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52. 일기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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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일기장(5)
[18년_11월_23일_금요일]
[19:45]
남들처럼 평범하진 못할지라도, 남들보다 한참 부족할지라도.
그들을 뒤따라서라도 흘려보내야 했던 현지의 시간은 09년 11월이라는 겨울 속에 멈춰있었다.
사무치게 차가웠던 계절에 얼어붙은 마음.
그 애달픈 마음이 누군가의 온기로 녹아내리지 않는 한, 현지는 제자리에 웅크려 돌아올 수 없는 따스한 계절만 추억할 것이었다.
제가 가졌던 모든 관계를 잃어버린 그날을 괴로워하면서, 그런 날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마음.
지독한 악순환이었다.
붙잡을 수 없는 걸 바라는 것을 갈망이라고 한다면, 그런 바람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뒤엉켰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떤 감정이라고 말해야 좋을까.
현지에게만 배타적이었던 세상이 그녀의 인생을 철저히 짓밟았다 해도, 대개는 그것을 미련이라 할 것이다.
다만, 뭉개진 마음에서 유일하게 지켜낸 추억을 갈망하는 그 감정을.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미련이라 치부해도 괜찮은 것일까.
올려본 하늘은 언제나 그대로인데, 그런 하늘이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을 세상.
그런 세상은 어느덧 8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현지는 도시로 상경해 대학을 졸업한 뒤, 빠른 나이에 정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근무하게 된 사립 중학교에서는 국어를 잘 가르치는 젊고 예쁜 선생님의 모습을 보였지만, 사교성만큼은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이전처럼 낯가림이 심한 게 아니었다.
친구의 성격을 닮아 보겠다며 제아무리 노력해도,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에 극도의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외롭고 위태로운 평일이 지나 주말이 되면, 본가로 내려와 아무도 없는 집을 청소했고,
밤이 찾아오면 베개에 얼굴을 파묻어, 그곳에 펼쳐지는 칠흑 같은 어둠에 별똥별이라는 형태의 눈물을 떨어트리며 소원을 빌었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이만 돌아와 달라고.
마지막으로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하루를 일기장에 남기며 쓸쓸히 잠드는 것까지.
여기까지가 그리움은 죄책감으로 이어지기가 십상이었고, 죄책감은 좌절감으로 늘어지는 게 일상이었던, 무색무취라고 하기엔 심하게 병들어 지독한 악취가 풍겼을 현지의 인생.
이런 비참한 방식으로라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이면 저를 떠난 사람들이 돌아와 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자그마치 8년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연극을 이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붙잡은 현실을 애써 외면해온 이중적인 모습의 그녀일지라도, 오늘만큼은 연극을 이어갈 수 없을 것이었다.
도시로 상경하자마자 부모님을 안치할 새로운 납골당을 찾았던 현지.
그런 그녀가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그곳에 수년 치의 안치 비용을 내두었고,
두 번째 월급을 받았을 땐, 그 옆자리에 똑같은 비용을 내두었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기다리는 게 지쳤기에, 그들을 직접 찾아가기 위한 준비를 해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부모님과 친구의 죽음을 부정하는 현지가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하루.
현실을 붙잡은 손이 가장 약해져 있을 하루였다.
“…다녀오겠습니다.”
현지가 아무도 받아주지 못할 인사를 전하며 어두운 자취방을 나섰다.
그리고 늘어진 주택가를 지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거리가 나타날 건널목 쪽으로 향했지만,
“도대체 언제 어디서 뭘 하려는 건데!”
건널목 너머에서 작은 소란이 느껴진 탓에 걸음을 잠시 멈춰 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도 먹고, 영화도 보면서 데이트 오래 했지!”
“그게 좋았으려나….”
“…진짜 죽을래? 아니, 할 말 있다면서… 그래놓고선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하고, 그리고 도대체 여긴 어디야!”
“…그러게.”
그건 조금 멀찍이서 들어도 알 수 있는, 사이좋은 연인의 대화였다.
“….”
이 건널목을 지나야 오늘 하루를 끝낼 수 있는데, 얼른 끝내고 싶을 것인데.
하지만 현지는 자신과 달리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그늘진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그들이 지나가기를 잠자코 기다릴 뿐이었다.
“나 집 갈래.”
“…잠시만.”
“하, 혹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서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왜 그러냐고!”
“…하, 알겠어. 이거 갑작스럽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야.”
