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56. 그녀의 과거(3) 봄을 알리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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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그녀의 과거(3) 봄을 알리는 바람
[10년_01월_11일_월요일]
[11:45]
잿빛으로 얼룩진 세상이 막을 내리고, 어떤 색도 스며들지 않은 새하얀 도화지가 펼쳐졌다.
그리고 그 새로운 도화지에 자신이 살아갈 행복한 세상을 그려나가듯,
“응, 응! 금방 올게!”
오랜만에 교복을 차려입은 현지가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을 나섰다.
그렇게 마주한 하늘에서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건, 그것들이 전부 하늘 아래로 떨어진 탓.
온 세상도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예쁘네… 뽀득뽀득… 으, 간지러워.”
한 걸음, 두 걸음. 계단에 쌓인 눈이 밟혀 귓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울리자,
“어머, 현지 학교 가?”
그것들을 계단 아래로 쓸어내리던 2층집 아주머니가 현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어,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그리고 현지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반가웠는지, 서둘러 계단을 내려와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고 살갑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눈이 엄청 내렸네요…! 게다가 엄청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잘 지내셨어요?”
“응? 오랜만 인가? 뭐, 당연히 잘 지냈지. 근데 지금 방학 아니야? 웬 교복?”
“아, 방학이긴 한데, 학교에 갈 일이 생겨서요.”
“음… 그렇구나. 그리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 평소랑 전혀 다른 사람 같아, 호호.”
“…다른 사람이요?”
제게만 중의적이었을 질문.
그것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게 된 현지였지만, 이내 활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 맞아요!”
“응?”
“먼저 태어난 언니가 어두운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는 밝은 모습이어야 해요.”
“…에? 그게 무슨 소리야?”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다짐, 그 올곧은 대답을 남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현지는 언젠가 들었던 대사를 떠올리며 장난스러운 대답만 이어갈 뿐이었다.
“보이는 그대로, 들리는 그대로랍니다…! 풋, 저 이제 학교 가야 해서, 이만 내려가 볼게요.”
“어,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렴…?”
그렇게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지나쳐 본가를 나서는 현지.
“현지한테 쌍둥이 언니가 있었나…?”
그런 그녀가 뒤편에서 들려온 터무니없는 의문에 고개를 돌려 반박하지 않은 건,
“와….”
앞으로 늘어진 주택가라든지, 그런 주택 사이마다 길고양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골목길이라든지.
오랜만에 마주한 등굣길이 전부 새롭게 느껴진 탓이었다.
“야옹… 이가 없네.”
현지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칠 때마다, 그곳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보기도 하고,
“여기로 가면 학교 후문이 나왔었지…?”
그런 골목길 중 아무 곳에 들어서, 가까운 거리를 빙 돌아가기도 하며 경쾌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흘러 마주한 언덕길에선, 학교 후문까지 늘어지는 가파른 경사가 질색이라는 얼굴로 작게 투덜거렸다.
“역시 정문 쪽으로 갈 걸 그랬나…?”
그래도 즐거울 것이었다.
수업 준비물 탓에 친구들이 북적이던 문구점, 어딘가에서 들려온 집을 지키는 강아지의 울음소리.
나무에 핀 눈송이 꽃이 녹아내리는 축축한 언덕길, 어째선지 벽돌 색깔에 맞춰 걷게 되던 걸음.
그런 풍경에 잠겨 있다 보면, 자연스레 학교 건물 안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장면만 떠오르는 복도를 지나서 마주한 교무실.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현지가 교무실 문을 활짝 열어, 창가 쪽 자리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윤희 쌤, 저 왔어요.”
그곳에 앉아있는 건 현지의 담임 선생님 김윤희였다.
“현지야….”
하지만 담임 선생님이 그 반가운 인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무리인 일이었다.
한 달 만에 마주한 제자의 모습, 그것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스승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웠지만,
그래도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현지에게 다가가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 도대체 그동안… 하… 그리고 갑자기 정시지원은 또 무슨 말이야….”
따로 짐작하는 게 있어도, 그것을 섣불리 말할 수 없었던 것인지.
담임 선생님이 잠시 말을 멈추고 무거운 침묵을 흘렸다.
그러자 그런 분위기가 싫다는 것처럼, 현지가 조금 더 밝아진 얼굴로 침묵을 깨트리며 물었다.
“잘 지내셨어요?”
“…너는, 너는 어떻게 지냈는데…! 연락은 왜 안 받았어? 부모님은 어디 가신 거고….”
