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48. 일기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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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일기장(1)
[09년_11월_16일_월요일]
[08:10]
셔츠 단추를 채우고 치마를 올려 입은 뒤, 바로 앞에 놓인 전신 거울을 바라보며 리본을 맨다.
그리고 김현지라는 명찰이 달린 교복 재킷과 쌀쌀한 바람을 막아줄 카디건까지 걸치면 준비 완료.
“딸! 진짜 늦었다니까!”
거실에선 재촉이 빗발치고 있지만,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의 현지가 차분히 등교 준비를 마치며 제 방을 나섰다.
“어떡해, 어떡해! 이러다 둘 다 지각하겠어!”
“…저기, 엄마가 호들갑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래. 여보, 현지 초중고 다니면서 지각 한 번을 안 해본 애잖아”
“당신은 잔말 말고 출근이나 해요!”
“…다녀올게.”
9시까지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 아버지,
“조심해서 다녀와.”
8시까지 학교에 출석해야 하는 고등학생 딸,
“아빠란 사람이 매사에 저렇게 느긋하니까, 딸까지 이러는 거잖아!”
그런 둘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제 가족의 아침을 열어줘야 하는 전업주부 어머니까지.
평범하기에 이상적인 가족의 아침이 여느 때와 같이 소란스럽다.
“자… 그래서 우리 딸은 자연스럽게 소파로 향하는데, 거기가 학교는 아닐 텐데 말이지?”
소파에 엎드려 누워 훤히 보이게 된 자신의 등, 그곳이 화끈해질 것을 예상한 것이었을까.
점점 가까워지는 어머니의 모습에 눈만 깜빡거리던 현지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밖으로 도망쳤고,
그렇게 먼저 쫓겨난 아버지와 함께 집 건물을 나서며 아침을 맞이했다.
“이제 곧 교복도 끝인데, 아쉽진 않아?”
아버지가 정장 차림인 제 모습을 바라보고 묻자, 현지도 교복 차림인 제 모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후련하다는 느낌이 훨씬 크네. 뭐,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아빠처럼 아쉬워하고 그러겠지?”
“땡. 교복이 그립다기보다, 이 양복이 지긋지긋한 쪽이란다.”
“와. 당장에라도 사표 쓸 기세, 정말 든든해.”
“…장난이고, 지금은 아닐지라도 나중엔 정말 자주 떠오를 거야.”
“그렇겠지.”
“그리고 소중한 건 멀어져야 알아차릴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런 말은 내가 아니라 엄마한테 자주 해주란 말이야.”
모처럼 뱉은 간지러운 말에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비밀인데… 네 엄마랑 연애할 땐 아까 같은 모습이 전부 애교처럼 보였거든? 근데 요즘은”
현지의 아버지는 괜스레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며 대화 주제를 흐리려 했고, 그런 순간이었다.
“수다는 집에 와서 하라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을 부녀의 모습에 날카로운 짜증이 뒤편에서 큼지막하게 울려왔다.
현지의 어머니가 3층 난간에서 몸을 내밀고, 손바닥 크기가 되어버린 부녀에게 소리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질투가 섞이긴 했지만, 마중 인사였다.
“…그, 멀어져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게, 지금 이 정도의 거리감을 말하는 건 아니란다.”
“네, 네.”
“아니! 이따가 나도 끼고 하라고!”
“큭큭, 그래도 역시 원래 모습이 어디 가진 않는다니까. 여보! 다녀올게!”
“…천생연분이네, 천생연분이야.”
초겨울을 맞이한 아침엔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런 것들이 무뎌질 만큼 따스한 배웅 덕에 누구보다 행복한 하루를 시작하는 부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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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이랬던 적 없었던 풍경이 펼쳐진 이곳.
학생들은 교단에 선생님이 서 있는데도 엎드려 자거나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고,
선생님 또한, 그런 학생들에게 별다른 제재를 주지 않는 이곳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교실이다.
이런 풍경이 펼쳐질 수 있게 된 건 3일 전 금요일에 대학수학능력시험, 약칭 수능이 치러진 탓.
수능이 끝난 시점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교실에서 수업을 들을 이유도 막을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교실 속에서 점심까지 늘어지는 단잠이나 휴대전화기 화면에 빠지는 것보단, 담임 선생님과의 수다가 즐거웠던 한 학생.
교단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한유나가 선생님을 바라보고 물었다.
“쌤, 저 화장법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화장? 갑자기 웬? 그리고 화장은 너희들이 더 잘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뇨, 아뇨. 제가 배우고 싶은 건 어른의 화장!”
“에?”
“예를 들면… 남자 꼬실 때라든지!”
“…에휴.”
어른이 되고 싶은 제자의 모습이 서툴게만 느껴진 탓이었을까.
3학년 4반의 담임 선생님인 김윤희가 가로로 저어대던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유나야… 화장보다 피임이 먼저다?”
