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4. 그녀의 과거(1)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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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그녀의 과거(1) 늪
[09년_11월_23일_월요일]
[19:05]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꽃이 다시금 피어오를 기회를 맞이한 이곳.
금목서 나무에 피어난 꽃들이 초겨울을 맞이한 공원을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그건 지금이라는 계절을 넘어서지 못하는 현지가 돌아온 탓에 벌어진 기현상이었을까.
아니면 꽃말 그대로, 과거로 이끌려 온 그녀를 지금이라는 세상이 환영해주는 것이었을까.
익숙한 공원 의자에 모습을 드러낸 현지의 주변엔 차갑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고,
“여긴….”
그런 바람에 흩날리던 꽃잎이 그녀에게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주할 수 없었던 선택의 순간, 선택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과거가 시작된 것이었다.
분홍색으로 물들었던 주변에 흩날리는 주홍색 꽃잎.
내일이라는 과거로 한 걸음 나아간 색감이 마치,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었기에.
주변을 멍하니 바라보던 현지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무릎 위에 올려진 일기장을 내려봤다.
11월 23일이라는 하루가 적혀있어야 할 일기장 위엔 꽃잎 하나만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고,
“….”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일기장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래에서 과거를 바라보던 인생에 과거에서 미래를 그려 볼 기회가 찾아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었을까.
수줍은 마음에 바닥을 긁어대던 하얀색 신발이, 제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현지의 두 발이 꽃잎들을 발판삼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주한 상황을 정리해낸 것도,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허황한 말을 이해한 것도 아니었을 테지만,
자그마치 8년이라는 세월에 오로지 단 하루만을, 오늘이라는 과거만을 후회해왔기에.
“지금이라면….”
당장은 서둘러야 했다.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
과거를 바꿔야 했다.
이게 그저 꿈일지라도, 아직은 이른 바람일지라도, 소중한 사람들을 구해내고 싶다고.
그런 간절한 소망을 머금은 현지가 달리고 달려 도착한 시내 입구는 다행히도 한산한 상태였다.
아직 늦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고칠 수 있다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현지가 그런 희망까지 품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어, 어? 저기 저 버스 왜 저래…?”
“뭐, 뭐야!”
모든 걸 베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가 사거리 주변을 가득 채웠다.
“꺅!” / “다, 다들 피해요!”
현지가 서 있는 시내 입구 왼편의 언덕 끝자락에서 커다란 버스 한 대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며 떠내려오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초조한 표정마저 지어낼 여유가 없었던 현지가 다급히 주변을 살피며 유나를 찾았다.
“유, 유나야…! 유나야!”
이런 기회가 쥐어진다면, 서둘러 유나를 구해내고 부모님의 차량도 막아서겠다던 계획.
그건 그저 꿈같을 계획일 뿐이었다.
속절없이 시작된 위기 속에서 두 발은 다시금 얼어붙으려 했고, 유나의 모습을 찾는 두 눈은 머리를 어지럽게 했기에.
“안 돼… 안 돼…!”
다급한 마음만 앞설 수밖에 없었던 현지가 결국, 무작정 도로 안으로 뛰쳐 들어가 주변을 살폈고,
그와 동시에 지금이라는 세상이 현지의 눈에서 아주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과거가 피어나려는 탓에 일어난 현상 같은 게 아니었다.
극한의 불안에서 시작된 신경 기관의 각성 현상, 현지의 절실함이 아드레날린을 꽃피운 것이었다.
그렇게 느릿해진 세상 속에서, 현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한 명은 제가 뛰쳐나온 인도 쪽에서 길을 건너기 시작하려는 유나였고,
“한유나…? 야, 야! 한유나!”
다른 한 명은 그런 유나를 다급히 불러대는 낯선 남자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모습이 낯설어도, 상황이 전부 맞아떨어지고 있었기에.
‘그럼 기다리고 있어, 금방 보내줄 테니까!’
현지는 어느 순간부터 잊게 된 이상혁이라는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지만,
“이상혁…?”
위기는 드디어 마주한 새로운 인연이 시작될 틈을 주지 않았다.
상혁이 서 있는 신호등 뒤편 멀찍이서 익삭한 형태의 차량이, 부모님의 차가 다가오고 있는 걸 발견한 탓이었다.
선택해야 했다.
무엇이 부모님과 유나를 되살릴 최선의 방법일 것인지 말이다.
“….”
