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46화 (46/76)

〈 46화 〉 #46. 네 번째 과거(4) ­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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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네 번째 과거(4) ­ 이별

[15년_01월_17일_토요일]

[15:10]

제 선택에 대한 강한 믿음이 때때로는, 진실의 가림막이 되곤 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신념이라는 이름의 고집이 차 있다면, 거짓을 알아보는 것마저 불가능해지기에.

그렇기에 가장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을 의심하는 것부터가 내딛는 발걸음의 처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둥글게 굽어 있는 진리를 깨닫기엔 아직 어린 나이의 유진이었기에.

가족을 바라는 소녀의 마음은 자신의 어머니를 확신하고 싶다는 고집을 놓아주지 못했고,

제가 사라지게 될, 제게만 마지막인 단 한 번의 기회를 사용해서라도,

그런 어머니와 상혁이 함께 할 미래를 만들어보겠다는 욕심을 꺾지 않았다.

이것을 세상의 순리라고 하기엔 가혹함의 정도가 과하게 치중되어있었기에.

이건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바라는 미래를 가진 소녀에게 내려진 벌, 시간의 섭리였다.

그렇게 유진이 무엇하나 제대로 확신할 수 없었던 과거로, 인생의 마지막이 될 시간 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유진은 제가 서 있는 베란다 앞으로 펼쳐지는 가정집 풍경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녀였지만, 이곳에서 풍겨오는 낯선 분위기를 떨쳐낼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람­ 아니, 엄마 본가겠지….”

유진은 거실 왼편, 현관을 사이로 둔 두 개의 방을 바라보다 주방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고,

“저기려나….”

그곳에 자리한 작은 방이 평범한 가정 속, 딸의 방일 것이라 추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낄 수 있게 된 마음이 주춤거릴 새도 없이 열리는 문.

작은 방으로 들어선 유진이 이번에는 조금 어수선하다는 기분을 느낄 것이었다.

흐릿한 날씨 탓에 밝지는 않아도, 커튼이 쳐져 있어 주변을 살필 수 있었고,

그런 주변에 널브러진 예쁜 옷가지들이, 이 방의 주인이 소중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외출했다는 걸 알려주는 탓이었다.

“아빠한테 가신 걸까… 아니야, 서두르자….”

셋이 함께 있고 싶다는 미련이 차오를 것이었다.

그렇기에 유진은 가만히 눈을 감고, 서로가 함께였을,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려보려 했지만,

어머니의 본가라 생각한 이곳에서마저도 떠오르는 기억 같은 건 아무것도 없을 뿐이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는 말과 달리, 심하게 떨리는 몸.

불협화음이었다.

자신을 다독이는 서글픈 목소리와 그런 소녀의 주변에 가득한 고독함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도, 제가 한 다짐의 결말이 두려워 이토록 떨고 있는데도.

“아니야, 아니야… 아무렇지 않아….”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는데도, 그런 자신을 붙잡아줄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데도.

“결심했잖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유진은 상혁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 제 뺨을 세게 두드리며 용기를 내려 했고,

“서둘러야 해.”

망설일 시간도 아깝다는 듯, 서둘러 창가 앞에 놓인 책상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찾아내야 했다.

상혁과 과거를 이어줄, 현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09년 11월 23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이건.”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피어오른 한 줄기 희망.

그것을 발견해낸 유진이 책상 서랍 구석 자리에서 낡은 노트를 한 권 꺼내 들었고,

“이거라면…!”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며, 제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가 헛되게 쓰이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하려는 순간이었다.

“…에?”

누군가의 방이었을 이곳에 눈이 쌓인 나무들이 자라났고, 그 옆으로 군부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만치 앞에 주저앉아있는 익숙한 남자의 뒷모습.

그렇게 뒤바뀌는 세상을 바라보던 유진은 조금 허탈한, 그와 동시에 그리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봐, 역시 어울리지 않잖아요.”

소녀의 인생의 막이 내릴 장소가 펼쳐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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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_01월_18일_일요일]

[15:25]

뒤편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을 상혁.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로 다가가 말을 잇는 유진.

“오늘도 바보 같은 얼굴이네요.”

“네가 왜… 네가 어떻게….”

“여전히 눈치도 없고요.”

“….”

무너진 제게로, 다시 한번 나타난 유진의 모습을 믿을 수 없었기에.

상혁은 조금 전까지 보였던 비참한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의아하다는 얼굴을 하게 됐고,

“…늦었지만 자기소개를 해볼까 해요.”

유진은 흐릿해지는 감각과 함께, 여태껏 끌어안아 온 미련을 놓아주기 시작했다.

