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51. 일기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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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일기장(4)
[09년_11월_23일_월요일]
[19:05]
현지의 과거를 마주한 탓이었을까.
아문 줄로만 알았던 마음의 상처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익숙할 길이 되어, 현지의 과거가 펼쳐진 이곳과 이어졌다.
상혁이 가장 외면하고 싶었던, 그렇기에 기억에서 지워버린 그날의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묘하게 어수룩한 분위기를 띤 남자가 시내 입구 반대편, 사거리 도로가 훤히 보이는 카페 앞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유나를 기다리는 상혁의 모습이었다.
상혁은 이곳에서 꽤 긴 시간을 기다려 짜증이 차오를 법도 했지만,
“무슨 말부터 꺼낸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던 탓에 귓불을 붉히며 수줍은 상상만 해댈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이곳에 도착했어도, 속으론 현지와의 만남을 기대해왔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혼잡한 인파 속에서 제각기인 일상이 평범하게 흘러가던 순간이었다.
상혁이 서 있던 도로와 시내 입구를 사이에 둔 오른편 언덕 끝자락.
그곳에서 누구도 바라지 않았을, 짙은 위기감이 서린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울려왔다.
“어, 어? 저기 저 버스 왜 저래…?”
“뭐, 뭐야!”
차량용 신호등이 한참 전부터 빨간불을 밝히고 있었는데도 그것을 어기고 내려오는 버스가.
아니, 좀처럼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는 버스가 난폭한 소리를 내며 떠내려오고 있었다.
“꺅!” / “다, 다들 피해요!”
찰나의 순간, 주변 사람들은 다급히 울리는 클랙슨 소리 덕분에 저마다 생각하기에 안전할 위치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귀에 이어폰을 낀 채, 시선이 휴대전화기 화면에 고정된 여학생.
이제 막 길을 건너기 시작한 한유나만큼은 그러질 못하고 있었다.
“한유나…? 야, 야! 한유나!”
그리고 그런 친구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한 상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 씨!”
하지만 돌아오는 건 제게 전송된 한 통의 문자, 휴대전화기 진동음뿐이었다.
다급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제 목숨부터 챙겨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리 분별이 어려워진 것이었을까.
상혁은 버스가 어디까지 떠밀려왔는지 확인하지도 않은 채 유나에게 뛰쳐 갔고,
“어, 어… 학생…!”
사고가 시작된 오른편 도로에선 무엇인가 부딪히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빨리, 빨리…!”
하얀색 승용차 한 대가 버스에 부딪혀, 상혁이 뛰쳐 가는 횡단보도 쪽으로 밀려오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차체가 뒤집혀, 상단 루프가 아스팔트 도로를 긁어대는 소리.
서둘러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제게 다가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것이었다.
“잡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횡단보도 중간에 다다른 상혁이 유나의 팔을 붙잡아냈다.
그리고 이곳까지 뛰어온 반동을 이용하기 위해, 그대로 몸을 틀어 제가 달려온 도로 쪽으로 유나를 잡아당겼지만,
“피, 피해!” / “꺅!”
유나를 잡아당기던 상혁의 어깨가 갑작스러운 충격에 강하게 뒤틀려 꺾여졌다.
“…어?”
아직 고통이 찾아올 차례가 아니었다.
상혁은 제게 벌어진 상황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을 테지만, 당장은 그저, 멍해진 두 눈으로 살면서 처음일 장면을 마주할 뿐이었다.
균형을 잃고 허공에 떠 있는 자신, 그런 몸이 어째선지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역행되려는 것처럼 느릿해진 세상 속에서, 자신을 치고 지나간 하얀색 승용차가 간신히 붙잡아낸 유나를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유나를 놓쳐선 안 된다는 직감을 느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산산이 부서진 어깨와 평범한 악력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렇게 상혁이 유나의 손을 놓쳐버린 순간, 느릿해졌던 세상에 가속이 붙어, 원래대로 흐르기 시작했다.
“컥…!”
머리부터 떨어진 탓에 의식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혁은 그 덕분에 전신에 가해진 고통이 뇌까지 전달되지 않은 것처럼 몸을 일으켰고,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저만치에 멈춰 선 승용차를 향해 다가갔다.
차에 부딪힌 오른쪽 어깨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든지, 아스팔트에 부딪힌 머리에서 무엇인가가 흐르고 있다든지.
거기에 언제, 어떤 이유로 망가진 것인지 알 수 없는 한쪽 다리 탓에 균형을 잡을 수 없다든지.
그런 것들은 지금의 상혁이 알아차릴 수 있는 자신의 상태 같은 게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유나를 끌고 간 승용차로 향해야 한다는 생각뿐일 것이었다.