다만,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을 것이었다.
그건 유나가 서 있는 횡단보도와 마주했던 사고 현장엔 충분한 거리가 있다는 분명한 사실,
그렇다면 유나를 막아서는 것보단 그녀를 치게 될 부모님의 차량을 막아서는 게 최선일 거라는 판단.
그런 것들을 토대로 한 답이었지만, 이것이 정답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확실하게 친구부터 되살릴 것인지, 불확실하더라도 부모님을 되살려볼 것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유나에게 달려가기 시작한 상혁의 모습이 두 눈에 담겼을 땐,
현지는 유나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상혁에게 친구를 맡기고, 저는 부모님을 구하겠다는 선택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렇게 현지가 그리웠던 친구들의 모습을 뒤로하며 사거리를 뛰쳐 지나갔고,
“어, 어… 학생…!”
“빨리, 빨리…!”
오른쪽 도로 한가운데에 서서, 부모님의 차를 막아서기 위해 두 팔을 벌렸다.
“아빠 제발, 제발 멈춰줘…!”
자신을 보고 멈춰달라고, 자신을 치더라도, 차라리 이곳에서 멈춰달라고.
이 방법이 부모님도 유나도, 자신은 어떻게 되든 모두가 살아날 방법이라고.
그런 불안한 생각뿐이었을 현지가 눈을 감지 않고, 저로 인해 멈춰 서게 될 부모님의 차량을 올곧게 바라봤지만,
“….”
그 찰나의 순간, 운전대를 꺾어 자신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아버지의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현지의 아버지는 딸의 절실한 바람을 허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현지의 오른쪽 뒤편에서 무엇인가 부딪히는 커다란 소리가,
“에…?”
거기에 연이어 아스팔트 도로를 찢어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피, 피해!” / “꺅!”
최악의 상황을 직감할 수 있었기에.
그렇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을 현지의 귓가에 세상이 꺼진 듯한 이명이 들려왔고,
그런 이명 너머로, 그들 대신 꺼지길 바랐던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울려왔다.
어째서 제 앞에 부모님의 차가 없는 것인지,
저는 어째서 이토록 멀쩡히 서 있는 것인지,
바로 앞 도로엔 어째서, 자신을 피해 지나친 듯한 새까만 타이어 자국만 남은 것인지,
일순간 마주쳤던 아버지의 얼굴엔 어째서 다행이란 듯한 표정이 그려져 있던 것인지.
“아….”
무엇하나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거기에 힘겹게 돌아본 뒤편은 전봇대에 박혀 멈춰 선 버스가 가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충격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더라면,
바꿀 수 없었던 과거를 가려준 세상의 마지막 배려를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그랬다면 현지의 미래도 달라졌을까.
하지만 현지의 머릿속엔 카페 앞 도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할 뿐이었기에.
“아, 안 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여기서라도 얼어붙어야 했던 두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유나는 상혁이가 구해냈을 거야… 엄마랑 아빠도 괜찮을 거야….”
도로를 가로막은 버스를 지나쳐 마주한 카페 앞 도로.
현지는 그런 도로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상혁의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
그와 동시에 걸음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혁이 향하는 그곳에 익숙한 승용차가 있는 탓이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다고 안심했던 게 무색하리만큼, 오래된 기억과 똑같은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전부 그대로인 현실이 무서워 다리에 힘이 풀렸다는 듯, 현지가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야… 한유나… 너 조심 좀”
어렴풋하게 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테지만, 현지에게 늘어지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주저앉은 자리부터 시작된 빨간색 줄기는 부모님의 차까지 늘어져 있었고, 그 주변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짓이겨져 있었다.
“아, 아니야… 지금… 빨, 빨리 꺼내줄게….”
“안 돼….”
떨쳐낼 수 없는 직감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시작되려는 순간,
현지의 두 눈엔 바닥을 굴러다니던 신발 하나가, 사람의 것이라 말하기 어려워진 신체 일부분이 신겨진 운동화가 담겼고,
“기다려… 얼른… 얼른 병원 가자….”
거기까지였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이성이 끊어진 것이었다.
현지는 현실을 부정하는 애처로운 목소리를 흘리며, 현실을 마주할 수 없게 된 눈으로 상혁이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실을 붙잡아 본 손에 더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노란색 꽃잎이 피어오를 계절을 그리던 마음이 결국, 끝을 알 수 없는 어두운 늪에 잠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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