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59. 그녀의 과거(6) 두 번째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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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녀의 과거(6) 두 번째 변화
[15년_01월_03일_토요일]
[16:00]
세 사람 사이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정말 긴 시간이 흘렀다.
그건 현지의 노력으로, 더 이상의 변화가 두려웠을 마음이 지켜낸 과거였지만,
과거는 오늘이 되어서야, 매일같이 찾아오는 오늘이 늘 불안하기만 했을 현지에게로 갑작스러운 비보를 전했다.
윤서 아버님의 부고 소식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이곳, 윤서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 마주하게 된 건, 상주 자리에 서 있는 상혁의 모습이었다.
애석하게도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해했다 한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어째서 저 자리에 상혁이 서 있는 것인지.
제가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의 관계가 선후배에서 발전한 것인지.
“….”
새롭게 그려가는 과거를 받아들인 뒤로 아물어가는 줄 알았던 상처가, 그저 잠겨있었을 뿐인 상처가 드러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현지는 어떤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윤서의 마음이 찢어지게 아프리란 걸 이해할 수 있는 탓일 테지만,
그 아픔을 공감했다는 것부터가 잠겨있던 마음이 드러났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현지가 멍하니 벌렸던 입을 다물며 빈소 안으로 들어섰다.
“언니….”
며칠 사이에 잔뜩 수척해진 얼굴의 윤서가 눈치를 살피며 인사해오자,
현지는 윤서 아버님께 재배한 뒤, 몸을 틀어 상주 측에 절을 올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빠가 아프셨었거든… 그래서….”
“기운 내야 해, 아버님 걱정 끼치면 안 되잖아.”
“…응, 응. 기운 낼 게. 고마워.”
짧은 위로와 그에 부응하는 대답이 오고 갔지만, 바로 옆에 서 있는 상혁은 묵묵히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현지는 차오른 불안감을 흘리듯, 상혁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휴가 나왔구나…? 윤서 잘 챙겨주고 있었어?”
“…응. 밥 먹고, 편히 쉬다 가. 나중에 연락할게.”
“….”
냉랭했다.
그 정도가 옆에 서 있던 윤서를 당황케 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런 탓에 윤서가 어느 정도 설명을 덧대보려는 것처럼, 상혁과 현지의 눈치를 살피며 끊어진 대화를 이어나갔다.
“언니, 그게… 그… 내가 경황이 없어서, 나도 모르게 선배한테 도와달라고 했거든…?”
“아, 응….”
“그런데 오늘 아침부터 말이 적네… 오신 분들께 간단한 인사만 드리더라고….”
“상주 예절이려나… 그렇겠지, 상혁이니까. 그래, 나도 말이 너무 많았네.”
“…선배, 선배! 언니 왔는데”
“아니야, 우리가 틀린 거니까. 나도 가서 밥 먹고 조금 쉬다 돌아갈 게.”
“….”
슬픈 기색도, 수척해진 몸 상태도 내색해선 안 되는 자리.
상주 자리를 부탁받았다는 건, 죄인의 자리를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윤서의 가족과 남이면서 그런 자리를 부탁받은 상혁은 사사로운 사담을 펼칠 수 없었다.
그저 선배일지라도, 이런 자리가 낯설지라도.
죄인의 자리에선 말을 아끼고 짧은 고마움과 사죄만 표현해야 했다.
그렇기에 상혁이 오늘 새벽부터 꺼낼 수 있었던 말은 두 가지 정도뿐이었다.
‘윤서 대학 선배입니다.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고인이 떠나는 마지막 자리를 찾아줘서 감사하다는 인사.
그리고 고인이 세상을 떠난 이유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막아서지 못한 자신에게 채찍질하듯 짧은 사죄를 표하는 것까지.
윤서의 가족에겐 타인일 뿐인 상혁이, 가족도 해내지 못한 최선의 예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오래된 예법을 알아차려 주는 사람이 이 자리엔 적을지라도.
그것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지키는 것이 윤서를 지켜주지 못했던 상혁의 속죄였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아버님이 안심하고 떠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어른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
다만, 그런 모습이 현지에겐 끝없는 불안감만을 전해줬기에.
그것을 견뎌내는 게 버겁기만 했을 현지가 조용히 등을 돌려, 빈소를 나섰다.
서운했을 것이며, 괴로웠을 것이다.
직접 나서는 것이지만, 내쫓겨진 것처럼 느껴졌을 제 모습.
현지의 얼굴엔 과거로 돌아왔을 때만큼 짙은 어둠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보다 강한 불안이 차올라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사랑은 용기를 낼 수 있는 자만의 특권이다.
