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60화 (60/76)

〈 60화 〉 #60. 그녀의 과거(7) ­ 설 수 없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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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그녀의 과거(7) ­ 설 수 없는 자리

[18년_02월_16일_금요일]

[07:45]

속이 거북하리만큼 짙은 어둠과 어깨가 조여들 정도로 시린 냉기가 가득한 자취방.

그건 2월이라는 계절과 이른 시간 탓에 드리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현지가 상혁과 동거하던 따스한 집을 갈망하기에 자아낸 대조적 분위기였다.

“….”

네가 있어야 할 장소는 이곳이라며. 시간이 작게 속삭이고,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마저도 점차 익숙해진 것이었는지.

현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을 책상 위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책상 한가운데 놓여있을 텅 빈 일기장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처럼.

“또 며칠이….”

그것을 옆으로 밀치며, 휴대전화기를 집어 오늘의 날짜를 확인했다.

“16일….”

약 5일 정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현상을 이해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현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혼잣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아침은 안 먹었겠지… 오해하진 않으려나….”

갑작스레 모습을 감춘 것처럼 보일 테지만, 그마저도 괜찮을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사라져도 오해받지 않도록 언질을 남겨둔 탓이었다.

‘동거는 좋지만,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갑자기 사라져도 오해하지 않기…!’

그리고 그런 거짓말이 통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제가 없는 집이 익숙했던 것인지.

상혁은 현지의 언질에 한 치의 의심도, 단 한 번의 의문조차 가져주질 않았고,

그런 탓에 현지의 휴대전화기엔 부재중 연락 기록이 한 통도 없는 것이었다.

5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미래는 현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자연스러운 미래가 만들어졌을지를 파악해야 했지만,

“출근 준비부터 해야겠지….”

현지는 아무런 의문도 가지질 않았다.

그저 퇴근하고 상혁의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거니, 이게 제가 그토록 바랐던 따스한 계절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최선인 탓이었다.

제가 느낄 불안감을 내색할 수 없었기에, 내색하더라도 알아차려 줄 사람이 없었기에.

현지의 머릿속엔 상혁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다는 하나의 바람과 언젠간 돌아가게 될 미래에 대한 불안만 가득할 뿐이었다.

현지를 집어삼킨 불안이, 인형의 목을 조이듯 차올라 있었다.

짙게 깔린 어둠과 시린 냉기는 현지에게서 흘러나온 부스럼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걷는 이 길이 마지막으로 붙잡아 본 희망이었기에.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뿐이었다.

현지는 불도 켜지지 않은 방에서 잠옷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고,

“….”

좁아진 공간 탓에 제게서 흘러나온 분위기를 견딜 수 없게 된 것처럼.

한 번 흘리기 시작하면 멈추지 못할 것 같았던 눈물까지도 숨기기 위해, 서둘러 샤워기를 틀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내일이 끊어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건 과거로 돌아오면서까지 붙잡고 싶었던 소중한 사람들을 놓아준 순간부터였을까.

그게 아니면 일기 적는 것을 소홀히 여긴 순간부터였을까.

그토록 절박했던 마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을 알 수 없었기에.

언제라도 끊어질 것 같은 관계가 과거의 끝을 예고하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지금이 과거라는 것부터 제대로 인지해야 했다.

무뎌지던 현실감을 떠올려내야 했다.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려내야 했다.

마지막으로 붙잡은 이 길이 제가 그토록 바랐던 길인지 판단하며 나아가야 했다.

그러지 않고 현재로 돌아간다면, 절망에 늪에 잠겨있던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땐 분명 늦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현지라는 가면을 쓴 인형에겐 지금이라는 과거가 유일한 현지였기에.

8년이라는 시간의 끝이 상혁이 마주했던 낭떠러지와 이어져 있다는 것도,

또다시 깊은 절망으로 떨어질 자신을 붙잡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모른 채,

아문 줄 알았던 마음에서 흘러내리는 절망을 발판삼아 과거를 그려갈 뿐이었다.

현지가 몸을 적셨을 뿐인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섰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가장 먼저 쥐어진 옷을 꺼내 입은 뒤,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와… 지각하겠다, 지각….”

배웅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된 건 꽤 오래였지만,

“엄마랑 아빠는 뭐 하고 있으려나….”

현지는 씁쓸한 표정이 아닌, 고개만 살짝 갸웃거리며 현관을 나설 뿐이었고, 그런 순간이었다.

