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40. 네 번째 과거(1) 엇갈린 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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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네 번째 과거(1) 엇갈린 봄의 기억
[15년_01월_16일_금요일]
[15:00]
부모의 사랑이라는 품에서 피어난 꽃봉오리가 자신을 감싸온 아랫잎이 떨어지는 순간을 바라만 봐야 했던 겨울.
“시클라멘. 그이가 나한테 고백할 때 줬던 꽃이야, 날 닮았다면서… 큭큭.”
“아빠가? 풉… 상상도 안 돼! 아, 근데 엄마가 먼저 고백했다고 하지 않았었어?”
“정확히 따지면 그렇지. 눈 내리던 겨울, 그이 부대 앞에서 그거 목에 끼워주면서 고백했거든.”
“음…!”
“그런데 무슨 고집이라도 생긴 건지, 제가 고백해서 사귀기 시작해야 성에 찼던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대놓고 그러더라. 제가 휴가 나오면 직접 고백할 거라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꺄…!”
“그 바보 같은 모습이 눈에 훤해. 여름에 타버린 새까만 피부가 겨울까지 이어지고 있었어. 그랬던 얼굴이, 무뚝뚝한 그 얼굴이 그날만큼은 내 마음처럼 분홍빛으로 물들었었지… 참 귀엽게도 말이야.”
“와… 묘사 대박, 엄마도 글 써볼래?”
“됐네요.”
“아쉽네, 아쉬워. 그나저나… 나는 이거 언제 완성해…?”
“엄마는 나흘 걸렸어.”
“그렇게 빨리?”
“응, 그러니까 너도 얼른 완성해. 아빠가 보였던 얼굴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지, 그런 얼굴을 다음 까지 미루는 건 아쉽지 않겠어?”
“그렇긴 하네… 부끄러워하긴 할까나…?”
“큭큭, 상혁이라면 그냥 끄덕거릴지도 모르겠네.”
“에휴….”
조금 이른 시기에 떨어진 아랫잎.
세상을 마주한 꽃봉오리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붙어야 했지만, 그곳에서 저만의 봄을 마주했기에.
윤서는 내일로 나아가듯, 수줍은 마음의 개화를 끝마칠 수 있었고,
이제는 꽃이 씨앗을 퍼트리듯, 진솔한 사랑을 전하는 일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리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모녀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어렴풋하게.
마치, 시클라멘이 기다려 온 봄처럼.
출입문 입구에 소리 없이 나타난 금빛 알갱이들이 그녀들에게 익숙할 형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윤서의 어머니가 회복 중인 입원실, 바로 이곳이 상혁이 마주할 네 번째 과거의 시작점인 것이었다.
“….”
도대체 어째서였을까.
상혁은 별다른 통증 없이 전신의 감각을 되찾았지만, 당장은 그것에 의아해할 틈이 없었다.
마주한 풍경이,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윤서의 어머니와 그녀를 간호 중인 윤서의 모습이.
그 익숙하면서도 차가운 풍경이 낯설면서도 따스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어째서….”
이질감만 느껴질 풍경에 흘러나온 목소리.
그 작은 인기척을 알아챈 윤서의 어머니가 제 딸의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고,
“어머…!”
그곳에 서 있는 상혁의 모습에 당황한 반응을 보이다, 윤서의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상혁이 왔구나…! 윤서랑 떠드느라 들어온 줄도 몰랐네!”
“응?”
자신의 어머니보다 한층 나아가, 상혁이라는 이름에 적잖이 당황한 것인지.
윤서가 화들짝 놀란 얼굴을 돌려, 뒤편에 서 있는 상혁의 모습을 확인했다.
“히익…!”
그리고 그런 어찌할 바를 모르겠을 상황 속에서도, 침대에 걸쳐둔 담요로 제 무릎에 있는 물건들부터 황급히 숨기며 입을 열었다.
“선, 선배! 언, 언제 왔어요…! 지금 들어온 거죠? 맞죠…?”
“….” / “풉….”
당장은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탓에 다급한 질문이 전해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풋풋한 목소리로도 상혁의 시선을 끌 수 없을 것이었다.
상혁은 모녀의 건너편, 눈이 내리는 흐릿한 창밖이 아닌, 그곳에 어렴풋이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멍하니, 점점 벌어지는 입을 가리지 못하며 말이다.
상혁의 머리엔 베레모가 쓰여 있었고, 전신에는 방상외피와 전투복 하의가 입혀져 있었다.
“에…?”
그 충격적인 옷차림에 당황하는 건,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누구나 보일법한 반응이었고,
“왜 그래요? 복귀 시간 늦었어…?”
“뭐 놓고 온 거라도 있니? 군번줄?”
그런 이유를 깨달을 수 없었던 모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 어린 질문을 해오자,
“….”
상혁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오른쪽 가슴팍에 달린 계급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야 지금이 언제인지를 떠올릴 수 있게 됐다는 것처럼.
떡하니 벌어진 입으로, 곱게 묻어둔 쓰레기 같은 트라우마를 습관적으로 내뱉었다.
“상병 이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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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
여행을 간다든지, 고향에 내려간다든지.
내일부터 시작될 주말을 조금 일찍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승강구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곳, 고속버스 터미널.