“풋…! 그리고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화장이 궁금한 거라고요!”
“사고 쳤다는 소식 들리면 회초리 들고 찾아갈 거야. 그래서 남자친구는 있고? 전혀 몰랐네.”
“…없으면 물어보는 것도 안 되는 건가요.”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유나의 모습에 서두가 잘못된 것을 알아챈 담임 선생님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차차… 그, 대학 가서 써먹게? 그래, 선생님이 차라리 남자를 유혹하는 50가지 방법을 알려주도록 하지.”
“…오, 좋네요. 그거 마침 이 친구한테 아주 필요한 이야기거든요!”
“응? 현지한테?”
유나가 제 옆자리에 앉아있는 짝꿍, 현지의 손을 번쩍 들며 대답하자,
갑자기 들린 손에 당황한 현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반응 뭐야… 설마, 작년 수학여행 때 나눴던 약속… 그걸 잊어버린 거야…?”
“어…?”
“무슨 약속을 했길래?”
“…너무해. 현지가 공부만 하고 지냈으니까… 그래서 수능 끝나면 같이 화장도 연습하고, 남자도 소개받고 같이 놀기로 했었단 말이에요….”
“아… 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됐어, 늦었어. 대학 가면 연락 끊을 거잖아.”
“또 그런다, 아니라니까….”
토라진 유나의 모습에 어쩔 줄을 모르는 현지의 모습.
그리고 늘 떠나 보내야 했던 모습들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아쉬웠을 담임 선생님이 대화를 이었다.
“그래, 현지는 화장을 배워둘 필요가 있겠지. 기념이다! 선생님 교무실 가서 파우치 좀 가져올게.”
“정말 괜찮은데”
“인제 와서 뭐라는 거야! 그리고 너 소개받을 남자애도 이미 골라뒀거든?”
“응?”
“걔 한국대학교 국문과 붙었다더라고.”
“그게 무슨 상관”
“바보야, 너 한국 교대잖아! 한국대랑 가까우니까, 유사 캠퍼스 커플을 맛볼 절호의 기회라고!”
“저기… 그건 소개를 받지 않아도 가능한”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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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다녀왔어. 오늘부터는 점심도 안 준다더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현지가 조금 크게 말했지만, 텅 비어있는 집에선 별다른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장 보러 갔나 보네… 배고픈데….”
현지는 허기진 배를 어루만지다 조금은 기다려보겠다는 듯, 주방 옆에 자리한 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기 화면에 적힌 글귀를 골똘히 바라봤다.
“….”
[이상혁이라고 해. 유나한테 번호 받았는데, 시간 되면 전화 좀 부탁할게.]
짧고 간결한 문자였다.
현지는 남자를 소개받을 땐 이렇게 간결한 대화를 나누는 것인지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부담스럽진 않지…?”
그것이 의도된 배려인지는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댈 뿐이었다.
물론,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상대방이 전화를 바란다는 점이었다.
현지는 고등학교는 물론, 중학교,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에서마저도 남자 경험이 없다 싶을 정도로 적었다.
“어떡하지….”
그런 탓에 이도 저도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고, 그런 순간이었다.
별다른 조작이 없어 꺼졌던 휴대전화기 화면이 켜졌다.
아직 저장까지는 하지 않은 번호로, 이상혁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
받아야 하는 걸 알면서, 그래 주질 못하는 손가락.
제가 하는 행동이 요즘 사람들에게 불리는 밀고 당기는 행위인지.
그것이 아니라 해도, 또 그럴 의도도 없었지만, 제대로 정리할 수 없는 온갖 생각에 머리가 아찔해질 뿐이었기에.
결국, 30초가량 울리던 진동이 끊어졌다.
“어떡해….”
침대에 엎드려 누워있던 현지의 몸이 어느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수줍은 마음이 어지럽힌 방, 이곳저곳에 던져진 이불과 베개를 정리하기 위해 현지가 몸을 일으켰고, 다시 한번 전화가 걸려왔다.
“…받자, 전화가 뭐 대수라고….”
그렇게 한참을 울려대던 휴대전화기가 현지의 귓가로 올려졌다.
[어….]
“어… 여보세요?”
[아, 안녕. 이런 일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하네.]
“아, 응… 나도 처음이라….”
[그렇구나… 근데 나를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유나한테 물어보니까, 같은 학원도 아니라던데….]
“어? 아… 아직 하나도 모르는 아, 한국대학교 국문과라는 건 들었구나….”
[에?]
“응…? 왜?”
[아니, 어… 그, 유나가 나한테 관심 있다는 애가 있다고 연락해보라고 해서….]
“뭐, 뭐라고?”
조금 얽혀있지만, 두 사람의 첫 번째 인연.
먼 미래에선 무색무취가 되어 잊혀진 인연이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달콤하게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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