그렇게 20m가량 걸어 도착한 승용차 앞에서,
“야… 한유나… 너 조심 좀”
상황을 심각성을 모른 채 쓴소리를 뱉으려 했던 상혁의 입이 벌어진 채로 굳어버렸다.
승용차 아래에 깔린 유나의 모습을 마주한 탓이었다.
“….”
정확히 말하자면, 상혁의 눈은 유나가 아닌, 뒤집힌 차량 루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나의 하반신을 마주할 수 없어, 그것을 찾아내려는 것이었다.
“아, 아니야… 지금… 빨, 빨리 꺼내줄게….”
마주한 진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유나의 다리가 차에 깔려있어야 한다는 것처럼.
상혁은 너덜거리는 몸으로 승용차를 밀어댔다.
“기다려… 얼른… 얼른 병원 가자….”
하지만 한계점에 다다른 육체론 미동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렇게 남은 기력을 소진한 상혁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고,
“아….”
의식을 잃지 못했다는 죄를 가진 눈과 귀로 이번에도 처음일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두 눈엔 주변 곳곳에 짓눌리고 뭉개진 장기 덩어리와 하반신이 잘려나간 유나의 모습과 차 안에 매달려, 부서진 유리 파편에 찢겨나간 여자와 남자의 모습이 담겼고,
“아파… 커헉… 다, 다리가… 이상해…. 상, 상혁 꺼, 꺼내줘….”
그와 동시에 죽어가는 친구의 신음이 귓가에 들려왔다.
“에…?”
정신을 차린 것이었을까.
상혁이 죽어가는 유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 아니야… 이게 무슨….”
난생처음 느껴볼 공포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요동쳐도 이곳에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한 몸 상태였에.
상혁이 이곳에서 도망칠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건 눈을 감고 현실을 외면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오늘을 기억 속에서 지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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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30. 월요일]
어째선지 아침을 차려주지 않는 엄마의 잔소리가 무서워서, 그래서 오늘은 학교에 다녀왔어.
학교에 가면 유나가 있을 것 같았는데, 그랬는데 역시 없더라.
윤희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게 되었어.
귀가 나빠진 모양이야.
그래도 그 덕에 내 뒤에서 기분 나쁜 얼굴로 수군거리는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어.
그리고 어째선지 유나가 괜찮다고 말하는 게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무섭지 않았어.
있잖아, 유나야. 나 무서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 … …
[09.12.01. 화요일]
오늘은 조퇴했어.
사실, 내가 집에 돌아온 이유를 잘 모르겠어.
윤희 선생님이 집으로 데려다 주셨는데, 선생님 자동차 시트를 더럽혔거든.
죄송해서 집에 잠시 모셔왔는데, 엄마를 못 본 척하시더라.
게다가 이상한 말을 하셔서, 무서워서 돌려보냈어.
이제 학교엔 가지 않으려고.
교복이 많이 더러워져서 옷을 갈아입으려 했는데, 옷이 없더라.
요즘 엄마가 가사 일을 하지 않는 모양이야.
귀찮아진 걸까… 그래, 엄마도 가끔은 쉬어야겠지.
아침, 점심, 저녁 식사랑 세탁까지. 당분간은 내가 전부 도맡아야 할 것 같아.
아, 아빠 양복도 다려놔야겠네.
큭큭, 우리 아빠 발 냄새 엄청 심한데, 나중에 유나 놀러 오면 맡게 해줘야겠다.
… … …
[09.12.03. 목요일]
어제는 온종일 잠들었던 모양이야.
있잖아? 요즘 세상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해.
TV를 틀어도, 바깥을 살펴봐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몸 상태가 나쁜가 봐. 조금 더 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엄마도 피곤해서 온종일 자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나는 중간중간 일어나서 밥 차려야 해. 그러지 않으면 엄마가 기운을 낼 수 없잖아.
수요일에 차려놨던 아침상이 그대로 남아있었으니까… 그래, 오늘은 안방 앞에 가져다 놔야겠다.
엄마가 얼른 기운을 냈으면 좋겠어.
엄마가 이렇게 아픈데, 아빠는 어디서 뭐 하는 걸까. 출장이라도 간 걸까?
그런 말 없었는데….
졸리다. 자고 싶어.
… … …
[09.12.04. 금요일]
엄마도, 아빠도, 유나도 내가 싫어진 걸까.
이유를 모르겠어….
… … …
[09.12.07. 월요일]
어째서?
… … …
[09.12.14. 월요일]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건데?
… … …
[09.12.31. 목요일]
이제야 알았어.
모두 내 소극적인 성격에 지친 거구나.
고칠게, 고친다고 약속할게.
유나처럼 밝아진다고 약속할게.
새해가 되면 다른 사람이 될게.
그러니까 모두 돌아와 줘.
부탁이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제발 돌아와 줘….
무섭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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