상혁과 윤서가 앉아있는 구석 자리 승강구는 늘 그렇듯 한산한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안해요….”
“…응? 갑자기 뭐가.”
“우리 아니, 나 때문에 휴가 나와서 놀지도 못하고… 솔직히 복귀하기 싫잖아, 얼굴에 전부 쓰여 있어요….”
상혁은 현지가 제게 고백했던 과거로 가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휴가 복귀라는 터무니없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했다.
“복귀라….”
물론, 그것을 인지했다고 해서, 세워둔 계획에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었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사사로운 것들이 아니었다.
이번 과거가 어째서 지금이라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인지.
어째서 현지가 상혁에게 목토시를 건네며 고백하는 순간이 아닌, 윤서의 어머님 입원실에서 시작된 것인지.
하다못해 지금이라는 순간, 과거의 기억마저도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었다.
그런 탓에 상혁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잠겨 멍한 표정을 짓자,
미안한 마음만 점점 커졌을 윤서가 건너편 승강구에서 눈물겨운 이별 중인 커플을 바라보다, 살짝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속마음의 운을 띄웠다.
“부대 앞까지 마중 갈까요…?”
“응?”
그리고 그마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인지.
상혁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 윤서가 바라봤던 건너편 승강구를 바라봤고,
그곳에 자신과 같은 처지인 군인들이 버스 앞에 줄지어 있다는 것에 쓰린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가는 데만 두세 시간이야. 됐어, 너 온종일 어머님 간호하느라 쉬지도 못했을 거잖아.”
“그, 그러니까 간다는 거죠…! 버스에서 한숨 잘까 싶어서! 돼, 됐어! 그리고 장난으로 해본 말인데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요…!”
“…아무튼, 이제 슬슬 타야 할 것 같은데.”
상혁은 버스 앞에서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오던 기사에게 살짝 웃어 보이며 간이의자에서 일어났고,
윤서는 그런 상혁의 군복 뒷자락을 붙잡고 따라 일어나 말했다.
“고마웠어요… 정말, 정말.”
“아, 맞다… 가기 전에 해야 할 말이 하나 있네.”
“…뭐, 뭐, 뭐요?”
“아직 아홉 번 남았으니까, 그러니까 또 보자.”
“네?”
“그럼 갈게.”
상혁은 이번 과거로 끝을 다짐한 것처럼, 윤서와의 만남을 기약하며 버스에 올라탔고,
“에? 아니, 선배!”
그런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윤서는 서둘러 버스 창가 앞으로 향해, 입 앞에 손을 모으고 들리지 않을 말을 전했다.
“아, 아! 들려요? 이상혁 바보!”
“…들리겠냐.”
“뭐라고요? 아, 안 들린다는 건가?”
“가끔가다 보면 진짜 바보 같다니까… 왜!”
“음… 진짜 안 들리는 거 맞겠지…? 아무튼, 나 오늘부터! 오빠라고 부를 거야! 반말도 할 거야!”
“…하.”
“아홉 번은 모르겠지만, 오빠 말대로 또 봐. 늦어도 일요일까지 완성해서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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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_01월_17일_토요일]
[10:00]
어째선지 흐려지지 않았던 감각 탓만은 아니겠지만, 좀처럼 잠들 수 없었던 밤.
결국, 두 번째 군 생활의 첫날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상혁은 사단 지휘통제실 위병근무까지 마치고 나서야 생활관에 돌아올 수 있었다.
“오, 이상혁 고생했다.”
“음… 감사합니다.”
“뭐야, 왜 이렇게 얼 타?”
“15일이면 휴가 물 안 빠졌을 법하지.”
“그것도 그렇네. 나도 못 나가본 만박을 나갔으니까… 그래서 제수씨는 괜찮으셔? 어제 당직이라 못 물어봤네.”
“에…?”
“…어지간히 정신없었나 보네. 윤서 씨 잘 살펴드리고 왔냐고.”
“아, 최대한 옆 지켜주다 온 것 같습니다….”
“음…? 이상혁 상병님? 윤서 씨가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침상에 앉아 대화를 엿듣던 후임 중 한 명이 의아하다는 식으로 묻자,
“맞습니다. 저도 윤서 씨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상혁과 함께 위병소 근무를 다녀온 후임 또한 그런 의문에 동조하듯 말했다.
“에? 너희들 윤서 씨 몰라? 상혁이 썸녀잖아.”
“…그, 이상혁 상병 썸녀는 김현지 씨 아닙니까?”
“맞습니다. 달마다 저희 생활관에 간식이랑 손편지까지 챙겨주시는데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 너희들은 이름도 기억 못 하냐? 야, 윤서 씨가 상혁이 면회 와서 보낸 치킨 피자가 몇 번인데, 어떻게 그걸 까먹어?”
“지금 다들 무슨 말을….”
과거는 어디서부터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엇갈려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과거를 밝혀내야 한다는 것을, 아직은 알아차리지 못한 상혁에게로.
“어, 전화 왔습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각 생활관에 비치된 병 공용 휴대전화기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이 번호면 이상혁 상병님 전화인 것 같습니다.”
“…줘 봐.”
아직도 생활관 입구에 서 있던 상혁이 후임에게 향해 휴대전화기를 건네받고, 그곳에 적힌 번호를 확인했다.
“누구야?” / “누구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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