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61화 (61/76)

〈 61화 〉 #61. 그녀의 과거(8) ­ 되돌아온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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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그녀의 과거(8) ­ 되돌아온 계절

[18년_11월_23일_금요일]

[22:00]

현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계획된 것만 같은 하루가 막을 향해 달려갔다.

입에 맞지 않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또다시 가고 싶은 식당.

사람이 없어 적적해도, 손을 붙잡고 거닐었기에 따스하기만 했던 공원.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는데, 되려 달콤하기만 했던 저녁 식사.

현지는 상혁이 준비한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전부 마음속 깊숙이 담아두었다.

물론, 우연히 들른 전시회와 좌석이 전부 매진인 탓에 별수 없이 보게 된 비인기 영화.

그것들을 가장 소중히 간직할 것이었다.

그것들을 제외하면 오늘은 마치, 언젠가 펼쳐진 하루처럼 완벽하게만 느껴졌기에.

계획에서 틀어진 것 같은 데이트 코스.

그것이 끝나가는 시간이 허락해준, 저만을 위한 마지막 선물처럼 느껴진 탓이었다.

그렇기에 현지는 오늘이라는 과거를, 제게 있어서 마지막이 될 따스한 계절을 있는 힘껏 만끽했다.

그리고 시간은 과거의 끝을 알리듯, 현지의 눈앞에 익숙한 거리를 펼쳤다.

“….”

현지가 그런 거리에 이질감을 느끼는 건, 이곳이 그녀가 지내는 자취방 근처여서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은 노란빛을 밝히는 가로등이 수놓듯 펼쳐져 있었기에.

그것을 바라보면 과거가 이대로 쭉 이어질 것만 같다는 희망이 차올랐기에.

현지는 묘한 이질감을 떨치고, 옅은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저도 모르게 앞질러가던 걸음을 멈춰, 반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상혁을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

“…다행이다.”

“살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 아니, 아니야… 상혁이 너랑 함께라서 늘 행복했어. 그런데 오늘만큼은 정말, 평생 기억에 남아있을 것 같아.”

“…현지야.”

현지가 비친 행복한 마음이 계기였을까.

상혁은 머뭇거리던 입술을 세게 물었다가 떼고, 살짝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있어.”

‘그럼 그때 괜찮은 가로등 아래서 말할게.’

“…벌써 두 개밖에 안 남았구나.”

애석했다.

상혁의 청혼을 미루면 그와 함께할 과거도 늘어날 것 같았기에.

그와 함께할 미래를 바라면서도, 제멋대로 그려질 미래는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렇기에 현지는 불안한 기색이 느껴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있잖아…? 하려 했던 말, 그거 내일 해도 괜찮아. 아… 이렇게 말하면 오해하려나…?”

“어…?”

“모래도 좋아. 아니, 다음 주도 다음 달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이라는 관계에서 한 걸음 나아가고 싶었기에.

지금이라는 관계를 놓치고 싶지 않은 현지의 모습을, 이 이상 펼쳐지면 애처롭기만 할 서로의 이야기를.

가장 중요한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상혁은 현지가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제 모습이 한심하다는 듯,

“나도 정말 바보 같네… 후.”

깊게 들여 마신 숨을 짧게 내쉬곤,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할 거야, 꼭 할 거야.”

“언제까지라도, 평생이라도 기다릴 수 있는데…?”

“바보야, 평생 기다리기만 해서 어쩌려고.”

“….”

그렇게 상혁은 현지가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도 모른 채,

“내일로 나아가고 싶어.”

현지가 그려낸 세상에선 흔들린 적 없었던 마음을, 그 올곧았던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너를 언제부터 좋아했을까. 요즘 그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봤어.”

뒤바뀐 과거에서 새로운 미래를 맞닥뜨릴 뿐이었던 상혁.

그런 그가 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순간은 언제부터였을까.

“군대에 있을 때, 네가 내게 고백했던 순간?”

그저 윤서보다 하루 빨랐을 뿐인, 현지가 일으킨 두 번째 변화부터였을까.

“그때가 아니었어.”

“….”

“그렇다면 신입생 시절 학번 MT 때, 생강나무 아래서 밝게 웃던 네 모습에 설렜을 때?”

“….”

“그때도, 대학교 입학했을 때, 이름도 모르던 네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을 때도 아니었고.”

“그럼…?”

“그보다 훨씬 더 예전부터 시작된 감정 같은데, 그런데 어째선지 제대로 떠올려 낼 수가 없었어. 바보 같지?”

“어…?”

제게서 지워낸 기억을 떠올려낸 것이었을까.

상혁은 현지가 덧칠한 서로의 첫 만남을, 서로가 지워버린 그날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근데, 너를 좋아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할까 싶더라.”

“….”

