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7. 이어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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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이어지는 길
[15년_01월_18일_일요일]
[15:35]
소녀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흔적.
끝끝내 전할 수 없었던 마음으로 얼룩진 흙바닥.
상혁은 그곳에 주저앉아 유진이 했던 말들을,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려야 했다.
마음이 외치고 있을 것이었다.
떠올려야 한다고,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요즘 학생한테는 말하기 힘든 사연인가 봐요?’
‘그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눈치가 없네요.’
“그냥… 그냥 궁금했던 거잖아….”
‘바로 옆이 대로인데, 설마 아니겠죠.’
‘약속했으니까요.’
‘어제 나눈 약속처럼 생생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찾아온 거 아니겠어요.’
“단순히 우연이잖아….”
‘지금처럼 쓸데없는 설전이 아니라.’
‘슬슬 정신 차려주세요. 나설 차례네요.’
‘아까 말한 방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저씨라면 둘 다 되살릴 수 있으니까.’
“답답해서… 그냥 답답해서 도와준 거잖아….”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못 알아듣는 건 참 서럽네요.’
“그럴 리가 없다고….”
‘그만 해요!’
‘어떻게 사람이 이래?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야?’
‘찾으면 되잖아!’
‘증명할 수 있어. 아저씨랑 여자 친구 씨한테 누구보다 밝은 미래가 있었다는 걸’
“나는….”
‘이상혁이란 남자는 정말 다정한 남자였네요.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잖아.’
“너한테… 너한테 그래 주질 못했다고….”
‘아니야, 내가 알고 있어.’
“아니라고….”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만… 제발 그만….”
‘언제까지나 기억할’
“….”
하나부터 열 끝까지 부정해보려 한들, 유진이 했던 말 전부가 저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런 마음을 그녀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끝끝내 외면하려 했던 자신이었기에.
그렇기에 사과하고 싶었을 테지만, 무엇도 전할 수 없게 되어버렸기에.
그저 도망치고 싶을 것이었다.
상혁은 마주한 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마음을 숨길 뿐이었다.
그리고 진작에 끝났어야 할 세상에 칠흑 같은 절망이 그려진 탓이었을까.
세상을 그리던 모든 것들이 흩어져 사라졌지만, 네 번째 과거의 막은 내리지 않았고,
그런 어두운 공간에 남겨진 상혁의 앞으로 나타난 금빛 알갱이가 익숙한 형체로 모여들었다.
“…아주 늦지는 않았나 보군요.”
유진에게 마지막 기회를 쥐여줬던 노인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기척이 과거의 끝을 알리던 목소리라 생각했을 상혁이 고개를 들고 그곳을 바라봤지만,
그렇게 마주한 풍경은 시계가 가득한 방이 아닌, 칠흑처럼 어두운 세상과 그런 허공에 떠 있는 노신사였기에.
“여긴….”
현실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한 목소리를 흘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밝혀줄 빛의 근원지마저 사라진 이곳이었지만, 둘은 서로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지금이라는 세상의 마지막 등장인물인 두 사람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지는 것처럼 말이다.
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서로의 이야기가 비극이라는 것을, 제 인생의 끝을 다짐한 서로인 탓이었을까.
세상에 존재하던 모든 걸 집어삼킨 칠흑 속엔 서로를 마주한 두 남자가 자아낸 적막감이 흘렀다.
그리고 이런 마지막 순간이 마음에 들어, 소리 없이 미소만 지어 보이던 노신사.
드디어 찾아온 여명을 차분히 만끽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 유진과 마찬가지인 처지였기에.
“후.”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
“아, 저희는 구면인 상태죠?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구면인 상태라니. 상당히 흥미로운 관계군요.”
그런 장난스러운 감상에 상혁이 대답을 해야 할 필요성조차 못 느끼겠다는 식으로 미간만 좁히자,
“흠….”
노신사는 조금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는 사라진 시간 선의 존재, 먼 미래에서 찾아온 존재입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걸 당신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그래, 당신의 딸이 살았던 미래에서 찾아온 존재라고 해야겠죠.”
“잠시만… 지금, 유진이를 말하는 겁니까?”
“네, 그래도 이제는 그녀가 딸이라는 걸 인정하실 수 있게 된 모양이군요. 다행이네요.”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을 이야기, 마주하는 것마저 두려웠던 진실에 겁이 난 것이었을까.