하지만 현지에게는 사랑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그렇기에 상혁과 윤서 사이에 끼어들 틈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내일로 나아가는 상혁과 그를 뒤따라 걷는 윤서의 뒷모습, 그런 모습을 저만치 뒤에 서서 바라볼 뿐인 저 자신.
시간은 상혁과 윤서를 이어주려 할 뿐이었다.
누구의 편도 아니어야 할 시간이 그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이었다.
제가 먼저 찾아냈는데, 제가 먼저 다가갔는데.
그런데 어째서 제게서 상혁을 뺏어가려는 것인지.
현지가 윤서라는 존재를 미워하고, 원망할 수밖에 없게 된 순간을 찾는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었다.
노란 꽃이 가득 그려졌던 도화지가 어둡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가슴이 아려올 만큼 절실했고, 그런 아픔을 숨겨가며 갈망해왔기에.
현지는 상혁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이제는 결정해야 했다.
숨겨왔던 마음을 전해야 했다.
다가올 내일을, 과거를 바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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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_01월_17일_토요일]
[14:50]
연락하겠다는 말을 믿고, 휴대전화기만 하염없이 바라봤지만,
상혁은 휴가를 나왔던 15일간, 현지에게 단 한 통의 문자도 보내질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든 지쳐 떨어져 나갈 수 있었고, 그러기 충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여자였다면 가능할 이야기.
현지는 이질적이리만큼 낯설어진 관계가 원래의 과거라는 걸 모른 채,
괴롭고 두려움만 가득 찬 마음을 안고, 상혁이 근무 중인 부대로 향했다.
이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뿐일 것이었다.
제가 아닌 윤서가 소중한 거라면, 어차피 빼앗길 거라면, 끝끝내 제 모습을 돌아봐 주지 않는다면.
상혁에게 제 마음을 전해, 고개를 돌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현지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직전, 휴대전화기를 꺼내 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 마음을 전하면, 최소한 윤서가 상혁에게 고백하는 일만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상혁이 제 고백을 받아줄지 모르니까, 그의 마음속에 누가 자리해 있는지 모르니까.
구태여 제 선택을 통보하려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상혁을 제 것이라 여겼기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채 말이다.
[여보세요?]
“응, 뭐해?”
[병원이야, 피곤해… 언니는? 아, 무슨 일 있어?]
“으응. 난 상혁이 면회 가는 중이야.”
[어? 아, 응… 이번에 휴가 나와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들어갔는데, 미안하네….]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무엇인가를 눈치챈 것인지.
윤서가 상혁에게 미안하다는 식으로 대화 주제를 돌리려 했지만,
“저기, 윤서야.”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마친 현지의 입을 막는 건 무리인 일이었다.
[….]
“사실, 나 오늘 상혁이한테 고백하려고.”
[어…?]
“너한테는 일러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전화한 거야.”
[아… 응, 드디어 하는 거구나….]
“응, 상혁이 많이 좋아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쭉, 좋아해 왔어.”
[…근데 이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네 마음을 오해한 것 같아서. 아니, 오해한 거면 좋겠어서… 그래서 전화한 거야.”
[….] / “….”
서로가 같은 마음이란 걸 알아챈 두 사람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지만,
제가 한 발짝 늦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윤서였기에.
[둘이 사귄다고 나 따돌리면 안 된다? 그리고 나 일이 있어서, 이만 끊어야겠네….]
“…응, 고마워.”
수많은 감정이 오가던 통화가 끊어졌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는 좀처럼 흩어지질 못했다.
그리고 그런 무거운 분위기를 지나 도착한 군부대.
“할 수 있어, 괜찮을 거야….”
현지가 택시에서 내려, 정면의 군부대를 향해 달려갔다.
고통은 버틸 수 없다는 능력 탓에 발생한다.
즉, 불행의 원인은 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현지는 자신과 과거를 바꿨다.
진학할 대학교를 바꿔서 그려낸 새로운 이야기, 일으킨 변화라곤 그 정도뿐이었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넘겨, 다시 한번 새로운 도화지를 마주해야 할 순간이 찾아온 것이었다.
“상혁아…!”
“넘어지겠다, 그나저나 빨리도 왔네. 그 짐은 뭐야?”
“음, 뇌물이려나…?”
“응?”
“…평소보다 더 예쁘게 봐달라는 뜻!”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내려는 현지에겐 여느 때보다 눈부신 햇빛이 내리비쳤고,
그런 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상혁도 수줍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질적이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현지가 바라는 상혁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현지가 그려낸 세상, 상혁과 윤서가 살아갈 세상.
이 두 가지 시간이 뒤엉킨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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