“…음?”

발치에서 무엇인가 쓸리는 소리에 바라본 바닥.

현관문 아래엔 편지 봉투가 쌓여있었다.

그건 며칠 만에 모습을 드러낸 현지의 모습을 발견하곤, 계단 옆으로 몸을 숨긴 상혁이 적은 편지.

정확히 말하자면 윤서와 헤어지고, 그녀를 붙잡기 위해 적었던 편지.

그런 편지가 드디어 현지에게 전해진 것이었다.

▶▶▶ ▶▶▶

[18년_11월_23일_금요일]

[02:00]

현지의 모습을 띤 인형일지라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를 수 없었기에.

그렇기에 인형은 다가올 아침이 두려워,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어떤 식으로 막을 내리는지가 아닌, 과거의 끝에서 펼쳐질 새로운 미래가 두려울 것이었다.

상혁마저도 자신을 떠날 것 같다는 불안을 떨쳐낼 수 없었고,

제가 그린 적 없는 미래가 그려지는 걸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상혁에겐 제가 소중하지 않았던 것인지.

제가 과거를 바꾸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서 있을 사람은 누구일 것인지.

정답을 알면서도, 인형은 그것을 마음에 그리려 하지 않았다.

제 모습이 비참해서, 또다시 초라해져서.

상혁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지만, 그런 생각을 떨쳐낼 수 없는 건,

사랑하는 남자의 기억은 어딘가 왜곡되어 있었고, 과거 또한 이질적이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뱉어본 게 바로 지금이었다.

“너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았을까?”

원래의 과거에서 상혁의 연인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하지만,

상혁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처럼 살아온 인형이었기에, 바라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 옆에 누워있는 남자의 마음이 제게 향해있기를, 그에게 단 한 명뿐인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어? 자는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

그건 욕심이라면 욕심으로 보일, 맹목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무슨 일 있어…?”

“…너는 분명, 내가 아니어도 행복했을 거야.”

이 정도 욕심마저 죄가 된다면, 인형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야 했던 것일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없잖아.”

바라던 대답이 돌아왔는데도, 인형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흘린 눈물에 되려 당황한 인형은 고개를 베개 쪽으로 파묻자,

그보다 당황한 얼굴의 상혁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내가 무슨 잘못 했어?”

“…그런 거 아니야.”

오늘이 지나면 무서운 일만 펼쳐질 것 같았기에.

인형은 상혁의 품에 안겨 불안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었지만,

“그냥 물어본 거야. 갑자기 이상한 말 꺼내서 미안. 괜한 말 했네. 그만 자자.”

그것을 말할 수 없어, 마음에도 없는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어… 응.”

분명 이어진 것처럼 보이는 둘이었지만, 이건 그저 얽혀있는 것일 뿐이었다.

둘의 관계는 한쪽에서 매듭을 풀기 시작하면 곧바로 떨어질 것처럼 헐겁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아는 게 인형이었기에.

인형은 제가 묶은 매듭이 풀리지 않도록 열심히 조여왔지만, 그건 약지에 끼워진 헐거운 반지처럼.

아무리 조이고 조여도, 서로의 관계는 예쁘게 매어진 리본처럼 쉽게 풀리려 할 뿐이었다.

이것이 풀리면 상혁은 떠날 것이고, 그걸로도 부족해 저를 미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

인형이 그런 불안에 잠기려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에 맞추는 거라 걱정했는데, 조금 크네….”

인형의 약지에서 헐거운 반지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반지가 끼워졌다.

“그래도 일단,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 음….”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가 저만을 위한 것처럼 들려왔기에.

“…해야 할 말이 있어. 그, 내일 자기 쉬니까 데이트 가자. 공원에서 산책도 하고, 우리 처음 데이트했던 명동도 가고, 평범하게 영화도 한 편 보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도 먹자.”

힘있게 울려온 목소리가 저와의 추억을 외치고 있었기에.

“그쯤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둡겠지…?”

어두웠던 얼굴은 가장 바랐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럼 그때 괜찮은 가로등 아래서 말할게.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입가에 작은 미소를 그렸지만, 새롭게 끼워진 반지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헐거웠기에.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너란 사람 덕분에 늘 행복해.”

그것이 의미하는 과거를, 다가올 미래를 직감할 수 있었던 인형은 차마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좋은 꿈 꿔.”

사랑이 가득한 내일을 그리는 상혁에게 제가 그린 슬픈 미소를 보이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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