“응?”
“우선 네게 품었던 감정이 어떤 식으로 커져 왔는지부터 말해야겠지. 대학 시절, 새내기 후배인 널 처음 봤을 때, 그때는 마냥 예뻐서, 그래서 따라다녔고”
“자, 잠시만….”
“글 쓰겠다고 다짐한 널 봤을 때, 그때는 나보다 어른스러운 것 같아서, 그래서 호감이 생겼고”
“기, 기다려 보라고요…!”
“군대에 있을 땐, 연인 사이도 아닌데 달마다 면회 오는 널 보면서, 언제부터였을지 모르는 사랑을 느끼고 있었어.”
“….”
어째서 제게는 저런 소중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러다 너희 집에 힘든 일이 찾아와, 너를 향해 달려가는 내 모습을 마주했을 때, 그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었고.”
“거짓말….”
어째서 제게는 저런 행복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는 것일까.
“네가 목토시 주면서 고백해줬을 땐,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그 순간이 언제부터였는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널 사랑하고 있어서 답답했고”
“아니야… 내가 먼저….”
어째서 제게는 누구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일까.
“마지막으로 등단에 성공했을 때, 무력감에 무너졌을 때, 너와 헤어졌지만, 다시 붙잡아냈을 때. 그때는 나도 준비해야겠구나 싶었어.”
어째서 저만 홀로 남은 것일까.
“그리고 그 준비가 끝난 게 바로 오늘이야.”
“….”
“네가 가장 힘들 때 떠올린 사람이 나였으니까, 네가 가장 행복할 때 함께일 사람도 나였으면 좋겠어.”
“이거 설마….”
“맞아,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줄게. 윤서야, 우리 결혼하자.”
무엇 하나 가진 게 없었던 현지가 남들의 행복을 시기하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어째서… 어째서 나만….”
차갑기만 했던 인생을 붙잡은 두 손의 힘이 풀려갈 것이었고,
그렇기에 오늘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현실을 놓아줄 수밖에 없는 하루가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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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어스름한 달빛과 형형색색의 연등이 조화를 이뤄 어두운 주변을 밝히는 이곳.
부모님이 안치된 절에 도착한 현지가 곧장 안치소 안으로 들어섰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탓에 안쪽엔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고,
“실례합니다….”
그런 이곳에 현지가 작게 인사하며 신발을 벗는 소리가 차올랐다.
현지의 부모님은 안치소 가장 안쪽에 부부 단으로 안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현지였지만, 비교적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들을 마주했다.
“다녀왔어… 일 년만이네….”
무슨 말을 해도, 어떤 마음을 품어도 그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시험문제 때문에 일이 밀려서… 그래서 조금 늦었어… 미안….”
제 하루를 전하는 현지의 몸이 서글프리만큼 애처롭게 떨리기 시작했다.
“유나도 만나러 가야 하는데… 아니… 아니야….”
이것만큼은 끝까지 뱉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현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고개를 숙였고, 그런 순간이었다.
“지독한 계절이 이어지고 있군요.”
차오른 건 고요함뿐이었던 이곳에, 인기척도 없었던 뒤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모여든 것이었다.
그것에 화들짝 놀란 현지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점잖은 분위기의 노인을 마주했다.
“에…?”
“안녕하세요.”
“아… 아, 안녕하세요….”
갑작스럽게 나누게 된 인사가 어색하고 불편했을 현지가 잠시 들었던 고개를 다시 땅으로 떨구자,
“흠….”
그녀와 원만한 대화를 이어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노인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며 말을 이었다.
“고개를 들지 않으면 봄이 찾아올 기회도 놓치게 되겠죠.”
“…네?”
“그리고 끝끝내 결심한 그 선택보다는 이 방법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명함을 내밀자, 그것을 건네받은 현지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아, 그리고 가방에 있는 그 노트는 챙겨오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
무엇하나 이해할 수 없는 말들뿐이었을 테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노인이 바라보는 것은 제 가방이 아닌, 그 속에 담긴 오래된 일기장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현지는 옆으로 매두었던 가방을 열어, 그곳에 있는 일기장을 확인했고,
“어, 어떻게 어…?”
그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물으려 했지만, 이곳에서 노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
제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스산한 기운에 겁이 날 것이었기에.
현지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한 발짝 뒷걸음질치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에 쥐어진 명함, 그곳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과거를 바꿔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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