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58. 그녀의 과거(5) 세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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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그녀의 과거(5) 세 사람의 이야기
[11년_03월_02일_수요일]
[17:50]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음속에 피어오른 꽃은 그날처럼 생생한데도.
현지는 상혁에게 그런 마음을 전하지 않았다.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크기. 이것을 전하면 상혁이 부담을 느낄 것 같았기에.
더는 혼자서 견뎌낼 자신이 없는 내일. 그것을 함께 걸어줄 상혁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라도, 당장은 지금의 관계로 만족할 뿐이었다.
남몰래 피운 꽃을 친구라는 관계 뒤에 숨겨놓는다 해서, 그런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현지는 옷단을 붙잡고 수줍게 떨어대는 손을, 사랑을 머금어 부끄럼에 꾹 다문 입을.
언젠가는 상혁이 제 모습을 고개를 돌려 바라봐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 정도 거리감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모든 것을 놓쳐버린 현지일지라도 상혁만큼은 놓치지 않으리라, 제게서 떠나지 않아 줄 거라며 안심할 수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과거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상혁에게는 따스하지만, 현지에게는 차가운 색으로 돌아가려 했다.
정해진 섭리처럼 말이다.
“오늘은 여기서 마쳐야겠군.”
교단에 서 있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교수가 출입문 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곧바로 개강총회였지? 이번 학기도 잘 부탁한다.”
“네,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새 학기를 여는 개강총회. 그것이 2학년 전공수업이 끝난 강의실에서 곧바로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맨 앞 구석, 창가 옆자리에 앉아있던 상혁과 현지.
오랜만인 수업에 피곤함이 몰려온 현지가 기지개를 짧게 켠 뒤, 전공수업 교재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벌써 2학년이네. 아무튼, 과대표 씨! 올해도 잘 부탁드려요?”
“…잘 부탁해.”
그러자 상혁은 귀찮다는 내색은 감추지 않겠다는 식의 기운 빠진 대답을 전하다, 잔뜩 구겨진 얼굴을 전공수업 교재에 파묻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해야 하는 거냐… 복학생 선배들 있잖아… 동기들은… 어휴… 됐다, 됐어.”
“옆에서 열심히 도와줄 테니까, 기운 내자…!”
“임원은 장학금도 나오는데, 다들 마다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니까….”
“음, 10학번 아무개 씨도 굉장히 마다하고 계신 것 같은데?”
“…그러게.”
움직일 기색이 없어 보이는 상혁의 필기구를 대신 정리해주다, 그의 기운을 북도와 줄 방법이 떠오른 것이었을까.
싱긋 웃어 보이던 현지가 고개를 상혁의 어깨까지 기울이고 말을 이었다.
“남자애들은 전부 군대 갔으니까, 익숙한 청일점에 기대는 게 아닐까? 상냥하기도 하고…!”
“익숙한 남자… 즉, 편하게 부려 먹을 수 있는 남자… 요약하자면 노예 1호네….”
“아니, 아니! 그건 상혁이 네가 힘든 일 도맡아서 하니까 그런 거잖아!”
“그럼 학과가 문제였네… 어째서 국문과엔 남자가 적은가… 아… 사회가 문제려나….”
“안 돼, 잡념 멈춰!”
현지는 생각에 잠기려는 상혁을 붙잡기 위해, 겉옷 아래 감춰진 팔뚝을 드러내며 말했다.
“봐, 근육도 잔뜩이잖아. 나도 무거운 거 들 수 있어!”
물론, 현지가 그곳에 힘을 준다 한들, 암만 봐도 가녀릴 뿐인 팔뚝에 힘이 드는 부탁을 하는 건 상혁에겐 무리인 일이었다.
“와, 정말 의지가 되네.”
“…못 믿겠으면 만져봐! 진짜 단단하다니까?”
“그, 원래 뼈는 단단 아니다….”
이제는 사담을 나눌 기운도 없어진 것인지, 잠시 들렸던 고개가 다시 교재 속으로 파묻혀 버렸다.
“기운이 없네… 학회장 선배 오시기 전에 잠깐 쉬고 올래? 두 시간이나 참았잖아. 나도 잠깐 바람 좀 쐬고 싶고!”
“…차라리 끊으라고 해.”
“응? 내가 끊으라고 하면 끊을 거야? 진짜?”
“…생각해보면, 정말 쉬웠던 의제도 현지 네 입을 통하면 무척 어려워진단 말이지.”
“음…? 왜…?”
“…됐다.”
이번엔 또 어떤 부분이 신경 쓰였던 것인지.
생각에 잠기게 된 상혁이 교재 위에서 고개만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뭐야! 아직 끊으라고 할 예정 없어! 저기요, 저기요. 이상혁 씨…!”
현지가 새침데기처럼 입술을 내밀고, 그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그렇게 자신들에게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다정한 모습만 보이는 두 사람을 지나, 강의실 뒷문으로 또 다른 재학생들이 들어섰다.
“이야, 이제 10학번도 선배야? 다들 앞으론 술 사달라고 전화하지 말도록.”
“벌써 헌내기 취급…?” / “어차피 안 불러요!”
