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45. 이유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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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이유진(3)
[19년_11월_30일_토요일]
[17:30]
이제는 상대방의 감정까지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해진 마음이 있는데도.
그런 마음이 상혁이 점점 무너져가는 모습에 아려오기 시작했는데도.
유진은 상혁을 다시 한번 과거로 내몰고 말았다.
부모님이 살아갈 미래를 위해서, 상혁을 위해서였던 선택이 저만의 바람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상혁이 세 번째 과거를 향해 떠나가는 도로를 멍하니 바라보던 유진.
그런 그녀가 제자리에서 휘청이기 시작했다.
상혁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제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다는 걸 직감했을 유진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어이, 뭐 하나만 물어보자.”
유진이라는 사람을 끝끝내 이해할 수 없었을 철식이 제 뒤통수를 긁어대며 발목을 붙잡았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
질문의 방향은 상혁이 아니라는 것처럼, 철식은 유진의 얼굴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넌 누군데, 어째서 이상혁을 돕는 거지?”
그리고 그 질문이 자신의 정체에 관한 날카로운 의구심일지언정,
“도저히 고등학생이라곤 믿을 수가 없잖아… 넌 너무 냉정하다고.”
무엇도 털어놓을 수 없는 처지엔 변함이 없었기에.
유진은 상혁이 떠나간 도로 끝자락에 미련이 남는다는 것처럼 그곳을 바라보다, 이내 초연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저씨가 행복할 수 있게끔, 하다못해 불행한 미래는 마주하지 않게끔… 그런 미래를 만들어주고 싶은 조력자… 이 정도면 될까요.”
“….”
고등학생이 했다고 하기엔 사무치게 서글픈 표정과 대답 탓이었을까.
이제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까지 하게 되는 철식이었고,
“…이만 갈게요.”
유진은 짧은 인사를 남기며 떠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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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_○○월_○○일_○요일]
[20:20]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거리에서 시계가 가득한 방으로 뒤바뀐 주변.
“….”
제가 있어야 할 세상으로 돌아온 유진이 그런 비현실적인 상황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게 됐지만,
“돌아오셨군요.”
노인의 두 눈은 유진이 아닌, 책상 위에 놓인 모래시계를 향해 있었고,
미간은 더는 피할 수 없는 문제를 맞닥뜨린 탓에 크게 구겨져 있었다.
모래시계에 생겼던 실금이 점점 커져, 분명한 균열이 되어 있었다.
“저기….”
“말씀하시죠.”
“아빠가 세 번째 과거로 향했어요. 이번에도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테지만….”
말을 잇는 와중에 긴장감이 차오른 것이었을까.
다음부터가 중요했을 유진은 마른침을 삼키고, 노인의 분위기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문제는 세 번째 과거에서 일란성 쌍둥이에 관한 단서를 못 찾으면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가로막 길이군요.”
“…그리고 그런 아빠한테 차선책이 있었어요.”
자신의 어머니를 확신하고, 얼마 못 가 사라질 기억에 잠시나마라도.
아주 잠시라도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담아보고 싶었을 유진이었지만,
‘그리고 아까 말한 방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상혁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를 끝마친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진실을 알려줄 수 없고… 제겐 기억이 없으니까… 저는 여자 친구 씨만이 아닌, 후배 씨까지 되살리는 길을 찾아야 해요….”
“이미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확신하고 있으면서, 다른 길에 여지를 두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노인은 유진이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기 위한, 나름의 배려가 담긴 질문을 건넸고,
“…아빠가 힘들어하니까.”
유진은 계속해서 되새기지 않으면 잊혀질 상혁의 모습을 떠올리다, 옅은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저랑 제 엄마가 살아갈 미래를 만들 수 없다면… 그렇다면 저는 아빠가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미래를 만들고 싶어요.”
“아버지 하나만을 위한 희생을 하겠다는 건가요?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하나도 없으면서”
“아니야…!”
그리고 마침내, 유진이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소리칠 수 있게 되자,
“있어, 있다고… 아빠 얼굴, 이름… 이상혁… 이유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그런 확실한 모습을 기다렸던 노인이 그녀가 지었던 옅은 미소를 그리며 대답했다.
“모든 걸 잃은 당신, 그런 당신이 유일하게 되찾은 건 사랑이었군요.”
“사랑…?”
“…서두르죠. 얼마 남지 않았지만,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으실 테니까요.”
