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50화 (50/76)

〈 50화 〉 #50. 일기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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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일기장(3)

[09년_11월_23일_월요일]

[19:00]

인산을 이룬 바로 앞 거리와 동떨어진 것처럼 한산한 분위기가 가득한 공원.

시내 미관을 살리기 위해 조성된 이곳으로 교복 차림의 유나와 사복 차림의 현지가 들어섰다.

그리고 이 정도면 두 사람의 첫 만남 장소로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양손 엄지와 검지를 직각으로 세워, 저만의 카메라를 만들어 구도를 살피던 유나가 현지에게 저만치에 놓인 공원 의자를 가리켰다.

“현지야, 저쪽에 앉아있어 봐.”

“…네, 네.”

“음, 여기가 딱 좋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상혁이 여기로 보내줄 테니까.”

현지는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유나의 계획을 전부 전해 들었지만,

“정말 돌아가게? 그냥 같이 있어도 되는데….”

아직은 친구에게서 자립할 용기가 서지 않는다는 얼굴로 작게 칭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소심한 모습을 언제까지고 감싸줄 수 없었던 유나였기에.

“안 돼. 첫 만남이라는 그림 속에 나까지 껴있을 필요는 없다고.”

“…굳이?”

“응, 굳이 그래야겠어. 그러니까 괜히 전화하지 말고, 최대한 다소곳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어.”

“풋, 다소곳한 모습은 또 뭐야.”

“남자는 첫인상이 중요하다더라. 그러니까 평소처럼, 네가 잘하는 얌전한 모습으로 시작해보자고.”

“드라마 감독님 다 됐네… 바보 같아, 진짜 바보 같은데, 이번만이다…?”

마지못하다는 분위기는 있어도, 자신의 계획에 수긍해줬기에.

“오구오구, 기특해. 그럼 기다리고 있어, 금방 보내줄 테니까!”

유나는 입꼬리가 귀에 닿을 정도로 활짝 웃어 보이다, 시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상혁을 데려오기 위해 공원을 나섰고,

현지는 여느 때와 같이, 친구의 귀를 막는 이어폰이 신경 쓰인다는 듯, 조금 크게 소리쳤다.

“유나야! 이어폰 음량 좀 낮추고­”

물론, 이어폰은 그런 뒤늦은 잔소리마저 가로막았지만 말이다.

“바보… 위험하다니까.”

그건 분명한 악습관이지만, 그래도 서로는 언제까지나 함께일 소중한 사이니까.

현지는 나중에라도 천천히 고쳐주겠다는 듯, 점점 멀어지는 유나의 뒷모습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멍한 표정이 되어,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기다리길 한참.

현지는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는 얼굴로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 내리며 이리저리 고쳐 앉고 있었다.

“다소곳하게… 역시 모르겠네….”

아쉽게도, 수수한 화장과 연분홍 셔링 원피스부터가 다소곳한 분위기의 절정을 자아내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결국,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현지가 크로스백에 넣어둔 일기장을 꺼냈다.

“밀린 것부터 써야 하나?”

16일에서 멈춰버린 과거를 써 내리려는 것이었지만, 오늘은 소극적이었던 제 모습을 털어내는 날이었기에.

“아니… 그래, 오늘부터 새로 쓰자.”

현지는 제 인생에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오늘부터 적는 것도 괜찮겠다는 것처럼, 11월 23일 월요일이라는 과거를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09.11.23. 월요일]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네. 화장도 했고, 상혁이를 만나게 될 날이니까.

유나 덕분에 항상 새로운 일투성이야….

가끔은 난처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항상 고맙다는 마음이 큰데, 잘 표현해주지 못해서 늘 미안해.

그래도 오늘부터는 밝아질 거니까, 앞으론 잘 챙겨줄 거야. 이건 내가 나랑 하는 약속.

그나저나, 이제 곧 상혁이가 도착할 텐데… 조금이 아니라, 너무 많이 떨려서 문제야.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좋을까 싶어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 한 권을 들고 왔는데… 괜찮으려나.

사실, 하나도 모르겠어. 가슴 속이 되게 간지러워.

나쁜 기분은 아닌데,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어서 힘들어.

유나는 상혁이 보내주고 돌아가려나… 같이 있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부끄럽단 말이야. 어떡해, 어떡해!

(큭큭, 이건 유나 말투.)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모처럼 유나가 만들어 준 인연이니까. 잘 해낼 거야.

아자, 아자.

“…여기까지, 나머지는 집에 가서 써야지.”

조금은 뭉게뭉게, 어쩌면 둥실둥실.

좀처럼 가라앉지 못하고 설레는 기분을 주체할 수는 있어도, 수줍은 발끝으론 애꿎은 공원 바닥을 긁게 되는 현지였다.

▶▶▶ ▶▶▶

[19:20]

무심한 세상이 계절에 비해 따스한 색감을 띤 소녀에게로 겨울이라는 차가운 바람을 전하기 시작했다.

“….”

공원 의자에 홀로 앉아, 조금치고는 긴 시간을 기다린 현지.

그런 그녀가 유나에게 전화와 문자를 수차례 해봤지만, 어째선지 연락은 닿질 않았다.