“이름은 이유진이고, 나이는 열일곱에서 열아홉 사이에요. 아, 그리고 저 그 고등학교 학생 아니에요. 쭉 고등학생이었던 건 맞지만요. 나이를 안 먹었으니까.”

“지금 무슨 말을….”

또 어디서부터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상혁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음… 아!”

그런 고민에 잠겨있던 유진이 적당한 대사를 떠올려냈다는 듯, 목소리를 고르며 말을 이었다.

“음음, 나 미래에서 왔어. 이거면 되겠죠?”

그리고 상혁은 그 말이 제가 첫 번째 과거에서 윤서에게 했던 말이라는 게 떠오를 것이었기에.

무의미한 질문은 멈출 수 있게 됐지만, 크게 벌어진 입으로 아무 말도 잇지 못할 뿐이었다.

“조금 어려웠나…? 그럼 한 번 맞춰보는 건 어때요? 지금 이 순간은 여자친구 씨나 후배 씨가 아닌… 저라는 사람을 추리해 보는 거예요.”

장난스러운 분위기 속에 담긴, 자신을 알아차려 달라는 간절한 바람.

하지만 그토록 간절한 바람이 닿지 못할 세상을 살아온 상혁이었기에.

“누군데… 도대체 누군데… 네가 어떻게 여길….”

또다시 무의미한 질문이 시작됐고,

“…역시 안 되네요.”

바라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던 유진.

그런 그녀가 하늘인지, 우주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새까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도 흐리네… 그, 있잖아요? 이 일들이 전부 소설 속 이야기라고 했었던 거 기억나요?”

“….”

“그 소설의 등장인물 중엔 아주 먼 미래에서 온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어요.”

“뭐…?”

“아무도 모르는 아이, 모두가 잊어버린 아이.”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에게 잊혀져 쓸쓸했던 모습 그대로 떠나가는 결말인가 봐요.”

“….”

“실패했다는 건 시도했다는 뜻이고, 지쳤다는 건 노력했다는 뜻이고, 그만두겠다는 건 버텨왔다는 뜻인데… 사람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하는데….”

“….”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몰라주는 거예요…? 나 정말 노력했는데… 꾹 참아왔는데….”

그토록 냉정했던 유진이 서러운 마음을 두 눈으로 쏟아내고 있는데도.

상혁은 지금이라는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녀가 이토록 애달픈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탓이었다.

“대답 좀 해 보라고요…! 왜 몰라주는데… 왜, 왜, 왜! 왜 몰라주냐고! 포기하지 말자고 했잖아… 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리고 이제는 상혁이 미워진 것처럼, 그래서 이대로 사라질 심산인 것처럼.

유진이 쥐고 있던 낡은 노트를 상혁의 가슴팍에 밀어 넣고 뒷걸음질치자, 주어진 시간도 여기까지란 것처럼.

상혁과 유진이라는 부녀 사이에 약속되어있던 이별이 시작되려 했다.

“윽…!”

전신의 감각이 흐릿해져도, 유일하게 찾아 간직한 마음은 또렷한 색으로 남아있었기에.

“안… 안 돼… 싫어….”

유진은 상혁에게서 뒷걸음질쳤던 자신을 원망하듯, 다시 그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와 동시에 소녀의 모습은 상혁이 놓아준 소중한 추억들처럼, 두 번 다신 되돌릴 수 없는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금 무슨… 잠, 잠시만, 유진아…!”

그리고 애써 외면해온 직감을 두 눈으로 마주한 상혁이 유진에게 다가가려 하자,

발끝부터 흩어지던 그 모습이 뒤편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흐릿해졌다.

다가갈 수조차 없게 된 것이었다.

“미워… 나빠….”

그렇기에 이제는 해도 된다고, 전해도 된다고 저 자신을 허락해준 것인지.

유진은 과거로 오게 된 순간부터, 상혁을 마주한 순간부터 쭉 하고 싶었던 말을,

세상에서 가장 슬프지만, 그렇기에 예쁜 마지막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었다.

“아빠가 딸도 몰라보면 어쩌자는 건데요….”

“…뭐?”

“아빠라고요… 아저씨가 내 아빠라고요….”

흩어지는 손을 붙잡아보려고 한들,

“잠시만, 잠시만…!”

“엄마 못 구해도 괜찮아… 힘들면 멈춰도 괜찮으니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빠.”

그런 모습을 뒤늦게 안아보려고 한들,

“유진아…!”

유진의 모습은 먼지처럼 사라진 직후였기에.

그녀가 떠나간 빈자리에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못할 뿐이었다.

유일하게 되찾은 사랑이라는 마음.

그것을 보이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소녀의 세상이 막을 내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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