지난날을 돌아볼 때, 부모의 사랑은 내일로 나아갈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 건 부모의 사랑부터가 시작이었으니까.
내일을 잃어버렸더라도, 무엇보다 선명한 부모의 사랑이 지나온 길을 밝히고 있었기에.
과거를 쫓아야 하는 유진이 길을 잃지 않고, 상혁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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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_12월_01일_일요일]
[21:00]
모든 것을 놓아주려는 상혁의 발걸음.
그것을 따라 걷는 유진이 느낄 좌절감이 그녀의 두 눈에서 흐르고 있었지만,
“….”
정작 유진은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걸음을 멈추고 크게 소리쳤다.
“그만 해요!”
잿빛으로 물든 고요한 거리에 서글픈 마음이 덧칠해진 것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
“이럴 거면 처음부터 되살리겠다는 생각을 말았어야죠. 어떻게 사람이 이래?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어?”
그건 잃고 싶지 않은데도, 전부 놓아줘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달라는 식의 원망이자,
“더는 방법이 없네.”
“찾으면 되잖아!”
모든 것을 포기했기에 가질 수 있는 집착이었다.
“…있잖아? 현지도 과거를 바꿨더라. 부모님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과거로 향했지만, 실패했던 모양이더라고.”
하지만 예상조차 못 했을 대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기에.
유진은 당황한 얼굴로 제가 놓친 부분을 알아내려 했고,
상혁은 덤덤한 얼굴로 전부 놓아주겠다는 절망을 전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현지한테 청혼한 날, 그날이 현지의 부모님 기일이더라… 아니기를 바랐던 게 정답이었어.”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유진은 현지가 자신의 어머니라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런 말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런 과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유진을 바라보는 상혁의 시선이 어느덧 내리는 빗방울보다 차가워져 있었기에.
포기하는 쪽은 자신이 먼저라는, 딸이라면 전부 돌이킬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야 했다.
“…증명할 수 있어. 아저씨랑 여자 친구 씨한테 누구보다 밝은 미래가 있었다는 걸”
“아니, 할 수 없어.”
그렇게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설전이 시작됐다.
“…할 수 있다고요!”
“10년 전 그날, 내가 무엇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아. 그 시절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고. 그런 내게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이 있을 리가 없잖아….”
“찾아보면… 같이 찾아보면 되잖아”
“도대체 얼마나 몇 번을!”
“….”
윤서에게 가질 죄책감을 이해하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유진은 상혁의 마음을 이해하려 했다.
자신마저 그래 주지 않으면, 상혁이 느낄 죄책감은 앞으로 평생, 그 누구도 이해해줄 수 없는 감정이 될지도 모르는 탓이었다.
“애초부터 우리가 함께할 미래가 없었던 거니까… 그러니까 여기까지야.”
단단하게, 아려오는 마음을 조금 더 단단하게 굳혀야 했다.
그렇게 유진은 지금까지 품어온 바람을 놓아주듯, 상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많이 힘들었죠.”
“….”
함께했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새롭게 쌓은 추억이 짧더라도.
과거의 상혁과 함께한 모든 순간을 소중히 간직했던 유진.
“이상혁이라는 남자는 정말 다정한 남자였네요.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잖아.”
“그게 무슨”
“아니야, 내가 알고 있어.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런 그녀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따스한 위로를 건네려 했지만,
“언제까지나 기억할 끄윽…!”
거기까지였다.
전부 포기할 각오를 했는데도, 과거는 또다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고,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갈게요.”
유진은 제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 마지막 만남을 기약하며 상혁을 떠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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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_○○월_○○일_○요일]
[20:30]
유진이 과거에서 돌아오고 몇 분이 흘렀지만, 노인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마지막이 될 다짐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할 수 있어… 무섭지 않아… 괜찮을 거야….”
그렇게 흐르는 눈물을 교복 소매로 닦아가던 유진이 마지막 순간을 다짐했고,
“알고 싶은 과거, 그걸 전하고 싶은 순간이 있어요… 할 수 있을까요…? 서둘러야 해요….”
그런 다짐에 어떤 조언도 보탤 수 없었던 노인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가능합니다. 당신이 알아낸 진실을 아버지에게 전하는 순간, 감각이 흐릿해지기 시작할 겁니다.”
이건 상혁에게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될 것입니다.”
미래에서 벌어진 딸의 이야기.
“…상관없어요.”
모두에게서 잊혀질 소녀, 이유진의 이야기가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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