순식간에 갖가지 걱정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제 볼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평범한 대답만 이어갈 뿐이었다.
“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지… 아, 괜한 걱정 끼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무척 바빴거든요.”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도 아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갑자기 진로를 왜 바꾸려는 건데? 갑자기 한국대 국문과? 거길 왜….”
“음, 그냥… 이라고 말하면 화내실 거죠?”
“야…!”
“장난이에요. 사실, 제 인생에 꼭 그려 넣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거든요.”
현지의 얼굴엔 앞으로 그려갈 인생이 기대된다는 듯한 행복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지만,
그런 얼굴에 묘한 이질감만 느꼈을 담임 선생님이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물었다.
“부모님께 말씀은 드렸고? 그걸 허락하셨어…?”
“네, 두 분 다 허락해주셨어요.”
“하… 현지, 네 정시 성적이면 어디든 붙기야 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른 곳도 지원하는 게”
“아뇨, 아뇨. 그건 괜찮아요.”
“만약에라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재수하면 되겠죠?”
“뭐…?”
“헤헤, 괜찮아요. 드디어 찾아온 봄이니까, 거기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바꿀 거예요.”
“….”
“더는 바꾸지 않아, 이것까지면 충분하니까요.”
봄이란 계절을 기다리는 현지의 모습은 새하얀색으로, 얼룩지기 쉬운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로운 도화지가 아니었다.
잿빛으로 얼룩진 세상에 새하얀 소망이 덧칠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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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_02월_26일_금요일]
[08:50]
수없이 많은 날에, 한 가지 소망만이 적힌 일기장이 계속해서 과거를 펼쳤다.
그런 과거가 점점 익숙해질 것이었다.
제가 돌아갈 현재를 떠올릴 수 없을 것이었다.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지, 개의치 않는 것인지.
지금까지 버텨온 계절이 단지, 오늘이라는 과거, 이제야 펼쳐진 계절을 위한 웅크림이라 생각한 것인지.
앞으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척이나 조심스럽지만, 그 끝이 정해져 있었기에.
현지가 싱긋 웃으며 한국대학교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엔 학생뿐만이 아닌, 승용차까지도 줄지어 서 있어 복잡한 인산을 이루고 있었고,
그런 모두를 환영하는 대학교 마스코트 인형 탈이 즐겁고 활기찬 분위기로 자아냈다.
현지에게 대학교 입학은 처음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모든 장면을 누구보다 눈부시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어깨를 살짝 걸친 단발머리와 스무 살이 차려입은 것이라 보기 힘든 단정한 옷차림.
그 청초한 모습을 바라보는, 도로 가득한 신입생들과 그들을 반기는 재학생들의 시선이 조금 더 반짝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현지는 그런 시선 따위에 관심이 없어, 알아차리는 것마저 불가능하다는 것처럼.
‘캠퍼스 커플을 맛볼 절호의 기회라고!’
친구가 그리려 했던 그림을 이어서 그려나가기 위해, 교정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닌다 한들, 넓디 넓은 이곳에서 연락처도 없는 남자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탓에 몸에 열이 차오른 현지가 목에 매었던 연노란색 목도리를 풀고,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목가에 제멋대로 따스하다고 결정한 바람이 불어왔을 때, 바로 저만치 앞에서.
그토록 찾아 헤맨 상혁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녹아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인생에 정말로 봄이 찾아오려 했다.
“어떡해, 어떡해…!”
잊고 싶은 과거는 전부 끊어낸 현지였다.
지우고 싶은 모습도 전부 끊어낸 그녀였다.
그렇기에 지금부터가 처음이 될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어떤 첫 만남이 그에게 가장 예쁜 형태로 기억될까.
‘남자는 첫인상이 중요하다더라. 그러니까 평소처럼, 네가 잘하는 얌전한 모습으로 시작해보자고.’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제가 그에게 따스한 봄이 되어줄 수 있을까.
제게 그런 자격이 있는 것일까.
점점 녹아내리는 마음 사이로 수줍은 새싹이 피어올랐고,
현지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상혁에게로.
“저기…!”
아직 펼쳐지지 못한 꽃망울, 수줍은 마음에 주춤거리게 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에, 에?”
“안녕…!”
없었던 과거에서 없었던 인연이, 새롭게 덧대어 그려진 두 사람의 첫 만남.
“난 김현지라고 해…!”
“어… 이상혁입니다. 혹시 선배님이신가요…?”
상혁과 현지 사이엔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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