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53. 일기장(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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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일기장(6)
[18년_11월_23일_금요일]
[21:00]
낯선 건물과 이어지는 골목길 앞으로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어둠이 몰려왔다.
그건 이곳을 끝으로 현실을 놓아주려는 현지에게서 흘러나온 절망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했을 건물이 생겨난 탓에 드리운 비현실적인 분위기였을까.
아무렴, 그저 밤이 된 탓에 몰려온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
이곳을 인생의 종착지로 결정했을 현지.
그런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마주한 건물과 쥐고 있던 명함을 번갈아 바라봤다.
하지만 허무맹랑한 문구에 속는 셈 치고 찾아왔더라도, 7층 높이의 건물 어디에서도 그렇다 할 불빛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당장은 이곳이 명함이 가리키는 장소가 맞는지 확신하는 것부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잘못 찾아온 건가…?”
그리고 애초에 이런 음침한 분위기의 건물에 겁이 많은 여자가 홀로 들어서는 건 무리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현지는 저를 둘러싼 음침한 분위기에 가녀린 몸을 미세하게 떨다, 주변 건물에 도움을 요청하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안 돼.”
이런 식으로 겁에 질린 제 모습이 여태까지의 제 인생과 닮아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싫어….”
오늘만큼은 두려움이라는 사사로운 감정으로도 현지의 걸음을 막아설 수 없는 모양이다.
애석하게도 말이다.
현지가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기를 꺼내 조명을 켜고, 칠흑같이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들어선 건물 내부는 세상의 끝에 펼쳐져 있을 드넓은 광야보다 고요했지만,
현지의 귓가엔 제가 내딛는 발걸음에 바닥이 쓸리는 스산한 소리와 그에 맞춰 울리는 심장의 떨림이 뒤섞인 난잡한 소리가 가득할 것이었다.
그런 탓에 정신이 없어, 주변을 살피는 것마저 무리였을 테지만,
“저, 저긴가…?”
어떻게 또,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하곤 그곳으로 쏜살같이 뛰쳐 갔다.
“하우… 하우우….”
삶을 포기할 각오를 한 그녀일지라도 무서움이라는 감정은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인지.
현지는 엘리베이터 옆 구석 자리에 주저앉아, 가슴을 짓누르며 안정감을 되찾으려 했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를 들고 바라본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아 보이는 게 원망스럽다는 것처럼,
그 옆으로 이어진, 위층으로 올라갈 길을 대신하는 어두운 계단에 절망했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니… 저길 어떻게….”
하지만 무섭기만 한 저 길이 마지막으로 붙잡은 희망이었기에.
용기를 내야 했다.
건물에 들어설 때 지어 보인 굳은 표정은 어느덧 울상이 되어있을지라도.
현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 심하게 부들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얼마나 겁이 났으면, 성인 남성도 2분은 걸렸던 계단을 1분도 되지 않아 올라왔고,
세상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에게 미약한 빛을 허락하려는 것처럼.
창밖에서 흘러들어온 네온사인이 어두운 주변을 밝혔다.
그리고 현지는 그 미약한 빛에 걸음을 의지한 채, 복도 끝에 보이는 문 앞으로 향했다.
애타게 그리던 계절이 이 너머에 있으리란 희망.
그것이 헛된 희망이란 걸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본 손이 결국,
“실례합니다….”
닫혀있어야 했을 문을 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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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
잠겨있던 문이 열리는 정도에 따라, 현지의 몸에 새겨지던 노란 빛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그건 바깥과 비교하면 예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밝은 빛줄기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붙잡은 이 길마저도 자신과 어우러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외로운 어둠이 익숙했을 현지는 인상만 찌푸릴 뿐이었다.
그렇게 마주한 괘종시계, 그 옆에 서 있던 노인이 현지를 바라보곤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
“무너질 기회는 충분히 있었지만, 견디고 견뎌냈다”
“네?”
“그리고 그런 어둠 속에 찾아온 한 줄기 빛을 쫓아, 끝끝내 이곳에 다다르셨군요.”
“….”
오래된 격언을 인용해 대화를 이어가려는 것이었지만, 현지가 그런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탓에 대화가 이어지질 않자,
“하하, 아닙니다. 들어오시죠,”
노인은 당황한 얼굴로 머쓱하게 웃다, 애먼 관자놀이를 긁어대며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현지는 이렇게 밝은 주변이라 해도 아직은 겁이 자시지 않았다는 듯,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나서야 노인을 뒤따랐다.
