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57. 그녀의 과거(4) 생강과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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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그녀의 과거(4) 생강과 동백
[10년_04월_02일_금요일]
[14:00]
전공수업 첫날, 흡연장에서 담배를 피우다 선배들의 눈에 띄어 엉겁결에 1학년 과대표 후보에 지원하게 된 상혁.
유일한 후보였던 상혁이 과대표로 선출되자마자, 부과대표 자리에 자진해서 지원한 현지.
여기까지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엔 갖가지 소문이 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현지는 교양수업 때도, 전공수업 때마저도. 언제나 늘 상혁의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괜한 소문에 아랑곳하지 않을 뿐이었지만, 그게 보란 듯이 장작을 넣어대는 행동처럼 보였기에.
둘은 사귀는 중이라는, 각자의 자취방이 있지만 동거하고 있다는, 그런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는 식의 뜬구름 같은 소문이 퍼져 나갔고,
‘솔직히 말해 봐, 둘이 사귀지?’
‘하… 그만 좀 하세요.’
‘어…?’
‘저야 군대 다녀오면 끝인데, 현지 얘는 어떻게 지내라고 그런 소문 퍼트리고, 또 믿어주는 겁니까.’
‘아니, 그 소문을 우리가 퍼트린 건’
‘가십거리는 저 하나로 참아 주시죠.’
‘상혁아…! 일단 듣자, 응? 선배도 우리 걱정돼서 물어보신 거잖아… 그렇죠, 선배?’
‘아, 응! 당연히 그렇지!’
‘그런데 선배, 저도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씀드리고 싶은데… 제가 상혁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제 쪽에서 억지로 붙어 다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도 같은 이유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그리고 이미 친해.’
‘어… 응…!’
그것을 해명하기 위한 첫 번째 술자리에서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저 자신이 아닌, 서로를 챙길 뿐인 해명은 소문이라는 불길에 기름을 부어준 꼴이었다.
그런 탓에 한국대 국문과에 일어난 불길은 3월이 지나서도 잡히질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까지나 구전될 달콤한 설화가 탄생한 것이었다.
거기에 오늘은 지난주에 있었던 학과 MT에 이어, 신입생만 참여 가능한 동기 MT를 오게 된 날.
국어국문학과 신입생으로서 지역 문학을 조사한다는 명목상 목적이 갖춰져 있지만, 그들이 타고 온 전세 버스에서 내리는 짐 중 5할이 술이었기에.
평소보다 혼란스러울 광란의 술자리를 위해, 놀러 왔다고 보는 게 당연했고,
그 중심에 소문의 주인공 상혁과 현지가 서게 될 것 또한 예견된 일이었다.
햇살은 가볍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오는 이곳을 단체 숙소로 예약해 두었던 상혁.
그런 그가 여태껏 보인 적 없던 속도로, 아주 빠르게 짐 정리를 마치고서 모습을 감추자,
상혁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현지가 당황한 얼굴로 동기들에게 물었다.
“어… 얘들아 혹시 상혁이 봤어? 안에 들어갔나?”
“조금 전에 숙소 뒤편으로 가더라.”
“아, 고마워! 얼른 가서 데려올 게!”
“얼른 데리고 가 아니라, 천천히 즐기다 와!”
“아이참, 뭐라는 거야! 얼른 데려올 게!”
피식거리는 동기들을 등지고 향한 숙소 뒤편엔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상혁을 찾던 현지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그 길에 매료된 것처럼 그곳으로 발을 내디뎠고,
저만치 앞 나무 주변에서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발견하곤 서둘러 그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펼쳐지는 배경은 흡연장으로 삼긴 아쉬운, 소곳하고 푸르른 봄의 모습이었다.
선선한 봄바람에 흩날리는 담배 연기, 그 앞으로 펼쳐지는 푸른 잔디가 가득한 언덕의 풍경.
멀찍이 산에서 들려오는 수풀 소리, 뒤편에서 풍겨오는 알싸한 꽃내음.
그 길의 끝자락에 도착한 현지가 상혁을 발견했다.
상혁은 봄이라는 풍경에 잠기기 좋은 나무 아래 의자에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찾느라 진땀을 뺐다는 듯, 볼에 바람을 넣어대던 현지가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
“…들켰네.”
그러자 상혁은 의자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켜, 반쯤 피운 담배를 신발 밑창에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너도 앉아서 쉬어, 경치 좋아.”
“응, 기분 좋은가 봐? 얼굴에 다 적혀있어.”
“최근 들어 가장 편안하네.”
“최근 들어?”
“뒤편이 조용하잖아.”
“응?”
“한 달 동안 들었던 수업보다, 뒤편에서 들려온 수군거림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아.”
“…아, 미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당연한 거잖아. 너랑 나랑 사귄다는데, 그거 신경 안 쓰일 남자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
“그런가…? 그럼 좋아?”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조금 빙 둘러 물어본 질문에 반응해준 것일까.
현지는 제 시선을 피하며 의자에 기대 눕는 상혁의 옆모습을 골똘히 바라보다,
“풋….”