“지금 내가 사랑하는 건 현지 너니까. 그리고 우리는 과거를 살아가는 게 아니니까.”

과거에서 나아갈 자신이 없는 현지에게로.

“나는 너랑 내일로 나아가고 싶어.”

내일로 나아가고 싶은 상혁의 마음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런 소중한 마음을 저도 모르게 피할 수밖에 없었을 현지.

그녀의 시선이 상혁의 뒤편으로 향한 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내일로, 영원토록 나아가길 바라게 됐어.”

사랑하는 남자의 뒤편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어딘가 익숙한 탓이었다.

아니, 그저 익숙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현지는 가슴이 아려오는 그 풍경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노란빛 조명이 밝혀주는 거리의 끝자락, 이질감이 느껴질 만큼 어두운 건널목.

“현지야, 결혼하자.” / ‘윤서야, 결혼하자.’

“아….”

그토록 외면해온 현실을 두 눈으로 마주했을 때.

제가 서 있을 장소는 상혁의 옆이 아닌, 어두운 건널목이라는 것을 떠올렸을 때.

이곳에서 펼쳐졌던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가 아닌 윤서라는 것을 알아챘을 때.

현지의 마음속엔 삶을 포기하겠다던 결심이 돌아와 있었고,

그와 동시에 계절을 거슬러 올라왔던 시간이 봄의 끝을 알려왔다.

“…어.”

현지는 생전 처음 느껴 본 감각, 그 낯선 두통에 눈살을 찌푸리게 됐지만,

그것을 애써 견디고, 상혁에게 활짝 웃어 보이며 청혼의 답을 전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 말은….”

“응, 응… 나도 정말 많이 사랑해. 너와 함께 내일로 나아가고 싶어… 줄곧 그런 생각만 하면서 살아왔어….”

대답이 멈추자, 상혁이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지만,

현지가 그런 상혁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 가슴 앞에 모았던 손을 부서질 것처럼 세게 쥐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내가 정말 급한 일이 생겨서….”

“응?”

“가야 할 곳이….”

“지금…?”

“….”

“…괜찮아, 기다리고 있을게.”

지금의 청혼은 윤서에게서 빼앗은 장면일 뿐이라는 좌절감.

그것을 견딜 수 없었을 현지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상혁을 지나쳐, 저를 위한 장소로 도망쳤다.

두 사람은 두 번 다신 닿을 수 없을 것처럼 멀어지기 시작했고,

현지가 건널목으로 들어서 상혁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

“끄윽….”

현지의 모습이 금빛 알갱이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일기장이 펼치던 과거가, 내일로 나아가지 못한 봄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 ▶▶▶

[18년_11월_24일_토요일]

[06:00]

수많은 시계가 오직 한 사람만을 감시하는 이곳.

제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의 태엽 소리와 구석에 놓인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까지.

난잡하게 뒤섞인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지만,

“흠….”

노인은 평온한 얼굴로, 제 앞에서 펼쳐지는 현상만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너무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탓이었을까.

현지의 모습을 띤 인형이 현재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을까.

현지가 앉아있던 의자에선 옅은 빛깔의 알갱이가 모여들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마른 입을 열었고,

“돌아올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 자리로 향해 옅은 알갱이를 한참 동안 관찰하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을 전부 이해하고 말을 이었고,

“이 자리를 누가 차지하게 되려나요… 뭐, 당신이 바란 대로 인형이라 적어두긴 했습니다만….”

그리고 책상 위에 어질러진 종이 뭉치를 바라보다, 끝끝내 확신할 수 없었던 질문을 전했다.

“근데 사실, 그거 전부 연기 아니었나요? 인형이 아니라, 가면처럼 느껴졌는데 말이죠.”

일방적인 질문과 돌아오지 않는 대답.

이런 상황이 흥미로웠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었기에.

“당신이 뿌려둔 이야기는 이제부터 피어오를 테니까.”

노인은 자신을 감시하는 시계들을 눈치를 살피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손을 들었다.

노인의 손에서 묘한 빛이 내뿜어졌다.

“그래도… 역시 꺼림칙하지만, 저로선 어쩔 수 없네요.”

그리고 그 밝은 빛줄기가 좀처럼 모여들지 못하던 옅은 알갱이를 휘감자, 좀처럼 모여들지 못하던 현지의 모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다만, 무너진 마음으로 8년이라는 시간이 뒤바뀌는 인과를 견뎌낼 수는 없었기에.

현지는 이곳에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고,

“….”

그런 모습에 옅은 동질감을 느꼈을 노인이 자신을 감시하는 시계들을 무시한 채,

“그래, 당장은 쉬도록 하죠.”

이곳을 현지의 방으로 뒤바꾸곤, 씁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역시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던 거겠죠… 그래도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길 바랍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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