그렇게 불안을 안고 들어선 안쪽 방이었지만, 묘하게 안정감이 느껴진 것이었을까.
현지는 이곳이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를 떠나,
벽면을 가득 채운 무수한 시계들과 그것들이 제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에 호기심이 차오른다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요. 그래, 갈라진 시간 선… 그곳들의 시간이라 해야겠네요.”
“아… 네….”
“…일단 앉으시죠.”
괜한 말은 아끼겠다 결심한 노인이 입술을 빼쭉 내밀며 말하자,
그런 얼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현지가 자리에 앉아, 그에게 받았던 명함을 내밀며 물었다.
“저기 근데, 이 명함에 적힌 문구… 이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 적혀있는 그대로입니다. 뭐,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오, 노트를 가져오셨군요. 다행이네요.”
현지는 노인이 이번에도 보여주지 않은 물건을 봤다는 듯이 말하는 것에 의아해할 법도 했지만,
이곳의 몽환적인 분위기에 사고가 무뎌진 것처럼, 옆으로 맸던 가방을 열어 노트를 꺼내며 질문을 이었다.
“이게 있으면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러자 현지의 노트를 골똘히 바라보던 노인이 시선을 그녀에게 옮기며 대답했다.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로 길어지겠군요.”
“네…?”
“보통은 물건이 사용된 시절, 그때라는 찰나의 시간이 담기기 마련이지만, 그 일기장엔 정말 긴 시간이 담겨있네요.”
“저기…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 일기장엔 09년도부터의 시간이 기록되어있다는 뜻입니다.”
“2009년이요…?”
“네.”
“이거 작년에 새로 산 일기장인데….”
“음… 일기를 참 오래 써 오셨죠?”
“아, 네. 꽤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일기장이 바뀌더라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떠올렸던 날… 애타게 소망하던 날이 있고요.”
“아….”
제 인생을 관통하는 말에 당황한 현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노인이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다 말을 이었다.
“어떤 시절의 일기장을 바치더라도, 당신이 애타게 그리는 그날부터 펼쳐질 겁니다.”
그리고 현지는 그런 말까지 듣고 나서야, 노인이 말하는 그날이 언제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일기를 쓰며 그렸던, 머릿속에서 단 하루도 지워본 적 없었던 날.
제 인생에 있어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리라 생각했던 그날, 09년 11월 23일 월요일을 말이다.
“…그날부터 펼쳐진다는 건, 제가 그날로 향할 수 있다는 건가요?”
“네.”
“그리고 그날을 바꿀 수 있다고요…? 어떻게…?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하하, 급하실 필요 없습니다.”
진정하라며 작게 손짓하던 노인이 허공에서 텅 빈 모래시계를 만들어내자,
그 신비로운 현상에 화들짝 놀란 현지가 앉은 자리에서 주춤거리다 짧게 물었다.
“그건….”
“당신을 과거로 보내줄 전송 장치 같은 것이라고 해야겠죠.”
“저를 과거로…? 그 모래시계가… 에? 자, 잠시만… 저를 과거로 보내준다고요…?”
“네. 다만, 그 일기장을 바쳐야 합니다. 그로써 당신의 추억도”
“바, 바칠게요… 얼마든지 바칠 수 있으니까….”
“…고민할 여유는 충분히 드릴 수 있습니다만.”
조금 전에 벌어진 현상을 마주한 탓이었을까.
현지는 더는 노인의 말이 허무맹랑한 것이라 치부할 필요가 없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바로 가고 싶어요….”
“흠, 알겠습니다.”
그런 대화를 끝으로, 노인이 현지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일기장이 금빛 알갱이로 뒤바뀌고, 그것들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텅 빈 모래시계에 스며들었다.
“꽤 긴 시간이 될 것 같군요. 그래도 이번이 처음이니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 겁니다.”
“네…?”
“다만, 머물렀던 시간이 길어진 만큼, 돌아오셨을 때의 두통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할 테고요.”
“…어라….”
현지는 의식이 흐릿해지는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이곳에서 모습을 감췄고,
“잃어버린 계절을 되찾기 위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또, 무엇을 포기하게 될 것인지.”
노인은 그녀가 사라진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며 하려던 말을 끝까지 이어갈 뿐이었다.
“그로써 당신이 과거를 바꿀 수 있을지, 한번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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