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거를 바꾸는 방법-44화 (44/76)

〈 44화 〉 #44. 이유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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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이유진(2)

[18년_02월_13일_화요일]

[17:11]

타인의 기억에 자신이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

최소한 상혁의 기억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선명한 색으로 남아있길 바랐을 마음.

그런 애달픈 마음이 흐릿한 성격과 어우러져, 세상 어디에도 없을 특별한 색으로 튀어나왔고,

“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때, 제가 아저씨와 원조교제를 하는 여학생으로­”

“야, 야!”

그런 색감이 머릿속에 분명히 물들었다는 것처럼 크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상혁이었다.

다만, 유진은 제 마음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기에.

상혁이 그런 모습을 보이거나 말거나, 카운터 건너편에 모여 앉아있는 여자들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평범한 여학생이 어떤 음료를 주문해야 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녀들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저는 딸기 스무디로 할게요.”

“신경 쓰는 건 맞아…? 그리고 적당히 선생과 제자 정도로 보이겠지…!”

“….”

아무것도 상관없다던 마음에서 금이 가는 소리라도 들려 온 것이었을까.

“애초에 둘러댈 가치도 없는 시선이지만요. 음, 저쪽 창가 자리가 좋겠네요.”

유진은 서로의 관계를 단정 짓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등을 돌렸고,

흐릿한 바깥이 훤히 보이는 창가 자리로 향해, 아직 주문 중인 상혁을 흘끗 바라봤다.

“저 사람이 내 아빠….”

상혁과 자신의 사이는 어땠을 것인지, 부녀는 어떤 분위기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유진은 떠오르지 않는 기억과 입에 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말들을 되새기다,

어느새 주문을 마치고 다가오는 상혁에게서 고개를 휙 돌렸다.

“당차다고 해야 할지… 요즘 학생들은 다 그래?”

“요즘 학생이 아닌가 보죠.”

의도와 달리 전해지는 바가 많았던 질문, 의도와 맞게 전하려는 바가 명료한 대답.

“됐다, 됐어….”

그런 대화가 오고 간다 한들, 하나부터 열 끝까지 서러울 처지만큼은 전해지지 않았고,

유진은 마음에서 흐르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뒤로한 채, 굳은 얼굴로 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궁금하네요.”

“뭐가.”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생김새가 아니라 표정이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지금이 몇 월인지 헷갈렸던 건가 싶어서요.”

과거는 흐릿한 하늘처럼 막막하기만 한데도.

그런 낯선 길을 헤쳐나갈 방법을 따지고 있을 여유마저 없었다.

▶▶▶ ▶▶▶

[17:45]

상혁이 제 아버지라는 건 확신하게 됐지만,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었다.

김현지라는 사람은 어째서 자살하려는 것이고, 이윤서라는 후배는 어째서 상혁을 도우려는 것이며, 일란성 쌍둥이는 또 무슨 말인지.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상혁이 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현지와 윤서가 죽었다는 점, 그것이 자신의 어머니가 사라진 이유를 설명해줬지만,

어째선지 상혁은 죽지 않았는데도 미래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과거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유진의 생각은 상혁이 청혼한 상대가 현지라는 것을 듣게 된 순간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현지일 거라는 추측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당장은 후배 씨는 내려놓고, 여자 친구 씨가 죽지 않는 과거부터 만들어야겠죠.’

그런 탓에 현지를 되살리는 방향으로 조언을 시작했지만,

‘절대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후배부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윤서라는 후배를 내려놓지 못하는 상혁의 모습이 묘하게 신경 쓰였기에.

‘여자 친구 씨가 죽지 않는 미래를 만들어, 후배 씨를 이 사건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겠죠.’

그렇기에 제 어머니가 현지라고 확신하면서도, 두 사람을 구하자는 애매한 조언을 하게 된 것이었다.

“….”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어차피 잊혀져 사라질 제게 남은 시간마저 얼마 없다면, 어머니만을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아직 이르다는 걸 알면서도, 현지를 쫓는 길만을 가리키게 했다.

“차라리 과거를 크게 바꾸는 게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고 봐요.”

“어떤 식으로?”

“여자 친구 씨를 만나서 화해한다든지요.”

“만나주지 않을 거야… 조금 크게 싸웠거든.”

“크게 싸웠다는 설정이겠죠.”

“아… 맞아, 그런 설정이야. 너무 깊게 빠져들었네… 하하.”

“그리고 주인공이 지금 가능하고 불가능하고 신경 쓸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서요. 뭐든 해봐야죠.”

“네 말이 맞네….”

그렇게 상혁의 마음이 유진의 조언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려는 순간,

“너무 어렵네요. 주인공도 무척 힘들 것 같고­ 윽….”

예정되어있던 두통이 시작됐다.

“고맙다. 은근 상냥한 구석도 있네.”