그곳에 함께 기대, 하늘을 반쯤 가리는 노란색 꽃이 핀 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봄은 역시 노란 꽃이 어울리네, 엄청 예쁘다.”
“노란색 좋아하더라.”
“어…? 어떻게 알았어?”
“옷은 둘째 치고, 분위기가 그런 느낌이니까.”
“음… 맞아, 노란색 좋아해. 봄이 떠오르잖아.”
“그러게, 좋네.”
“응, 정말 좋아해. 아, 봄이 좋다는 뜻이다…?”
“…나도 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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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_04월_03일_토요일]
[00:30]
해가 질 무렵에 시작된 고기 파티, 그것을 겸해서 펼쳐진 술자리.
주량을 잘 모르는 스무 살뿐이었기에 분위기는 계속해서 과열됐고,
30명가량의 성인남녀가 2시간도 안 되어서 소주 두 짝을 비운 뒤 준비한 건 다음 술자리였다.
조금 쌀쌀해진 야외 바비큐장을 정리하고, 숙소에 들어가 다음 술자리를 이어가려는 것이었다.
혼잡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조금 달콤한 분위기를 풍기던 동기 두 쌍 정도가 모습을 감추자,
열이 잔뜩 오른 남자 동기들은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다며 여행을 떠났고,
이미 잔뜩 취했으면서 다음 술자리를 준비 중인 몇몇 동기들이 숙소를 어지르고 있지만,
바비큐장 구석에서 주인 모를 따스한 토사물을 발견한 여자 동기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논의를 진행할 뿐,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조금 많이 흘러서야 시작된 두 번째 술자리.
숙소 거실에서 이어진 술자리에 곧바로 술 게임이 시작된 탓이었을까.
밤을 새워서라도, 아침을 마주할 때까지 술을 마시겠다던 자칭 주당들까지도 12시 정각을 못 넘기고 전멸해버린 지금.
이곳에 펼쳐진 참상을 멍하니 바라보는 건 상혁과 현지, 단 둘뿐이었다.
“어떡하지…?”
“인원부터 살피자. 현지 네가 여자 방 인원 체크 좀 히끅.”
“아니, 아니! 내가 할게. 그러려고 술 대신 마셔준 거잖아… 먼저 들어가서 자.”
“됐어… 남자 방 개판이야. 확인하고 올 게.”
“그래도….”
“그래도는 뭔 그래도 히끅. 확인하고 올 게.”
“바보… 은근히 고집 세다니까….”
사실,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던 둘이었다.
그렇기에 술에 취한 동기들을 챙기기 위해 술을 마시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사유로 술을 권하지 않을. 아니, 강요하지 않을 동기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애초에 술을 잘 못 마시는 현지 대신, 상혁이 대신해서 마시자는 협상안을 내밀었고,
그런 탓에 지금 이곳에 잔뜩 취한 주정뱅이 흑기사 상혁과 그를 걱정하는 멀쩡한 여인 현지의 모습이 그려진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인원 파악을 마친 상혁이 비틀거리며 남자 방에서 나오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현지가 자연스럽게 부축하며 물었다.
“몇 명 있어?”
“여섯 명….”
“남자는 작은 방에 여섯, 거실에 셋. 여자 방엔 열다섯 있었고, 두 명은 샤워 중, 그리고 조금 전에 은지랑 수진이 나갔으니까….”
머리로 덧셈을 하면서, 고개를 치켜들고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모습.
“어? 스물여덟? 남자랑 여자 한 명씩 비는데…?”
그 모습이 무척 귀엽게 보였을 테지만, 웃긴다는 식으로 넘기려는 것인지.
상혁이 현지의 이마를 툭 치곤, 그녀를 지나치며 대답했다.
“아야….”
“거실에 서 있는 이상혁이랑 김현지까지 더하면 서른이잖아.”
“아…! 그럼 다 있네! 그럼 이제 들어가서 쉬어, 피곤하지?”
“피곤한 것보다, 방에서 술 냄새 진동해서 들어가고 싶지가 않아….”
“음… 환기하기엔 날이 차서, 애들 감기 걸릴 수도 있고… 아, 그럼 잠시 산책이라도 다녀올까?”
“산책?”
상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현지가 거실 바닥을 뒹구는 맥주 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응. 나도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싶은데….”
거실에서 자려고 했던, 소파가 적당할 것 같다는 대답을 삼켜야 했고,
현지의 얼굴에 그려진 아쉽다는 듯한 미소가 마음에 걸려, 피곤한 기색을 감춰야 했던 상혁.
그런 그가 바닥에 놓인 맥주 한 캔을 집어 들고, 현관 쪽으로 향하며 짧게 말했다.
“가자.”
“응!”
그렇게 숙소를 나서, 이제는 어두워진 오솔길을 걷는 두 사람.
상혁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가 느려지기를 반복하는 건, 오른쪽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현지의 걸음을 맞춰 걸으려는 탓이었다.
물론, 진실은 현지가 오락가락하는 상혁의 발걸음을 맞춰 걸어줬다는 쪽에 가깝지만 말이다.
“꽤 쌀쌀한데 괜찮아? 겉옷 챙겨올 걸 그랬나.”
