친 현지가 마지막으로 형광등에 묶어둔 낚싯줄에 목을 넣고 눈을 감았지만,

드디어 마주한 죽음의 문턱에서, 내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무너지려는 자에게 내려지는 마지막 벌을 마주해야 했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삶을 포기하려는 상황 속에서도,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야 한다는 벌.

그건 반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유를 증명하는, 신이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

무서웠을 것이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며,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면 제가 누구인지조차 알기가 어려워졌기에.

도망치지 않고 마주한다 한들, 결국은 이 길로 이어질 것만 같았기에.

눈을 감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던 현지가 조용히, 마지막까지도 외로워 비참하기만 한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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