그건 세상이 뒤바뀌며 시작된 강렬한 두통이 아닌, 유진이라는 존재만 지워내려는 것처럼 옅은 색감의 통증이었다.

‘그리고 그런 조언으로 당신의 아버지가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과거가 당신을 막아설 겁니다.’

“알겠어, 네 말대로 해볼 게.”

그리고 그런 통증의 의미가 상혁의 결심을 뜻하고 있었기에.

유진은 제가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으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고,

그대로 곧장 등을 돌려, 주머니에서 주인 모를 종이와 팬을 꺼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가야겠네요.”

“에? 가야 해? 학원 갈 시간이야?”

“주인공은 이번 과거가 끝나면 언제로 돌아가는 거죠…? 19년…?”

“아, 응.”

“날짜, 날짜는요….”

“그… 11월 29일. 아, 새벽 지났으니, 이제 30일이겠네.”

“알겠어. 이건 저 가면 읽어요.”

유진은 그런 말을 끝으로 카페를 뛰쳐나갔고,

“….”

그렇게 마주한 거리는 순식간에 시계가 가득한 고요한 방으로 뒤바뀌었다.

“돌아오셨군요.”

제가 있어야 할 장소, 잊혀질 세상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 ▶▶▶

[○○년_○○월_○○일_○요일]

[20:15]

상혁이라는 존재를 마주한 덕이었을까.

“….”

조금은 또렷해진 모습의 유진이 제게 찾아온 서글픈 감정 탓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재화는 어떠셨나요?”

아직 질문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던 것인지,

“나는 이윤서… 아빠는 이상혁… 이상혁이야….”

유진은 이것만큼은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자신과 상혁의 이름을 되뇔 뿐이었다.

아무런 기억도 없었던 그녀에게 평생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추억이 생긴 것이었고,

“내가 해야 할 일… 아빠를 도와야 해… 엄마를 구해야 해….”

그와 동시에 자신은 함께할 수 없는 미래를 만들겠다는 다짐까지 다잡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당신의 아버지를 위한 일만은 아닐 겁니다. 당신에게도 무엇인가 차오르는 게­ 아니, 이미 눈에 보일 정도네요.”

“할아버지,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말씀하시죠.”

“제 아빠가 사라진 이유요. 아빠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어째서 사라진 거죠.”

과거에서 마주한 의문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유진이 기운 내 물었지만,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었던 노인이 고개를 살짝 저어대며 대답했다.

“저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인 존재입니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요. 아까 말했던 대로,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작은 조언만이 당신과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입니다.”

“….”

그리고 여유가 없는 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처럼.

모래시계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것을 바라보던 노인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다짐은 좋지만, 저희의 시간은 길지 못할 것 같네요. 아버님은 어떤 상태였나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당장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방향을 권하긴 했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마음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입니다. 다음 약속은 잡고 오셨나요?”

“19년 11월 30일, 방금까지 있었던 카페로 했어요.”

“알겠습니다. 이번엔 정확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곧바로 출발할까요?”

“에… 지금 바로요?”

“하하. 아버님을 만나신 덕인지, 현실적인 질문도 하실 수 있게 되셨군요.”

▶▶▶ ▶▶▶

[19년_11월_30일_토요일]

[16:00]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골목길 입구로 모여든 유진.

그런 그녀 바로 앞에선 익숙한 뒷모습의 남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었을까.

유진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바로 옆이 대로인데, 설마 아니겠죠.”

“…정말 왔네.”

“약속했으니까요.”

“….”

“되게 바보 같은 표정이네요.”

“2년이야, 2년이 지났다고.”

“벌써 2년인가요. 아저씨­ 아니, 누군가에겐 어제 나눈 약속처럼 생생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찾아온 거 아니겠어요.”

“너도 참… 아니다.”

상혁이 전부 진실인 대답에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며 골목길을 나서자,

그런 변함없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건 모욕죄.”

기껏 지었던 미소를 구기며 상혁을 뒤따르는 유진이었다.

그렇게 카페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

유진이 조금 전에 딸기 스무디를 떠올리며 새로운 음료를 고르려는 순간이었다.

“딸기 스무디?”

잠시 헤어졌다 만난 것일 뿐이었지만, 분명하게 기억해주고 있었기에.

유진은 감동과 부끄러움이라는 기분을 동시에 느낀 것처럼 횡설수설하며 대답했다.

“그건 조금­ 아… 조그마한 사이즈, 바나나 스무디로 부탁할게요. 순서가 꼬였네요.”

“음?”

그런 와중에 새로운 음료를 고른 건, 상혁과의 추억을 다양하게 남기고 싶었던 마음이 시킨 일.

흐릿해진 마음에 가족이라는 색이 덧칠해졌기에, 유진의 모습 또한 점점 선명해지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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