그게 아니면, 20대라는 나이로는 가질 수 없을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 탓이었을까.
상혁은 유진이 자신의 딸이라는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조차 몰랐을 테지만,
그녀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에 동요하는 것처럼 얼굴을 흐렸다.
그러자 노신사가 주저앉은 상혁의 몸 아래 놓여있는 일기장, 유진이 찾아낸 마지막 희망을 바라보며 끊어진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제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사용해서 당신이 과거를 마주할 물건을 찾아냈어요.”
“단 한 번의 기회…? 그게 무슨 말이죠…?”
“그녀가 그 일기장을 건네기 위해서 바쳐야 했던 건, 자신의 목숨이었고요.”
“지금 무슨 말을….”
“어차피 잊혀져 사라질 운명일지라도… 그건 열일곱 어린 소녀가 해낼 수 있는 다짐이 아니었죠.”
“….”
“그것도 무려, 전부 포기할지도 모르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결정이었고요.”
상혁의 눈은 노신사를 향해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된 유진의 모습을 쫓아, 칠흑처럼 어두운 허공을 헤매는 것이었다.
“다만, 그 일기장으로는 과거를 마주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곳엔 당신의 추억이… 아니, 어떤 시절의 기억도 담겨있지 않을 테니까요.”
“….”
제대로 들려오지 않을 것이었고, 그와 동시에 무엇도 이해하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진이 남긴 희망까지도 외면할 수 없었기에.
상혁은 제 몸 아래에 놓여있던 노트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것이 첫 번째 과거에서 찾으려 했던 현지의 일기장이란 걸 알아챘고,
그제야 노신사가 하는 말의 의미, 제가 마주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준 지금이 돼서야 찾아온 기회.
하지만 이 일기장에 현지가 자살한 이유가 담겨있다 한들, 현지의 과거를 마주할 수 있다 한들.
인제 와서 무엇이 달라질까.
평소처럼 상황을 정리하고 발버둥치는 건 지금의 상혁에겐 무리인 일이었다.
“또다시 과거로 간다고…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딸이 남긴 노력을 실패로 남게 할 것인지, 그것을 발판 삼아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낼 것인지… 그 정도가 달라지겠죠?”
“….”
“아, 그녀의 노력이 오로지 당신의 선택 탓에 결정되는 건 애석하네요.”
“…유진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궁금한 건 그쪽이군요. 당신의 선택에 따라, 그녀가 태어날 세상이 만들어질 수는 있겠죠.”
“이 노트로 09년에 갈 수 있다는 건가요…?”
“아뇨, 마주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마주할 수 있을 뿐이라는 건….”
“말 그대로입니다.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지만, 그 일기장 속에 담긴 그녀의 인생은 전부 마주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가능하고 불가능하고 신경 쓸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서요. 뭐든 해봐야죠.’
그런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나서야,
상혁은 조금 허탈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주저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힘들면 멈춰도 괜찮으니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제는 멈춰 서는 것마저 불가능했기에.
‘아빠.’
포기해서는 안 되는 미래를 마주했기에.
“…알겠습니다.”
또다시 과거를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상혁이 현지의 일기장을 집어 들자, 노신사는 제 손 위에 언제라도 부서질 것처럼 금이 간 모래시계를 만들어내며 말했다.
“서둘러야겠군요.”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과거로 올 수 있었던 방법… 유진이가 어떻게 과거로 올 수 있었던 거죠?”
“음… 저 자신을 바쳐서 왔다고 해야겠죠.”
“…알겠습니다.”
“도움이 됐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지의 일기장이 분해되어 금빛 알갱이가 되었고, 그것을 담아내던 모래시계가 하단부부터 부서졌다.
칠흑처럼 어두운 이곳에 흩날리는 모래시계와 금빛 알갱이.
그것들이 오래된 과거를, 현지의 일기장 속에 담긴 과거를 그리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길이라… 역시 두 개의 시간 선이 엉켜있던 거군요.”
그리고 그런 진실을 조금 먼저 알아차린 노신사가 의식을 잃은 상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지만,
“그래도 당신은 저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길 바라보겠습니다….”
그런 말을 끝으로 그의 모습 또한 재가 되어 이곳을 떠나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미소를 짓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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