“괜찮아, 그거 마시면 조금 따스해지겠지! 아,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나…?”
“전혀, 소주 두 잔에 취하는 걸 똑똑히 봤으니까.”
“아… 그건 제발 잊어주세요…!”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어느새 오솔길 끝자락에 도착했고,
“마셔.”
상혁은 의자에 앉아, 쥐고 있던 맥주 캔을 따, 현지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아껴서 마셔, 리필해 줄 체력이 없다.”
“큭큭, 알겠어.”
그러자 현지도 의자에 앉아, 상혁이 건넨 맥주 캔을 쥐고, 그런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 오늘 생각한 건데, 역시 거리를 조금은 두고 지내는 게 좋겠다 싶지? 상혁이 너도 불편해 보이고… 그동안 너무 서슴없이 굴어서 미안….”
속상하다는 표정이 감춰지질 않았을 현지가 그것을 덮으려 괜스레 웃어 보이자,
상혁은 어진지 모를 간지러운 기분에 애먼 관자놀이를 긁어대며 대답했다.
“그럼 이제 내가 따라다녀야겠네.”
“정말…?”
“…됐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해줄 테니까 안주 삼아 들어.”
“…응!”
“우리 뒤에 있는 나무, 무슨 나무인 줄 알아?”
“음… 모르겠어.”
“생강나무야.”
“생강나무? 내가 아는 생강?”
“응. 봄이 되면 생강처럼 알싸한 향기를 내는 노란색 꽃을 피워.”
“오…! 어쩐지 코가 조금 시큰하더라.”
현지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흥미롭다는 얼굴을 들고, 하늘 가득한 생강나무 꽃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음, 김유정의 동백꽃이라는 소설 알아?”
“알지, 알지! 점순이 나오는 소설!”
“맞아. 그 소설 마지막 장면에 남자 주인공이 점순이랑 노란 동백꽃 속으로 넘어지는데, 거기서 알싸하고 향긋한 냄새에 아찔했다는 표현이 있거든?”
“잠시만… 아, 기억났다!”
“왜 알싸하고 향긋했을 것 같아?”
“어… 설마 생강나무랑 연관되어 있어?”
“응. 우선 어원적 차원으로 접근해보면 첫 번째 이유를 알 수 있어.”
“뭔데, 뭔데? 빨리, 빨리!”
“…김유정은 강원도 출신, 거기선 생강나무를 동백나무라고 부른데.”
“아?”
“우리에겐 단순히 생강나무일 뿐인 저 나무가, 강원도 출신 김유정에겐 동백나무가 된다는 거지. 즉, 생강나무에서 핀 노란색 꽃, 알싸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이 노란 동백꽃의 정체.”
“헐, 그래서 알싸한 향기가 났다는 거구나… 생강나무 꽃이라서….”
“응. 개량종이라면 모르겠지만, 동백꽃은 하얀색과 빨간색 꽃이 전부기도 하고, 애초에 알싸한 향기도 나지 않거든.”
“탐정이다…! 그런데, 그런데 첫 번째 이유라는 건, 두 번째 이유도 있다는 거야?”
흥미가 차오른 현지가 반짝이는 얼굴을 상혁의 얼굴 코앞까지 들이밀자,
그런 서슴없는 행동에 당황한 상혁이 등을 살짝 뒤로 내뺐다.
안주 삼아 들려주려 했던 이야기에 맥주 캔이 잊혀진 지는 오래였다.
“아, 아무튼… 다음은 향긋하다는 표현으로 시작된 두 번째 이유. 이건 감성적 차원으로 접근해야 해. 그리고 이게 더 정답이라 여기고 싶고.”
“두근두근! 궁금합니다!”
“혹시 동백기름이라고 들어봤어?”
“어… 아, 응, 응! 머릿기름 말하는 거지?”
“맞아. 그것도 저 생강나무에서 만들어지는 건데, 점순이가 머리에 그 동백기름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어.”
“에… 아? 설마….”
“둘이 넘어졌을 때의 자세가 떠올랐다면 정답.”
“점순이 머리카락…! 동백기름을 발랐으니까 알싸한 향기가 느껴진 거네!”
“맞았어. 저 작은 생강나무 꽃이 바닥에 한가득 쌓이는 건 불가능해. 즉, 남자 주인공은 생강나무 꽃이 아니라, 점순이의 품으로 넘어진 거겠지.”
“와… 꽃이 아니라, 점순이한테서 느낀 거구나….”
“거기에 저도 모르게 사랑을 시작한 상태니까, 알싸한 향기가 아닌, 달콤한 향기를 느꼈다고 표현한 거겠지.”
“꺅…! 뭐야, 뭐야! 동백꽃이 이렇게 달콤한 로맨스였다고…?”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옅은 달빛에 비친 현지의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러게 말이야.”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는 상혁의 귓가도 비슷한 색감을 띠고 있었다.
유나가 남긴 인연을 이어가려는 마음, 상혁을 유나와 같이 소중한 친구로 여겼던 마음.
그런 마음에 생강나무 꽃이 피어난 탓이었을까.
그런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 / “….”
상혁과 현지는 달콤한 향기가 가득한 나무 아래서 수줍은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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