“네, 네. 그래서 현지랑 상혁이는?”
“음… 오, 저기 앞에서 꽁냥거리고 있네.”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도, 신입생이 뒤편에 줄지어 서 있는데도.
재학생들의 최대 관심사는 여전한 모양이지, 3학년 임원 둘이 상혁과 현지가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현지 하이! 잘 지냈어?” / “한쪽은 죽어있네?”
“어! 아람 선배, 영준 선배! 두 분 다 방학 잘 보내셨어요?”
현지는 선배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지만,
“오셨네. 아니, 왜 오셨대… 졸업 안 해요?”
상혁은 그런 목소리가 질린다는 것처럼, 창가로 돌린 고개 탓에 열려 있는 한쪽 귀를 가리며 물었다.
“저기, 우리 이제 3학년인데…?”
“차갑다, 차가워! 나한테도 현지한테 해주는 거 반만큼만 상냥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
“상혁이는 모두한테 상냥하다고요! 저번에 답사갔을 때, 아람 선배 파스 챙겨준 게 누구였는데!”
“어머, 현지는 이런 부분에선 기억력이 말도 안 되게 좋더라? 설마 나한테도 질투하는 걸까나….”
“에…?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역시 무리다. 아직 예정도 없다 했고, 얼른 다녀올게. 아람 선배랑 놀고 있어.”
“어…? 응, 다녀와!”
“영진이 형, 저 먼저 갑니다.”
“야, 야. 같이 가!”
두 남자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강의실을 나서자, 아람이 슬쩍 웃어 보이며 대화를 이었다.
“네 남자 친구, 조금 이상하네?”
“남자 친구 아니라니까요!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현지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반응을 보이자, 아람이 상혁의 자리에 앉아 고개를 저어대며 말했다.
“틀려, 그리고 조금 전 반응을 보면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
“응? 뭐가요…?”
“아직 예정도 없다는 말. 그거 네가 했던 말 아니야? 혹시 담배 끊으라고 했어?”
“어… 조금 전에 비슷한 대화가 오가긴 했어요….”
“맞네, 맞아. 혹시 이거 전세 역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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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
“여기까지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입생 인사 듣고, 11년도 1학기 개강총회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학회장의 말을 끝으로 앞자리에 모여 앉아있던 신입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단으로 올라섰다.
그러자 현지는 신입생들의 얼굴이 살짝 굳어있다는 것을 느끼곤, 상혁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다들 떨리나 봐… 어떡해…!”
“어이, 여기 2학년 부과대표가 너희들 긴장한 것 같다고 걱정된단다.”
“바보야…! 아니, 그 얘들아…! 무서운 거 시키는 거 아니니까, 아자, 아자…!”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올해도 볼 수 있다는 게 즐겁다는 듯.
“큭큭, 너흰 아직도 그러고 있냐.”
교단 끝자락에 서 있던 학회장이 피식 웃으며 진행을 이어나갔다.
“다들 긴장할 거 없고, 간단하게 이름 하고 인사만 부탁할게. 그래, 상혁이가 예 좀 들어 봐라.”
“하필 접니까….”
“간단명료하게! 너니까 가능한 거 아니겠어?”
“예, 예… 음, 충청도에서 온 이상혁입니다.”
“끝이지? 자, 저렇게 어두울 필요는 없고… 그럼, 현지야 부탁 좀 할게.”
“아, 네…! 음, 안녕하세요! 김현지입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지만, 선배님들하고 가깝게 지내고 싶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악례랑 선례가 딱 나왔네. 역시 합이 잘 맞는다니까.”
“하아…?”
“아무튼, 맨 오른쪽부터 시작!”
상혁과 현지의 도움으로 굳어있던 분위기가 살짝 풀어지자,
신입생들도 졸이던 마음을 놓아준 것처럼, 오른편에 서 있던 학생부터 차례로 인사를 시작했고,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러 자기소개 순서가 막바지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부산에서 온 김경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 부산 좋네. 어디? 방학에 서면 다녀왔는데.”
“장산역 쪽입니다!”
“오! 어딘지 전혀 모르겠군!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네?”
“와, 사회 구려.”
“상혁아 다 들려, 그러다 이따 죽을지도 몰라!”
“…와, 재밌다. 다음은 누굴까, 정말 기대된다.”
“옳지, 그럼 다음… 오, 벌써 마지막이네?”
왼쪽 끝자락에 서 있던 마지막 신입생, 그녀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이윤서입니다.”
“…끝?”
“…서울에서 왔습니다.”
“어… 음,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악례로 남겨졌던 것보다 훨씬 짧은 인사.
그것에 강의실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고, 박수를 보낼 순간을 놓친 탓에 분위기마저 가라앉았지만,
“오… 훌륭한 친구네.”
상혁만큼은 윤서의 자기소개가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묘한 기분을 느꼈을 현지가 작게 물었다.
“왜? 혹시 아는 애야…?”
“아니, 그냥 조신하구나 싶어서.”
“아….”
현지가 덧그려진 세상에 상혁과 윤서의 첫 만남이 그려지려 했다.
원래의 과거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려는 것이었고,
그건 현지의 마음에 불안이 피어오른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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