혹시 상혁이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은 것일까.

그런 탓에 유나가 제게 미안해져서, 그래서 연락을 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럴 애가 아닌데….”

유나는 미안할 때 고개부터 숙이는 친구였다.

그런 성실한 모습을 의심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현지는 눈을 질끈 감는 것으로 두 귀를 막고, 휴대전화기를 붙잡은 손으로 남은 손등을 세게 긁어댔다.

겉으로만 봐도 불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건, 바로 앞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현지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말들만 오가는 탓이었다.

시내 입구 사거리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든지, 그 사고로 많은 사람이 다쳤다든지.

그런 악재와 유나를 연결 짓고 싶지 않았던 현지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아니야, 아니야… 이상한 이벤트 같은 거 준비하고 있는 거겠지… 유나잖아, 유나니까….”

발랄한 친구가 연락을 받지 않을만한 이유를, 그것을 어떻게든 만들어내려 했다.

“제발, 제발… 전화 좀 받아, 유나야… 나 그런 이벤트 같은 거 하나도 필요 없다고….”

이별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바라지 않았던 최악의 형태로 찾아오곤 한다.

그리고 현지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녀의 세상이 무너지려는 것처럼.

의자에 앉아, 유나를 기다릴 뿐이었던 현지에게로 얼음장처럼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다고 외치는 입과 달리, 다급하게 움직이는 두 발.

현지가 공원을 나서, 시내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새로운 미래를 그려가려는 지금, 분홍빛으로 물들었던 세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어스름한 별빛이 떠올랐던 밤하늘엔 잿빛 연기가 가득했고,

불안한 색감의 연기가 시작된 시내 입구 쪽에선 누군가에겐 비극이 될 이야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인산을 이루고 있었다.

“유나야, 유나야…!”

현지는 유나가 사고 현장을 구경하는 것이길 바라며 인산을 헤집고 다녔지만,

주변 사람들은 바로 앞에서 벌어진 사고의 조연 배우라도 발견한 것처럼, 주변에 쉬쉬하며 사고 현장 쪽으로 길을 터줄 뿐이었다.

그렇게 현지가 저도 모르게, 사고 현장에 도착하게 됐다.

“….”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게 무서웠던 것이었을까.

현지는 붙잡고 있던 크로스백과 휴대전화기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한 발짝 뒷걸음질쳤지만,

“에…?”

이내 무엇인가 잘못된 거라도 발견한 것처럼, 두려움이 차올랐던 얼굴이 멍한 얼굴로 뒤바뀌었다.

평범하게 지나치던 시내 입구가 비참한 사고 현장으로 뒤바뀐 탓도, 사거리 도로 한가운데 전복된 버스 탓도 아니었다.

그건 건너편까지 길게 늘어진 사고 현장, 그 끝자락에서 조금 익숙한 차량을 발견한 탓이었다.

수많은 차량이 오가는 사거리, 그런 거리에서 발생한 대형 추돌사고.

사고 현장은 사거리가 시작되기 이전의, 조금 멀찍이서 통제되고 있었다.

다만, 막상 시내 안쪽에서 사고 현장으로 향하는 현지를 가로막아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지켜볼 뿐, 속으론 현지의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현지가 익숙하다고 생각했을 차량, 제 아버지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차량에 다가갔다.

“저기요! 거기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뒤늦게 확인한 구급대원이 저만치서 소리치며 달려왔지만,

“…아니야, 아니… 아닐­ 아니야….”

결국, 마주하고 말았다.

차라리 마주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것이고, 현지도 그것을 직감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차량을 살피는 두 눈은 멈춰 서질 않았다.

마주한 흰색 승용차에 달린 번호판, 그마저 제 아버지의 차량과 일치했다.

“아빠…?”

차 내부는 텅 비어있었지만, 운전석만이 아닌, 조수석까지도 유리조각과 뒤엉킨 핏자국으로 얼룩져있었다.

‘저녁 대충 먹어! 오늘 엄마랑 아빠는 늦을 예정!’

‘…전화해. 맛있는 거 사 올 테니까.’

떠오르는 기억에 두 발의 힘이 풀린 듯, 현지가 제 아버지의 차 앞에 주저앉았고,

“어….”

그와 동시에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유나에 대한 걱정을 떠올리게 된 건, 제게 익숙한 물건을 또 하나 발견한 탓이었다.

“이게 왜….”

이어폰 선이 연결된 휴대전화기.

그 익숙한 물건을 집어 들려는 현지의 두 손도, 점점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시간도.

무엇 하나 멈춰 서는 게 없었다.

현지는 액정만이 아닌, 겉면 대부분이 손상된 휴대전화기를 집어 그 뒷면을 확인했다.

그곳엔 휴대전화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사진이 한 장 붙어있었다.

현지와 그녀의 친구, 한유나의 발랄한 모습이 담긴 네 가지 장면이 담긴 사진.

사진 속에는 다시는 그려지지 못할 두 소녀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유나야…?”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이었다.

어떤 표정마저도 지어 보일 수 없게 된 현지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빗방울만이, 그녀가 흘려줄 눈물 대신할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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